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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길을 나섰다.'
<요나 예언서의 시작 1,1ㅡ2,1.11>
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4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5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6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7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8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9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항구함, 충실성, 지속적인 신뢰>
A. J. 크로닌이 지은 감명 깊은 소설 <천국의 열쇠>에 등장하는 프랜치스 치셤의 신부의 성소 여정은
굴곡 많고 험난하며 의외성으로 가득 찬 사제성소의 한 단면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프랜치스 치셤은 사제로 서품되기 전까지
여러 번에 걸쳐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뜻하지 않게 다가온 부모님과의 사별과 그로 인한 뼈저린 고독 앞에서 방황하고 몸부림칩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 친구 노라의 죽음,
신학교에서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
발령받는 본당마다 직면하게 되는 주임사제와의 마찰...
그럴 때마다 그의 곁에는 한 따뜻한 은사님이 계셨습니다.
신학교 시절 학장이었던 러스티 맥 신부님.
다른 사람들은 다들 드러내놓고 ‘이 인간은 안 된다’고 펄펄 뛰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 평생에 걸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학장 신부는 프랜치스 치셤 안에 잠재되어 있는 하느님을 향한 순도 높은 신앙, 순수한 열정, 불의에 맞서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을 눈여겨봅니다.
프랜치스 치셤 입장에서 볼 때,
비록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전달되는 학장신부님의 근심어린 배려와 기도, 걱정 섞인 연민의 눈길이
자신의 사제 성소를 활짝 꽃피어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나중에 확인합니다.
항구함, 충실성, 지속적인 신뢰를 토대로 한 둘 사이의 인간관계,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가 추구해야 할 관계의 전형이자 모범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때 어떤 마음으로 바라봅니까?
혹시라도 상대방을 내가 딛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로 바라보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은 내가 물리쳐야 할 적대자가 아닙니까?
상대방은 내 성취의 도구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런 시각은 빨리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보내셔서 관계 안에 살게 하시는데,
우리는 그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서로 격려해주고, 서로 지지해주고, 서로 보완해주는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수도원 입회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대형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는 속성상 군대와 비슷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있어야 하고, 돌아올 시간에 정확하게 돌아와야 합니다.
요즘 양성 담당자로 살다보니
제가 저질렀던 ‘장기간 무단 이탈’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담당자들에게 있어 얼마나 속상하는 일이었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철없던 시절, 프랜치스 치셤에게 있어 러스키 맥 신부님과도 같던 신부님이 제게도 계셨습니다.
돌아보니 제 힘으로 걸어온 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지속적인 배려와 항구한 인내 속에
한 사람의 성소가 싹트고 열매 맺는다는 것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의 실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며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 본보기는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특징은 ‘항구성’입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끝까지 그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무엇보다도 뒷마무리가 확실합니다.
애프터서비스까지 책임집니다.
적당히 해보다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건 내 영역이 아니다, 이건 내 힘에 부친다며 어느 순간 물러서지 않습니다.
짜증내지도 않습니다.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누가 알아봐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이 지금 내 눈앞에서 괴로워하고 있기에, 고통 받고 있기에, 죽어가고 있기에,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사랑의 실천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련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보라, 여기 사람이 있다.">
사랑을 보고 사랑을 할 때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고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를 발견할 때
‘보라, 여기 사람이 있다’ 환호성을 올리게 됩니다.
깨달음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새롭고 놀랍고 고맙습니다.
편견과 선입견도 치유됩니다.
잘 보고 잘 들을 때 깨달음입니다.
마음의 깊이 따라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천차만별입니다.
하여 잘 보고, 잘 듣기 위해
마음의 침묵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수녀님이 고백성사 중 들려 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수도원에 찾아오는 도중 청량리 전철역에서 220번 버스로 가면 되느냐고 어느 자매에게 물어봤더니
202번이라며 친절하게 버스정류장 까지 안내해 줬다는 이야기며,
또 밤늦게 수도원을 찾느라 헤매는데
어느 승용차를 운전하던 분이 차에 태워 수도원 정문 앞까지 안내 해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심을 느꼈습니다.”
수녀님의 고백에 저 역시 즉시 화답했습니다.
“아, 사람을 만났군요.
바로 그게 하느님 체험, 천사 체험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 천사 체험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에 하느님 체험, 천사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요나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소홀히 넘겨버리기 쉬운 사람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고
거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곤경 중에 있는 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게 사랑이요 사람입니다.
거룩한 종교인이라 하는 레위인과 사제에게 발견하지 못한 사람을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발견합니다.
혐오의 대상 이방의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의 놀라움입니다.
