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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왕(4)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신앙, 요한
요한 19:25-27, 요일 4:7-8, 계 22:20 / 박찬길 목사
요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고 있는데, 은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은혜가 되시나요? 감사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신 겁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요한을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이 있지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입니다.
마가라고 하는 요한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가면 ‘마가라 하는 요한’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 의견이 다른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가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도 있습니다. 보통 사도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고향이 같습니다. 갈릴리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야고보의 동생이면서, 예수님과는 이종 사촌간입니다. 예수님의 이모 아들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고기를 잡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요한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오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신앙으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것은 끝까지 변함없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어머니를 모셔달라는 의미입니다. 어머니의 노후를 책임져달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이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끝까지 변함없는 사도 요한의 신앙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대로 마리아를 한평생 섬겼다고 합니다. 요한은 에베소로 건너가서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필요한 것을 계속 공급해 드렸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자신의 어머니로 극진하게 모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했을까요? 사도 요한의 신앙이 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타고난 성격 때문에 가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진실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녔어요. 예수님이 요한을 중요한 현장에 대동하시면서 일하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릴 때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가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함께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셨어요. 유월절을 준비할 때에도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어요.
요한은 변함이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다른 제자들은 가곤 없잖아요. 베드로도 부인하고 도망갔는데, 요한은 끝까지 따라갑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있는 것을 주님이 보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무덤에 돌이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요.
성령 강림 이후에도 보면 요한의 신앙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행3장)과 사마리아(행8:14)에서 전도합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을 받아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말합니다. 행 4:19,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신앙이 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신앙의 지조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의 변함없는 신앙자세를 먼저 아시고 어머니를 맡기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끝까지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다윗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가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에 가서 너에게 일러 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가서 자초지정을 이야기하고 아들들을 차례대로 부릅니다. 큰 아들 엘리압, 둘째 아들 아비나답, 셋째 아들 삼마... 일곱 아들이 집에 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양을 치고 있어요. 자신에게 맡겨진 양 때문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선지자가 자기 집에 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기대가 없습니다. 자신은 막내이기 때문에, 기름 부음은 형들이 받는 거예요. 엘리압 형이 받겠지요. 그러나 형이 기름 부음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겠어요?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중요한 기회잖아요. 우리 가문의 영광된 일인데 그 현장에 가보고 싶지 않겠어요?
여러분의 가정에 형제들이나 자녀들이나 사촌 중에서 하나가 대통령에 취임한다면 그 자리에 참석해서 보고 싶지 않겠어요? 열일을 제쳐 놓고 참석할 겁니다. 휴가를 내서라도 참석할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 갈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을 치는 일 때문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다윗의 진실한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십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귀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up and down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려워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눈물 흘리는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동생들이 여럿 있잖아요.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야고보도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구세주라는 것을 깨닫고 사도가 되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변함없이 따르는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변함없이 감당하는 사람,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얼마나 책임 있게 감당했느냐? 얼마나 진실하게 감당했느냐? 지식이 부족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재능이 탁월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진실하게 충실하게 변함없이 감당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2대째 장로가 되었습니다. 축복이지요. 아들이 장로 안수를 받는 날 아버지 장로님이 아들 장로님을 불러서 말합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장로로 헌신하면서 교회에서 하는 일에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다. 모든 일을 아멘으로 순종하며 섬겼다. 너도 나처럼 장로로 헌신해라.” 아버지 장로님이 얼마나 진실하게 사명을 감당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진실한 신앙생활에 승부를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변함없는 신앙생활에 믿음의 그물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여건을 초월해야 합니다. 방해물을 뛰어넘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변함없는 신앙생활을 소유하셔서 하나님께 값지게, 보석같이,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것은 사랑으로 변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사랑은 헬라어로 ‘아가페’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요.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며 핏 값으로 우리를 사신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이고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되니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했기 때문에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자신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하여 외칠 수 있는 성품이나 인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요한의 모습은 독특합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배우지를 못했어요. 좀 무식했어요.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지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 얻을 이름은 하늘 아래에 예수의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이 모습을 사람들이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요한은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요한은 야심가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 와서 정치적인 부탁을 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세요.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형님은 주님의 오른쪽에, 저는 주님의 왼쪽에 앉게 해 주세요. 영의정 좌의정을 하겠다는 겁니다. 야욕이 보통 넘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은 불같은 성격을 갖고 있어요.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다가오니까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심하십니다.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서 예수님 말씀을 전하니까 거부하는 겁니다. 그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다가 이 사람들을 태워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죽하면 예수님이 “우레의 아들”이란 별칭까지 지어주지 않으셨겠어요?
요한은 인간적으로 보면 흠과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배우지도 못해서 보잘 것 없어요. 야심적인 사람이에요. 성격은 불같아요. 그런데 우리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배우지도 못해서 무식합니다. 야망은 넘쳐서 그릇도 안 되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정치적인 줄을 타려고 합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벼락 맞아서 죽으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말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누가 그 말을 듣겠어요. 사람들이 혀를 찹니다. 저저 저런... 저나 잘하라고 하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만 할뿐입니다.
그런데 흠과 허물이 많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서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외치고 있어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권면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고 있어요.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우리가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때에 나타나는 15가지의 현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사랑은 오래 참고” 한두 번 참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오래 참습니다. ②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이 있으면 성격이나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러워집니다. ③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④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상대방에게 뽐내거나 의시대지 않습니다. 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남을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⑥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합니다. ⑦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배려한다는 겁니다. ⑧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하면 화를 내지 않습니다. ⑨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나쁜 것을 마음에 담아 두지도 않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⑩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⑪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옳은 것과 함께 하며 기뻐합니다. ⑫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상대방의 잘못을 덮어주며 참습니다. ⑬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어떤 것이라도 믿고 신뢰합니다. ⑭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바라보며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⑮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힘들고 어려워도 견디면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지요.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요한이 변화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해요.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 주고, 도와주고, 가깝게 지내고 사람은 변화되지를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거예요. 아가페의 사랑이 임할 때에 생각이 변화되고, 말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감사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올 때와 지금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처음에 의기소침해서 와요. 기가 죽어서 자신도 없고 늘 조용합니다. 어떤 분은 너무 자신만만합니다. 실력도 탁월합니다. 말도 잘 합니다.
어떤 분은 삐딱합니다. 불평불만이 많아요. 상처받은 인생으로 살았다는 뜻이지요. 어떤 분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요. 비기독교신앙이지요. 어떤 분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왜 미국에 왔는지도 모르고, 예수를 왜 믿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좋은 말로 근심 걱정이 없어요.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되는 겁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겁니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환해지고, 굳었던 마음이 펴지고, 세상의 말이 나오던 입에서 신앙적인 말이 나옵니다. 가치 중심이 바뀌고, 시간을 사용하는 개념이 바뀌고, 물질을 사용하는 기준이 달라졌어요.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깝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드러나고,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겁니다. 저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제단에서 일어납니다.
가끔씩 부모님들이 이런 말씀하세요. “목사님, 우리 아이를 변화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가 너무 달라졌어요.” 청년들이 변화되었다는 겁니다.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저는 목사의 자리에 그냥 서 있었을 뿐입니다. 기도하고 설교하고 사랑한 것 밖에 없어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거예요. 목사 말을 듣고 변화된 사람도 없고 변화될 사람도 없습니다. 나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여러분이 제 말을 들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변화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요한을 변화시켜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였듯이,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속에 흘러넘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파도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증거 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은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를 갑니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서 핍박을 받습니다. AD 96년을 전후하여 18개월 가량 밧모섬에서 삽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동굴의 돌판 위에서 잠을 자는 혹독한 고난의 삶을 보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께 보여주시는 영적인 비밀을 받게 됩니다.
그 영적인 비밀은 무엇입니까? 1:1, “속히 일어날 일” 4:1,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22:6, “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속히 일어난다는 것인가요? 어떠한 일이 마땅히 일어날 난다는 것인가요? 어떠한 일이 반드시 속히 되어 진다는 것인가요?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 성경 중 가장 많은 예언은 바로 재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초림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구약의 경우에 초림보다 재림이 3배 가량 많다고 합니다.
신약에도 보면 마태복음에도 24장, 25장이 재림장이잖아요. 24장은 51절에 걸쳐서, 25장은 46절에 걸쳐서 종말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을 것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서로 미워하게 될 것이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미혹할 것이다. 불법이 성해서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창세로부터 이런 환란이 없을 것이다. 해가 어두워질 것이다. 달이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주님이 임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 처녀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불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주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역사의 최후 결론은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이 계시를 받고 재림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이 영적인 신비한 비밀을 알았으니 사도 요한이 얼마나 축복을 받은 것입니까?
오늘날 이 계시의 내용이 점점 드러나고 있잖아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납니다. 나라와 나라가 싸웁니다. 기근과 지진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서로 미워하잖아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미혹당합니까? 불법이 성해서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대로 식어져 가잖아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는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에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는 천국에 가려고 믿는 것인데, 재림 신앙이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말세야. 말세야.’ 하는데 생각으로는 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신앙으로도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고백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예언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으세요? 재림 신앙을 소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세요?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영적인 시야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믿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신부의 자세를 가지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시잖아요. 회사에서도 회장님이 오신다고 하면 사무실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한번 야단맞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지옥에 가는 것이에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데 내 영혼을 살피고 관리해야지요. 언제까지 육신의 정욕에 얽매여서 살아갈 것입니까? 언제까지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에 속아 살 것입니까?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여전히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에 포장되어서 물욕, 소유욕에 빠져서 살 것입니까?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면 내 영혼을 살펴야 합니다. 더러운 곳은 없나? 죄가 아직도 내 삶을 감싸고 있지는 않나? 내가 얼마나 신앙적인 생각을 소유했는가? 주님으로부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가? 내 영혼을 점검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해야 하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예수님 정신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학업에 충실하고, 직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자녀를 예수 잘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주님이 오실 때에 들림 받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까지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했어요. 흔들림이 없어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이에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자고 부르짖고 있어요.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사도 요한과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셔서 사도 요한처럼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영적인 도전을 받습니다. 끝까지 변함없는 신앙생활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내 영혼을 잘 관리해서 하나님께 상급 받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 요한의 교훈
요 19:25-27 / 박봉수 목사
성경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입니다. 이 사람을 ‘세례요한’이라고 구별해서 부릅니다. 다음에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요한입니다. 이 사람을 ‘사도요한’이라고 구별해서 부릅니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에 몇 사람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마가라고 하는 요한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도 요한이고, 공회원 가운데도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요한은 ‘자비로우신 여호와’라는 뜻의 예호하난(יהוחנן)의 줄임말인 요하난(יוחנן)에서 온 이름입니다. 그 뜻이 좋아서인지 당시 유대인들이 이 이름을 많이 지어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많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라는 이름이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각 언어권에서는 자기네 언어로 이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John(영어), Johann(독어), Jean(불어), Jan(폴란드, 체코), Juan(스페인), Ivan(러시아), Giovanni(이태리), Hans(덴마크), 그리고 우리나라는 요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이름을 따라 지어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도요한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의 신앙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마음에서 그 이름을 이렇게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도요한이라는 인물을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걸었던 신앙의 길이 우리에게 교과서처럼 중요한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인격의 성숙
성경을 보면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아직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막 3:17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별명을 붙여주셨는데, 그것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도중에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을 지나시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사람들이 이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 사람을 만나서 함께 예수님을 따르자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그런 사역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금하지 말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참 편협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더 압권은 이런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갑자기 요한이 자기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이런 청을 드렸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청입니다.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메시아로 등극하실 텐데 그 때 자기 형제를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둘을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에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러 가신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이 때 나머지 열 제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요한이 이기적인 사람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 성품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이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훈련을 받았지만 그 성품에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요한의 모습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요한이라는 인물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저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격이 급했습니다. 그리고 편협했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 문제 때문에 참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에 요한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요일 4:7을 보면 요한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리고 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영적 지도자로 사역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 성품이 주님을 닮게 된 것입니다.
