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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 -中-
레이코는 다비[足袋, 일본식 버선,譯者註] 끄트머리에 잔뜩 힘을 주고 남편의 애무를 받았다.'목욕을 하고, 술을 마시고 나면...어때, 이층에 자리를 깔아주겠소?' 중위는 아내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레이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는 거칠게 군복을 벗어 던지고는 욕탕 속으로 들어갔다.
먼 곳에서 퉁겨져서는 되돌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코는 거실화로의 불을 한번 살펴보고는 술을 데웠다. 단젠과 허리띠, 속옷가지를 챙겨들고 욕탕으로 가서는 물이 적당히 데워졌는지 물었다. 데워진 목욕물의 수증기가 자욱한 욕탕 안에서 중위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수염을 깎고 있었다. 젖어있는 그 늠름한 팔뚝의 근육이 팔의 움직임을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여기서는 무엇하나 특별한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레이코는 분주히 움직이며 즉석으로 안주를 장만하였다. 손도 떨리지 않았으며 모든 일이 평소보다 활기차고 유쾌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가슴속의 심연에서 신기한 고동이 일렁이고는 지나갔다. 멀리서 내려치는 번개와도 같이, 그것은 반짝하며 매우 강렬하게 스치고, 그리고는 지나가 버렸다. 그밖에는 무엇하나 평소와 다른 것이라고는 없었다. 욕탕 안에서 중위는 수염을 깎으며, 덥혀진 그의 몸이, 어찌할 도리 없는 고뇌로부터 온 피로가 말끔히 가셨으며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즐거운 기대로 하나 가득해 짐을 느꼈다. 아내가 밖에서 일하고 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이틀동안 잊고 지냈던 그의 건강한 욕망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두 사람이 죽음을 결의한 순간의 그 기쁨에 한치의 불순함도 없다는 것을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바로 이것이야 라고 뚜렷이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한번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두사람만의 정당한 쾌락이 대의와 신(神)의 위엄, 그리고 한치의 틈새도 없는 완전한 도덕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었다.
두사람이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정당한 죽음을 발견하였을 때, 다시 한번 그들은 그 누구도 부술 수 없는 철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타인은 그들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는 미(美)와 정의에 의하여 보호받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중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우국지정 사이에 어떠한 모순이나 당착(撞着)도 발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조차 있었다.
어둡고 군데군데 금이 간, 김이 잔뜩 서린 벽면거울 안으로 중위는 얼굴을 들이밀고 정성스레 수염을 깎았다. 이것이 그대로 그의 데드 마스크가 되는 것이었다. 보기 흉하게 수염을 남기거나 해서는 안되었다. 수염을 깎은 그의 얼굴은 다시 한번 젊게 빛났으며 어둡던 거울을 밝게 비출 정도였다. 이 맑고 건강한 얼굴과 죽음의 결부에는, 이를테면 일종의 산뜻함이 있었다. 이것이 그대로 죽은 얼굴이 된다! 이미 그 얼굴은 절반이 중위의 소유로부터 떨어져 나가 죽은 군인의 기념비 위에 놓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아 보았다. 모든 것은 암흑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더 이상 그는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욕탕에서 나온 중위는 윤기 흐르는 뺨 위로 푸른 면도자국을 빛내며 불이 잘 일어난 화롯가에 앉았다. 바쁜 가운데에도 레이코가 재빨리 얼굴을 고쳐 만진 것을 중위는 알았다. 젊은 아내의 이런 격정적인 성격의 징표를 보고 중위는 참으로 자신이 아내를 제대로 선택했음을 느꼈다. 중위는 술잔을 비우고 그것을 레이코에게 주었다. 한번도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는 레이코이지만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고 조심조심 입을 가져다 대었다.
