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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118) 장량의 계산 착오와 위기극복
항우는 워낙 성미가 급한지라, 30만 대군을 몰아쳐 오기 무섭게 유방의 근거지인 고릉성에 전격적인 공격을 개시 하려고 하였다.
만약 그랬다면 한군(漢軍)을 크게 패하고, 한왕 자신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이었다고나 할까 ? 항백이 항우의 전격 작전을 반대하고 나섰다.
"폐하 ! 우리 군사들은 쉴틈 없이 먼길을 달려오느라고 몹시 피로해 있사옵니다.
더구나 적정(敵情)을 잘 모르면서 무작정 전격 공격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오니, 며칠 동안 여유를 갖고 적정을 정확히 파악한 뒤에 총공격을 퍼붓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래야만 적을 일거에 섬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항백이 기습적인 전격 작전에 반대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항백은 일찍부터 장량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사이인데다가, 한왕 유방과는 처남,매부지간 이었기 때문에 한왕을 최후의 궁지에까지 몰아 넣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숙질(叔姪)간인 항우를 배반하고 한왕에게 돌아 붙을 생각도 없었다.
다만 한왕의 덕망과 장량의 기발한 지략을 평소부터 흠모해 왔기 때문에, 마음만은 전격적으로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항백은 초한(楚漢)간의 강화 조약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였으나,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친구인 장량과 처남인 유방이 절대적인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그만 시간이라도 벌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항백이 전격 작전을 반대하고 나오자, 항우는 항백의 의견을 받아들여 먼저 적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로 하였다.
한편 한나라 군사들은 초군이 30리 밖에 진을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움직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왕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한신,영포,팽월 중 단 한 사람도 달려와 주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왕이 조서(詔書)만 보내면 <한신,영포,팽월 등이 부리나케 달려와 줄것>이라고 단언했던 장량의 커다란 계산 착오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한왕은 너무도 불안스러워 장량에게 나무라듯 말한다.
"나는 선생의 말씀만 믿고 항우에게 선전 포고문을 보냈는데, 한신,영포, 팽월 등은 감감 무소식인 채 항우만이 대군을 몰아쳐 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 "
장량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한신,영포, 팽월 등이 대왕의 조서를 받아 보면 즉시 달려오리라고 믿었던 것은 신의 커다란 계산 착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지 아니하면 다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가 어렵다 뿐이지, 적을 막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신을 믿어 주시옵소서."
이리하여 한나라 군사들은 수비 태세만 견고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모양으로 10여 일이 지나도록 서로간에 움직이는 기색이 전혀 없다 보니, 항우가 몹시 답답함을 느끼며 모든 대장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묻는다.
"유방은 우리에게 선전 포고문을 보낸 주제에, 우리가 코앞에 와 있어도 움직임이 전혀 없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 "
그러자 계포가 나서며 말한다.
"유방은 지금 우리에게 둔병지계(鈍兵之計)를 쓰고 있는 줄로 아뢰옵니다."
"둔병지계라니 .... ? 그러면 저들은 우리와의 싸움을 회피하고, 우리 군사들이 저절로 지쳐 버리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 "
"예, 그러하옵니다."
항우는 이번에는 종이매에게 묻는다.
"장군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
"소장도 계포 장군과 똑같은 생각이옵니다. 둔병지계를 쓰지 않는다면, 선전 포고문까지 보낸 주제에 어째서 나와 싸우기를 회피하겠사옵니까 ?"
그러자 대장 주란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온다.
"두 분의 의견은 크게 잘못된 것인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은 한신의 군사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싸울 자신이 없어 수비만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번 싸움은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할 것이니 , 오늘이라도 총공격을 퍼붓도록 하시옵소서."
"음 ..... 듣고 보니 과연 장군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러면 내일은 아침부터 한군에게 총공격을 퍼붓기로 합시다."
다음날 항우가 총공세로 나오자, 한왕은 왕릉,번쾌, 관영, 노관등 네 장수로 하여금 적을 막아내게 하였다.
항우가 말을 달려 나와 적장들에게 말한다.
"내가 한왕과 단 둘이 담판할 일이 있으니, 그대들은 물러가고 한왕을 내보내라."
그러자 왕릉이 장검을 휘두르며 대답한다.
"대왕께서는 그대가 태공을 팽살하려 했던 원한을 푸시려고 그대를 생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시어 우리 네 사람은 그대를 생포해 가려고 나왔다. 그러니 그대는 여러 말 말고 우리의 결박을 받으라."
이에 항우가 크게 화를 내며 장검을 휘두르며 비호같이 돌진해 왔다.
네 장수가 항우를 상대로 30여 합을 싸웠으나, 항우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제각기 쫒기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근흠,주창,고기, 여마통 등 10여 명의 장수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와 싸움을 가로 맡았다.
그러자 초진에서도 계포, 종이매,환초,우자기등 모든 대장들이 총출동하여 양군 대장들간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기만 할 뿐 끝날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 되자, 초군 진지에서 별안간 요란스러운 철포 소리가 나더니, 그것을 신호로 대장 주란이 대군을 몰아쳐 나와 한군을 사면 팔방으로 때려부수기 시작 하였다.