저도 돌이켜보면 많이 달라졌습니다. 신학생 시절, 전도사 시절, 부목사 시절, 그리고 위임목사가 되어 20여년 지나면서 과거와 다른 제 모습에 놀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닮지 못해서 괴로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만 과거보다는 성숙해 진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쳐서 쓰시는 분이십니다. 결함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들을 주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처음부터 남달리 예수님 닮은 것 같은 사람 그리고 남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은 잘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훈련시키시고 또 사역하게 하시면서 조금씩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어느새 저만큼 주님을 닮아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면서 너무 형편없다고 낙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님 손에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켜 가실 것입니다.
변함없는 헌신
성경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가 요한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불린 사람이 요한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대신 쓴 표현이긴 하지만 당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쓸 수 없는 표현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 13:23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한이 예수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요한이 제자들 중에 가장 어리고 또 예수님보다 대여섯 나이가 어렸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 가장 편하게 생각했고 가까이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자리에 가실 때 빠짐없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변화산 위에 오를 때라든지,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같은 경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요한을 마음에 두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예수님 사랑도 남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셨을 때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대제사장 집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입니다. 26-2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요한이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있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모든 제자들이 두려워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의 현장에 가지 못했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이 요한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먼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를 이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이 부탁을 받고 마리아가 세상 떠날 때까지 자기 어머니처럼 모셨습니다.
저는 이런 요한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의리’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의리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서는 “신의를 지켜야 할 교제상의 도리”를 말합니다. 대체로 친구사이에서 또는 서로 신의를 지켜야 할 사이에서 자기가 할 도리를 끝까지 지켜가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도리를 지키기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그 도리를 지켜갈 때 그 사람을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들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주님께 대한 의리를 잘 지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며 늘 그 사랑을 갚을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실 때 그 사랑을 갚았습니다. 더더욱 자기에게 큰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 사랑을 갚으며 살았습니다.
요한의 제자 가운데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 지역의 영적 지도자로 충성을 다하다가 86세 때 체포돼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그 지방 총독 게르마니쿠스의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총독은 폴리갑이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은 총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저는 이 이야기를 오래전 신학생시절 교회사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때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슴이 뭉클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나도 폴리갑처럼 주님께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힘들다고 주님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고 주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버리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끝까지 주님께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믿음의 승리
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초대교회를 든든하게 이끌었습니다.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친 형 야고보는 가장 먼저 주후 30년대 초에 순교했고, 바울과 베드로는 주후 60년대 중반에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주후 90년대 중반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함께 부름을 받았던 형 야고보보다는 60여년을 그리고 베드로보다는 30여년을 더 살면서 초기 교회를 이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일찍 순교하여 주님 품으로 가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초기 교회를 마지막까지 이끌던 요한에게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년에 겪어내야 했던 가장 힘든 일은 점점 더 거세지는 로마의 박해입니다. 그리고 박해로 동요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이 시기가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가장 극렬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로마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습니다. 이때까지 로마 황제들은 죽은 뒤에 원로원에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추대될 경우만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황제들 가운데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클라우디우스 세 사람만 신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아직 살아서 황제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신전을 지어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시범케이스로 무자비하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 때 당연히 요한도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이 체포되어 독배를 받았는데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는데도 살아났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보낸 편지가 요한계시록입니다.
도미티아누스가 측근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되면서 극심한 박해가 끝이 났습니다. 이후 요한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사역을 하면서 소아시아교회를 영적으로 지도했습니다. 박해로 믿음이 흔들리던 교인들을 다시 굳건히 세웠고, 교회들을 믿음의 반석위에 세웠던 것입니다. 이 때 쓴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이 극심한 박해를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이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 믿음이 흔들리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을까요?
요한은 요일 5:4에서 그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요한이 이 극심한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믿음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 이기게 해주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이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몽고메리버스스트라이크를 이끌고 있을 때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와 폭파협박이 너무 심해서 견디지 못하고 손을 떼려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답니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하라” 그 때 믿음이 생기면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솟구치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갖가지 삶의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참 많습니다. 게다가 믿음생활을 방해하는 핍박도 있습니다. 가족들 가운데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터에서 상사나 동료들이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 핍박이 너무 힘들어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코로나19사태는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일상이 무너져버렸고, 경제적인 터전도 위협받고 있고, 가족들에 대한 염려도 크고, 교회생활에 대한 걱정도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언제 회복될지 기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요한처럼 기도하며 믿음으로 이겨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이 코로나사태를 이기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요 19:25-27 / 이필재 목사
복음서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나와서 때로는 혼돈할 때도 있고, 바꾸어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바꾸어서 설교한 적이 여러 번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주변에 있던 여인들 중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마리아이고,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 마리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과 앞으로 두 주일은 인물에 대한 설교로서 예수님 주변에 가장 가깝게 있었던 마리아를 조명해 봄으로 우리 신앙의 도움을 얻고자합니다. 아마 지금 세상에 있는 여인들 이름 가운데 제일 많은 이름이 마리아라고 생각됩니다. 서구 사회는 웬만하면 다 마리아(Mary)입니다. 남자 이름은 요한(John)이나 다윗(David)이 가장 많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아마 성경의 이름을 갖기 원했던 아빠, 엄마들이 좋은 마음으로 자녀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 거의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이름을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고 그냥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 됩니다.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 이름 때문에 아주 불평이 많고 웃지 못할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이민을 가면 무조건 여자들은 자기 성을 없애버리고 남편 성으로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이름의 의미가 금방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제가 아는 교인 가운데 여인 이름이 ‘이정배’이었습니다. 남편 성이 주씨거든요? 하루아침에 ‘주정배’가 되었고, 여자 이름이 ‘김성애’가 얼마나 예쁩니까? 남편이 동씨입니다. 그러니 이름의 의미가 금방 달라집니다. 마리아라고 하는 말은 ‘높다’라는 뜻이 있는 말인데 히브리어의 ‘마라’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마라’는 미리암에서 나온 말로 모세의 누나가 미리암이었습니다. 미리암이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헬라화되면서 마리아가 되었다고 학자들이 보통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한테서 탄생하셨고, 마리아들의 협조를 많이 받으시다가 마리아들이 울며 지켜보시는 가운데 운명하셨고, 마리아들에게 부활을 제일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마리아로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편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나사렛에 가보면 예수님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집과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집은 붙어있습니다. 바로 이웃집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시골의 한적한 동네, 몇 가구 살지 않는 그런 빈민 마을에서 이웃집에 사는 처녀, 총각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 피차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사회가 규정하는 정혼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록을 보면 정확합니다. 누가복음 1장 26~27절을 보면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유대 사회의 정혼은 결혼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앞으로 둘은 식을 올리는 잔칫날만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와 요셉의 문제점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전한 하나님의 소식은 이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많은 기도 요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원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그렇게 모든 사람이 소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한테 주어졌다고 천사가 직접 나타나서 은혜의 전달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 사건이고, 나의 의사 개입 없이 하나님의 결정으로 주어지는 상태를 은혜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람은 이 분야의 신앙 고백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주어졌습니다. 그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서 사는 겁니다. 바울 사도의 소명관, 바울 서신의 1장 1절은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는 내 뜻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겠다고 말했습니까? 그는 예수를 반대하는 열성분자였습니다. 그가 소원한 일, 뜻이 있었다면 당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없애버리고 잔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고 선택 자유를 행사할 여유도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벼락같이 주어져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일방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런 은혜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자신이 소원하지 아니한 일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천사가 와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좋은 것일까?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그의 일생에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일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라.” 마리아는 그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후손에게 주어진 율법적 생활 윤리는 성 도덕에 잔인할 만큼의 엄격 규례를 적용합니다. 성경에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아버지 모르는 잉태가 발견되었을 때 의논할 시간도 없이 내리는 시아버지의 결정은 “끌어다 불사르라.” 그것이 성윤리입니다. 수없이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어떤 여자의 간음현장의 발각에 마을 사람들이 돌을 가지고 나와 쳐 죽이려는 장면을 예수님이 보시게 됩니다. 수없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제 그 당시의 성 윤리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시겠지만 그런 일은 지금도 있습니다. 사우디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는 명예 살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부모가 정해준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거나 사랑을 하는 것, 혹은 임신이 발견되었을 때, 그 처녀의 아버지나 오빠가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여 버립니다. 이것이 명예 살인입니다. 파키스탄의 경우 2,003년 일 년 동안에 명예 살인된 처녀가 1,261명이나 됩니다. 상상이나 되십니까? 현재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안 되겠다고 입법을 추진해서 명예살인자는 7년 이상의 감옥, 아니면 최고 살인에 처하는 법률을 통과한지 채 2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은 통과했을지라도 명예 살인은 계속되고 있고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21세기 문화 안에서도 이렇게 무서운 문화가 존재하는데 2,000년 전 유대 사회는 이 문제가 얼마나 엄격했는지 성경에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런 입장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의 순결성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마리아 자신이며 둘째는 정혼자 요셉입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결혼 적령기 처녀는 성교육 없이도 어린 아기 잉태의 과정은 자연 법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당시의 사회법으로 불태우던가 돌로 쳐서 죽이던가 둘 중 하나의 명예살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때 마리아의 마음에 가장 신경이 쓰였던 사람은 정혼자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나사렛 시골에서 약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목수로서 평범한 총각에 불가합니다. 나름대로 마리아와 결혼에 대해 설계하고 행복을 성취하려는 희망 속에 결혼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알 수 없는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를 본다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예배드리는 모든 남자 분들 가운데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10대에 세례 받고 성령 충만의 체험을 했고 주일 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순교까지도 각오한다.’ 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 겁니다.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 나에게 어느 날 내 약혼녀가 나타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린 아기가 생겼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했을 때 믿으실 분이 계십니까? 성경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의롭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도 이것만은 참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끊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의롭다는 것은 마리아의 머리채를 끌고나가 불태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말은 명예 살인은 안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요셉의 이해와 동의는 얻었습니다. 더 이상 불행한 사건 없이 둘은 결혼에 성공했는데 마리아는 이때로부터 은혜로 인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천사가 일러준 임마누엘의 탄생!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출생의 권위가 나타나야 마리아의 마음과 의로움이 나타날 텐데 낳자마자 어린 아이 학살 명령을 내린 헤롯으로 인해 외국으로 떠나가야만 했습니다. ‘출생의 장소가 마구간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낳자마자 죽음에 직면해 애굽까지 피난살이 떠나야 되는 것이 메시아 탄생의 권위인가?’ 이런 생각을 왜 안 하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 대해 의심이 가게 되어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마리아의 순결과 성령의 잉태를 꿈을 통해서 믿고 이해를 했는데 그런 과정을 보고 요셉은 ‘내가 헛꿈을 꾼 것이 아닌가?’라고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라면 그 신적인 권위가 빨리 나타나야 되는데 30년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할 때 과연 마리아는 편했는가? 성경의 기록만 가지고 보면 요셉은 일찍 죽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활동시기에서 십자가 사건까지 어머니 마리아는 계속 등장을 하는데 요셉은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아무 사인도 확인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30년 동안 마리아는 어떤 마음으로 남편 요셉을 보았으며 또 예수를 보았을까? 성경에 나타납니다. 30년 평범한 나사렛 시민으로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 이제 하늘나라 복음의 반포 시기가 되어 처음으로 반포하기 시작하셨을 때 마리아와 다른 자녀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인정하고 집안 망신 좀 그만 시키라고 잡으러 온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마리아는 이미 30년 전의 성령 잉태 일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왜 정상적으로 가정생활을 하고 일을 할 것이지 사람을 몰고 다니면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빨리 집에 가자. 창피해서 못 견디겠다.”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 탄생 후 30년, 또한 그 후 3년 동안은 마리아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의 십자가 밑에서 처참한 죽음의 고통을 바라보며 견디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마침으로 마리아의 생애는 가브리엘의 말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인가?