'이리 와'중위가 말하자 레이코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비스듬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가슴은 격렬히 물결쳤고 교차하는 슬픔과 희열은 독한 술을 섞어 놓은 듯 하였다. 중위는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의 얼굴, 여자의 얼굴이었다. 나그네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지방의 아름다운 풍광에 내리쏟는 시선으로 중위는 천천히 아내의 얼굴을 점검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차가움이라고는 없었으며 입술은 부드러운 힘으로 가볍게 닫혀 있었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입술에 입맞춤하였다. 조금 지나서야 알아차린 일이지만 그 얼굴은 조금도 흐느낌으로 일그러지지 않았지만 감겨진 눈의 길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로부터 눈물방울이 차례로 넘쳐 그 눈 끝으로 빛을 발하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위가 이층의 침실로 올라가자고 재촉하자, 아내는 목욕을 마친 후에 그러마고 하였다. 중위는 홀로 이층으로 올라가 가스 스토브로 데워진 침실로 들어가서는 깔아 놓은 요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이렇게 아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무엇하나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머리 밑으로 두팔을 괴고는 스탠드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흐리멍텅하게 어두운 천장의 판자를 응시하였다. 그가 지금 품고 있는 것이 죽음인지 광적인 감각의 즐거움인지, 그 부분이 중복되어 마치 육욕의 죽음을 향하고 있는 듯이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어느 쪽이건 중위가 지금만큼 혼신의 자유를 맛 본 적은 없었다.
창문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온다. 길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을 뒤엎고 지나가는 타이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운 곳의 담벼락으로 클랙션이 반향하였다... 이런 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변함없이 바쁘게 오고가는 사회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오직 이곳만은 외딴 섬과 같이 우뚝 솟아 있음을 느낀다.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나라는 이 집의 주위로 커다랗고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지금 그것을 위하여 몸을 바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의 몸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간언(諫言)하고자 하는 그 거대한 나라는 과연 이 죽음을 한번이라도 뒤돌아봐 줄지 알지 못하였다. 그것으로 족하였다. 이곳은 화려하지 않은 전장(戰場), 그 누구에게도 공을 과시할 수 없는 전쟁터이자 영혼의 최전선이었다.
레이코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집의 급하게 경사진 계단은 자주 삐걱거렸다. 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무척 반가운 것이었으며, 셀 수 없이 중위는 잠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이 감미로운 삐걱거림을 들었다. 두 번 다시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자 그는 청각을 그곳에 집중시키고 귀중한 시간의 한순간 한순간을 그 보드라운 발바닥이 울려대는 삐걱거림으로 빈틈없이 하나 가득 메우고자 하였다.
이렇게 시간은 찬연한 빛을 발하였고,이윽고 그것은 보석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레이코는 유카타[浴衣]에 나고야오비[名古屋帶, 허리띠의 일종, 譯者註]를 메고 있었다. 그 진홍빛 허리띠는 엷은 어두움 속에서 거무튀튀하게 보였으며 중위가 그리로 손을 가져가자 레이코의 손의 도움을 얻어 펄럭이며 달음박질하여 방바닥 위로 떨어졌다. 아직 유카타를 입고 있는 채로 중위는 아내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끌어안으려 했으나 야츠구치(일본의 전통의상은 겨드랑이 부분을 꿰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 부분을 야츠구치라 함, 譯者註)로 드러난 겨드랑이의 따듯한 살갗으로 중위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그는 손가락 끝으로 전해진 감촉으로 인하여 온몸이 불타오름을 느꼈다.
두사람은 스토브 불빛 앞에서 언제인지도 모르게 자연스레 알몸이 되어 있었다.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몸과 마음, 그리고 설레는 가슴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 행위라는 생각으로 하나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이 '마지막 행위'라는 문자는 보이지 않는 먹으로 두사람의 전신에 빈틈없이 빼곡이 적혀 있는 듯하였다. 중위는 격렬하게 아내를 끌어안고 입맞춤하였다. 두사람의 혀가 상대의 매끄러운 입속을 구석구석까지 확인하였고 아직 어디에서도 징조를 보이지 않는 죽음의 고통이 그들의 감각을 달구어진 쇠붙이와 같이 새빨갛게 단련해 주고 있음을 느꼈다. 아직 느낄 수 없는 죽음의 고통, 이 먼 고통이 그들의 쾌감을 정련(精鍊)해 주었던 것이다.
