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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연극
1. 영화의 전사로서의 연극
영화가 탄생하기 전에 종합예술의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연극이었다. 그러나 연극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가며 극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른바 사건의 포화상태를 천연시키는 단점이 있다. 즉 연극은 그 대본으로서 쓰는 드라마가 아무리 길어도 5막을 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사건이 아무리 많이 일어나고 줄거리가 길어도 결국 저마다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생략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같은 장소에서 많은 사건들을 처리해야 한다. 이리하여 연극은 인물과 인물의 갈등이나 심리 묘사에 중점을 주는 반면, 영화는 모든 사건이 일어난 모든 장소를 구체적인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가 연극에 비해서 좀 더 시적 예술에 가깝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사실주의적 영화미학은 프랑스 영화이론가인 바쟁에 의해 연극과 영화의 차이점을 규명함으로서 확립되었다. 바쟁은 1920년대 프랑스에 등장했던 영화의 예술화운동으로서 연극영화의 개념을 검토했다. 연극영화는 연극을 그대로 영화로 전환시킨다면, 가장 최상의 연극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영화화되면서 연극 연기의 잘못이 고쳐질 수 있고 관객은 가장 좋은 자리에서 연극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연극영화는 영화적 기술이 예술에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쟁에 의하면 연극영화가 현실적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극영화는 영화적 미학과 연극적 미학의 차이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바쟁이 연극을 영화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연극을 영화화한 탁월한 예들을 분석했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영화 <헨리 5세>를 영화 속의 연극으로서 전개시켰고, 배경을 회화적으로 변형시켰다. 장 꼭토의 <무서운 양친>은 뛰어나게 통찰력이 에민한 모든 것을 볼 줄 아는 힘을 지닌 관객의 관점만을 영화에서 사용했다. 그리고 채플린의 희극영화는 정면촬영이나 관중을 향한 연기를 사용함으로써 영화를 연극무대의 연장으로 만들었다. 이런 예들은 연극성이 무엇이며 영화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반증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연극과 영화의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연극과 영화, 양자 모두가 절충적인 예술이지만, 연극은 발화언어에 특별히 집중하는, 제한적인 매체다. 연극에 있어서 대부분의 의미는 정보로 가득 차있는 대사에서 발견된다. 이런 이유에서 연극은 일반적으로 작가의 예술이라고 간주된다. 작품(텍스트)의 중요성이 연극을 문학의 특별한 분파로 만드는 것이다. 연극에서 우리는 보기 전에 듣는 경향이 있다. 반면, 영화는 대체로 시각예술이자 감독의 예술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영상을 창조하는 것은 감독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므로, 연극을 영화화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영화와 같이 시각성이 우월한 예술에서는 어느 정도의 언어가 필요한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연극과 영화 모두 시청각적인 예술이지만, 그 관례적인 강조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연극에서 의미의 두 가지 주된 원천은 연기와 대화다. 관객은 배우의 행위와 말을 관찰한다. 연극에서의 연기는 대사를 설명하는 것만은 아니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대조는 흔히 아이러니의 원천이 된다.
2. 연극과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1) 시간
연극무대에서 시간은 대체로 영화에서만큼 자유롭지는 못하다. 연극 구성의 기초단위는 장이며, 한 장에서 흐르는 극적인 시간의 총량은 대체적으로 그것의 상연시간의 길이와 비슷하다. 물론 어떤 연극에서는 여러 해가 지나기도 하지만, 보통 그것은 ‘막간에’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관객은 무대 지시나 대사에서 ‘7년 후’ 따위의 사항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영화 구성의 기초단위는 쇼트로서, 시간을 좀 더 교묘하게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데, 이는 쇼트 하나가 평균적으로 10초나 15초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은 비교적 적은 수의 장과 막 사이에 많은 시간을 잘라 내야 하지만, 영화는 수백 개의 쇼트 사이에 시간을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연속적이다. 그것은 실제생활에서처럼 앞으로 흘러간다. 플래시백 (flashback)과 같이 잠시 동안 시간을 뒤바꾸어 놓는 것은 연극에서는 드물지만, 영화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현재형이며,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동시에 제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영화에서의 시간은 종종 이보다 더 복잡하다.