그러더니만 한나라 군사들을 마치 풀을 베듯 쓸어버리는데 그 기세가 막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에 한왕은 크게 당황하여,
"모든 군사들은 즉각 성안으로 후퇴하라 ! "
하고 긴급 후퇴명령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군사들은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일절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는 성문 앞까지 접근해 와 의기 양양하게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린다.
"적은 이미 독 안에 든 생쥐들이다. 성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유방을 당장에 생포하라. 나의 오랜 원한을 오늘 밤에 깨끗하게 풀고야 말 것이다."
그러자 대장들이 입을 모아 아뢴다.
"폐하 ! 지금은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 오니,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뭐가 두려워서 내일 아침으로 미룬다는 것이냐 ? "
"어둠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함락시키려면 적이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되어 우리 측의 피해가 많게 되옵니다. 그러니 밝은 후에 공격하는 것이 우리측의 손실을 줄일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음 .... 그러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더라도 오늘 밤에 경계만은 삼엄하게 하라."
한편, 성안에 갇혀 있던 한왕은 불안에 떨며 모든 막료들에게 말한다.
"적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여 성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 "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초군은 진종일 싸우느라고 무척 지쳐 버려서, 지금쯤은 모두 잠이 들어 버렸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오늘 밤에 성고성으로 근거지를 옮겨 가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고릉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할 바에는 지키기가 견고한 성고성으로 옮겨 가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러나 적의 경계가 삼엄하여 성을 함부로 빠져 나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 "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신이 적정을 잘 알아 보아서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장량은 번쾌,주발,시무,근흠 등 네 장수로 하여금 성밖으로 나가 적정을 면밀하게 살펴 오도록 하였다.
네 장수가 어둠 속으로 잠행하여 적정을 살펴 보니, 북문에는 적이 거의 없어서 북문으로 탈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한나라 군사들이 한왕을 모시고 북문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왕을 선두로 군사들이 절반쯤 성을 빠져 나갔을 때, 초장 종이매가 그 사실을 보고 받고 항우에게 급히 달려와 고한다.
"폐하 ! 유방을 비롯한 그의 군사들이 성을 포기하고 지금 북문으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하옵니다."
자다 말고 일어나 그 보고를 받은 항우는 큰소리로 외친다.
"뭐야 ? 유방이 도망을 가고 있다구 ? 그러면 당장 군사를 보내 그자를 잡아오도록 하여라 ! "
항우가 급하게 호령을 내리자, 종이매가 조용히 간한다.
"폐하 ! 적이 도망을 갈 때에는 방비책을 튼튼하게 세워 놓고 떠났을 것이 분명하오니, 함부로 추격하는 것은 삼가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섣불리 추격하다가 적의 복병에 말려드는 날이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항백이 종이매의 의견에 찬성하고 나온다.
"폐하 ! 밤도망을 갈 정도라면 유방의 운명은 이미 다 된 판이니, 너무 서두르지 않으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구태여 야간 추적을 하지 않아도, 머지 않아 유방을 완전 섬멸 시킬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항우는 종이매와 항백의 의견을 옳게 여겨, 야간 추적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 덕택에 한왕은 남은 군사들을 고스란히 거느리고 성고성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러나 언제 또다시 항우의 공격을 받게 될지 모르므로, 한왕은 장량과 진평에게 걱정스럽게 상의한다.
"적이 언제 이곳까지 공격해 올지 모르는데, 나를 도와줄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으니, 이를 어찌 했으면 좋겠소 ?"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한다.
"대왕 전하 ! 그 점은 조금도 염려 마시옵소서. 모르긴 모르되 적은 사흘 안으로 반드시 자진하여 철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항우가 자진하여 철군을 하다니요 ? 그게 무슨 말씀이오 ?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려."
그러자 장량이 기다린듯이 말한다.
"적은 군량사정이 넉넉치 않아, 어림해도 열흘 분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신은 그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수일 전에 장창과 장다 두 장수를 날렵한 병사 백여명 씩을 딸려서 유주(柳州)로 밀파하여 적의 군량고(軍糧庫)를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였습니다.
제아무리 초패왕이라도 밥을 먹지 않고서야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사옵니까 ? 그러므로 적은 수일 안으로 반드시 팽성으로 자진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춤이라도 출듯이 기뻐하였다.
한편, 초군 진영에서는 다음 날, 한왕이 쫒겨간 성고성을 공략하려고 전군에 또다시 출동령을 내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유주로부터 비마가 달려오더니,
"폐하 ! 유주에 있던 군량고가 어젯밤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전방으로 추진할 군량미가 모두 없어졌사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뭐야 ? 유주에 있던 군량미 창고가 어젯밤 화재로 모두 불타 버렸다고 ? 그렇다면 경비 책임을 맡고 있는 놈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 "
그러나 책임을 따지고 호통을 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초군이 제아무리 사기가 하늘을 찔러도 먹지 않고서야 싸울 수 없는 일이 아니런가 ?
항우는 즉시 참모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자 모든 대장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이번 기회가 유방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밥을 굶고서야 싸울 수 없는 일이니,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사옵니다."