'당신 몸을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군. 천천히 잘 보고 싶어' 중위는 이렇게 말하고는 스탠드의 갓을 옆으로 눕혀 드러누워 있는 레이코의 몸 위로 빛이 쏟아지도록 하였다. 레이코는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낮게 깔린 빛이 이 엄숙하고 흰 육체의 기복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중위는 약간은 이기적인 기분에서 이 아름다운 육체가 붕괴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끝날 수 있다는 행복을 기뻐하였다. 그는 잊을 수 없는 풍경을 천천히 마음에 새겼다.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조용히 아름다운 얼굴을 쓰다듬었고, 눈길이 닿는 곳에 일일이 입맞춤하였다. 아름답고 조용하며 차가운 이마로부터 부연 눈썹 밑으로 길다랗게 늘어진 속눈썹에 둘러싸여 감겨 있는 눈, 빼어난 코의 생김새, 적당히 도톰하고 단정한 입술사이로 슬며시 엿보이는 이의 반사광, 부드러운 뺨과 날카로운 턱... 이런 것들이 진실로 맑은 데드 마스크를 생각나게 하였고, 이윽고 스스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댈 하얀 목덜미를 몇 번이고 강하게 빨아 붉게 만들고 말았다. 입술로 돌아와서 그 입술을 가볍게 누르고는 자신의 입술을 그 입술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와 같이 움직였다. 눈을 감자 세계는 요람과 같이 변하였다. 중위의 눈길이 가는 곳을 그의 입술이 충실히 훑으며 좇았다. 거칠게 숨쉬는 유방은 야생벚꽃의 봉오리와 같은 유수를 갖고 있었으며 중위의 입술에 둘러싸여 굳어졌다. 가슴의 양옆으로 매끈하게 흘러내린 아름다운 팔, 그 둥그런 팔이 그대로 손목을 향하여 점점 가늘어지는 그 정교한 모습, 그리고 그 끝에는 결혼식날 부채를 쥐고 있던 섬세한 손가락이 있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는 중위의 입술 앞에서 부끄러운 듯이 각각의 손가락이 만드는 그림자 뒤로 숨었다....가슴으로부터 허리에 이르는 천혜의 자연스런 굴곡은 부드러운 채로 팽팽한 탄력을 머금고 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 허리로 펼쳐지는 풍만한 곡선을 예기(豫期)하며, 그 스스로 추호의 단정치 못함도 없는 육체의 올바른 규율과도 같은 것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배와 허리의 순백과 풍만함은 커다란 사발에 하나 가득 담겨진 젖[乳]과 같았으며 유독 정결하며 움푹 들어간 배꼽은 마치 그곳에 방금 한 방울의 빗물이 떨어져 뚫어 놓은 신선한 자국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점차로 짙게 드리워지는 부분으로 체모는 상냥하고 민감하게 우거져 있었고, 향기 짙은 꽃잎을 태우는 듯한 냄새는 지금은 진정되지 못하는 신체의 그침 없는 요동과 함께 그 근처로부터 조금씩 짙어져 갔다.
결국 레이코는 뚜렷하지 않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보여줘요... 내게도,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게 자세히...' 이처럼 강력하고 정당한 요구는 여태껏 아내의 입밖으로 흘러나온 적이 없었으며 그 소리는 중위에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의 조심스러움이 감추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봇물 터진 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얌전히 누워서 아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요동치던 그녀의 흰 육체는 경쾌하게 일어나서는 남편이 여태껏 한 일을 되돌려 주겠노라는 사랑스런 소망으로 발열하여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중위의 눈을 두 개의 흰 손가락으로 흘러가듯 쓰다듬어 감겼다. 레이코는 눈꺼풀마저 상기될 만큼 흥분으로 뺨을 붉게 물들이며 애틋함에 겨워 중위의 짧게 깍은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젖가슴으로 남편의 짧은 머리카락이 아프게 닿아왔고, 그의 오뚝한 코는 차갑게 그곳을 눌렀으며 숨결이 뜨겁게 부딪혔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가슴으로부터 떼어놓고 그 씩씩한 생김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늠름한 눈썹, 감겨진 눈, 준수한 콧날, 굳게 다문 아름다운 입술...푸른 면도자국을 남겨놓은 뺨은 실내의 불빛을 반사시키며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코는 그것들에 이어서 굵은 목덜미, 억세게 벌어진 어깨, 두 장의 방패를 이어놓은 듯한 건장한 가슴과 짙은 오렌지 빛 젖꼭지에 입맞춤하였다. 두터운 가슴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겨드랑이로는 체모가 우거진 부분으로부터 달콤하고 암울한 냄새가 어지러이 풍겨왔고, 이 냄새의 달콤함에는 어딘지 청년의 죽음에 대한 실감이 서려 있었다. 중위의 피부에는 흡사 보리밭의 그것과 같은 찬란함이 있었으며 모든 근육들이 뚜렷한 윤곽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복근 밑으로 다소곳한 배꼽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레이코는 남편의 이런 싱싱하고 탄탄한, 짙은 체모로 뒤덮인 겸허한 배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곳이 얼마지 않아 참혹하게 칼로 파헤쳐 지고 말 것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나머지 그곳으로 엎드려 울며 입맞춤을 퍼부었다. 드러누운 중위는 자기의 배 위로 흐르는 아내의 눈물을 알아채고는 어떠한 극렬한 할복의 고통에도 견뎌 내리라는 용기를 다졌다.