주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를 들려준 후
율법교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말로가 아닌 곤궁 중에 있는 이웃에게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사람이 되라는 구원의 초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봤으면 너도 그처럼 자비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봄(seeing)은 함(acting)으로 직결되어야 비로소 사랑이요 사람입니다.
요나의 이야기에서도 저는 이방의 선원들에게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이 이방의 선원들 안에도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어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요
어느 종교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자
이 인정 많은 선원들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 이 선원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합니다.
이 선원들처럼 측은지심, 하느님의 마음을 살 때 비로소 사람이며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지신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 요나의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현존해 계신 하느님을 깨닫고 사람이 된 선원들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 마음의 눈을, 마음의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을 체험케 하시고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을 치유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 김대한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상담심리학회에서 교리를 가르치던 중에
‘교회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입니다.’라는 말을 하자 술렁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가 인간 중심으로 비치는 이유는
하느님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아이를 더 생각하는 부모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한 일과 사람을 위한 일이 서로 부딪치게 되면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을 위한 일을 우선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 두 가지 사랑 중에 우선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고,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살다 보면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나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독서에서 요나에겐 니네베 사람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의 회개를 위해 가야 했고,
이렇게 해서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이웃 사랑이 완성됩니다.
- 수원교구 분당 성마리아 본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누가 그에게>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누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반문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등장 인물은 강도들, 강도를 당한 사람,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 여관 주인입니다.
만일에 율법학자가 비유 말씀을 듣고 나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한다면...?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이웃'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은 당연히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이웃은 당연히 강도를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강도들의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제나 레위인이나 여관 주인의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의 이웃은 강도를 당한 그 사람이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 라고 하십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를 묻지 말고,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이 '너의 이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중요한 것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최후의 심판 대목에서(마태 25,31-46)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가 심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당한 사람은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 포함됩니다.
왜 '가장 작은이들'(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이 심판의 기준인가?
그것은 그들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인가? 라고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그건 그냥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 바로 나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건 '선언'이기 때문에 '왜?' 라고 물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왼쪽에 있는 자들이 이렇게 항의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시거나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셨습니까?"
이 말은, 주님께서 그런 처지에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기들이 모른 척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자기들은 몰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몰랐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 항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이
'강도를 당한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인 줄을 나는 몰랐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실천에 관해서는 몰랐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몰랐다는 것 자체도 잘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이냐?' 라고 묻지 말고,
'나는 누구의 이웃이냐?'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은 강도들에게도 이웃입니다.
강도들은 이웃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은 사제와 레위인에게도 이웃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도 이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여관 주인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고,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관계입니다.
강도를 당했기 때문에 이웃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원래 이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도를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이 된 것이 아니라
이웃이 강도를 당한 것입니다.
내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나의 이웃이 아니라,
나의 이웃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면서도 유대인을 이웃으로 생각했고,
이웃이 강도를 당했기 때문에 도와준 것입니다.
사제나 레위인의 잘못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니라,
이웃이 강도를 당했는데도 외면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전 인류는) 모두 다 이웃이고 가족입니다.
강도를 당했어도, 안 당했어도, 부유해도, 가난해도,
높은 자리에 있어도, 낮고 보잘것없는 처지에 있어도...
- 전주교구 함열 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피해주지 않는 사람?>
공동체에서 어떤 일을 맡기기 위해 청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귀찮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자신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며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일까요?
1964년 3월,
광기 어린 충동에 사로잡힌 채 뉴욕의 새벽 거리에서 사냥감을 찾던 살인마 모즐리의 눈에 띈 28세 여성 키티 제노비스.
살인마는 그녀의 등에 칼을 꽂고,
비명을 질러대며 반항하는 그녀와 격투를 벌입니다.
길 건너에서 그 처절한 울부짖음을 듣고 창 너머로 바라 본 38명의 목격자 중
누구도 여인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스로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난 제노비스는 집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지만
다시 되돌아 온 살인마는 이웃 주민의 비겁과 방관을 잘 알고 있다는 듯
30분 넘게 제노비스의 온 몸을 칼로 난도질하고 성폭행한 뒤 유린했습니다.
‘제노비스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회에
인간의 ‘무책임한 방관자로서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심리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모델로 삼아
‘책임의 분산 효과’, ‘방관자 증후군’ 등의 신개념과 이론을 쏟아냈습니다.
2003년 8월 영국 리버풀.
쇼핑몰에서 잠시 엄마 손을 놓친 4살 제임스 벌져군이
두 명의 10대 소년에게 끌려 매를 맞아가며 4㎞를 이동하는 동안
이들과 마주쳐 위험을 느낀 38명의 어른들 중 누구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임스는 참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제노비스 사건 38명의 목격자’가
‘리버풀 38인’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2009년 6월 4일 오후 8시,
적지 않은 행인과 영업 중인 가게가 밀집한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서
심부름 다녀오던 10살 초등학생이 승합차에 살짝 부딪치는 교통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아이는 바로 일어나 울며 집 쪽으로 달려갔고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아이를 뒤쫓아 갔습니다.