2) 공간
연극에서의 공간 역시 장이라는 기초 단위에 의존한다. 연극에서의 공간은 연속적이다. 연기는 특정한 범위를 가지는 하나의 통일된 시간 내에서 일어나며, 그 특정 범위는 보통 프로시니엄 아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종합예술로서, 무대는 이 주어진 영역 안에 관계가 있는 모든 의미를 가두어 넣는다. 그렇다면 연극은 거의 언제나 닫힌 형식을 취급하는 셈이다. 관객은 연기가 무대 양옆의 빈 곳과 분장실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반면, 영화에서는 프로시니엄 아치는 스크린, 즉 프레임이다. 이는 사물과 인물은 단지 순간적으로 그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일종의 분할장치다. 분석적 예술로서의 영화는 일련의 분할된 공간적 단편들을 취급한다. 비록 쇼트는 열린 형식이나 닫힌 형식을 취할 수 있지만, 닫힌 형식의 영상 역시 더 커다란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일시적인 조각에 불과하다. 쇼트의 프레임 너머에는 또 다른 국면의 연기가 촬영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 사물의 클로즈업은 일반적으로 그 클로즈업의 주변관계를 제공하는 롱 쇼트의 디테일이다. 연극에서는 어떤 정보를 이런 방식으로 보류시키기는 더욱 힘들다.
예를 들어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을 한 번 생각해 보자. 관객들은 입장권을 사서 극장에 들어가 지정된 좌석에 앉는다. 앞을 바라보면 무대는 있지만 뭔가 썰렁하고 하얀 스크린만 있을 뿐이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상영되면 스크린에는 촬영된 필름이 영상으로 투사될 뿐이다. 배우들이 등장은 하지만 그들은 스크린 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갇혀 있을 뿐이다. 물론 스크린 속의 배우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지만, 관객들은 그저 이미지로 스크린에 영상으로 갇혀 있는 배우만을 볼 뿐이다.
그런데 연극은 그렇지 않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무대 위의 조명도 꺼진다. 조금 있다가 무대 위에 불이 들어오면 배우들이 나와서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기를 한다. 무대 위에 등장한 배우들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배우들이다. 영화처럼 스크린 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배우들이 관객들의 눈앞에서 대사를 하고 연기를 해 보인다. 무대 가까이 있는 관객이라면 배우들의 조그만한 숨소리나 이마 위의 땀방울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연극에서 관객은 정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관객과 무대 간의 거리는 일정하다. 물론 배우가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유동적인 공간과 비교할 때 연극에서의 거리변화는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이다. 반면 영화관객은 카메라의 렌즈를 자신의 눈과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는 관객들이 어떠한 방향으로라도, 또한 어떠한 거리라도 ‘움직이게’ 해준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속눈썹의 수를 헤아릴 수 있게 할 것이다. 익스트림 롱 쇼메라의 이동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영화적 기법을 무대에서 구사하려고 해도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이런 공간적 차이가 반드시 한 매체를 다른 매체보다 우월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연극에서의 공간은 3차원적으로, 실제 사람과 사물이 그 공간을 좀유하고 있어 그만큼 더 사실적이다. 연극에서 공간과 부피에 대한 지각은 현실생활에서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살아 있는 배우가 다른 배우들과 그리고 관객들과 미묘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영화에서는 복제가 불가능한 것이다. 영화는 공간과 사물의 2차원적 영상을 관객에서 제공하며, 화면 속의 배우와 관객 사이에는 어떠한 상호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3) 관객과 작품의 관계