오늘 우리들은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데 과연 내가 좋은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인가? 정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는 일반적 은혜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내 소원의 성취 부분을 말합니다. 내 소원의 성취 부분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일반적 은혜도 주님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건강 회복이라든가 물질의 풍요라든가 평화로운 가정생활이라든가 사회적 명성이나 출세가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것도 아름답고 선하고 이런 것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의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얼마든지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도의 제목으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한 것은 일반적 은혜의 개념 속에는 고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될 수만 있으면 고난에서 멀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반적 은혜 개념입니다. 날마다 기도하시는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세요. 고난 받기 원하십니까? 절대적으로 고난이 내게서 멀리 가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일반적 개념입니다. 두번째는 특별 은혜가 있습니다. 이 은혜의 개념은 나의 개인적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계획의 성취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은혜 속에는 나의 고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 은혜로 출애굽의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모세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못하겠다고 하나님과 맞섰던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예수에 대한 핍박자였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 없는 인간 구원의 성취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개인적 소원은 어떻게 처리가 되었나? 모두가 무시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생각하시고 선택하시고 하라는 대로 모두 행해진 것이 특별 은혜의 개념입니다.
모세도 출애굽 지도자로 느보산에서 고생스러운 40년 순례 여정을 완수했으며, 바울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로마 감옥에서 순교자의 생을 마쳤고,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대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 속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자기 의견은 다 무시가 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특별 은혜자는 자기의 소원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에 맞는 사명의 길을 가야하기 때문에 자기의 개인적 소원의 성취 면에서 평가하거나 세상 기준으로 말하면 오히려 망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아니었으면 당시 세계 최대의 강국인 바로 궁전의 왕이 보장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아니었으면 유대 나라 최고의 정치실세가 보장되었던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특별 은혜는 아브라함 때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훌륭한 생활기반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 은혜의 구체적인 방향 제시는 무엇이냐? “너는 본토 너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러면 그것은 행복한 것인가? 그날부터 아브라함은 고난에 들어갑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나오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중심으로 이루어진 최초 문명의 넉넉한 혜택자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 때문에 그날부터 고난의 먼 길을 떠납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에서 출발한 사막 여행이 터키 하란을 거쳐 지금의 이스라엘 서쪽 텔아비브 부근까지 고난스러운 순례의 길을 떠났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고난은 땅에 기근이 심한지라 먹고 살 양식이 없어 두 식구가 밥을 먹기 위해 애굽으로 동냥을 떠나는 그런 고난의 삶을 시작합니다. 애굽 땅에 갔을 때는 그 나라 왕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기는 씻지 못할 아픈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헷 족속에게서 은 400세겔을 주어 묘지 하나를 구입한 것이 아브라함의 소유였습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받은 자만이 가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평가하면 이것은 주님의 사명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기쁨인데 세상적으로 보면 제 명도 못살고 죽는 거란 말입니다.
나사렛 시골 처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받고 말할 수 없는 수난의 생애를 살아갔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얻어진 것인가? 지금 나사렛의 마리아 생가에 가면 기념 예배당이 건축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세계 각 국의 여인들이 자기 나라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그림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한복을 입은 여인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왜 세계 여인들의 그림을 여기에 놨는가? 마리아는 세계의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는 뜻이며, 인류의 어머니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이 마리아를 통해 메시아를 탄생시킴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특별 은혜 때문에 무한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마리아는 인류의 어머니이다.” 얼마 전에 천국으로 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미국에 오셨을 때 제가 뉴욕에 살았습니다. 뉴욕에 있는 수녀들이 모임을 가지고 교황을 초대해 항의식 질문으로 요청을 했습니다. “왜 신부는 남자만 되는 겁니까? 우리 수녀들도 다 신부되게 해주세요. 성차별이 아닙니까?” 미국 같은 나라에서 당연하지요? 교황이 대답했어요. “가톨릭의 수녀란 남녀평등이라든가 여권신장 이런 문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말을 한다면 수녀님은 모든 사람의 어머님이요 신부의 어머니요 교황의 어머니요 인류의 어머니 뜻으로 수녀가 있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훌륭하게 되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나서 여권 신장만 부르짖는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들은 교황의 어머니요 신부들의 어머니, 세계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자리를 물리치고 신부가 되시겠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셨는데 가톨릭의 수녀는 그런 의미입니다.” 수녀들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정혼한 처녀 마리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 은혜 때문에 33년의 긴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난의 순례자로 살아와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의 완성 장소인 갈보리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 은혜의 개념 속에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고난 없이 다 잘 되는 길이 우리의 받고자 하는 은혜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특별 은혜의 사명이 내게도 주어진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 갑니다. 그 길은 험난하고 고난스럽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대 실패자의 모습같이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목걸이를 왜 하고 다니십니까? 왜 교회는 안이나 바깥이나 이렇게 십자가에 선명하게 빛을 밝힙니까? 뜻은 하나입니다. “나도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 은혜, 즉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특별 은혜와 고난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나도 동참하기로 오늘 이 주일 아침에 믿음의 고백으로 동의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날마다 사치스러워서 무엇이든지 다 잘되는 일반적 은혜의 개념 속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류 역사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은 모두가 고난스러운 특별 은혜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고난의 특별 은혜에 동참하는 믿음의 고백으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십자가 곁에 서 있을 때
요 19:25-27 / 백장흠 목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이 보입니까? 보이는 것이 나의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커피나 차를 위하여 물을 끓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관심하게 보고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왓츠(Watts)’ 라는 사람은 끊은 물주전자를 보면서 증기기관차를 본 것입니다. 번개가 칠 때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러나 플랭크린(Franhlin)은 어둠을 밝혀주는 전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쥐를 보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즈니(Walt Disney)는 미키마우스를 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봅니다. 불신자들도 봅니다. 신자들도 봅니다. 십자가를 노래합니다. 그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십자가 곁에 서서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무엇을 봅니까?
