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 한국 국제학술대회’를 다녀와서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 출근길의 오토바이 행렬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원과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가 공동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8월 10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주재 사회과학원 철학원에서 개최되었다.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원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베트남 유교와 한국 유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이라는 주제로 3박 4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우리 종단 측에서도 교무부장과 연구위원 3명, 대진대 교수 2명이 참석하였다.
9일 밤에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여 숙소에서 일박을 하고 이른 아침에 본 하노이 시내의 거리는 실로 장관이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강물이 흐르는 듯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월남파병, 보트피플로 연상되는 나라이다. 1989년까지 수십 년간 전쟁의 화염 속에 있던 나라가 20년 만에 이 정도의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민족의 외세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성과 근면하고 성실한 국민성에 그 원동력이 있다는 것을 현지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스스로 근면, 성실, 인내, 친절, 용감성 등의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동안의 끊임없는 외침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국민’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고자 하며, 무엇보다 외세에 굴복하지 않은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데, 실제로 이 말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정복되어 1,000년간 지배를 받고 근대에는 프랑스로부터 100년간 식민지배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전개해 왔다. 프랑스를 물리친 디엔비엔푸 전투는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지 군대가 제국주의 본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항복을 받아 낸 전쟁으로서 세계 10대 결전 중 하나로 전사(戰史)에 기록되었다.
그 후 3차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모두 승리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의 자존을 지켰으며, 오늘날에는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 연평균 7%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베트남 사회과학원 소속 교수들과 연구원들, 통역을 맡아준 하노이대 한국어학과 학생들, 3~4일의 짧은 사귐이었지만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꾸밈이 없고 순수하며 다정다감하였으며, 오랜 벗을 다시 만난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편하고 반가운 만남이었다. ‘짧은 만남, 긴 여운 …’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인 듯하다.
첫째 날 개막식에는 베트남 사회과학원 원장, 아시아 지역 연구소장, 이인혁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 소장, 임홍재 주 베트남 한국 대사 등이 참석하여 축사 및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날 발표에서 베트남 사회과학원의 원로학자인 부 키에우 교수는 한국과 베트남 유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유사점은 두 나라 모두 중국 본토로부터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교를 전해 받고 시대의 추이에 따라 중국 유교의 영향 아래 발전해왔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한국유교가 전통적인 유교관에 충실하고 철저하다면 상대적으로 베트남 유교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베트남 민족의 역사성과 국민성에 의하여 유교적 전통이 폭넓게 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호찌민 사상과 유교의 상관성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호찌민은 자신의 제1 스승으로 공자를 삼고 제2 스승으로 예수를 삼고 제3 스승으로 칼 마르크스를 삼아 동서양의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와 현대 유물변증법의 철학사상을 반영하여 자신의 철학사상을 정립하였다고 하였다. 중국에서 공자의 사상을 접한 것과 호찌민의 경우가 다른 것은 중국정부는 문화혁명 당시에 공자를 비판하였지만 호찌민은 공자를 한번도 비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고 베트남 국민의 정서와 사회주의의 사상적인 요구에 맞게 전향적으로 수용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공자는 충(忠)을 이야기할 때 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고 효(孝)는 재가(在家)에서 부모에게 하는 것으로 가르쳤지만 호찌민은 충을 국민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효도 국민에게 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공무원은 고위직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충복(忠僕)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 같은 발언은 호찌민의 애국적인 삶과 정신을 베트남 국가 이념의 모토로 삼고 있는 베트남이 유불선의 사상이나 신종교문화를 무조건 비판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국민적 정서와 사회발전의 요구에 맞게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베트남 국민의 종교적 분포 또한 불교가 70%이고 로마가톨릭교가 10%를 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베트남은 우리의 대순사상을 전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좋은 국민적 정서와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겠다.
충남대 황의동 교수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유교’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유교는 인간을 가장 중요한 목적적 가치로 삼는다고 하면서 “유교의 목적은 신도 자연도 아니다. 인간을 위한 자연, 인간을 위한 신이어야 한다. 또 종교도 과학도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오전의 발표가 끝나고 오후 1부 발표에서 대진대 고남식 교수는 대순사상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 신종교에서 유교적 가치의 수용”에 대하여 발표하면서 대순사상에 나타난 유교적 가치에 주목하여 유교사상과 대순사상이 어떻게 교감하고 있는지를 『전경』에 인용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의 내용들을 소개하였다.