항우로서도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처럼의 승기(勝機)를 잡았던 초군은 눈물을 머금고 자진하여 철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량의 앞을 내다 보는 전략이 놀라운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한왕은 초군이 팽성으로 철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숨을 쉬며 장량에게 묻는다.
"한신,영포,팽월 등에게 소집령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 "
장량이 면목이 없는 듯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대답한다.
"대왕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그들이 즉시 달려오리라 믿었던 것은 신의 커다란 착오였사옵니다. 신이 커다란 과오를 범하였사오니 대왕께서는 신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 말에 한왕은 손을 힘차게 내저으며 말한다.
"선생을 처벌하다뇨 ?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점에서 착오를 하셨는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해 주소서."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장량은 머리를 정중하게 조아려 보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한신 장군은 이름만 제왕(齊王)이었다 뿐이지 아직까지 그가 소유할 영토를 하나도 나누어 주지 않으셨사옵니다. 한신 장군은 그 점에 불만을 품고 오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영포와 팽월 장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영포 장군은 항우를 배반하고 우리에게로 왔건만, 아직까지 아무런 작위(爵位)도 내려 주시지 않으셨고, 팽월 장군의 경우도 무수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에 걸맞는 포상을 아니 해 주셨사옵니다.
더구나 영포와 팽월은 의리보다는 이해(利害)가 남달리 밝은 사람들이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대왕께서는 그들에게 제각기 영토를 나눠 주시기만 하면, 그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대왕께서 굳이 부르시지 않으셔도, 저마다 달려와서 대왕을 돕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옵니다.
대왕께서는 그 점을 각별히 고려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거듭 끄떡이다가 장량의 말이 끝나자 물었다.
"내가 우매하여 그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소이다. 선생의 충고는 새삼 폐부를 찌르는 것만 같소이다.
그러면 한신을 삼제왕(三齊王)에 봉하고, 영포를 회남왕(淮南王)에 봉하고, 팽월을 대량왕(大梁王)에 봉하여, 그곳 영토와 물산을 모두 소유하게 할 테니, 수고스런 대로 선생께서 인부(印符 : 도장과 임명장)를 가지고 가셔서 그들에게 직접 나의 뜻을 전해 주소서."
장량이 한왕의 명령을 받들고, 우선 제나라에 머물고 있는 한신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인부와 한왕의 조서를 내주면서 말한다.
"대왕께서는 이번에 장군을 삼제왕에 봉하심과 동시에, 제나라의 영토였던 70개의 성을 모두 장군에게 자치 운영을 할애(割愛)하셨습니다. 인부와 조서를 가지고 왔으니 받아 주소서."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면서 장량을 상좌로 받들어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량은 자리를 사양하면서 말한다.
"장군은 이미 왕위에 오르게 되셨고, 나는 일개의 변객에 불과 하니, 내가 어찌 감히 상좌에 앉을 수가 있으리까."
그래도 한신은 장량에게 상좌를 권하며 말한다.
"내 일찍이 선생의 도움이 아니었던들 제가 어찌 오늘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겠나이까 ? 선생은 한왕의 군사(軍師)이시므로, 저 역시 선생을 지난 날과 마찬가지로 군사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장량은 좌석을 사양하다 못해 한신과 동등한 자리에 앉으며 다시 말한다.
"항우의 세력은 지금 보잘것없이 약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왕께서는 항우와 화친 조약을 맺었던 것은 태공이 항우의 손에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태공을 무사히 구출하였으므로 이제야말로 항우를 섬멸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때가 되었습니다.
만약 제왕께서 항우를 정벌하는 데 힘을 써 주신다면, 제왕께서는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이 되셔서, 자손 만대에 이르도록 영광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연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선생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제야 말이지, 선생에게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 일전에 대왕께서 항우와 화친 조약을 맺고 천하를 양분(兩分)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크게 실망했었습니다.
통일 천하의 성업을 포기하고 천하를 둘이 나누어 가질 바에야 내가 나서 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어, 저는 저 나름대로 실속을 차리기 위해 대왕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그러나 오늘, 대왕께서 저를 삼제왕에 봉해 주시면서 천하 통일을 끝까지 완수 하시겠다면, 제가 어찌 전력을 기울여 대왕을 돕지 않겠습니까 ? 그 점에 대해서는 저를 굳게 믿어 주시옵소서."
장량이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제왕께서 그와 같은 결심을 가지고 계시다면 신속히 군사를 일으켜 대왕과 함께 항우를 정벌해 주소서. 나는 이제부터 영포 장군과 팽월 장군을 찾아가 제왕과 공동 보조를 취해 주도록 부탁할 생각이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말한다.
"선생을 모시고 영포,팽월 장군과 함께 힘쓰면 천하 통일을 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장량은 한신과 작별하는 길로 곧 회남(淮南)에 있는 영포를 찾아갔다.
영포가 장량을 반갑게 맞아들이자, 장량은 인부와 한왕의 조서를 내주며 말한다.
"대왕께서는 이번에 장군을 회남왕에 봉하심과 동시에, 구강(九江) 이남의 모든 군현(郡縣)을 장군께 하사하셨습니다. 장군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영포는 그 말을 듣고 기쁨을 금치 못하며, 한왕이 있는 서쪽 하늘을 향하여 사은 숙배(謝恩肅拜)를 올린다.