1. 예수의 고난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힘든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극형이 선고된 죄수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죄인의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못으로 박아 매달려있기에 살이 다 찢겨 많은 피를 쏟게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옵니다. 숨을 내쉴 수 없어 근육에 산소 공급이 안 됩니다. 그로 인하여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증세를 참으려고 죄수가 몸을 치켜올리게 되면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고통은 가중됩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는 이런 거였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예수의 고난을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괴로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하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십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겠습니까?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볼 때 관계가 없는 이들은 그사람 참 아프겠구나. 안되었다 라는 정도의 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볼 때에는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본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 고난을 피해보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현실을 버리고 다른 환경 속에 들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2) 고통을 당하면 낙심하고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즉 자신이나 어느 누구라도 불행이나 고통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는 생각으로 자살하려는 이들입니다. (3) 생각 있는 이들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잘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그의 고통을 봅니다. 어떻게 봅니까? 고난 당하는 이들 중에 원인을 죄 값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범죄하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 당하는 데 이유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여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개 낀 고속도로를 조심스럽게 제한속도보다 훨씬 적게 안전하게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들어와 내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자신이 엄청난 아픔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는 고통은 이런 경우와 다릅니다. 선택 된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고난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게 된 것이 두려워 도피하여 도망 나옵니다. 그때 주님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두고 왔기에 내가 그 십자가를 지려고 간다. 그러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갑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정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감이 예수님같이 죽겠습니까? 나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그리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봅니다. 온전히 선택적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자원하여 죽으시는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주님을 위한 거라면 고난은 영광입니다. 십자가 곁에 있는 이들이 예수의 고난을 보면서 삶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십자가를 보면서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 곁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고대 사회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비극적인 사형의 도구였습니다. 십자가 형틀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집트, 카르타고, 인도, 그리스, 로마 등이었습니다. 유대적인 형틀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적인 사형집행제도는 목매는 것, 교수형, 불살라 죽이는 것, 돌로 쳐죽이는 것(레 20:27) 등이었습니다. 유대에서는 죄 지은 사람을 죽인 후에 나무에 달아 놓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신 21:23) 십자가 형틀은 고대 사회에서 무섭고 수치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정치범, 반사회적인 죄를 지은 사람에게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흉악범이라는 두 사람의 강도와 같이 취급하여 십자가 형틀에 예수님을 매어 달아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하여 죽으십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십자가 곁에서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게 아닙니다. 바로 내가 죄인인데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내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삽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사망이 왔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는 망하게 합니다. 개인을 망하게 하고 가정을 망하게 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왜 패망이 왔고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되었습니까?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우리의 행복을 빼앗습니다. 에덴의 행복과 기쁨을 죄가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절망하게 합니다. 죄가 우리를 지옥으로 가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인인 줄 모르고 죄를 범하고 삽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암이 왜 무서운 병인가요? 병인 줄도 모르게 번져가서 결국은 사람을 죽게 하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암이라도 일찍이 발견하면 사람은 죽지 않고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죄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죄가 죄 인줄 모르고 계속 범죄 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최근 네델란드 카톨릭 단체에서는 7대 죄악으로 자만, 시기, 대식(폭음), 색정, 분노, 탐욕, 나태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죄에 대한 다섯 가지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 ‘오페일레마’ 인데(마6:12) 뜻은 ‘빚진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도 죄를 빚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빚진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빚지고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 카드 빚입니다. 모르고 있는 동안에 빚을 많이 지었음을 알게 되면 회개가 가능한 것입니다.
둘, 죄는 ‘하말티아’ 라는 말입니다.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셋, ‘파랍토마’인데 이는 ‘미끄러진다’는 의미입니다. 미끄러지면 안 됩니다. 누가 잘 미끄러집니까? 노약자가 미끄러집니다. 힘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끄러집니다. 죄의 유혹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노인 들은 또 다릅니다. 하체가 허약하니까 자주 넘어집니다. 힘들어합니다. 그러다가 미끄러집니다. 그러면 심한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유혹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시험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넷, ‘파라바시스’입니다. 이는 선을 넘어갔다. ‘탈선’을 의미합니다.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 선 대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아노미아’입니다. 이는 ‘불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불법을 생각하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문제는 죄인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흔히 똥벌레가 제 몸 더러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앞서간 사람들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말을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냐 라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죄과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죄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못하는 예가 있습니다. 왜 회개하지 못합니까? 죄를 무서워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를 죄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곁에서 자기 죄를 발견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못 합니다.
(1)죄에 대하여 변명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변명합니다. 변명한다고 죄가 없어진 게 아닙니다. 회개하여야 없어집니다.
(2)죄를 정당화합니다. 사랑이 죄입니까? 남녀가 간음하는 죄를 지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은 회개가 불가능합니다.
(3)전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저 사람 때문에 그러하였습니다 라고 책임전가 하는데 능수인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4)자기 죄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가 사는 길입니다. 회개는 우리 주님께서 갈망하시는 사한이라고 봅니다. 자기는 상당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은 과감하게 지적하면서 자기는 정당하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회개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에 대한 말씀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떠나지 못합니다.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회개하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용기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책망할 때에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내가 죄인입니다. 인정했습니다. 그 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회개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삶 속에 이상하게 어려움이 있고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계속될 때 하나님께 내가 잘못한 게 있지 아니한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속하게 조치하여야 합니다.
성결 되게 살고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내게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 섭시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철저하게 회개하여 성결 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 십자가 곁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 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요 3:16) 왜 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이 세상에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왜 죽어야 했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추상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목사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속으로 모르지요. 말하는 이가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신데요? 라고 반문하고 싶어집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사랑입니다. 소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매사에 관심을 갖습니다. 무관심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용서합니다. 내게 해를 끼쳤다고 하더라도 용서합니다. 모든 면에서 도와주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도와 줍니다. 목표한 것을 되도록 도와줍니다. 한 마디로 사랑은 주는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 무엇을 주어야 사랑입니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도저히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하여 모든 천지만물을 주셨습니다. 그보다 더 큰사랑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 중에 모성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짐승도 새끼를 위하여 죽는 자리를 피하지 아니합니다. 그런 깊은 사랑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열심히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렸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새 신자 한 분이 시험을 받습니다. 왜 시험에 들었느냐 하면 목사님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평범한 생각을 하면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드릴 수 없다는 말 사실 같습니다. 이사야
49:14-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주신 것만이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죽어야 했습니다. 왜 그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주셨습니다. 십자가 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속의 사랑입니다. 구속이란 원래의 소유주에게 다시 환원시킨다는 뜻인데 그것이 상응하는 대가를 치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서 이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발견한 바울은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변치 아니합니다. 변한다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저명 인사가 움직이면 보디가드가 함께 움직입니다. 철저히 호위합니다. 우리의 보디가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1:5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 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실 때에는 “모든 환란을 면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21:7) 요즈음 문명의 도구들이 도적을 지켜 줍니다. 그러나 영혼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지켜주시는 사랑이십니다. 지켜주시는 방법은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다고 하였습니다.(신 32:10, 시 17:8)
우리는 어디에 서있습니까? 십자가 곁에 서야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의 고난을 봅시다. 우리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한 고난, 예수께서 자원하여 당하시는 고난을 보면서 감사하는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막혔던 것들이 열리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받고 감격함으로 복되게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효자를 활용하시는 하나님
요 19:25-27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버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은 가정입니다. 이점은 말할 필요도 없고 더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고 부부가 있고 형제들이 있고 동기간들이 있습니다.
“형제”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형, 동생, 누나, 이 세상에서 이런 관계보다 더 좋은 관계는 없습니다. 이 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요소는 우애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고 칭송했습니다. 이 관계에 반드시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이 우애가 없으면 남남만도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보면 아주 무서운 적이 되고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형제들도 참 너무나 많습니다.
또 “부부” 이 또한 얼마나 감칠맛 나는 관계입니까. 평생 함께 살아가는 관계, 이것이 부부입니다. 비록 남남이 결합되어 함께 살아가지만 이 관계처럼 신비한 관계도 없습니다. 이 관계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신비로운 관계인지라 이 관계를 하늘이 맺어준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요소는 사랑입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말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부부입니다. 서양인들을 보면 참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하며 살아갑니다. 말로 마음을 표현하고 입으로 표현하고 몸으로 고백하고 시인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것이 진짜 사랑하는 거야 하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표현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속으로 사랑하고 뼛속으로 마음으로만 표현할 뿐 무표정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부부들의 사랑고백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부부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상대방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평생 입 밖에도 내지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하고 살아간 부부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평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기적입니다.
목사님들이 어느 가정 세미나를 하는 과정에 집에 있는 아내들에게 전화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집집마다 전화를 걸어 “여보 사랑해요”하고 사랑을 고백하도록 전화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젊은 목회자들은 전화해서 순순히 사랑을 고백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나이 많은 목사님 한분은 한사코 전화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던 목사님들이 억지로 전화를 걸어서 바꿔 주었습니다. 전화를 받아든 이 나이 든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요, 사 사 사.... 사찰 잘 있어요?.” 이 문제가 이렇게 힘듭니다.
이것은 평소에 말로 표현하며 고백하며 살아가는 삶이 서툰 결과입니다. 표현하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심하게 살아간 결과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어쩌다 용기를 내서 여보 사랑해요 하고 말하거든 아내들은 그곳이 교회 안이든지 시장바닥이든지 길을 갈 때든지를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까무러져 쓰러져야 합니다. 졸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들이 자꾸만 사랑을 말로 언어로 표현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남편들이 모처럼 용기를 내서 당신 사랑해요 하고 말했는데 하는 대답이 왜 안던 짓 하느냐고 쏘아붙이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 먹었느냐고 말하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멋없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족 가운데서 또 소중한 사람은 부모입니다. 이 부모처럼 소중한 존재도 없습니다. 부모는 나를 낳아준 생명의 공급자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 소중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자녀들이 부모를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인들이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 이 시대는 병든 시대입니다.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렇게 짐처럼 느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부모처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이 부모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오늘 사람들이 너무나 모릅니다. 늙으신 부모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 팽팽하던 얼굴이 흉하게 주름살이 지고 그 예쁘던 몸매가 엉망이 되고 꽉 찼던 뇌가 반으로 줄어 치매가 생겨서 분별력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한번 눈여겨보십시오. 그런 부모를 귀찮다고 짐스러워할 일입니까.
오늘 자식들은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모르다가 언제 알게 되는가 하면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한 후에 가서야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눈물짓는 존재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생존하여 계신 분들은 효도하십시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지극히 공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식의 도리이고 사람의 도리입니다.
여러분, 효자동 이야기를 아십니까. 효자동에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들 내외가 있었습니다. 이 아들 내외는 홀아버지를 참으로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잠을 잡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잠버릇이 아주 험악했습니다. 하루는 이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잠을 자다가 그만 깔아뭉개서 어린 손자를 죽게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효자 아들이 아침이 되어 문안인사를 드리려고 아버지 방에 가 보니까 그만 아이가 죽어 있고 아버지는 잠에 취해 잠을 자고 있습니다. 오늘 아들들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이름 난 효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효자 아들이 죽은 아이를 조용히 안고 나옵니다.