이러한 경위로 두사람이 그 얼마나 지극한 기쁨을 맛보았는가는 구태여 말로 할 필요도 없으리라. 중위는 당당히 몸을 일으켜 슬픔과 눈물로 녹초가 되어버린 아내의 몸을 억센 팔로 끌어안았다. 두사람은 서로의 뺨을 미친 듯이 비벼대었다. 레이코의 몸은 떨고 있었다. 땀에 젖은 가슴과 가슴은 완전히 밀착되어 두 번다시 서로 떨어질 수 없으리라 생각될 만큼, 그들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는 구석구석까지가 하나가 되었다. 레이코는 외쳤다. 높은 곳으로부터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나락에서 날개를 얻어 다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중위는 긴 구보에 지친 연대 기수와 같이 신음하였다... 그리고 한바탕의 격정이 지나가자 다시 격렬한 정의(情意)에 넘친 두사람은 다시 서로를 부여잡고 지친 기색도 없이 단숨에 절정을 향하여 갔다.
Ⅳ
시간이 지나 중위가 일어선 것은 행위에 질려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할복에 필요한 많은 힘을 없애는 것을 꺼려서였다. 또 하나는 지나치게 욕망을 탐함으로써 최후의 감미로운 추억을 손상시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중위가 분명하게 자신의 몸으로부터 떠나자 레이코는 이에 승복하였다. 두사람은 알몸인 채로 서로의 손가락을 움켜잡고 드러누운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땀이 한꺼번에 흘러 내렸지만 스토브의 열기 덕분으로 조금도 춥지 않았다. 너무나 조용한 밤이었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마저 이제는 그치고 들리지 않았다. 요츠야[四谷]역 부근의 성선(省線) 전차와 시영(市營) 전차의 공명도 고궁을 둘러싸고 있는 도랑(고궁을 둘러싼 도랑이란 서양이나 일본의 성곽건축에서 보이는 moat를 말함, 譯者註) 안쪽으로 메아리 칠 뿐, 아카사카 이궁[赤坂離宮] 앞의 널따란 찻길에 면한 공원의 숲에 가려 여기까지 들려오지는 않았다. 이 도쿄의 한 구석에서는 지금도 둘로 분열된 황군(皇軍)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긴박감이 거짓말 같기만 하였다.