아이를 잡은 40대 운전자는 아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차로 데려와 태우고는 출발했습니다.
커다란 급제동 소리가 주의를 끌어 여러 명의 행인과 상인들이 이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지만,
누구도 나서 제지하거나 아이 부모에게 연락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는 온몸에 공기총을 맞아 참혹하게 숨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음주 운전으로 면허 정지 상태에서 다시 음주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자 신고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벌인 참극이었습니다.
(표창원, 중앙일보 뉴스 [2011, 4, 24], ‘28세 그녀가 죽어갈 때 38명은 어떻게 외면했나’)
저도 오토바이를 타다가 옆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에 부딪혀 넘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4명의 건장한 불량배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저에게 차의 찌그러진 곳을 고치도록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때 주위에 있던 분들이 모두 달려와 제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처음엔 왜 남의 일에 참견하냐고 소리 지르다가
사람이 많이 몰리자 그냥 차를 다시 타고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지 않았어도 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폭행당하는 사람을 방관하고 그냥 지나치면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웃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배 위에서 잘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때문에 주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나는 겉으로는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기에
하느님께 뿐만이 아니라 이미 이웃에게도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도
사제와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봉사를 해야 하기에 피 흘리며 쓰러져있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지나칩니다.
물론 그들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인지 찾지 말고
내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결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피해를 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도 응당 주위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합니다.
부정의가 벌어지면 당연히 바로잡으려 해야 합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이미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 수원교구 오산 본당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 너를 위한 마음자리>
살아가다 보면 기도를 부탁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기도드려 드리는 분이 마흔 분 정도 됩니다.
그런데도 또 기도드려 달라고 부탁하는 분이 있으면
어떤 때는 고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짜증나기도 합니다.
고마운 이유는 그래도 기도해줄 착한 사람으로 그분이 저를 여겨준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다가도 어떤 때는 짜증이 나기도 하는데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제가 우울해지면서
'어떻게 이 모든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에게 기도를 부탁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나를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여기는 것이고
나로 하여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 말입니다.
도움을 받는 것보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이고,
도움을 주어 그가 잘 되거나 위안이라도 되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런 행복감 때문에 저는 선제적으로, 즉 그가 얘기하기 전에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찾습니다.
그런데 제가 피곤하거나 마음이 편치 않으면 정반대입니다.
고백 성사를 통해 죄 고백을 듣거나
상담을 통해 골치 아픈 얘기를 듣게 되면
그 어두움이 그대로 저에게 전해지면서 마치 제가 쓰레기통이 된 듯한 느낌까지 듭니다.
하여 오늘 복음의 사제나 레위인처럼 그 자리를 얼른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쓰레기통이 있어야 방이 깨끗하지’ 하는 넓은 마음은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픈 얘기가 들어와 있을 그런 작은 여유도 없으면
그런 얘기는 그런 얘기를 들어줄 수 없는 내 작은 마음자리를 들춰내기에 나를 불편케 할 뿐입니다.
쓰레기통이 꽉 차면 아무 쓰레기도 받을 수 없듯이
내 마음이 나로 가득 차 있으면 너를 받아들일 수 없고
너를 위한 조그만 마음 씀도 허용치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너를 위한 작은 마음자리인 것 같습니다.
- 작은 형제회
* <굿뉴스> '매일미사'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티벳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 싱’(1889-1929년)이 직접 겪은 이야기입니다.
선다 싱이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동행자를 만났습니다.
동행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어느 노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다 싱이 동행자에게 노인이 길에서 얼어 죽을지 모르니 함께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행자는 버럭 화를 내며 “우리도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간다는 말이오?” 하고는 먼저 가 버렸습니다.
선다 싱은 그 노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노인을 혼자 등에 업고 눈보라 속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힘겨웠지만 노인은 선다 싱의 체온으로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고 마을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는 한 사내가 꽁꽁 언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살겠다고 먼저 떠난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가던 사제도 레위인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다인에게 멸시당하던 사마리아인만이
쓰러진 사람을 낫게 해 주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진정 누가 이웃이냐고 물으십니다.
선다 싱은 한 노인의 이웃이 되어 노인의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되기를 외면한 그 사내는 결국 목숨도 영혼도 다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한 이웃은 만나서 그저 수다나 떠는 대상이 아닙니다.
내 필요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그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전달되는 사람이 바로 내 이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내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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