나오면서 그 죽은 아이에게 “이 불효막심한 놈, 네가 죽었으니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상하겠느냐”며 그만 아이의 따귀를 때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잠버릇이 험해서 깔아뭉개도 죽지 말아야지 네가 죽어서 할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느냐, 너 때문에 아버지께 불효하게 되었다“며 따귀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따귀를 얻어맞은 아이가 너무나 놀라서 재채기를 하더니 마침내 죽은 아이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극적인 이야기입니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님이 그 효자에게 상을 내리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동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효자동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들어서 흐뭇하고 전해서 흐뭇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오늘 같은 인륜이 무너진 험악한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가 청량음료처럼 상쾌한 맛까지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합니다. 성경은 부모공경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공경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공경의 대상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부모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영의 공급자시고 내 부모는 육신의 공급자이십니다. 그래서 부모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나를 낳아준 생명의 공급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주어지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복을 받는다”
성경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복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으로부터 받는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여러분, 양심은 자기 자신에게 가감 없이 진솔하게 속삭입니다. 사람은 떳떳한 일을 하면 양심이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칭찬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떳떳한 일을 하면 용기 있게 하고 당당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세상을 자신 있게 살게 하고 당당하게 살게 해 줍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며 살게 되면 매사가 당당해 집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또 하나의 복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음의 복”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다는 것은 상당한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세상이 인정해 줍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은 일단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사기가 없습니다. 믿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기본이 서 있는 사람은 다른 면에서도 하자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이같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경하지 못하면 반대로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질책”을 받습니다. 양심이 그냥 놔두질 않습니다. 양심이 자꾸만 자신을 고발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내가 나 자신은 결코 속일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떳떳하지가 못합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기쁨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불효하다 그 부모님이 돌아가셔 보십시오. 장례식 때 정말 떳떳하지 못 합니다. 형제들 보기가 부끄럽습니다. 이웃 사람들 보기도 부끄럽습니다. 평소에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고 잘 했어도 장례식 때는 후회밖에 남는 것이 없는 법인데 오죽하겠습니까. 그것이 벌입니다. 또 하늘로부터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효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효자를 활용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효자들을 택해서 크게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말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들 가운데서 다윗이 가장 부지런하게 일했습니다. 형들은 집에 있었지만 다윗은 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사무엘이 집에 와 기름을 부을 때도 형들은 집에 있었지만 다윗은 들에서 양치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양을 치는데도 책임감 있게 했습니다. 짐승 떼가 와서 양을 물어가려고 하면 쫒아가서 뺏어왔다고 합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양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효도입니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책임 있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효도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택해서 마침내 그 나라의 백성을 책임지도록 목자장으로 삼고 임금으로 삼으셨습니다.
또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도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효성스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색동옷을 지어 입힌 것은 그 형제들 보다 더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사랑받을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여러 아들들 가운데서 요셉에게만 색동옷을 지어 입혔겠습니까. 사람이 감동을 받으면 하늘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우리민족은 이렇게 예부터 이 땅에서 감동스런 삶을 살면 하늘에서도 들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룻을 보십시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룻기를 읽어보면 룻은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생각과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룻이 볼 때 시어머니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여인입니다. 아주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에게 기댈 어떤 조건이 한 가지도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아무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미래를 내다보면 희망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는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시어머니를 따라 낫선 이국땅으로 주저하지 않고 따라갑니다. 그런 룻을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하고 칭찬해 줍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후 룻이 얼마나 많은 복을 받습니까. 그의 자손에게서 다윗이 태어나고 그의 혈통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또 요나답의 자손들을 보십시오.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가훈으로 가르칩니다. 그랬더니 그 자자손손이 그 가훈과 전통을 존중해서 그것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 이야기가 마침내 하나님께 까지 전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 요나답의 자손을 얼마나 칭찬합니까(렘35;14). “너희들은 내 말을 어기고 순종하지 않지만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조상의 말을 순종하고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불러서 사용하시고 활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부모 공경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짓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내려다보시고 곁에 섰던 제자 요한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로다” 이 짤막한 말씀 속에 예수께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다 들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짤막한 구절들이 있는데 그 말씀들은 대부분 내포하고 있는 함축된 메시지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 짤막한 말씀 속에도 전달하고 져 하는 메시지가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요한이 마리아를 평생 모셨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시간에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탄식할 어머니를 생각하니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로하고 보호하고 공경할 것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예수께서 당부하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끝날 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고 또 한 가지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먼저 공경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부모에게 효도하십시오. 부모라는 존재는 살아계심 만으로도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고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부모들이 오늘에 와서는 부담스런 존재들이 되어 버리고 외면당하고 밖으로 내 몰리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이 세상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불효하다가 그 부모가 돌아가셔 보십시오. 그러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그러면 그 자식들은 또 자신이 행한 대로 갚을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본 것이 그것뿐인데 아이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공경하겠습니까. 그래서 예부터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고치고 치유하고 바로잡아 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가정을 건강하게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고 내용이고 사명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5-27 / 조재진 목사
기독교 신앙이 불신자들에게 오해받고 있는 부분이 여러 가지입니다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효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불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제사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것 하나 때문에 마치 기독교는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만큼 가정의 중요성을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가정의 창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정은 작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가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불교는 가정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석가는 가정을 버리고 가출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출가’라고 하지만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공자님은 가정을 한쪽 부분만 강조했습니다. 남자 중심의 가정만을 강조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천대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갈수록 병든 가정만 생겼습니다. 이것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하나님 신앙을 중심으로 수평적인 관계인 부부관계,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기본적인 구조로 하고 있습니다. 수평적인 관계와 수직적인 관계가 균형을 이루어서 작은 천국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깨어졌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이 무너진 것을 말합니다. 가정에는 부부의 관계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라는 수직적인 관계도 바로 서야합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부모와의 관계를 힘들어합니다. 수직적인 관계를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결혼의 조건에서도 시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이 이제는 너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아예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시부모를 모시는 어려움을 ‘시집살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단어가 요 근래에는 ‘며느리살이’라는 말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주제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부모가 부담스러운 자녀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3:1-2에서 말세에 일어날 여러 징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여기에 보면 말세의 타락의 징조중의 하나가 바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18-32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의 죄들을 열거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는 이방인의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타락한 세상과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어가는 악한 현실도 사실은 다 하나님 모르는 불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부모와 자녀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우리들은 믿음생활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일에 헌신함으로 가정을 팽개쳐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생활한다고 ‘출가’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은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부모를 공경하며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믿음으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믿음과 가정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특히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 신앙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반면 부모를 신실하게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통로입니다. 노아의 세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함이 저주받은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들추어냈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버지의 허물을 가려준 셈과 야벳을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부모를 슬프게 하고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압살롬입니다. 그는 다윗과 그술 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을 왕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전쟁 중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리게 되었고 요압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난도질했지요.
반면 부모를 존귀케 한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그렇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윤리적인 부분이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또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아마 아버지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 같지요(?) 형제중에서 편애한 것 때문에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은 애굽에서 총리가 됩니다. 이 때 요셉이 취한 행동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판 형제들을 오히려 선대합니다. 그리고 모자라는 아버지 야곱을 끝까지 책임지게 됩니다. 애굽으로 가족들을 초청하고 고센 땅에 아버지와 형들의 거처를 마련해 드립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애굽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나를 가나안 땅에 장사하라”고 말했을 때 창47:30에 보면 요셉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을 요셉의 삶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나안에 장사합니다. 부모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요셉은 부모를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 요셉에게 놀라운 복을 주었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할 때 다른 아들들보다 두 몫의 축복을 선언합니다. 그 결과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에브라임지파, 므낫세 지파로 이스라엘의 12지파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또 룻기서에 보면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그가 시어머니 나오미의 믿음을 그대로 따랐고, 시어머니를 공양하기를 결단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룻을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바로 메시야 계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고 메시야 가문에 포함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축복의 통로입니다. 부담스러운 분이 아니라 공경과 순종으로 섬겨야 하는 분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과 축복은 고스란히 아들 이삭에게로 옮겨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축복을 이어갔습니다. 또 이삭은 이번에는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이삭에게로 그리고 야곱에게로 이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삭이 믿음이 좋았느냐 나빴느냐는 두 번째 문제였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느냐는 것도 두 번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로 이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로 부모의 축복이 자녀에게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모공경, 믿음의 테스트
혹시 여러분들은 부모님을 부담스러워서 피하고 있습니까? 시부모 모시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하십니까?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그것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너무 분명한 사실은 성경적으로 보면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축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부모를 모셔야 되느냐 아니면 모시지 말아야 되느냐’ 라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 모시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축복의 사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동시에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부모님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부모님을 무시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그 부모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을 신실하게 섬기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지를 테스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부모님이라는 분명한 권위를 세우고 그 부모에 대해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 공경을 배우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 속에 부모 공경을 넣어 사람들로 하여금 권위에 복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3)고 축복을 선언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예수 믿지 않아도 부모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를 섬기는 것은 자연적인 축복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자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믿음의 자녀들이 예수 안에서 부모님을 잘 공경한다면 더할 나위없겠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삶 속에서 부모님을 섬겼습니다. 부모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모범을 우리게 보이셨습니다. 어떤 모범을 보이셨습니까?