장량이 다시 말한다.
"이로써 장군은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항우가 건재해 있어 가지고서는, 장군의 지위가 결코 튼튼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한신 장군은 항우를 정벌하기 위해 불일간 군사를 거느리고 성고성으로 대왕을 찾아뵙기로 하였으니, 장군도 한신 장군과 함께 천하 통일의 성업에 적극 가담해 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
영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반색하며,
"저 역시 불일간 군사를 거느리고 성고성으로 대왕을 찾아가, 통일 성업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굳게 맹세하였다.
장량은 영포의 확약을 받고, 그 길로 대량(大梁)에 들러 팽월을 만났다.
때마침 팽월은 참모들과 회의를 하다가, 장량이 찾아 왔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 나와 정중히 맞아 들인다."
장량은 대량왕의 인부와 함께 한왕의 조서를 내밀어 주니 팽월은 등불을 밝히고 한왕의 조서를 읽어 보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 한왕은 팽월 장군에게 글월을 보내오>
공은 본시 위(魏)나라의 상국(相國)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귀순하여, 초나라의 양도(糧道)를 차단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워 주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포상을 못 해왔기에, 이번에 공을 대량왕으로 봉함과 동시에 50군(郡)을 식읍(食邑)으로 급여(給與)하는 터이니, 자손 만대에 이르도록 길이 영광을 누리기 바라오.
팽월은 한왕의 우악(優渥)한 은총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장량에게 말한다.
"대왕께서 신에게 이처럼 커다란 은총을 내려 주셨으니, 신은 신명을 다해 대왕의 은총에 보답하겠습니다."
그 말에 장량이 말한다.
"한신 장군과 영포 장군도 대왕의 통일 성업을 돕기 위해 불일간 군사를 거느리고 성고성에서 한왕과 회동하기로 하였으니, 대량왕께서도 동참해 주시면 한대왕께서는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불일간 성고성으로 대왕을 찾아 뵙겠습니다."
이리하여 한신,영포,팽월 등이 모두 자진하여 성고성으로 군사들을 몰고 찾아오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장량의 탁월한 지략의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초한지(楚漢誌) (119) 백만 대군의 출정
삼제왕(三齊王)에 임명된 한신은 한왕을 도우려고 15만 군사를 거느리고 성고성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때마침 괴철이 찾아왔다.
일찍이 한신에게 <한왕을 배반하고, 천하를 항우와 더불어 세 사람이 나누어 갖도록 하라>고 권고했던 일이 있었던 바로 그 괴철이었다.
한신은 괴철을 보고 묻는다.
"공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오셨소 ? "
괴철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제가 장군의 은총을 오랫동안 받아 왔사온데, 오늘은 장군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고성으로 떠나가신다기에, 장차 장군의 신상에 일어날 커다란 재화(災禍)를 모른 척하고 넘길 수가 없어 찾아 왔사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란다.
"커다란 재화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
괴철이 다시 대답한다.
"한왕이 전날 고릉성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한왕은 장군에게 급히 달려와 도와 달라고 간청했으나, 장군은 끝끝내 가시지 않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왕은 장군의 환심을 사려고 부랴부랴 <삼제왕>에 봉하는 동시에 많은 영토까지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포상이 아니고, 장군의 힘을 빌려 항우를 정벌하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것을 아셔야 하옵니다."
"음 ...! 과연 그럴까요 ? "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한왕은 장군의 힘을 빌려 천하를 통일하고 나면, 그때에는 장군을 그냥 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니, 그 어찌 <커다란 재화>라고 아니 할 수 있으오리까 ?
그러하니 장군은 성고성으로 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이제 장군께서는 한왕을 도우려 하지 마시고, 종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천하를 세 분이 나눠 갖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커다란 재화>를 미연에 방지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길이 누리시게 되시옵니다."
괴철은 <천하 3분론>을 또다시 들고 나왔다.
그러나 한신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장량 선생이 직접 찾아오셔서 군명(軍命)을 전달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칠 것을 철석같이 약속하였소.
그 일을 이제와서 번복하면, 나는 세 가지의 불의(不義)를 범하게 되는 것이오. 첫째는 군명을 배반하는 불의요, 둘째는 친구의 신의를 배반하는 불의요, 셋째는 은혜를 부덕(不德)으로 갚는 불의를 범하는 결과가 되오.
그와같은 불의를 범하고 나면, 내가 비록 삼제왕의 자리를 유지 한다 한들, 변방의 제후들이 나의 부덕함을 얼마나 비웃을 것이오.
그러하니 나는 설혹 후일에 공의 말대로 <커다란 재화>를 당하는 한이 있어도, 지금 당장에 그런 배은 망덕은 못 하겠소이다."
한신이 이처럼 확고 부동한 태도로 나오니, 괴철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지 한신의 앞을 총총히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한신이 괴철의 <천하 3분론>을 강력히 물리치고, 15만 군사와 함께 성고성으로 달려오니, 한왕은 원문(轅門)밖까지 몸소 달려나와 한신을 반갑게 맞아 주며 말한다.
"삼제왕이 이렇게 와 주셔서, 나는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만 같구려."
