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개역개정판)
이사야 29: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개역개정판)
이사야 묵상이 어려운 건
우리 사는게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성경의 표현
너를 괴롭히던 이를 혼내주겠다. (현대식 표현)
-> 너를 괴롭히던 이가 **도 못할 것이며, **도 못하게 될 것이며, **도 못하게 될 것인즉, 너는 **하겠고, **와도 같을 것이며, **와도 같을 것이라. (이사야적 표현)
고전 영화들, 특히 영미권의 고전 영화들 가운데 역사물들을 보면
최근에 나온 오디세이(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같은 역사물들이 구어체를 쓰는 것과 달리
대단히 문어체적인 표현을
선포하듯이,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를 영화화한 (2차 대전 참전용사) 올리비아 로렌스가 2차 대전 중인 1944년에 만든 영화 헨리 5세만 하더라도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이런 말을 쓰던 시절이었던 것인데
우리 말로 억지로 풀어내려고 하고
우리 식으로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예컨대 이런 말들
"오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녀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로되,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 날마다 기억되리라
소수인 우리는, 행복한 소수인 우리는, 한 형제들일지라.“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는 기억될 겁니다.
비록 우리의 숫자는 적어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현대어처럼 말하는 시대가 아니었는데
왜 저렇게 말하는 거야? 라고 하는 질문은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어리석은 질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이유가 있다면?
가령 이사야 29장 14절 같은 이유라면 말이다.
이사야 29: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개역개정판)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종교의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리는 복음의 능력이
한낱 종교적인 포맷이나
전근대적인 사상,
신비로운 초현실적 현상이나 (무당이 칼 위에서 춤추는 것 같은)
비과학적인 무언가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진 것이라면?
그래서 영안이 가려져서 보지 못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의 인간들이
천사 둘을 강간하려고 왔을 때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 양반들 말고
우리는?
아리엘,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의 선포가 이사야 29장에서 이어진다.
사는 게 힘들거나 말거나, 해마다 돌아는 절기
그러나 사는게 힘들어서인지 그 절기를 지키는 마음은 갈수록 하나님과 멀어져 갈 수도 있는 법..
이사야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개역개정판)
성이 포위되는 암담한 상황도 문제지만
영적인 상황은 더 큰 문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바
마가복음 7장 6절에서 7절 말씀처럼
입으로는 가깝고
눈으로는(폰으로는) 좀 더 가까워도
마음은 멀어져있다.
우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막 7:18)는 말씀 듣기에 딱 좋은
우리의 영적 상황인 것이다.
이사야 29장 9절은 정말 노골적이다.
사 29: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개역개정판)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시는 크리스찬이
그 사실을 자랑할 필요가 없다.
술을 안마셔도 세상에 취할 수 있고
술을 안즐겨도 세상에서 비틀거릴 수 있다.
오히려 10절 말씀을 두려워해야 할 것 같다.
사 29: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개역개정판)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을 덮으시면
말씀을 받을 통로가 없다.
우리가 기도해야할 부분이 이것이다.
지혜가 멀어져 있고
명철에 눈감겨 있으며
마음은 멀다고 판정받을 때
우리가 기도를 부탁할 사람들조차 덮어버리시는
암울한 순간에
말씀이 주어져도
반응은 이렇다.
사 29: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개역개정판)
12절에는 글을 모르는 이들의 반응도 나온다.
신학교 출신이 아닌 평신도라 그렇습니다...라는 말과
왜 그리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 19: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개역개정판)
사실
말씀은 지식이나 학문으로 열리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통 교단에서
전문적인 커리큘럼과 학위 과정을 통해
정통 신학을 연구하신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의 말씀을(그것도 유튜브로)
의지하기만 한다면
봉한 책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못 읽겠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진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목사님의 은혜로운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의 앞뒤로 녹화되는, 찬양 사역팀들의 찬양(특히 요즘 유행하는 새노래들)
그리고 그 집회의 마무리 시간 앞에 반드시 들어가는 통성으로 기도합시다의 시간들...
이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간증이니, 입신이니 이런 이야기들로 알려져
밈으로 되거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 우리네 상황과 사정이다.
진실로 변화된 사람은
분명히 있지만
대다수라고 볼 수 있을까?
그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
내 삶이 거룩해 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엄청난 착각일 수도 있다.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실제 사이에 벌어진 틈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지적이고, 예수님은 이것을 거듭 강조하셨다.
지혜와 삼만광년 정도 떨어진 내가 가장 경계해야하는 지점이 바로 거기이다.
지혜로운 사람에게서 지혜가 사라지고, 총명한 사람에게서 총명이 사라지게 하시면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어찌될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전히 정답은 말씀에 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스스로 묵상하며,
지혜가 없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예배의 설교는
필수적인 요소이지
모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 그 자체가
내 삶의 구원과 지혜를 담보해주지 않는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경외다.
그리고
왕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성실히 신원해야 한다.(잠 29:14)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자신을 변호할 힘이나 재력, 인맥이 없는
모든 사회적 약자(과부, 고아, 나그네)는 물론
이사야 29장 12절에 나오는
글을 모르는 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일 설교 한 번, 내지는 유튜브 시청(과 좋아요) 한 번으로 끝내려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 모두가 포함된다.
거기에 내가 포함된다.
그리고 그들을 견고히 신원하면
그 왕위는 견고해진다.
마치 헨리 5세가
그 시절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혁신적으로
법과 정의를 세워 약자를 보호하려 노력했고
법정에서 프랑스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여
민중들의 입과 귀를 막아버리는 귀족들을 견제하고
그들의 입장을 변호했던 것은
우리가 본받고 행해야할 최소한의 모습이다.
(그러나 오직 영국인들만 위했고, 프랑스의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잔혹하여 결국 백년전쟁에서 영국을 패하게 만들었던 모습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오히려 심판이 멀어지고, 복락은 가까워질 것이다.
그런 뒤에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수인 우리는, 행복한 소수인 우리는, 한 형제들일지라.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