순종과 공경으로 부모를 섬겨라
첫 번째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여 섬겼습니다. 누가복음2:51에 보면 어린 예수님이 성장하여 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부분에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본래 이 본문은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의 권위에 스스로 복종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어떻게 부모님에게 순종했는지 그 실제적인 일들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어릴 때의 삶을 한마디로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들었다”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어렸을 때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부모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섬겨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비웠습니다. 육신을 입고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사셨습니다. 순종하시는 예수님, 이 모습은 성경이 그려주는 예수님의 이미지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함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부모에게 순종할지 삶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우리들의 부모님에게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에는 순종이라는 단어, 공경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개성’이라든지, 무슨 ‘끼’ 또는 ‘튄다’ 라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아가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의 악한 본성인 ‘자아’가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것이 보통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도 힘듭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제일 먼저 만나는 첫 번째 권위인 부모님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을 제대로 배운다면 이 사람은 바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언제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나의 삶을 바로 살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함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망치와 어머니라는 끌을 사용하여 자녀인 나를 깎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순종의 경험들을 통해 우리들을 빛나는 보석처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나에게 부모님을 주셔서 나를 만들어 나가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친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순종한다는 것과 공경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님에 대해 가지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부모님을 섬긴다는 것은 부모님에게 순종한다는 말이고 다른 한편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부모님을 인정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공경한다”는 말의 단어적인 의미는 "중요하게 여긴다," "높은 위치에 둔다," "높이 평가하고 인정한다" 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최고의 존칭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 고통 속에서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동양적인 언어 감각으로 보면 어떻게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된 희랍어 단어인 “구나이”라는 말은 ‘그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아주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을 향해 사용되었던 존칭어입니다. 고대 문서를 보면 왕후에게 사용했던 존칭어가 바로 이 ‘구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유명한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저 유명한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첫마디가 “구나이”(여인이시여)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최고의 존칭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부모, 나쁜 부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배운 부모, 못 배운 부모, 또는 부자부모, 가난한 부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입각해서 살펴본다면 부모님의 품행을 수우미양가로 등급을 매겨서 공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어떠하든 간에 자녀들은 부모님을 바르게 공경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 가치관이 너무 빨리 변했기 때문에 참 당황스러운 어른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유교의 가르침을 보면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잘못된 것이 있을 때에는 세 번 간하고 듣지 않을 때는 울면서 따라다녀야 한다. 또 부모가 병들었으면 자식이 머리를 빗지 않고 길을 다닐 때에는 활개를 펴지 않으며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거문고를 타지 않으며 큰 소리로 웃지 아니하며...” 이 글을 보면 요즘 어른들, 요즘 부모님들이 얼마나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노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전통적인 효도관을 따라주기를 바라지만 자녀들의 생각은 또 다릅니다. 그래서 더 부모님들이 외로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세상을 탓하지 말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부모공경과 하나님 공경은 같은 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모의 필요를 채워드려라
세 번째 예수님은 부모의 구체적인 필요를 공급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구체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정을 보면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비교적 일찍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0세가 될 때까지 아버지가 했던 목수 일을 계속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게는 4명의 형제들과 몇 명인지 밝혀지지 않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섬기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신뢰할 만하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것은 어머니를 모셔달라는 의미입니다. 어머니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심으로써 부모의 필요를 공급하신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한평생 섬겼습니다. 그는 에베소로 건너가서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한에게 굉장한 영적인 축복을 주었습니다. 원래 그는 성질이 불같아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나중에는 사랑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90세가 넘게 산 축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그 핍박의 시기에 많은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90세를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마리아의 필요를 채우는 책임을 다하도록 장수의 축복을 주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모님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부모와 형제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도전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 있는 사역을 하자 여기저기에서 소문이 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사역을 바알세불, 즉 사탄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예수님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염려되기도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진정으로 내 모친이며 형제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니라”(마12:48-50)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부모가 되도록 복음을 전하고 형제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족에게 해야 할 최후의 책임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예수를 안 믿는다면 그 부모를 버려두고 어떻게 우리만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내 부모 형제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효도는 단순히 육신적인 것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것이 효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해 온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행16:31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에 노아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았고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혼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온 집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일가와 친구들을 다 모았습니다. 이 때 그 곳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고넬료 한 사람 때문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인한 갈등이 가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가정을 파괴하는 독소가 아닙니다. 부부간의 애정을 깨뜨리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를 갈라놓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믿은 아내로 인해 거룩해질 수 있고 믿는 자녀로 인해 그 부모님이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제단에 여러분의 가족, 부모, 형제, 그리고 믿지 않는 당신의 남편을 올려놓아야 합니다.
혹시 아내 때문에 마지못해 교회 나온 남편이 있습니까? 부인에게 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비굴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주님 앞에서 예배하는 행복을 아십니까? 그것은 물질적인 풍요하고 바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축복입니다. 예수 믿는 부인들이여, 남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주고 소원을 다 들어준다 해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당신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요한 집에 살더라고 온 가족이 주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진정한 천국 같은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효도의 완성은 온 가족의 구원, 부모님의 구원에 있음을 알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요 19:25-27, 딤전 5:8 / 이동원 목사
지난해 관객 천 삼백만을 동원한 국내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던 영화 ‘괴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평가를 남겼습니다. 반미와 환경 문제등 다양한 이슈를 제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 봉준호는 이 영화가 이념 영화보다도 가족 영화로 평가 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괴물이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괴물과 맞서 싸운 박 강두네 가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절하고 외로운 사투를 벌려야만 했던 그의 가족이야 말로 그가 오늘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부각하고 싶어 한 우리 시대의 잃어버려져 가는 가치였던 것입니다. 딸 현서의 생존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가치를 다시 발견해야 했고, 이 주인공 가족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유일한 가치가 바로 가족의 가치였습니다.
오늘도 구정을 맞아 저 고속도로를 메우고 있는 차량행렬은 바로 이 가족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인생들의 외로운 몸짓이라고 한다면 너무 감상적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고속도로를 메우는 귀성의 행렬을 우리는 단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고향의 매력이 무엇입니까? 고향의 산천입니까? 아니지요. 고향의 산천은 그대로 있는데 고향을 찾지 않으시는 분들은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더 이상 가족이 없는 때문이 아닙니까? 고향이 그리운 것은 단순한 고향의 산천 때문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한 그 추억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고향에 가지 않아도 고향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이유는 우리의 가족들과 어우러져 흐느적거린 그 추억의 자취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가족관의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이 질문의 대답을 위해 우리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인생을 사신 예수님의 가족관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족관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1.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협의의 가족’의 테두리에 갇혀 ‘광의의 가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족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의 마당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웃의 가족에 해가 돌아가게 하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가족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족보다 좀 더 큰 개념인 민족을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민족은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내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의 권리를 박탈하고 침략하는 행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협의에서 사용되는 좁은 민족주의는 결국 병든 애국심이요,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가족 사랑이나 민족사랑은 가족이나 민족보다 더 높고 더 넓은 가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족보다 민족보다도 더 높고 더 넓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바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관을 반영하는 에피소드가 복음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설교 중 이었는데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달받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마태12:49-50의 말씀을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르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저는 결코 이 말씀이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예수께서 부인한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혈연적 가족의 범주를 초월하는 가족관을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육신의 어머니 그리고 육신의 형제들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의 제자들이 또한 바로 그의 가족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이셨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을 태국 파타야에서 우리 교회 파송 선교사님들의 가족 그리고 섬감이들 모두 90여명의 식구들과 한 주간을 함께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과 일본,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등지에서 그리고 태국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던 모든 가족들이 그들의 자녀들까지 모두 다 함께 모였습니다. 너무 소중하고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얼싸안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은혜 받고 함께 격려를 나눈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거기서 느낀 가장 강렬한 공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아, 우리가 가족이었구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과 헤어지며 제 가슴에 떠오른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 내 동생들이냐--[다시 말하면 누가 내 가족이냐]--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가족이니라]” 이것이 바로 성경적 가족관 즉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목장 교회에서 깊은 은혜와 사랑을 나눌 때 혈연의 가족 못지않은 동일한 가족애를 느끼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묶여진 형제와 자매들-그들은 우리들의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함께 묶여져 평생을 사는 것-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중심의 성경적 가족관의 정체입니다.
2.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가족의 책임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 가족관이 우리의 혈연의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가족들에게도 최선의 책임을 다 하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최후의 3년-즉 공생애 기간동안 그는 자주 이미 소개한 성경적 가족관 즉 하나님 중심의 광의의 가족관을 피력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이 십자가를 앞둔 공인의 입장에서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공생애 3년 이전에 30여년을 고향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 형제들과 함께 성실한 가족의 삶을 더불어 살아가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았던 말씀처럼 12살 먹은 소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방문이후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살아가는 모습을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좋은 아들이요 좋은 가족으로 사신 것입니다. 그후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당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시자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교훈에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막6:3) 사람들은 정확하게 그의 착한 마리아의 아들로 살아가던 모습,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잘 감당하던 그의 성실했던 직업인의 모습, 그리고 그의 육신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과 어울리며 살아가던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으로서의 성설성은 그의 지상생애 마지막 십자가 사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 통치시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거기에 죄인이 되어 두 강도와 함께 매달리신 예수님-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사람들이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면 자신의 고통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최악의 고통의 시간-예수님은 누구를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의 어머니의 복지 문제를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고통의 절정의 순간 그분이 기억한 것은 자신의 고통이 아닌 어머니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지하신 지혜로 그의 어머니의 마지막 여생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부탁하십니다. 그가 거느리신 제자들 중 가장 오래 살수 있는 제자 그리고 가장 섬세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제자를 생각해 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본문 26절에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27절에서 요한을 주목하며 말씀하십니다. “또 그 제자(요한)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그분의 지상생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신 일-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가족을 돌보시는 일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족 돌봄의 교훈을 승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관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처음 생생한 영향을 받은 처음 제자들이 어떤 가족관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예수님이후 세상을 복음화한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딤전5:8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여기 바울 사도는 가족 돌봄을 포기한 사람들을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교훈을 자신의 목회의 승계자인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바로 자신이 또한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디모데 전서의 교훈을 시작하며 바울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1:1-2)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이 예수님의 명을 따른 목회적 교훈의 하나로 그가 주께 받은 교훈이 가족 돌봄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남기신 모범이요,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의 유산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분의 제자인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가족 돌봄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디모데 전서에서 바울 사도는 바로 우리의 이런 가족 돌봄의 노력이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며,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기독교의 최대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기독교인들의 의식구조를 연구하는 조지 바나(George Barna)라는 분에 의하면 현대 기독교의 최대의 문제는 신자와 불신자의 삶에 다른 것이 없는 것(범죄율, 이혼율등)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2세기의 한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Diognetus)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헌학적으로 1-2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들여다 볼수 있는 매우 소중한 편지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갖고 아기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처럼 아기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아기를 낙태하고 아들이 아닌 딸을 버리는 것은 관행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관행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또 하나의 관행이 늙은 병든 부모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관행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처음 역사는 그렇게 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소위 성도들에게는 어쩌다가 왜 이런 거룩한 습관이 상실되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거룩한 동기의 결핍이나 상실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모델이신 주님의 삶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신 주님-그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결국 자신의 백성들 곧 그의 영적 가족들을 위한 거룩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괴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다시 배운 영화 괴물의 주인공 강두의 마지막 절규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현서야, 나는 알고 있었단다. 네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했었는지. 남들한테 바보 소리를 듣는 아빠를 창피하게 여기는커녕 언제나 어른처럼 입바른 소리를 하며 사랑을 나눠주던 너였다는 걸 아빠는 다 알고 있었단다.--맞아, 현서야 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네 이름을 하루에 열 두번은 더 불러야 난 행복했었다. 넌 나의 분신, 넌 우리의 가족이었으니까.” 그런데 강두를 포함해서 우리의 문제는 너무 늦게 가족의 가치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늦게 너무 늦게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가족은 어떠신지요? 우리의 가족-안녕하십니까?
