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5월 24일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하고 죽었다. 지구는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4개월 뒤 유럽 기준으로 지구의 동쪽 끝 일본에 유럽인이 상륙했다. 국적은 포르투갈이고 이들이 상륙한 곳은 일본 가고시마 본토 남쪽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였다. 가고시마 항구에서 페리선으로 3시간 걸리는 섬이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전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상선의 좌초와 철포의 전래
철포를 받아들인 다네가시마 14대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다네가시마 철포박물관 앞에는 칼을 차고 총을 손에 쥔 도키타카의 동상이 서 있다.
1543년 9월 23일부터 며칠 사이 다네가시마에서 벌어진 일은 이러했다. '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선원이 100명이 넘었다. 생김새도 기이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동승했던 명나라 유생 오봉(五峯)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 상인들이라 했다. 이틀 뒤 (당시)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가 이들을 만났다. 이 가운데 모랑숙사(牟良叔舍)와 희리지다타맹태(喜利志多佗孟太)가 인사를 했다(포르투갈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542년 믈라카해협 샴 왕국에서 무단 탈출한 프란시스코 제이모토와 안토니오 다 모타였다). 이들 손에 두석 자짜리 물건이 들려 있었다.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바위 위에 술잔을 놓고 그 작대기에 눈을 대고 겨누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나며 잔이 박살 났다. 은으로 만든 산도 쇠로 만든 벽도 뚫을 것 같았다. 도키타카는 "보기 드문 보물이로다(希世之珍)"라며 거금을 주고 두 자루를 사고 화약 제조법도 배워 가보로 삼았다. 이름은 철포(鐵砲)라 했는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열다섯 살 먹은 도키타카는 "내 어찌 이를 혼자 숨겨두겠는가"라며 기슈(紀州)에 있는 승병 장군 스노기노보(衫坊)에게 보냈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인 야이타 긴베(八板金兵衛)에게 하사해 역설계를 명했다.'(도키타카의 아들 다네가시마 히사토키(種子島久時), '철포기(鐵砲記)', 1606년)
이들과 함께 왔던 오봉은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왜구(倭寇)의 두목'이었다.(1556년 4월 1일 '명종실록') 본명이 왕직(王直)인 오봉은 동남아 일대에서 왜구를 지휘해 밀무역을 하다가 처형됐다.(1559년 11월 29일 '명실록')
철포의 국산화와 전국통일
유럽과 첫 만남에서 일본은 신무기를 얻었다. 마흔한 살 먹은 대장장이 야이타는 도주 도키타카가 명한 대로 철포를 분해해 국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나사였다. 화약 폭발력에 탄환이 발사되도록 총열 뒤를 막아야 하는데, 아무리 불로 녹여 구멍을 막아도 부서지곤 했다. 야이타 족보에 따르면 외동딸 와카(若狹)를 각시로 주면 기술을 전수하겠다는 포르투갈인 제이모토의 요청에 "함께 며칠을 울다가" 시집을 보냈다. 이듬해 다른 배를 타고 돌아온 제이모토는 장인에게 나사산을 파서 고정하는 기술을 전수했다. 와카는 귀국 며칠 후 죽었다. 와카는 지금 다네가시마 공동묘지 왼쪽 언덕에 잠들어 있다.
'철포기'에는 '이듬해 돌아온 만종(蠻種) 상인에게 나사 제조술을 배워 제작에 성공했다'고 돼 있다. '도키타카는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라 실전 효용(可用之於行軍)을 원했다. 사격술을 배운 이들 가운데 백발백중인 자가 셀 수 없었다. 이후 이즈미(和泉·현 오사카) 상인이 와서 기술을 배워 간 이래 기나이(畿內·교토 주변)까지 철포가 퍼져나갔다.'('철포기') 철포라고도 했고 그저 다네가시마라고도 불렀다.