연극의 경우, 특유의 공간을 통해서 배우는 관객들과 교감을 갖는다. 연극배우는 서로 다른 관객들과 미묘한 일치감을 만들어야 한다. 반면 영화배우는 여지없이 필름 속에 고정되어 있다. 영화배우는 관객에 따라 적응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화면의 세계와 영화 관객은, 연극에서와 같이 연결되어 연속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적 차이로 인해 연극과 영화에서 관객들의 참여방식에는 차이가 난다. 연극에서의 관객들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하나의 주어진 공간에 모든 시각적 요소들이 주어지므로, 관객은 필수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이리하여 일단 연극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제쳐 둔다면, 연극은 시각적 포화도가 낮은 매체다. 즉 관객 스스로가 시각적 디테일이 부재하는 곳에 적당한 의미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영화에서 옷을 벗는 것은 연극에서만큼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연극에서 벌거벗은 사람들은 실제 사람들이지만, 영화에서는 단지 ‘그림’ 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는 보다가 배우들이 연기를 못 하면 “참 연기 못하네.”하며 투덜거려도 괜찮다. 그리고 영화가 정말 재미없고 짜증나면 극장을 나와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연극은 그렇지 않다. 무대 위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영화처럼 투덜댈 수 없다. 왜냐하면 무대 위의 배우가 그 투덜대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 재미 없어도 꾹 참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왠지 무대 위의 살아있는 배우들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간접적이고 일방적이지만 연극은 직접적이고 쌍방적이다. 즉, 영화는 객석의 관객들 혼자만 스크린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식으로 일방적이지만, 연극은 무대 위의 배우와 객석의 관객들이 서로 교감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영화의 관객들은 수동적이다. 필요한 디테일 모두가 클로즈업과 편집을 통해 병치로 제공되므로 영화는 시각적인 포화도가 높은 매체다. 화면은 정보로 세밀하게 가득 차 있어서 따로 의미를 부가할 것이 거의 없다. 게다가 사실주의 영화감독들은 공간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좀더 연극적인 경향이 있어서, 관객들도 하여금 표현주의 영화나 고도로 편리화된 영화를 볼 때보다 더 적극적인 참여를 강요한다.
영화는 제작 방식이 모두 기계와 과학에 의존하고 있지만 연극은 연극이 발생한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제작되고 있다. 즉, 영화의 발달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하지만 연극은 아직까지도 원시 수공업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지만 연극 무대에서는 사람의 체취와 땀 냄새가 느껴진다. 즉, 영화는 객석의 관객들 혼자만 스크린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식으로 일방적이지만, 연극은 무대 위의 배우와 객석의 관객들이 서로 교감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영화는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만들어져 관객을 기다리고 있지만 연극은 관객들이 보는 ‘지금 이곳’의 현장에서 완성되어지는 예술이다. 영화는 이미 훨씬 이전에 만들어져 관객을 기다리고 있지만 연극은 관객들이 보는 현장에서 완성되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어제 보거나 아니면 오늘 보고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 관객이 조용한 태도로 보거나 아니면 소란을 피우면 보거나 영화의 질적인 수준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극은 그렇지 않다. 어제 볼 때나 오늘 볼 때나 같지 않고, 첫 날 볼 때나 마지막 날 볼 때나 같지 않다. 첫날 볼 때는 무대 위의 배우들의 연기가 좀 서툴고 어수룩해 보였는데 열흘 뒤 마지막 날 볼 때는 배우들의 연기가 한층 성숙해져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똑 같은 작품이라도 중학생들이 마구 떠들며 볼 때나 일반 관객들이 정숙한 가운데 진지하게 관람할 때나 결코 같지 않다.즉, 연극은 관객의 관극 수준이나 날짜에 따라서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
이처럼 연극은 관객이 지켜보는 ‘지금 이곳’의 현장에서 완성되어지는 예술이다. 영화는 이미 본 사람들에 의해 영화의 평가가 내려지면 그 다음 사람들이 봐도 영화의 수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연극은 다르다. 연극은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리기 전에는 결코 그 연극의 예술적 완성도를 평가할 수 없다. 연극이 완전하게 끝나야 그 공연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극은 무대 위의 배우들과 객석의 관객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예술이다.