"대왕 전하의 홍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이 대왕 전하의 은총으로 삼제왕에 봉하여 지었으나, 대왕 전하를 가까이 모시고 있을 때에는 예전처럼 장군으로 불러 주시옵소서.
대왕 전하 앞에서 <삼제왕>으로 불리오니, 신은 망극하기가 이를 데 없사옵니다."
"그러하시다면 우리가 만났을 때에는 예전에 돈독한 군신지의(君臣之誼)의 시절로 돌아가 , 격의 없이 부르도록 하겠소이다. 이 점은 장군께서 양해하도록 하시오."
"하명을 백번 접수 하옵나이다. 그나저나 그동안의 신의 죄과가 백사 가당하오나, 차후로는 신명을 다해 충성을 다할 것이오니, 주공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무슨 말씀을 !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소의 잘못은 있는 법이오. 지나간 일은 일절 거론치 않기로 하고 어서 대전으로 들어갑시다."
이렇게 한신을 대하는 한왕의 태도가 어디까지나 관후하여, 한동안 어색하였던 한왕과 한신간의 군신지의가 다시 예전처럼 다시 뜨겁게 되었다.
마침 그 무렵에 장량도 성고성으로 돌아와 영포와 팽월도 대군을 이끌고 불일 내로 달려오게 되리라고 아뢰니, 한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세 장군이 한결같이 나를 도우려고 오게 된 것은 오로지 선생께서 애써 주신 덕택입니다."
"천만의 말씀이시옵니다. 그들이 자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된 것은 오로지 대왕의 위덕에 감복한 소치인 줄로 아뢰옵니다."
그로부터 열흘쯤 지난 뒤, 영포,팽월을 비롯하여 연왕(燕王),위왕(魏王),한왕(韓王) 등도 자진하여 지원군을 몰고 왔는데, 그 규모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연왕군 15만
위왕군 20만
한신군 15만
영포군 5만
팽월군 5만
삼진세 6만
장다세 3만
이런데 다가 함양에 있는 승상 소하도 15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군의 규모가 무려 80여 만이나 되었다. 거기에다 한왕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도 20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성고성에 집결한 총병력은 물경 1백만이 넘었다.
게다가 각 나라에서 따라온 대장급 장수만도 무려 8백영에 이르렀다.
한왕은 한신을 대원수로 임명하여 각군을 통일된 명령과 신호로 맹렬하게 훈련을 시킴과 동시에 소하,진평,하후영 등에게는 삼진(三秦)으로부터 군량과 피복은 물론 부상자를 치료할 약품까지 수없이 운반해 오게 하니,
군사들의 사기는 날이 갈수록 왕성해 가고 있었다.
한왕은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 보면서 사기가 왕성함을 느끼고 지극히 만족스럽게 여기면서, 하루는 한신을 불러 상의한다.
"초군을 정벌할 준비가 이미 완료된것 같으니, 이왕이면 항우를 이리로 유인해서 싸우는 것이 어떠하겠소 ? 우리로서는 그 편이 훨씬 유리할 것 같은데,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
한신이 한왕에게 품한다.
"항우를 우리 진영으로 유인하여 싸우면 우리가 그처럼 유리한 전쟁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초군은 군량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가, 원정을 나와서 번번히 패했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선전 포고문을 보낸다 하더라도 항우는 결코 이곳까지 나오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음 .... 들어보니 과연 옳은 말씀이구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작전으로 공략하는 것이 좋겠소 ? "
"주상께서 팽성까지 군사들을 친히 거느리고 가셔서 싸움을 먼저 거셔야 하옵니다. 그러면 항우는 화가 동하여 몸소 달려 나올 것이니, 우리는 그때를 잘 이용하여 초군을 때려부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그거 참 좋은 작전이오. 그러면 장군의 계획대로 합시다."
이리하여 작전 계획은 완전히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일이 지나도 한신은 웬일인지 출동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장량이 적이 의아스러워 한신에게 묻는다.
"초군 공격 준비는 완료된 것 같은데, 장군은 어찌하여 출동 지시를 하지 않으시오 ? "
그러자 한신이 대답한다.
"군사를 발동시키려면 먼저 지리(地利)의 길흉(吉凶)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제가 수일 전부터 많은 첩자를 파견하여 양무(陽武)에서 서주(徐州)에 이르기까지의 지형(地形)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는데, 우리측에 유리한 곳은 오직 구리산(九里山) 남쪽에 있는 해하(垓下)라는 곳이 있을 뿐이옵니다."
"해하가 어떻게 생긴 곳이기에, 오직 그곳만이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말씀이오 ? "
"해하라는 곳은 산이 높아서 산기슭에 군사를 매복시키기에 적당하고, 배후의 산은 험준하여 적에게 후방을 공격 받을 위험이 전혀 없는 곳이옵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터는 오직 그곳 뿐이기에, 다시 한번 정확하게 알아 보려고 사람을 두 번째 보냈는데, 그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다시 검토하여 곧 출동하겠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감탄하였다.
"장군은 과연 불세출의 병가(兵家)이시오. 그러면 나는 나대로 오늘 밤 천문(天文)을 보고 향후 상황을 예측해 보겠소."