두사람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느끼며 방금 맛보았던 그지없는 최상의 쾌락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그 한순간, 한순간, 그치지 않는 입맞춤의 감촉, 현기증이 날것만 같은 쾌감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두운 천장의 판자에서는 이미 죽음의 얼굴이 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기쁨이란 마지막의 것이었으며 두 번다시 그들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컨데 앞으로 그들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그만큼의 환희에 도달하는 일이 두 번다시 없으리란 사실은 거의 확실한 것이었고, 두사람 모두 그런 생각에는 다름이 없었다. 서로 움켜잡은 손가락의 감촉, 이것 또한 오래지 않아 상실하고 말리라. 지금 바라보고 있는 천장의 나뭇결 모양마저도 곧 그들은 상실하고 말리라. 죽음이 그들 몸속에 한 발짝 더 가까이 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었다. 용기를 내어 스스로 그 죽음을 움켜쥐려 달려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자, 준비를 하지' 중위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분명 쾌활한 어조에 실려 나온 말이었으나 레이코는 남편이 이처럼 따듯하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쁜 일거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위는 여태껏 이부자리 깔고 개는 일을 거든 적이 없었으나 쾌활하게 오시이레(일본식 붙박이장, 譯者註)의 문을 열고 손수 이불을 들어 그곳에 넣었다. 가스 스토브의 불을 끄고 스탠드를 치우고 나자, 중위가 집을 비운 사이 레이코가 이 방의 정리를 끝내놓고 말끔하게 청소를 해 놓은 덕분에 구석에 놓여진 자단(紫檀) 책상을 빼놓으면 이 방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전의 거실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술도 자주 마셨지. 가노오[加納], 혼마[本間], 야마구치[山口]하고 말이야' '그랬죠 모두들' '녀석들과도 곧 저승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당신을 데리고 온 걸 알면 필시 녀석들은 나를 무척 놀려대겠지' 계단을 내려오며 중위는 환하게 전등을 밝혀 놓은 이 청징한 방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마시고, 떠들고, 천진스럽게 자랑거리를 늘어놓던 청년장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때는 이방에서 자신이 배를 가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었다. 일층에 있는 두 개의 방에서 부부는 마치 물이 흘러가듯 담담하게 각자의 준비를 하였다.
중위는 용변을 마치고 그의 몸을 정화시켰던 욕탕으로 들어갔으며, 그 사이에 레이코는 남편의 단젠을 개고 군복 상하의와 깔끔하게 재단한 육척짜리 표백된 무명 천을 욕탕 앞에 놓고는 유서를 쓰기 위한 종이를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은 후 벼루 뚜껑을 열어 먹을 갈았다. 유서로 남길 문구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레이코의 손가락은 먹의 차가운 금박을 슬며시 눌렀다. 벼루의 바다는 먹구름이 퍼지듯 순식간에 흐려졌고 그녀는 이러한 동작의 반복, 그리고 이 손가락의 압력과 소리의 희미한 왕복이 오로지 죽음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죽음이 그의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것은 시간을 담담하게 새겨 나가는, 일상 다반사로 하는 흔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모됨에 따라 차츰 매끄러움을 더해 가는 먹의 감촉과 점점 축적되어 가는 먹의 향기에는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다.
맨살 위로 반듯하게 군복을 차려입은 중위가 욕탕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붓을 잡고는 종이 앞에서 머뭇거렸다. 레이코가 흰옷을 챙겨들고 욕탕으로 가서 몸을 정결히 하고 엷은 화장을 한 뒤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거실로 돌아 왔을 때 전등 밑의 종이에는 검정글씨로
'황군만세 육군 보병중위 다케야마 신지'라고만 쓰여진 유서를 볼 수 있었다. 레이코가 중위의 건너편에 앉아 유서를 쓰고 있는 동안 중위는 아무 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붓을 쥔 아내의 하얀 손가락이 단정하게 움직이는 품을 응시하였다. 중위는 군도를 차고, 레이코는 허리띠에 단도를 꽂고서 유서를 들고 신단 앞에 나란히 앉아 묵도한 후 일층의 전등을 모두 껐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잠시 뒤를 돌아본 중위는 어두움 속에서 지긋하게 눈을 내리깔고 그를 따라오는 아내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었다. 유서는 이층의 도코노마[床の間]에 가지런히 놓였다. 족자를 떼어내야 했지만 두사람의 중매역이었던 오제키 중장의 글씨였으며 그것도 '至誠'이라 쓰인 것이었으므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설령 핏방울이 이것을 더럽힌다 하여도 중장은 이를 양해해 주리라.
중위는 도코노마의 기둥을 뒤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군도를 무릎 앞에 눕혀 놓았다. 레이코는 다타미 한 개를 사이에 둔 거리에 앉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은 백색이었던 지라 입술에 칠한 엷은 붉은 색 연지가 퍽이나 요염하게 보였다. 두사람은 마주 앉아 가만히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하였다. 중위의 무릎 앞에는 군도가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보자 레이코는 첫날밤의 기억을 되살렸고, 슬픔에 견딜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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