4) 연기
연기란 무엇인가? 작품의 언어 밑에 숨어 있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끄집어내어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정직하고, 진실 되고, 순수하고 그리고 편안하게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작품(희곡)을 읽으면서 특정 장면의 대사 속에서 어떤 장면이나 등장 인물의 감정 상태를 상상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장면을 연출가와 연기자(배우)가 한 호흡이 되어 여러 사람(관객) 이 보는 장소(무대)에서 가장 정직하고 - 그 인물의 성격분석을 완벽하게 소화하여 보는 사람들이 가공의 인물이 아닌 살아 있는 인물로서 착각하여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 진실 되고, 순수하고 그리하여 연기하는 배우나 보는 사람이나 편안해 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을 연기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연극의 3요소인 희곡, 관객, 배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무대, TV, 영화의 연기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직접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와 기계에 의해 관객과 만나는 TV와 스크린의 연기의 특성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이 유용할 것 이다. 왜냐하면 훌륭한 연기자는 모든 장르의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 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대연기는 모든 연기의 기본이고 기초이다. 따라서 연기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맨 처음 무대연기를 기본으로 연기수업을 받아야 연기자로서의 생명이 길고 제대로 된 연기를 오래도록 지속할 수가 있다. 무대는 한 번 등장하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 감정을 지속 시켜야 하기 때문에 심도 깊고 밀도 있고 지속적인 감정의 선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또한 무대와 관객과의 거리를 인식하여 좀 더 큰 표현(정확하고 계산된 움직임)과 또렷한 발성과 발음으로 대사를 전달하고 모든 대사와 감정상태가 관객에게 전달 될 수 있도록 관객을 향한 시선의 응시(감정을 관객에게 전달)와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연극에서의 연기는 영화적 메타포를 써서 말하자면, 주로 객관적인 롱 쇼트에 제한되어 있다. 햄릿과 레어지트 간의 질투, <유리 동물원>에서 로라가 옷 입는 것을 도와 주는 아맨더 등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상당히 커다란 연기만의 효과적이다. 계속해서 영화적 메타포를 쓰자면, 극단적인 롱 쇼트의 거리는 연극에서는 나름대로 양식화되어야만 한다. 가령 셰익스피어 사극에서의 서사적인 전투가 무대에서 사실적으로 보여진다면 우습게 보일 것이다. 결국 관객과 배우가 극도로 밀착되는 연극의 경우를 제외하면, 연극에서의 클로즈업 연기는 언어화되어야 한다. 즉, 연극에서 인물의 미묘한 행동과 반응은 시각적인 수단보다는 말로써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인 애로점 때문에 아주 넓은 공간이나 극히 좁은 공간을 요하는 연기는 대부분의 연극에서 회피하고 있다. 보통 연극에서의 연기는 폴 쇼트와 롱 쇼트의 범주에 제한되어 있다. 만약 넓은 공간이나 극히 좁은 공간이 요구된다면, 연극에서는 비사실적인 관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익스트림 롱 쇼트 연기에 있어서는 발례와 양식화된 인물군에, 클로즈업 연기에 있어서는 언어 표현의 관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영화는 이런 거리를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연극에서는 안지 <막간>에 일어나는 행위를 영화는 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그 나름대로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카메라의 이동, 표현주의적 음향, 편집은 연극의 관례만큼이나 인위적인 것이다. 양쪽 경우 모두 관객들은 이러한 관례들을 게임의 규칙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몇몇 문제 때문에 연극에서의 두드러진 특성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연극적 플롯은, 가령 안티고네와 크레온, 리어와 그의 딸들, 스탠리 코왈스키와 블랑쉬 드브아의 사이처럼, 주인공과 상대역 사이의 확연한 갈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극적 갈등은 작품 초반의 해설 부분에서 제시되고, 뒤를 잇는 장을 거치는 동안 점진적으로 심화되어, 주인공이나 상대역 중의 하나가 승리를 거두는 클라이맥스에서의 대결을 낳게 된다. 그러나 모든 희곡이 이러한 고전적 형태에 맞아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단지 상당수의 희곡이 극적인 분위기가 결여되어 있는 희곡도 그러하다.
5) 배우
연극의 미학에 있어서는 인간이 중심이다. 말은 사람이 해야 하며, 갈등은 배우에 의해 구체화되어야만 한다. 영화는 인간에 그처럼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영화의 미학은 사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촬영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연극의 영화화는 연극이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것을 영화로 복제하기에 어렵고 또한 불가능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영화를 무대로 옮기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 야외촬영이 들어 있는 영화는 거의 저절로 제외 될 것이다.
이런 사실에 의거하여 연극을 영화화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열어 놓는 것, 즉 실내를 야외로 대치하는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언제나 극단적인 롱 쇼트, 한꺼번에 수평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팬, 그리고 과거 회상 장면을 가능케 하는 편집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연극이 일종의 속박감을 강조할 때 ㅡ 사실 상당수의 연극은 육체적, 혹은 심리적 속박감을 강조하고 있다 ㅡ 이를 훌륭하게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면 원작의 정신을 존중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영화적 기법을 찾을 것이다.