그날 밤 장량은 홀로 산성에 올라가 천문을 바라보니 자미성(紫薇星)이 과거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오성(五星)은 전에 없이 밝아 보였다.
장량은 크게 기뻐하면서 한신에게 달려와 말한다.
"내 지금 산상에서 천문을 보니, 한나라의 운수가 그렇게나 왕성할 수가 없이 보였소. 그러니 장군께서는 속히 발군(發軍)하여 기공(奇功)을 세워 만백성들을 도탄에서 속히 구출해 주시오."
한신이 크게 기뻐하며 대답한다.
"천문이 그처럼 대길(大吉)하다면 주상전에 품고하여, 곧 발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신은 곧 한왕에게로 달려갔다.
한편, 항우는 팽성으로 돌아오자 몸에 쌓인 피로와 권태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오랫만에 사랑하는 우미인(虞美人)과 더불어 부부간의 정희(情憘)를 마음껏 풀고 있었다.
황후 우미인은 남편에게 기쁨의 술잔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한다.
"구중 궁궐(九重宮闕)이 아무리 좋기로 혼자 있을 때에는 사막처럼 쑬쓸하기만 하였는데, 폐하께서 돌아오시니 이렇게도 기쁠수가 없사옵니다."
항우도 사랑하는 우미인의 얼굴을 행복스럽게 바라보며 말한다.
"나 역시도 전야(戰野)에서 천군 만마를 질타(叱陀)할 때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당신 생각뿐이었소. 그러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소중한 것은 부부간의 정리(情理)라는 생각이오."
"말씀만 들어도 행복하옵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부부간의 정리를 <일련탁생(一連托生)>이라고 일러 오지 아니하옵니까 ?"
"일련 탁생이라 ...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오. 전쟁을 하도 오래 계속하다 보니 이제는 싸우는데 지쳐 버려서 나도 평범한 지아비로 돌아와, 당신과 더불어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조차 없지 않구려."
이렇게 말하는 항우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상조차 없지 않았다.
남편의 얼굴에서 전에 없던 감상적인 표정이 보이자 우미인은 적이 놀라며 말한다.
"폐하께서는 천하의 영웅답지 않으시게 오늘은 어찌하여 이처럼 나약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폐하의 평생 소원이시오니, 천하 통일만은 기필코 이루어 놓으셔야 하옵니다.
폐하가 아니면 누가 천하를 통일할 수가 있으오리까 ? 폐하께서 천하를 통일하시면 신첩은 쌍수를 들어 축하의 말씀을 올릴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제서야 흔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하하하, 당신이 그처럼 기뻐해 주겠다면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반드시 당신을 천하 통일의 황후를 만들어 주리다."
"그때에는 신첩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의 황후>가 될 것이옵니다."
오랜만에 만난 부부가 내전에서 이와 같은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문득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폐하 ! 긴급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항우는 방문을 힘차게 열어제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 "
문전에는 상서령(尙書令) 항백이 서 있다가, 국궁 배례하며 대답한다.
"지금 비마가 달려와 보고한 바에 의하면, 한왕 유방이 우리와 일전을 하겠다며 백만 대군을 끌고 성고성을 떠나 양무(陽武)로 진군중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적의 최고 사령관은 한신이라고 하옵니다."
"뭐요 ? 한신이란 놈이 최고 사령관이라구 ? "
옛날에는 형편없는 인물로 여겨 왔던 한신이었지만, 몇 차례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 난 지금에는 항우는 <한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 왔다.
항우는 곧 장중으로 달려 나와 긴급 중신 회의를 소집했다.
상서령 항백을 비롯하여 항장,계포,주란,종이매, 등등 대장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아니하고 자리에 앉은채로 굵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자리에 함께한 대장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중에, 종이매가 묻는다.
"폐하께서는 긴급회의 주재는 하지 않으시고,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리기만 하시옵니까 ?"
항우는 그제서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범증 군사께서는 일찍이 나에게 <유방은 무서운 야망가(野望家)이니 일찌감치 죽여 없애지 않았다가는 큰일난다, 그리고 한신을 크게 쓰지 않으려면 죽여 없애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간언을 한 일이 있었소.
그때 나는 그 간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오늘날 이런 변을 당하게 되었으니, 작고하신 범증 아부 생각이 새삼스럽게 간절하구려.
우리 군사는 30만인데 유방은 백만 대군을 몰고 오고, 게다가 한신이란 자는 총사령관이라니, 이를 어찌해야 좋겠소.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범증 군사를 돌아가시게 만든 것이 생각할수록 애통하구려."
그러자 주란이 위로하며 말한다.
"폐하 ....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서육성(舒六城)을 지키고 있는 주은(周殷)도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긴급 소집령을 내리시면 주은도 10만 명을 즉각 몰고 올 것이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은은 본래 영포와 가까운 관계로, 나를 돕기 보다는 유방의 편에 가담하기 쉬운 인물이오. 차라리 배반의 우환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은을 넌즈시 불러다가 미리 처치해 버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오."
항백이 그 말을 듣고,
"주상의 말씀대로 주은은 위험한 인물이니까, 미리 없애 버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항우는 이녕(李寧)을 시켜 주은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주은 장군은 보시오. 장군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이 편지를 보는 대로 급히 와 주기를 바라오.>
편지를 받아 본 주은은 편지를 보낸 항우의 의도를 수상하게 여겨서 고개를 갸웃뚱 하며 생각해 본다.