예수님은 효자이십니다
요 19:25-27 / 성흥모 목사
어버이주일이 되면 사실 설교하기가 두려운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부모님을 잘 모시고 살아가는 교우들이 많은데, 부모도 모시지 않는 사람이 부모님을 잘 모시라고 설교한다는 것이 정말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만 같아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오래 전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사시는 가정을 표창하며, 최근 3년 전부터는 영주교회 어버이 상을 시상하는데, 이 상을 받으시는 분들은 만80세가 넘어야 하고, 심사위원의 투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 공정한 시상이 이루어진다는 봅니다. 우리 교회는 어버이상을 한 해에 5명씩 드리는데, 자녀들이 교회를 잘 나오고, 오래 사시기만 하면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금반지 3돈을 선물하는데, 정말 기념하고, 기념패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받으신 어떤 상패나 기념패에 못지않은 가치있는 상패가 될 수 있습니다. 금반지는 살아생전에 기쁜 마음으로 끼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꼭 모시고 살아온 자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어르신이 돌아가실 때에 약력을 소개하면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영주교회에서 어버이상을 수상하신 분이라고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노회 안에는 저의 어머니의 친구 분의 아들이 목사님이 계십니다. 일전에 시찰회에서 야유회를 가면서 일부러 목사님 옆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전도사로 시무할 때에 청년회원이었고, 신학을 늦게 한 후배이지만, 나이는 몇 달 빠른 분입니다. 요즈음 어머니는 건강하시냐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정말 모시고 살아가기에 힘들다고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어머니는 교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목사 어머니가 아픈데 심방도 오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한번 심방을 오면 다음에는 수시로 전화 걸어 또 오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여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었는데, 잘못 전화를 걸어 그 집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와서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이 밤중에 남의 집에 전화를 걸었느냐고 따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가 치매가 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용서하시라고 통사정한다고 합니다. 아들이 설교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불러서 예배를 드려달라고 합니다.
예배드리면 머리에 안수하고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를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조금 안심을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또 불러 예배드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부인에게 어머니와 함께 가정 예배드리라고 부탁을 하면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고, 조금 후에 우리 또 예배드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자부인 사모님도 이젠 하다하다 지쳐 쓰러지고 만다고 합니다. 다른 아들들이 좀 모셔보겠다고 하는데도 큰 아들 집을 떠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 사랑하시는 어르신들 잘 들으세요. 지금 여러분을 모시고 있는 자부를 칭찬하시고, 알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다가 와서 용돈 주고 가는 딸을 칭찬하고, 저런 딸이 없으면 어쩔 뻔하였느냐고 말씀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30대의 아들 내외가 어버이 날이라고 하여 부모님을 찾아가 용돈 드리고 저녁 식사하는 것은 5월의 날씨 좋은 날 가족들이 함께 나들이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한 가족이 한 자리에서 즐겨 친교 하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일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건강하여 손자들을 보아주시고, 아직은 돈을 버시는 것이 있어 자식들에게 밥이라고 사주신다면 그런 자녀들은 효도라는 말을 꺼낼 것도 없습니다. 이제 부모님이 80을 넘기시고, 어디 한번 나가실 수도 없고, 전적으로 자식을 의존하게 될 때에 비로소 효도를 말하고, 모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TV에서 영화를 보다가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아직 미완의 형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처음에는 형편없는 형사가 사건에 빠져들면서 우리 사회 공공의 적을 소탕한다고 하는 줄거리였습니다. 영화에서 악역을 맡은 사업가는 자기 앞에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비위를 상하게 하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나쁜 것을 골몰하게 생각하면서 운전하다가 택시를 추돌하였는데, 운전수가 나와서 욕을 하였다고 밤중에 운전수를 뒤따라가서 죽여 버립니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가져가다가 노신사분이 자기 옷을 더럽혔다고 하여, 그를 죽입니다. 세상에 이런 미친 사람이 다 있나싶은 못된 사람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정말 훌륭한 자선 사업가이신데, 당신이 후원하시는 고아원이 문을 닫게 되었으니, 아들이 회사에 투자한 18억원을 빼어 고아원을 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사업가의 두뇌로 보면 아버지가 하는 일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투자한 회사가 곧 상장이 되면 무려 380억 원이란 돈으로 불러나는데, 18억 원을 빼겠다고 합니다. 아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반대합니다. 고아들을 위하여 그런 돈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못된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만 있는 밤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칼로 수십 차례 찔러 죽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와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절규하는데,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어머니도 십여 차례 질러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칼을 잘못 사용하여 자기 엄지손가락의 손톱이 절반 정도 잘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어머니는 아들의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그 잘라진 손톱을 집어 목구멍에 삼킵니다. 자칫하면 미궁에 빠질 사건인데, 형사가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목덜미에 깊이 난 칼 구멍에서 손톱을 찾아내고 맙니다. 그래서 사건은 해결되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못된 아들인데,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까지도 죽이는 패륜아인데, 그 어머니는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손톱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아들을 보호하려고 사랑하는 어머니는 죽어가면서도 현장에 남아 있는 손톱을 집어삼켰습니다. 우리네 어머니는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식은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잘 덮어주시고, 용기를 주시던 어머니를 기억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십자가에서 마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그 골고다 형장에는 네 명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을 따라오면서 불쌍히 여기는 것은 같은 죄인으로 취급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도망치고 만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의 동정도 있을 수 없는 즉결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도요한과 네 명의 여인들이 십자가 밑에 나아왔습니다. 사랑은 말만으로는 되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형장에 나아갔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요, 예수님의 사랑받을 제자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랑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도 시기하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고 하여도 힘들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의 관계를 살펴보면, 참으로 은혜가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성령으로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 마리아에게 못할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정혼한 요셉에게 버림을 받을 수 있는 일이요, 사생아를 가지고 있다고 널리 알리면 돌에 맞아죽게 할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보내시기 위하여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나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은 예수가 귀신이 들렸다느니, 바알세불에 들려 미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동생들이 찾아와서 미친 짓 그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의 말은 듣지 않으니, 어머니까지 찾아왔는데, “누가 내 모친이며, 형제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내 형제니라”(마12:46-50)라고 했습니다. 단호하게 인간적인 정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적인 정으로 말하면 마리아에게 아픔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33살의 한참 일할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합니다. 그 처형장에 지금 어머니 마리아가 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기막히고, 안타까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데, 육신의 어머니가 그 곳에 와서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마리아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해야겠다고 하여 마리아에게 입을 열었습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자식으로서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어머니의 노후를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여”라는 말은 “귀나이”라는 말로 여자를 하대하여 부르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남자와 구별하는 것은 것으로 여자, 여주인, 여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였는지, 지금 마리아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데, “어머니”라고 부름으로 더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옛날 이삭이 제물이 되려는 순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아버지의 마음이 더욱 아팠다는 것을 생각하신 듯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말 대신에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정말 효자이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제부터 어머니로 생각하고 주님을 대신하여 잘 돌보아 드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고 가셨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11년간 살았으며, 후에 에배소에 모시고 왔으며, 마리아는 에배소의 한 동굴에서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이 늦게 순교한 것이나, 늦게 활동한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처럼 타락한 세상에서 늙으신 부모님은 천덕꾸러기와 같아졌습니다. 당신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있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 건강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집도 보아주시고, 손자들도 살펴주실 때에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파서 응급실로 가고, 여러 번 입원해야 하면 자녀들이 바빠집니다. 그러다보면 장병에 효자가 없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이 계속될 때에 진정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출20:12의 십계명은 제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륜의 계명에서 가장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에배소서6:1-3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6:1-3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인생을 가장 성공적으로 살아간 지혜자들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잠23:25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즐겁게 하며,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부모 모시는 것이 싫어서 한 부인이 남편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내가 장자인데, 부모님을 모시고 살자고 했지만, 부인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국에 이민 간 부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한인교회를 나가다보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가 잠30:17을 보았습니다. 잠30:17입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인은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드넓은 사막 지대를 가면서 생각했답니다. 이런데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는다면 내가 부모 모시는 것이 싫어서 이곳까지 왔는데, “아비를 조롱하고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의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말씀을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공경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은 축복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저주의 말씀도 있습니다.
제5계명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연결고리와 같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명의 마침이요, 인간에 대한 계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을 다시 쓰는 신명기 5:16의 말씀에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버이날을 맞이하였는데, 사실은 부모 공경이라는 것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모 되라는 교훈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잠시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으며,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엡6:4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마음이 전달되면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교훈이란 실제 훈련을 말하며, 체벌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훈계는 말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잘 안 듣는 아들을 둔 어느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번번이 부모와의 약속을 어기는 늦게 돌아오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최후의 경고를 했습니다. “우리 집안의 규칙을 한 번만 더 어기면 다락방으로 보내겠다.” 그러나 며칠 후 아들은 또 부모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부모에게 어디로 가는지 알리지도 않고 집을 나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밤이었지만 다락방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아들을 냉방인 다락방으로 보낸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너무 춥고 무서울 거라며 한숨을 쉬었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그 아이를 다락방에서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소리를 들으며 괴로움에 잠 못 이루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은 추운 다락방의 딱딱한 바닥에서 베개도 없이 얼어붙은 듯 쪼그리고 잠들어있었습니다. 아들을 내려다보던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 곁에 누웠습니다. 아들을 꼭 안고 팔베개도 해주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도 다락방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들을 안고 누운 아버지와 그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안겨 철없이 잠든 아들을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아들을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맞은편에 살며시 누워 아들의 뺨에 볼을 갖다 댔습니다. 양쪽에서 안아주는 부모님의 체온에 몸이 녹고 눈을 뜬 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닫고 “아버지,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면서, 교훈하고 훈계할 수 있어야 상처받지 않습니다. 잘 하다가 한번 독하고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시대에 지혜로운 임금이었던 효종의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왕께서 민정 시찰 중에 길거리에서 어떤 젊은이가 팔순이 넘은 노모를 업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까지 늙으신 노모를 업고 서 있느냐?” 그는 대답하기를 “어머님의 평생소원이 임금님의 용안을 우러러 뵙는 것이어서 제가 십리 길을 걸어서 어머니를 이렇게 업고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임금님은 그의 효행을 기특히 여겨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소문이 퍼지자 그 동네에 별로 효자가 아니었던 젊은이 하나가 자기도 노모를 업고 임금이 지나는 길옆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임금님이 그 모습을 보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여기에 와 있느냐?” 그랬더니 그는 지난번에 후한 상을 받은 사람과 꼭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하도 임금님을 뵙고 싶어 하셔서 제가 먼 길을 걸어서 이렇게 업고 왔습니다.” 이 때에 동네 사람 하나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아닙니다. 임금님, 저 놈은 천하의 불효자식인데 상금을 타 먹으려고 나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여러분이 이 상황에 있다면 어떤 반응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는 “저런 나쁜 놈은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라고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의외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효도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저자에게도 후한 상을 내릴지어다.”고 했답니다.