바쟁에 의하면 연극은 환각적이지만, 배우의 현존만은 환각이 아니다. 반면 영화에서는 인물이 실재적, 그러나 배우는 현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적 이미지는 영상이 아니라, 그 흔적으로서 이는 자동적으로 형성되며, 따라서 그것은 유사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 동일하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거울이 현존을 중계하듯이, 영화에서 인물은 생생하게 직접적 증언보다 더 확실하게 현존한다. 이처럼 연극과 영화에서 배우의 현존이 구별되므로, 연극적 배우와 달리 영화 배우는 영화밖에서도 영화 속의 인물과 동일화되어 남는다. 영화배우는 쉽게 그가 출현했던 영화적 이미지를 벗어 던지지 못한다. 이것이 왜 연극스타는 없는데, 영화에서는 스타가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연극의 경우 배우는 관객을 의식하며 그 관객의 시선을 자각하고, 그들의 호흡을 느끼면서 연기한다. 여기서 배우와 관객의 어떤 공모가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배우는 연기하는 자기를 관객의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 배우는 관객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관객과의 어던 공모를 느끼지 못하며, 그는 자신의 연기 중에 자기를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는 인물에 빠져 버린다.
또한 연극은 관객에게 어떤 종류의 긴장을 제공한다. 관객은 배우와 인물이라는 이중성을 본다. 그러므로 관객이 인물에 빠져들려면, 관객 자체의 자기 변형이 발생해야 한다. 그는 그의 의식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배우의 현존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러나 영화 관객은 영화적 이미지의 현장감에 빠져 버린다. 그러기에 그는 거의 수동적으로 영화를 응시하면서 피치못할 전압의 저하 상태에 이른다. 결국 영화에서 관객의 동일화, 감동의 획일화, 관객의 군중화가 일어난다
영화는 주인공을 통해 대리만족하며, 연극은 관객을 직접 자극, 주인공은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된다. 연극은 관객을 자극, 영화는 관객을 가라 앉힌다. 왜냐하면 연극은 적극적 의식을 발생시키지만, 영화는 수동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연극에서 조명과 가면을 넘어서, 현실에서 검열을 벗어나서, 욕망이 해방된다. 빛이 경계선상에 있고, 그 경계 너머에 배우가 우리 대신 행동해 주기를 위촉하면서,성스러운 야수들이 이 불빛의 방책을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연극은 관객과 배우의 현존, 연기를 목적으로 한 현존에 대한 상호 의식 속에 건립되어 있다.
그에 반해서 영화에서 우리는 어두운 방에 들어앉아, 반쯤 열린 덧문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구경거리를 고독하게 응시한다. 우리가 우리 앞에 움직이고 있는 세계, 세계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듯한 동일화가 일어난다. 영화의 관객은 고독한 군중이며, 이런 점에서 소설의 독자와 닯았다. 소설의 독자 역시 자가만족, 고독의 용인, 책임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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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트
주지하다시피 연극은 인물 없이는 불가능하다. 극적 사건들은 모두 인물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영화는 인물 없이도 가능하다. 등장한다하더라도, 영화적 사건들은 모두 세트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극의 중심이 아니다. 인간은 숲, 짐승 보다 어떤 특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연극과 영화에서 근본적으로 세트의 의미가 변화한다. 연극의 무대는 순수한 건조물이며, 자연과 대립된다. 무대는 세계의 다른 부분과 대립되어 자연과는 구별되는 특권적 공간이다. 의상, 가면, 분장, 언어양식, 각광이 이를 보조한다. 여기서 무대는 극이 전개되는 공지이며, 이는 관객의 동의하는 상상력을 통해 무대로 변형된다. 마치 그림이 액자로 인해 존재하듯이 무대는 각광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의 스크린은 무대가 아니다. 이는 사건의 일부밖에는 보여주지 않는 일종의 마스크이며, 따라서 등장인물이 우리의 시계에서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가 그 주위에 있다고 믿는다. 영화의 공간은 세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대신 열려진 공간이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를 대치한다. 따라서 극도의 작은 분량을 투입해도 완전히 자연 속에 침잠시킬 수 있도록 하는 촉매가 영화의 연출에서 주요하다. "연극은 수정으로 만든 샹들리에와 같다면, 영화는 섬광을 내며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알 수 없는 유성과 같다."