오후 2부 발표에서 대진대 이경원 교수는 “유교적 천관념(天觀念)의 역사적 전개와 조선후기 인격천관(人格天觀)의 특징”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그는 중국 유교의 사상사에서 천(天)에 대한 관념은 다양한 형태로 이해되어 왔다고 하면서 은대(殷代)의 천관념이 외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인격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제(帝)의 의미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가 송대(宋代)의 성리학에 이르러서는 천관념을 신앙적 관점에서보다는 이(理)라는 철학적 견지에서 이해하였으며, 청대(淸代)에 들어와서는 천(天)을 기(氣)로 보아 근대과학의 성과를 반영하여 물질적인 성격이 강조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조선의 유학사에서 이해된 천관념은 학파적인 특색에 따라 형이상학적인 근거로서의 이(理)로 이해하는 철학적인 성향과 천의 주재성과 인격성을 강조하는 종교적인 관념으로 나누어진다고 보았다.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사상적 경향성은 천을 인격적으로 이해하고 상제(上帝)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천의 인격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유교의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는 본질적인 요소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둘째 날 오전에 사회과학원 소속 교수들과 충남대 교수들의 발표와 토론에 이어 팜반득 철학원장의 사회로 폐막식을 거행하여 1박 2일의 학술발표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오후에는 한국 대표단의 하노이 역사유적탐방으로 공자의 사당으로 알려진 하노이문묘(Temple Of Literature)를 방문하였다.
하노이문묘는 1070년 리탄통(Ly Thanh Tong) 황제가 공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며, 꾸억뜨쟘(Quoc To Giam : 國子監)이라고 발음되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묘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는 하마(下馬)비가 세워져 있는데 바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이다. 규문각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드넓은 연못이 보이고 좌우에는 모두 다른 모습의 거북머리 대좌를 한 82개의 대형 진사제명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1484년부터 1778년까지 116회에 걸쳐 시행한 관리등용 시험의 합격자 명단이 각각 새겨져 있다. 거북 머리를 쓰다듬으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쓰다듬었는지 거북 머리가 반질반질 윤이 난다. 공자 사당에는 중앙에 공자, 양 옆으로는 증자, 맹자, 안자, 자사를 봉안하고 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이런 유교적인 전통의 문묘를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베트남의 이미지와 현지에서 직접 보고 겪은 베트남의 모습과는 실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베트남 사회과학원과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교수들은 오후에 회합을 갖고 내년 11월에 ‘베트남 철학사’와 ‘한국 철학사’를 정리하여 한국에서 학술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며, 이때 베트남 사회과학원 소속 교수들의 여주본부도장 방문을 기획할 예정이다.
셋째 날 베트남 철학원 소속 관계자들과 한국 대표단은 베트남 북부에 있는 베트남 제1의 경승지, 하롱베이를 탐방하였다.
하롱(Halong, 下龍)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용(龍)이 바다로 내려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무리의 용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내뱉은 보석들이 섬이 되었다고 한다. ‘베이(Bay)’는 ‘만(灣)’이라는 뜻이다. 이 만을 차지하고 있는 3,000개 이상의 섬들이 보여주는 장관은 장엄한데, 1994년에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되었다.
하롱베이에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섬들이라 종유동(석회암 동굴)이 많이 있는데,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은 ‘하늘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띠엔 꿍(Thien Cung : 天宮) 동굴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종유석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의 장관이 펼쳐진다.
동굴의 길이는 130m 정도 된다고 하며 동굴 안은 건조하고 후덥지근하였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 그런 것처럼 여러 가지 형상의 종유석마다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동굴 안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분수대와 같이 물줄기가 위로 솟구치는 곳이 있었는데,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분수라고 하여 인상이 깊었다.
넷째 날 8월 13일, 한국대표단 일행은 도썬(Do Son)의 역사 문화유적지로 호찌민이 작전 참모들과 전략회의를 자주 가졌다는 식당에서 오찬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하노이공항을 거쳐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베트남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눌 수 있는데 우기 때에는 강물이 범람하여 농민생활에 커다란 위협이 되며, 건기는 11~4월, 우기는 5~10월까지이다. 수돗물에는 석회질이 섞여서 음용할 수 없고 물을 따로 사먹어야 한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살기 좋고 물이 맑아 산천 어디를 가도 약수를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지 새삼 가슴깊이 느꼈다.
더불어 이런 자연환경과 큰 나라의 역사적 압박 속에서도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불굴의 의지로 쟁투하고 노력해 온 베트남 국민의 강인한 민족성도 함께 느꼈다. 그리고 한국의 월남파병에 대하여 유감을 전한 우리 측 한 일행의 말에 “우리는 과거의 원한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밝은 미래의 은혜로운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하는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원 부원장의 말에서 우리는 베트남 국민의 미래지향적인 가치관과 희망을 보았다.
이번 베트남 학술대회에 참가한 충남대 교수의 대부분이 여주본부도장 국제세미나실에서 열린, 대진학술원과 교무부가 주관하는 월례학술회의에 참석하여 대순사상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했던 분들이다. 이렇게 대순사상이 국내의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ㆍ토론될 뿐 아니라 멀리 이국 땅, 베트남에서 그것도 베트남 국민의 정신적 메카인 사회과학원에서 발표ㆍ토론된다는 사실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멀어져 가는 하노이 시내의 불빛을 바라보며 대순의 빛이 온 누리에 펼쳐져 화평한 세상이 이룩되기를 기원해 본다.
▲ 하롱베이 해상 위의 집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