효도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원하여 지는 것만이 아니라, 억지라도 지다보면 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자녀들이 부모를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인들이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 이 시대는 병든 시대입니다.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렇게 짐처럼 느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부모처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이 부모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오늘 사람들이 너무나 모릅니다. 늙으신 부모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 팽팽하던 얼굴이 흉하게 주름살이 지고 그 예쁘던 몸매가 엉망이 되고 꽉 찼던 뇌가 반으로 줄어 치매가 생겨서 분별력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한번 눈여겨보십시오. 나의 인생이 소중한 것처럼, 부모님의 남은 인생도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귀찮다고 짐스러워할 일입니까.
오늘 자식들은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모르다가 언제 알게 되는가 하면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고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어머니의 참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한 후에 가서야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눈물짓는 존재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생존하여 계신 분들은 효도하십시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지극히 공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식의 도리이고 사람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마지막까지 부모님을 잘 모시는 중에 약속하신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참 믿음의 회복
요 19:27 / 문기태 목사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학이 발달하였으나 귀한 것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전 체세포와 난자를 수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여자 혼자서도 자녀를 낳고, 동성연애자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귀중함을 찾기 어려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앞으로 지식은 더 발달할 것이고 과학은 또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더욱 부요해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다 가져야 부유한 것이 아니고 다 알아야 지성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많아도 오히려 더 약하고 비겁하게 되고 당황하며 불안해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고 신념을 갖고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물질이나 지식이 아니라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중심에 있을 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갖게 되며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병들었습니다. 겉은 건강해 보이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는 병이 들었습니다.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집착하지만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굳센 믿음에 선 하나님의 자녀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고 담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담대하고 땅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는 것을 믿을 때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이러한 참 믿음의 회복입니다. 사단은 온갖 방법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비난하여 실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허물을 들춰내고 과장하여 속삭이며 낙심하게 하여 하나님까지 떠나도록 만듭니다. 세상의 사람과 물질과 흥미거리를 총동원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게 속아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점점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도, 기쁨도, 하나님의 형상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급한 것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도 아닙니다. 집을 장만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자리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참 믿음의 회복입니다. 참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 안에 소망이 넘칩니다. 참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 가정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을 회복할 때 행복해지고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1. 참 믿음은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부장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찾아와 간청합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제법 권세를 휘두를수 있는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나 가족의 문제가 아닌 종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백부장에게는 종들이 많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인이 아니고 노예입니다. 당시에 노예는 주인의 재산입니다. 팔고 살 수 있습니다. 죽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부려먹다가 병들고 힘이 없어 쓸모가 없으면 내다 버리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노예의 치유를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가 간청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큰 문제 뿐 아니라 작은 문제도 주님께 가져오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뿐 아니라 이웃까지도 주님의 은혜를 힘입기를 간절히 바라며 주님께 나아가 은혜를 간구햇습니다. 가족뿐 아니라 노예까지도 가족처럼 사랑하고 은총을 받도록 대신 주님께 나아가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노예라 할지라도 소중한 한 생명으로 바라보고 그의 목숨을 귀히 여겨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진실한 믿음을 소유한 한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을 소유했다고 하는 사람들중에 사람을 경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은 귀히 여기는데 다른 사람은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있는 고용주들중에도 근로자들을 자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중에 고통받는 이웃을 만날 때 불쌍히 여기고 존중하며 그를 위해 대신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것은 새로운 눈이 열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특히 사람을 볼 때 이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보지 않고 내가 어떻게 사랑하고 도울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며 바라보아야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붙여준 사람임을 확신하고 마음을 다하여 섬기려는 자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목욕탕이나 식당에 가서 젊은 사람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종업원한테도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종종봅니다. 자신은 돈이 많아 존귀하고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 시시하다는 생각이 마음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야!" 또는 "어이" 하며 거들먹 거립니다. 사람을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귀하고 천하게 나누는 사고야말로 위험한 사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다릅니다. 그가 돈이 많든지 없든지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깔보지말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존대말을 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잘 알지 못하는 청년들에게는
존대말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실수할 때도 많습니다. 상대방이 아주 어색해해서 자세히 보면 초등학생에게도 존대말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하다보니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람을 깔보고 시시하게 여기는 마음에는 믿음이 싹틀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그를 위해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기를 간구하며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안에서 참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더 많은 것들을 주님께 가져가 은혜를 힘입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그들에게도 주님의 귀한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2. 참 믿음은 말씀의 능력을 기대하는 것입니다.(8)
백부장이 예수님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누워 몹시 괴로와합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망설임없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하며 "말씀만 하옵소서" 하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집에 예수님이 오시면 대접할 일이 번거로와서 사양한 것이 아닙니다. 그도 예수님을 집에 모시게 되면 아주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그의 집에 들어가시면 예수님이 다른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을까봐 집에 오시지 않고도 '여기서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게될 줄 믿습니다.'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의사처럼 환자를 만나 얼굴도 보시고 아픈 곳을 만져 보시며 어떻게 처방을 내리시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렇게까지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질병이 꼼짝 못하고 복종할 것이다.' 하고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실까?' '예수님이 나의 문제를 어디까지 도와주실까?' 하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내가 백부장만 되어도 내가 명령하면 부하들은 절대 복종하는데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데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질병도 꼼짝 못하고 귀신도 도망가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말슴에는 그 누구도 절대 복종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깜짝 놀랐습니다. '백부장이 어떻게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일도 없는데 주님의 말씀에 큰 능력이 담겨 있음을 깨달았을까? '하고 놀라셨습니다. 유대인중에도 백부장처럼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그리고 주님의 말슴에 대해서 진실한 믿음을 드러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칭찬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문제는 말씀을 들어도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에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을 통하여 약속을 하셔도 시들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책망을 하셔도 가볍게 여깁니다. 말씀을 통하여 도전을 하셔도 미지근한 반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통한 명령에 즉각적인 순종을 보이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능력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이 있으면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은 식은죽 먹기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만 있으면 귀신도 쫓아내고 고깃배에 가득 채우도록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만 받으면 천하가 다 복종합니다.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복 주십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치유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말씀을 충만케 하셔서 믿음을 성숙하게 하십니다. 말씀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주님을 경험하려면 말씀의 능력을 확신해야 합니다.
요 8:31을 통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안에 거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합니다.
뇌성마비 아들을 둔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고등부를 지도하는 전도사의 아내였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으나 늘 뇌성마비 아들이 가시였습니다. 내 아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고 교회 일도 더 열심히 할 것 같았습니다.
같은 교역자 아내들이 좀더 나은 내조를 위하여 간호학원, 신학대학, 혹은 직장생활을 하며 열심히 사는 것을 볼 때마다 왠지 초조해졌습니다. 나는 언제쯤이면 저런 뜻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병원 문턱을 넘나드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울어내는 아이를 달래느라 밤잠을 설치며 처량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뇌성마비 아들이 흠이 된다하여 남편은 전임 교역자로 결정된 교회로부터 부임을 거절당하기를 여러번 하였습니다. 주변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뇌성마비 아들을 데리고 목회하기란 어려우니 다른 방향으로 돌려 보라는 권고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와 아이를 데려가 주십시오. 너무 힘이 들어 견딜 수 없습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말슴이 이 여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십자가위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마지막으로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젊은 요한이 예수님의 부탁을 받아 들여 마리아를 평생 모셨습니다.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기에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지만 요한은 교회를 세우지도 못하고 명 설교를 하며 다니지도 못하고 오로지 하찮게 보이는 할머니 수발에 청춘을 다 보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마리아도 죽고 그도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요한복음을 기록합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께서 들려 주셨던 귀한 말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유일하게
남깁니다. 요한은 진리의 사람인 동시에 자유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뇌성마비의 엄마에게 그렇게 은혜가 됩니다. 이제 울고 보채는 아들을 바라보니 더 이상 짐도 아니고 가시도 아니었습니다. 보배요, 보석이며 하나님의 은총 자체였습니다. 지금까지 뇌성마비 아들때문에 고통속에서 살았는데 진리안에서 아들에 대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앞에 그렇게 부끄럽던 아들이 자유를 얻고 난 후에 보니 자랑스럽습니다. 교회에 안고 와서 교인이 안아 보겠다고 하면 누구든지 안아보게 합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고 주님이 나에게 말슴해 주시기를 기대하기 바랍니다. 백부장처럼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나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며 오직 주의 말씀에 집중하며 기다리며 반응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3. 참 믿음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10)
믿음이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본래 우리는 믿음이 우리의 안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신실하게 변화되어 가는 믿음은 다른 사람의 눈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의 눈에 쉽게 띄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보시며 믿음의 크기를 보셨던 것입니다. 백부장을 보고는 이스라엘중에서도 이만큼 큰 믿음은 보지 못하였다고 감탄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에게 나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주님뿐 아니라 사람들도 각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의 믿음이 큰지, 작은지 다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여러분의 믿음도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벌써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어떤 사람은 예배를 진실되게 드리는 것을 통하여 믿음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힘쓰는 모습을 통하여 믿음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의 열정을 통하여 믿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넘치는 감사와 풍성한 헌금생활을 통하여 믿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봉사하는 삶을 통하여 각각 믿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어떤 형태로든지 믿음은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가식적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인것처럼 꾸미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식적으로 믿음을 꾸미면 어색하고 오래가지 않아 다 탄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존경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 소리 없이 남모르게 헌신하는 분입니다.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는 분들입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면서 주님의 의를 드러내려고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성숙한 믿음의 자세를 드러내며 인내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것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믿음을 보시기를 기대하십니다. 뭔가 특별한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클레어 부츠 루스 여사는 "모든 인간은 단 한줄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워싱턴 대통령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링컨은 '노예 해방의 아버지'입니다. 닉슨 대통령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참 괴롭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미국을 위해서 엄청난 헌신을 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후에 사람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기억될 때 한 권의 책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한 페이지로 기억되지도 않습니다. 단 한줄로 기억됩니다.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아, 그 사기꾼!"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지" 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지" 한 줄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자식들이 자기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아휴 그 양반 고집은 못말리는 분이었지" 가장 가까이에서 본 가족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듣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며 긍정적인 평가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라는 평가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백부장같이 문제의 한 복판에 언제나 예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고 말씀을 기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보이며 살아가므로 좋은 인상을 남기기를 힘쓰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