또 연극은 정해진 시간에 가야만 볼 수 있다 한 번 지나가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보고 싶을 때 가서 봐도 되고 비디오나 dvd를 통해 볼 수 있으므로 시간의 제약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못 본 부분도 되감아서 볼 수 있고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은 빨리 감아서 볼 수 있으므로 1시간짜리 영화라도 30분 안에 볼 수 도 있고 또 몇 십 년이 지나도 30년 전의 영화를 지금 볼 수 있지만 연극은 50년의 연극이라 해도 지금은 볼 수 없다.
내용과 대본이 같은 연극이라 할지라도 무대 배경과 조명 그리고 배우 등이 차이가 나고 장소가 다를 수 있다. 영화는 한 번 찍으면 계속 볼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연극은 라이브이기 때문에 할 때마다 배우의 연기가 기분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또한 영화는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있어야 볼 수 있다. 연극은 바로 직접 볼 수 있는 관객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엔지라는 게 있기에 안되면 다시 편집해서 찍을 수가 있고 연극은 엔지가 없다 절대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실력 있는 연기자는 연극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결론
결론적으로 연극과 영화 모두 종합예술이다. 그러나 영화에 비해서 연극은 작품의 길이에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영화가 이미지의 예술인데 반해서 연극은 음성 언어에 의한 예술이다. 영화는 세련된 대사나 직접적인 심리 묘사가 불가능하다. 간접적 묘사에 치중하게 되며 흥행성을 가진다. 연극은 행동과 대사 모두 중시된다. 연극이 연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반면 영화는 영상이 서사의 중심이 된다. 영화, 연극 모두 공동 작업 - 감독, 배우, 작가 - 의 결과이며 따라서 사회적 예술이다.
4, 영화화된 대표적인 연극작품
⦿ 신의 아그네스 (Agnes Of God, 1985)
미국, 92분
감독 : 노만 주이슨
출연 : 제인 폰다, 앤 밴크로프트, 멕 틸리
종교적 신념과 성 모럴 등이 얽힌 존 피엘미어(John Pielmeier)의 유명한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제인 폰다가 정열적인 정신병리학자로 열연하며, 심리적인 주제를 베경과 조명으로 교묘하게 담아내고 있다.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존 피엘미어의 희곡을 각색한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제인 폰다, 앤 밴크로포드, 맥 틸리, 세 여배우의 연기대결이 압권이다.
⦿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 1985)
미국, 130분
감독 : 폴커 슐렌도르프
출연 : 더스틴 호프만, 케이트 레이드, 존 말코비치, 스티븐 랭, 찰스 더닝
나이가 들수록 더 훌륭해지는 더스틴 호프만이 윌리의 절망을 더 통렬하게 전해주며 그와 존 말코비치는 에미상을 수상했다. 누구라도 언젠가는 느낄 법한 소시민의 고뇌를 낮은 목소리로 사려 깊게 전달하는 수작 TV영화. 아더 밀러의 동명 희곡을 토대로 한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브로드웨이 극을 영상에 옮겼으며 그와 원작자 아서 밀러가 총감독을 맡았다.
⦿ 에쿠우스 Equus (1977)
영국 : 137분
감독 : 시드니 루멧
출연 : 피터 퍼스, 리처드 버튼, 콜린 블레이클리
국내에서도 무대에 올려져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울 만큼 히트했던 피터 셰퍼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 말의 눈을 잔혹하게 찔러 죽인 소년과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를 통해서 현대 문명의 어두움을 비판한다.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1951)
미국 : 120분
감독 : 엘리아 카잔
출연 : 비비안 리, 말론 브란도, 칼 몰덴, 킴 헌터, 닉 데니스
미국 현대극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거장 테네시 윌리엄스의 원작을 엘리아 카잔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 원작은 퓰리처 상과 뉴욕 극평가상 및 도널드슨 상을 휩쓴 아더 밀러 원작의 작품이다. 연극 무대 초연 당시 연출을 맡았던 엘리아 카잔이 그대로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무명의 말론 브란도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놨으며 영화사의 한 페이질 장식한 명화로 손꼽히고 있다. 이 영화로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비비안 리는 여주인공 블랑쉬를 섬세하게 소화, 연민과 두려움에 고통받는 모습을 절절하게 그려냈다.