(항우가 무엇 때문에 별안간 나를 부를까 ? 그는 지금 정세(政勢)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내가 의심스러워서 죽여 없애려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일찌감치 영포 장군을 통해 한왕에게 협력하는 편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
주은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시치미를 떼고 이녕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패왕 폐하께서 나를 부르셨지만, 이곳은 워낙 도둑이 많아 치안이 몹시 어지러운 까닭에 나는 일시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귀공은 돌아가셔서 폐하께 그렇게 전해 주소서."
항우의 사신 이녕은 주은의 거절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면서,
"이제부터 초한전(楚漢戰)이 크게 벌어질 판인데, 장군이 도둑때문에 폐하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
하고 노골적으로 나무랐다.
그러자 주은은 정색을 하고 말한다.
"귀공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 귀공은 초한전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계시는 모양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내 고을의 치안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오."
이녕은 주은이 역심(逆心)을 품고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육을 떠났다.
그리하여 팽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계(會稽)고을에 들렸다. <회계 태수 오주(吳舟)도 군사를 몰고 오게 하라>는 항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우의 서한을 받아 본 오주는 부장(副將) 정형(鄭亨)과 상의하더니 이녕에게 말한다.
"폐하의 명령에 따라, 본인은 열흘 안으로 군사 8만을 데리고 팽성으로 가겠습니다."
이녕이 팽성으로 돌아와 주은과 오주를 찾았던 경위를 소상하게 보고하니, 항우는 주은의 배반에 격노하며 말한다.
"그렇다면 주은이란 놈을 먼저 때려부수고, 유방은 다음번에 쳐부수기로 하자."
그러나 항백이 간한다.
"유방이 몰고 온다는 백만 대군을 상대하기에 앞서 다른 곳에 힘을 빼는 것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유방에 맞서려고 모든 군사를 규합해 보니, 이럭저럭 50만에 달했다.
한편, 한신은 구리산 지형을 속속들이 담은 현지 지도를 소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지도를 앞에 놓고, 광무군 (廣武君) 이좌거(李左車)와 상의한다.
"구리산 계곡에서 싸운다면, 우리는 항우에게 승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항우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올 수 있을지 ? 좋은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는 그 방도를 가르쳐 주소서."
이좌거가 대답한다.
"항우는 워낙 우둔한 사람이므로 그를 속이기는 쉬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의 막하에는 항백,종이매 같은 우수한 모사들이 있어서, 그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오기는 좀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항우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올 방도가 전혀 없으시단 말씀입니까 ? "
이좌거는 고즈녁히 머리를 숙이고, 오랫동안 심사 묵고하다가 머리를 들며 말한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옵니다. 결국은 위계(僞計)를 쓰는 방법밖에 없겠습니다."
"어떤 위계를 쓰면 되겠습니까 ?"
한신은 구체적인 내용을 다급하게 물었다.
이좌거가 한신에게 말한다.
"항우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오려면, 초군도 믿을만 한 우리측의 한 사람을 위장 투항(僞裝投降) 시켜서, 항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위계를 써야 합니다.
항우는 고지식한 성품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이해(利害)로 부추켜 놓기만 하면 항우는 반드시 구리산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매복해 있던 우리군이 공격을 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게 될 것 이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과연 묘계 중의 묘계이십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장 투항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글쎄올시다. 위장 투항이란 워낙 고도한 지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적임자를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한신은 한참동안 깊은 궁리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이좌거에게 말한다.
"매우 미안한 부탁이오나. 선생께서 몸소 그 일을 맡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처럼 막중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선생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사옵니다.
간곡히 부탁드리오니, 선생께서 몸소 나서 주시옵소서."
이좌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제가요 .... ?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면 항우는 그 사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본시 조(趙)나라 의 명망있던 대부이셨으니, 선생이 투항하신다면 항우는 틀림없이 선생을 믿을 것이옵니다.
만약 선생의 수고로 초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면, 선생의 공로는 누구보다도 크실 것이옵니다."
이좌거는 그 말을 듣고 흔쾌히 웃으며 대답한다.
"좋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원수의 각별한 우대를 받아오면서 아무런 보답을 못했었는데, 이번 일로 그동안의 신세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일이라도 항우를 만나러 떠날 테니, 원수께서는 구리산 계곡에 진을 치고 기다려 주시옵소서."
이좌거는 다음날 길을 떠나 팽성에 도착하자, 우선 상서령 항백을 찾아 갔다.
항백은 이좌거를 정중히 맞아 들이며 묻는다.
"선생은 본시 조나라의 대부이셨다가, 조나라가 한신에게 멸망한 뒤에는 그의 장하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오셨습니까 ?"
이좌거가 숙연한 얼굴로 대답한다.
"장군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본시 조나라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왕께서 나의 간언을 듣지 아니하시고 진여(陳餘)의 속임수에 넘어가 한나라와 싸우는 바람에 조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한신 장군의 그늘에서 기식(寄食)을 하고 있었지만, 그곳은 제가 오래 머물러 있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은 한나라를 탈출하여 이리로 오게 된 것이옵니다."
