17세기 스페인 화가 코에요의 작품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 서력 기원후 2세기부터 4세기까지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자(apologists)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대표자가 알렉산드리아의 크레멘스(150-220), 그의 제자 오리네스(185-251), 라틴 신학의 대부 터틀리아누스(150-222) 등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는 아우구티누스(Augustinus, 354-430, 보통 영어 발음을 따라 ‘어거스틴’이라 부르기도 한다)이었다.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탄생
지난 회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원류는 플로티누스였다. 플로티누스의 사상이 서방 그리스도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적어도 제12세기에 들어와 6세기의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학』등의 저서가 서방에 널리 소개되기까지는,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헌을 통해서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교부(敎父)의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서양 역사에서 최초의 본격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고백록(Confessions)』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 책 첫 부분에서 그는 “오 주님,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저희를 지으셨으니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쉼이 없사옵니다”하였는데, 그의 삶은 실로 이 고백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로마제국 말기북아프리카 타가스테(Tagaste, 지금의 투니시아)에서 그 지방 하급 공무원이었던 비그리스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 유명한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어머니의 극성스러운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교육를 받았다. 학교에서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웅변이나 글쓰기에 재주를 보였으나 일찍부터 육체적 쾌락에 쉽게 빠져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아프리카 북부의 고대 도시 카르타고로 옮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카르타고는 학문의 중심지로 그가 학업을 계속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시칠리아 섬으로부터 지중해를 가로질러 있는 항구도시로서 온갖 유혹이 들끓는 곳이기도 했다. 거기서 수사학을 가르쳤지만 그것이 ‘수다를 파는 것’이라며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이곳에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여자와 혼전 동거로 사생아까지 얻고 ‘신으로부터 얻음’이라는 뜻으로 ‘아데오다투스’라 이름 지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쾌락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의 삶이 더욱 의미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일종의 냉소주의자로 변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속 독서에 열중했다. 특히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보고 진리 탐구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었다. 그는 ‘키케로의 위엄에 비하면 성경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 여기고 성경을 배격하고, 자연스럽게 마니교(Manichaeism)에 심취하게 되었다. 마니교는 영지주의적 그리스도교와 불교 및 조로아스터교의 혼합종교로서, 영육 이원론을 주장하고, 육을 악으로 보았다.
9년간 마니교에 몸 담아
육을 악으로 보는 이론이 그에게는 짐이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는 “저에게 정조와 자제력을 허락하소서.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고 하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는 9년간 마니교에 몸담고 있었다.
아우구티누스는 29세에 어머니를 피해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가, 이듬해 마니교에 속한 친구의 도움으로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일거리를 얻었다. 거기에서 그는 그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힘찬 강론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주교의 종교적 통찰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웅변가로서의 그의 화술을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점점 암브로시우가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에게 되고, 성경이란 ‘부조리한 이야기’로만 가득한 책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어머니도 조금 있다가 밀라노로 옮겨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의 동거녀와 갈라서고, 그의 신분에 걸맞는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하라 다그치며 어린 처녀를 소개했다. 그는 어머니의 말대로 어쩔 수 없이 오래 같이 살면서 아이까지 낳은 그 여인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말한 그 나이 어린 처녀와의 결혼은 하지 않았다. 아직도 육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는 그러는 자기 자신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부로시우스 주교에게 영세
이 무렵 아우구스티누스는 지난 회에 우리가 살펴본 플로티누스가 창설한 신플라톤주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의 삶에는 극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그는 육신적 유혹이 육체 속에 생래적으로 존재하는 악의 요소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의 고백록에 쓰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 당신에게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 향할 때, 그것은 슬픔으로 뒤덮이나이다.”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과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인간이 겪는 비참함과 고뇌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 보았다. 육체는 본래 악한 것이고, 누구도 육체를 지닌 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던 마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저런 문제로 고민하다가 머리도 식힐 겸 자기 친구 알리피우스의 시골집으로 다니러 갔다. 하루는 절망감에 시달리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는 담 너머에서 동무들과 무슨 게임을 하던 어린아이가 “들어서 읽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하나의 계시로 생각하고, 자기 친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가 읽고 있던 성경책을 집어 들고 아무 곳이나 펼쳐서 눈길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을 읽었다. 그가 펴서 읽은 성구는 신약성서 『로마인서』 13:12-14,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하는 구절이었다.
최초 역사철학서 ‘신의 도성’저술
그 후 암브로시우스 주교로부터 영세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수사학 교사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을 창설할 목적으로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신부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396년, 42세에 오늘날 알제리의 안나바에 해당되는 힙포의 주교가 되고, 430년 반달족이 그가 살던 도시를 포위하고 있을 때, 그의 나이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30년 동안 수없이 많은 글을 통해 자신이 한때 따르던 마니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설들을 열정적으로 비판하고,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둥을 세웠다. 그는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 학파의 영향으로, 신은 영원한 실재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신을 체험했다고도 했다. 자기 어머니와 함께 자기들의 생각을 벗어나고, 또 스스로부터도 벗어나 ‘번쩍하는 통찰로 모든 것 위에 거하시는 영원한 지혜에 접했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언설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서, 신에 대한 최선의 경배는 침묵을 통해서, 최고의 지식은 무지를 통해서, 최고의 묘사는 부정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절대적 신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파악하는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이 삼위의 절대적 동등성을 역설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젊은 시절 맛보았던 비극적인 경험 때문인지 인간의 나약함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지닌 성욕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므로 지은 죄이기 때문에 자자손손 인간들에게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원죄’라 주장하고,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모두 죄인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이 미리 예정한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시므로, 그런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신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했다. 일종의 ‘예정론’이다.
이런 이론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던 영국 출신 펠라지우스(Pelagius)와의 유명한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원죄는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온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이론으로 성욕을 가진 모든 인간을 다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그를 힐난하는 이들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란 신의 은혜가 인간에게 임하도록 하는 예전(禮典)을 거행하기 위해 위임된 신성한 기관이라 보았다. 이 세상에 교회는 하나 뿐, 따라서 교회 밖에는 은혜가 이를 수 없고, 은혜가 이를 수 없기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못 박았다. 그가 쓴 많은 책들 중에 『신의 도성(Civitas Dei)』이라는 책이 특히 유명하다. 이 책은 인간 역사를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속하는 ‘신의 도성’과 바빌론과 로마로 대표되는 ‘땅의 도성(civitas terra)’과의 투쟁사로 보고, 인간은 이런 역사에서 훈련을 받게 되므로 역사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는 뜻에서 이 책은 서양 사상사에서 최초의 ‘역사철학’을 다룬 책이 된 셈이다.
성욕을 원죄로 규정…후대에 비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더불어 가톨릭 신학 전통을 떠받드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의 역할을 했지만, 어느 면에서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루터교 창시자 마틴 루터는 본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속한 신학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아 그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설정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은 장로교 창설자 장 칼뱅에 의해 장로교 신학의 주춧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스승인 셈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