⦿ 아마데우스 (Peter Shaffer's Amadeus, 1984)
미국 : 158분
감독 : 밀로스 포만
출연 : F. 머레이 에이브라함, 톰 헐스, 엘리자베스 베리지
19세기 이후부터 떠돌기 시작한 모짜르트의 독살설의 진위를 테마로 브로드웨이를 비롯, 전세계 연극계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킨 피터 세퍼(Peter Shaffer)의 히트 무대극을 영화화한 시대극. 끊임없이 떠도는 모짜르트의 독살설을 근거로 천재성과 평범성의 대결, 그에 따른 신에 대한 증오와 타협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제57회 아카데미 작품, 감독, 남우주연(F. 머레이 에이브라함), 각색, 녹음, 의상상 등 6개 부문 수상, 골든 글로브 작품상 수상.
⦿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 1958)
미국 : 108분
감독 : 리차드 브룩스
출연 : 엘리자베스 테일러, 폴 뉴먼, 벌 아이비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좌절과 탐욕에 젖어 있는 가족간의 갈등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극히 제한적인 공간의 사용을 통해 연극적인 미장센 연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치밀한 동선 유도를 통해 허위와 탐욕으로 가득 찬 영화의 분위기를 안정감 있게 표현해내고 있다. 특히 폴 뉴먼은 인간의 허위의식에 저항하는 주인공의 내면심리를 탁월한 연기력으로 보여주고 있다. (EBS 영화 편성부)
⦿ 클로저 (Closer, 2004)
미국 : 103분
감독 : 마이크 니콜스
출연 : 나탈리 포트만(앨리스), 주드 로(댄), 줄리아 로버츠(안나), 클리브 오웬(래리)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과 감정의 변화를 통해, 남녀간의 애정과 진실성에 관해 접근한 작품으로, 영국 무대를 시작으로 전세계 연극계에서 화제를 모았던 동명의 연극을, <졸업>, 최근에는 에미상 수상작인 HBO의 미니 시리즈 <미국의 천사들(Angels In America)> 등을 연출했던 명감독 마이크 니콜스가 스크린으로 옮긴 블랙 코메디 드라마.
1997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후, 로렌스 올리비에 최우수 신작 연극상과 런던 연극비평가 협회 최우수 신작을 수상했으며, 골든 글로브 상에서 여우조연(나탈리 포트만)과 남우조연상(클라이브 오웬) 수상했다.
⦿ 글렌게리 글렌로즈 Glengarry Glen Ross (1992)
미국 : 120분
감독 : 제임스 폴리
출연 : 잭 레몬, 케빈 스페이시, 알 파치노, 에드 해리스, 조나단 프라이스
퓰리처상을 받은 데이비드 마멧의 무대극을 작가 자신이 각색한 작품. 신랄한 대사, 연기파 배우들의 정력적인 연기가 한정된 시간, 공간 속에서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드라마를 긴장감 있게 엮어냈다. 내용은 네 사람의 탐욕스러운 부동산업자들이 실적을 올리지 않으면 실직한다는 협박성 제의 속에서 미친 듯 날뛰는 사무실의 24시간이다. 샐러리맨의 비애가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 다음 주 강의 예고 >
통청아카데미 通 靑 Academy |
207회 |
주제: |
도덕경 읽기(18) 『도덕경』 32장, 33장 |
발표자: |
이태호 (통청아카데미 원장, 철학박사) | ||||
일시: |
2013. 12. 11.(수) (수) pm 7:00~9:00 |
장소: 대구시립수성도서관 제1 강좌실 |
문의 |
010-3928-2866 | |||||
h.p. |
cafe.daum.net/tongchungdg |
✍ 공지사항
✑ 다음 4주간 통청아카데미 원장인 이태호 교수의 강의가 연속됩니다.
⦾ 2013.12.11.(207회) : 도덕경 읽기(18), 『노자 도덕경』 32장, 33장 ⦾ 2013.12.18.(208회) : 도덕경 읽기(19), 『노자 도덕경』34장, 35장 ⦾ 2014. 2. 5.(209회) : 도덕경 읽기(20), 『노자 도덕경』36장, 37장 ⦾ 2014. 2.12.(210회) : 도덕경 읽기(21), 『노자 도덕경』38장, 39장
✑ 단, 2013년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 휴강이고, 2014년 1월은 동계휴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