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서적에 대한 역학조사 / 김왕노
- 이념서적을 잃던 불온한 밤을 추억하게 함
뜻하지 않는 병이 나돌거나
뜻하지 않는 사회현상이 나타났을 때 역학조사를 한다.
나도 나름대로 사라진 이념에 대한 역학조사를 하련다.
이념서적을 읽으면 가치관과 삶의 태도가 바뀔 거란 말이
한때 역병처럼 나돌았다.
조금만 불온한 생각만 하면 쉽게 손에 닿던 이념서적
불순분자가 읽는다 해서 방문을 담요로 가리고 읽던 책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려도 황급히 방안의 불을 끄고
개 짖는 소리와 인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일어나 읽던 책
읽을 때마다 문풍지처럼 파르르 떨던 마음
민중연극론, 노동현실과 노동운동,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 소금꽃나무, 대한민국,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우리 역사 이야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김남주 평전, 우리들의 덫,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정복은 계속된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21세기 철학이야기, 북한의 우리식 문화, 통일 우리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위 책은 북한 찬양 도서, 반정부 반미 도서, 반자본주의 도서,
혹 이념 서적이라 불리는 지금도 책방 어느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원한다면 서가 깊은 곳에서 꺼내어 빌려주기도 할 것이다.
나는 먼저 읽어야 한다. 표지가 낡지 않아도 혹 곰팡이 냄새가
나더라도 어떤 사심도 없이, 피가 도는 꽃잎 같은 얼굴로,
때로는 수정 같은 얼굴로 북방 여치 같은 얼굴로, 아무르장지뱀
같은 얼굴로, 어떤 편향도 없이, 오독도 없이 한 권의 서적이
만들어지기 위해 작가가 천권의 책을 읽기도 하므로 단 한 줄의
글을 위해 목숨을 내놓거나 사선을 넘기도 하므로 단 한 줄의
글에 목이 메어 울기도 하므로 책 한 폐이지가 대지 같고
초원 같아 그곳에서 짐승처럼 울거나 방목된 가축처럼 한가로이
거닐 수도 있으므로 몇 가닥 가능성을 열어놓고 나 다시
시대적 역순이나 목차의 역순으로 읽어보든지 불온이라
이름 불리어지게 된 내력을 찾아 검은 까마귀 떼
황망히 날고 효수된 민중의 목이 썩은 새끼줄처럼 처져
내리는 참혹까지 가보아야 한다. 자본의 수레바퀴가 무참히
지나간 곳 흔적으로 남은 검은 피딱지를 가난을 살붙이인 듯
오래 살펴보아야 한다. 아직도 인문사회과학의 숨결을 이어가는
풀무질로 가거나 녹두서적으로 가,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권
뽑아와 독서삼매경으로 또는 정독으로 다독으로 가볍게
스쳐가는 는개 내리는 아침 같더라도 책 페이지마다 정같이
박힌 차디찬 철자를 더듬어야 한다.
전태일 전, 죽을 먹더라도 껍데기를 벗고서는 국가보안법이든
아니든 제도권 교육이든 아니든 바른 가치관을 가지는 잣대
같지 않더라도, 회초리 같더라도 빨갱이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더 깊숙한 곳의 실상을 보는 것 나라를 위할 때는
나라의 행복도 알고 나라의 불행도 알아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 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생각이라 해서 나쁜 생각이
아니다. 나쁠 수도 있고 전혀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생각의 문장이 생명의 피가 도는 문장일 수 있다.
역학조사는 읽는 첫 페이지에서 시작해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또 다른 책의 첫 페이지를 열고 닫는 연결고리로 계속된다.
읽는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힘이 된다는 것
이념 서적을 역학조사해 간다는 것은 강철 같은 이념의 날을
세우고 어떤 비바람에도 굽히지 않는 이념의 만장을 높이
휘날린다는 것 이념에 물들어 장마 때 폐가의 벽지처럼
축축 처져 내린다는 것
난 이념에 취하고 새로운 이념위에 세워진 나라를 꿈꾼다.
한때 이념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 같은 날이 있었다.
이념은 내가 세상에 던져진 한 알 밀알이기를 꿈꾸게 했다.
이 대목쯤에 이르면 어느 정도 이념서적에 대한 역학조사가
마무리된다.
이념 없이 세워진 나라나 깃발은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하여 이념은 때로는 죽음으로 지켜진다.
여기서 짧았지만 이념 서적에 대한 역학조사는 끝.
- 김왕노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