전국시대였다. 영주와 무사들이 권력을 향해 무한 혈투를 벌이던 때였다. 창과 활과 칼로 싸우던 그 악다구니판에 철포가 들어왔다. 1549년 열다섯 살이 된 미래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철포 500자루를 구입했다. 1575년 6월 29일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부대를 전멸시켰다. 3열 횡대로 배치된 철포병 3000명이 연속으로 퍼붓는 총알에 기마 부대는 참패했다. 연합군은 3만8000명이었고 다케다 기마 부대는 1만2000명이었다. 1582년 암투 속에 오다 노부나가가 자살했다. 역시 철포로 무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다. 칼을 놓지 않은 자는 패했다. 총을 쥔 자는 이겼다.
조선의 철포 전래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본명은 소요시토시·宗義智) 등이 조총 수삼 정을 바쳤다.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1589년 7월 1일 '선조수정실록') 임진왜란 3년 전이다. 그런데 조총 전래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일본이 철포를 얻은 지 11년이 지난 1554년 5월 21일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했다.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가지고 온 총통(銃筒)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도 또한 맹렬합니다.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명종실록')
이듬해 5월 22일 사간원이 명종에게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으므로 버려둔 큰 종(鐘)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명종은 "이미 철재를 사들이도록 했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간원에 이어 비변사, 홍문관까지 철포 제작 허가를 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명종은 다만 "어진 장수가 있어 잘 조치한다면 적들이 멋대로 날뛰지는 못할 일"이라고 했다. 이에 세 정승이 "조선에 원래 있는 천자(天字)총통, 지자(地字)총통 같은 중화기 또한 잡철(雜鐵)로는 만들 수 없다"고 거들었다. 명종이 딱 부러지게 답했다.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1555년 6월 17일 '명종실록') 억지임을 알았는지, 명종은 "이 말은 삭제함이 옳겠다"고 사관에게 일렀다. 을묘왜변이 한창인 때였다.
그리하여 1592년 임진년, 일본 철포 부대가 조선을 짓밟았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아들 히사토키도 참전했다. "한 달 사이에 도성을 잃고 팔방이 와해됐다. 실은 왜적이 조총이라는 좋은 병기를 가지고 수백 보 밖에까지 미치고, 맞히면 관통할 수 있고, 총알 날아오는 것이 마치 바람을 탄 우박과 같으니, 궁시(弓矢)는 감히 서로 더불어 비교해 볼 수조차 없었다."(류성룡, '서애선생문집' 16권 잡저 '記鳥銃製造事') 적(敵)이 제 손으로 신무기를 거듭 바쳤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다. 매양 "우리나라가 본래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다른 기술에 기대하겠는가"라고 하다가(每以爲我國本有長技 何待於他耶) 참극을 맞은 것이다.('記鳥銃製造事') 1479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때 '화약 장인을 동행시키면 이를 배워 노략질에 쓸 터이니 동행을 금한다'(1479년 2월 26일 '성종실록')고 했던 첨단 군사 국가가 그리되었다.
하야부사의 귀환
다네가시마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우주선 발사장면. /JAXA
2010년 6월 13일 오후 11시 7분 일본 무인우주선 '하야부사(隼·송골매)'가 호주 우메라 사막에 착륙했다. 발사 7년 만이었다. 소행성 이토카와 시료를 채취하러 발사됐던 하야부사는 계기 고장이 연속되면서 우주 미아가 됐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그 7년 동안 원격 수리를 계속해 하야부사를 부활시켰다. 만신창이가 된 하야부사는 60억㎞를 날아와 시료가 담긴 캡슐을 사막에 떨어뜨리고 산화(散華)했다.
하야부사를 발사한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발사기지가 다네가시마에 있다. 1543년 맹렬하게 회전하는 지구에서 유럽과 일본이 연결된, 신문물이 동양에 상륙한 그 섬이다. 그 1543년 조선에서는 조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1543년 조선, 서원을 열었다'에서 계속〉
〈글 싣는 순서〉
1.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2. 1543년 지구가 움직였다 3. 1543년 일본, 총을 손에 넣었다 4. 1543년 조선, 서원을 열었다 5. 세종, 천재의 시대와 칠정산역법 6. 이와미은광과 조선인 김감불 7. 전국시대의 통일과 임진왜란 8. 성리학과 란가쿠(蘭學) 9. 무본억말(務本抑末)과 조선 도공들 10. 1852년 고종과 메이지 태어나다 11. 메이지유신과 대한제국 12. 기적의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