항백은 <탈출>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탈출이라뇨 .... ? 한신의 그늘에서 이리로 도망을 오셨다는 말씀입니까 ?"
이좌거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그렇습니다. 사내 대장부가 남의 그늘에서 밥을 얻어 먹으며 지내자니 세상 만사가 비위에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면서 한숨조차 쉬어 보였다.
그러자 항백이 고개를 기울여 보이며 말했다.
"선생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생 같은 분이라면 한신이 극진히 대우해 드렸을 것인데, 뭐가 못마땅해 비위에 거슬렸다는 말씀입니까 ? "
"물론 한신 장군도 처음에는 저를 극진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삼제왕이 되고 나서부터는 전에 없는 거드름을 피우며 저를 마치 자신의 졸개처럼 여기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초한전이 벌어질 판이기에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초패왕 폐하께 도움이 될 수있는 일을 찾아 이곳으로 도망을 오게 된 것이옵니다."
항백은 오랫동안 심사 묵고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선생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신은 권모 술수가 누구보다도 능한 사람입니다. 선생이 한신의 사주(使嗾)를 받고 위장 투항을 하신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선생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이까 ? "
그 말에 이좌거는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것은 커다란 오해이십니다. 나는 한 사람의 모사(謨士)일 뿐이지, 나 자신이 무기를 듣고 직접 전쟁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더라도 취사 선택(取捨選擇)은 장군 자신께서 하실 일이 아니옵니까 ?"
"음, 그건 그렇지만 ...."
항백이 끝끝내 믿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이좌거는 개탄해 마지 않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나는 초패왕의 위덕을 크게 사모하여 이곳까지 왔건만, 이제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 ! )
항백은 그 말을 듣자 자신의 불찰을 크게 깨달은 듯 이좌거의 손을 힘차게 움켜 잡는다.
"선생같은 분을 의심했던 것은 나의 커다란 잘못이었습니다. 선생같은 분은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하는 법인데, 일시나마 의심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폐하께서는 선생같이 훌륭한 분이 스스로 찾아 오신 것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 집에서 술이나 한잔씩 나누시고, 내일 아침 일찍 입궐하여 폐하를 알현하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이좌거는 이날 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다음날 아침에 항우를 만나기로 하였다.
항우는 이좌거가 투항해 왔다는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며 말한다.
"뭐요 ? 이좌거가 투항을 해왔다구 ? 세상에 이런 경사(慶事)가 있나. 그러잖아도 지금 나의 주변에는 모사다운 모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몹시 아쉽던 판인데, 이좌거가 왔다니 즉시 모셔들이시오."
이좌거가 항백의 안내로 어전에 나오자, 항우는 반갑게 맞아들이며 말한다.
"나는 진작부터 광무군을 무척 사모하고 있었소이다. 그러기에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뜻밖에도 찾아와 주셔서 이런 고마운 일이 없구려."
이좌거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신은 조왕(趙王)의 버림을 받고 한신 장군을 찾아갔으나, 한신 장군도 저를 처음과 달리 중요하게 써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자결할 결심까지도 했었는데, 폐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시니 한없이 감격스럽사옵니다."
"선생같이 훌륭하신 분이 그런 설움을 당하게 되신 것은, 조왕이나 한신이 모두 지인 지감(知仁之鑑)이 없었기 때문이오. 나만은 선생을 잘 알고 있으니, 오늘부터는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시기 바라오."
이리하여 위장 투항한 이좌거는 그날부터 항우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모사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되었다.
한편, 한왕은 건곤 일척의 대결전을 눈앞에 두고 한신에게 물었다.
"우리가 항우와의 싸움에서 초전부터 승리를 하려면 지용(智勇)을 겸비한 장수가 선봉장이 되어야 할 것인데, 누구를 선봉장으로 내세우는 게 좋겠소 ?"
한신이 대답한다.
"신이 조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지용을 겸비한 장수를 찾던 중에 천만 다행으로 두 사람의 효장(驍將)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이번 싸움에 선봉장으로 내세우면 초전부터 우리가 대승을 거둘 수 있겠사옵니다."
"오오, 그런 장수가 있다면 내가 직접 만나 보고 싶구려."
한신은 즉석에서 두 사람의 장수를 어전으로 불러 왔는데 두 사람은 한결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이 당당한 것이 첫눈에 보아도 효장임이 틀림없었다.
한신은 그들을 한왕에게 소개한다.
"이쪽은 원요현 태생으로 이름을 공희(孔熙)라 하옵고, 이쪽은 비현 태생으로 이름은 진하(陳賀)라고 하옵니다. 두 사람 모두 지모(智謨)와 궁마(弓마)에 능한 백전 노장들이옵니다."
한왕은 그들을 만나보고 지극히 만족스러워 하면서 즉석에서,
"내 그대들의 출신 지방의 이름을 따서, 공희 장군을 <요후(蓼侯)>에 봉하고, 진하 장군은 <비후(費侯)>에 봉할지니 부디 선봉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워 주기 바라오."
하고 특별 관작(官爵)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한왕과 한신의 협력으로 백만 대군의 출정 태세는 착착 갖추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