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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 19:28-37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 19:28-37 / [숨을 거두시다;마27:45-56,막15:33-41,눅23:44-49]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을 아시자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시려고 `목이 마르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29) ㄴ) 사람들이 항아리에 담긴 신포도주를 히솝 가지에 꿴 해면에 적셔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ㄴ. 시69:21) 30) 예수께서는 그것으로 목을 축인 뒤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셨다. 31)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죄수들을 그 다음날까지 십자가에 달아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 다음날이 안식일인데다 더욱이 유월절의 안식일은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그 죄수들이 죽어야 시체를 내릴 수 있으니 빨리 죽도록 다리를 꺾으라는 명령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다. 33) 그러나 예수께 와서는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34)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35) 이 모든 것은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다. 그래서 이를 명확히 증거하여 여러분도 믿음을 가지도록 하려고 기록하는 것이다. 36-37) 이 일이 일어남으로써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ㄱ) `뼈마디 하나라도 상치 않도록 그이를 주께서 보살피신다'라는 말씀과 ㄴ)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ㄱ. 출12:46,민9:12,시34:20. ㄴ. 슥12:10)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모든 순간들이 말씀을 성취하는 일들로 채워집니다. "다 이루었다" 선포하시며 온전히 숨을 거두신 예수의 죽음은 나의 죄를 씻기 위한 속전(贖錢)의 죽음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28-30) 요한은 죽음 앞에 서신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다”라고 기록합니다(28). 이는 빌라도의 정치적인 선택이나 유대인들의 무지한 함성 가운데 된 일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숨지시기 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며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신 예수의 죽음이 이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특히 “다 이루었다”의 헬라어 '테텔레스타이'는 완불됨, 모든 값을 치룸 또는 명령을 다 수행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30). 이는 분명히 예수께서 자신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의 값을 온전히 치루기 위한 죽음이며 하나님의 구원 명령을 다 수행하기 위한 죽음임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동사는 완료시제로 사용되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셨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31-37) 출애굽기 12장 46절은 유월절 양에 대하여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규정하여 유월절 양 됨의 조건이 뼈가 꺾이지 않아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9장 12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경 숨지십니다(마 27:46-50). 십자가형은 고통과 수치의 상징으로 옷이 발가벗겨지며 오랜 고통 가운데 숨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수일에 걸쳐 그 고통을 느끼다가 죽게 됩니다. 이것을 보는 이들로 두려움과 경각심을 주기 위한 로마의 잔인한 사형집행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셨다는 것은 달리시기 전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하셨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죽음으로 인해 예수의 뼈는 꺾이지 않았고, 이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말씀의 성취입니다. 어느 것 하나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이 없으며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확실한 증거들이 됩니다.
적용: 나의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충분합니까? 아니면 또 다른 공로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예수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는 삶으로 일괄되었음을 보며 오늘 내가 성취해 가야 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만약 당신이 어제도 오늘도 기도를 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극소수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복음을 발견한 복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그 기쁨은 그 어떤 기쁨에 비교할 수 없는 참된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 설 교 >
다 이루었다
김태환 목사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요한일서 4:1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또 바울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편지 글로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toward us, in that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로마서 5:8)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형이상학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허울 좋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새 사람이 된 제자 요한은 “우리는 말로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그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Let us show the love by our actions. 요한일서 3:18)”라고 그 시대의 크리스천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따라서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서기 33년 어느 날, 골고다 언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요. 이 명패가 아람어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 이렇게 3개국어로 씌어 있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누가 가질지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고개를 저으면서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운다는 사람 아닌가! 에라, 이 사람아! 네 자신이나 구원하여라.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마태복음 27:39-40)!” 하고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십자가 형은 극도의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양 손에 못을 박고, 양다리를 포개서 못을 박았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은 파열되고, 피를 흘려서 목은 마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그렇게 고통 중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6)”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뜻을 가진 아람어 (Aramaic)로 말씀하신 것인데, 사람들은 첫 소리만 희미하게 듣고 선지자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말씀을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가상칠언 (The Seven Words on the Cross)”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는 이 중 세 마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다 받아 들이셨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참고, 견디고, 다 받아 들이시면서 “내가 목마르다 (I am thirsty)!”고 하셨습니다. 군인들이 해면을 신 포도주에 흠뻑 적셔서, 우슬초 막대기에 매달아 예수님의 입에 대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 때 당시에 흔히 있는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죄수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할까요? 신 포도주를 먹으면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수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말씀에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When Jesus had tasted it)”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군인들은 예수님께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when he had tasted it, he refused to drink it. 마태복음 27:34)”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약간 다른 말씀을 보면서 마태복음의 말씀이 그 때 정황을 더 세밀하게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쓴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김지하를 저항 시인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 70년대에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했던 시인입니다. 그가 조국의 민주화를 기다리면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썼습니다. 잠깐 들어 보시겠습니까?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중략)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내가 목이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왜 김지하의 시가 생각이 나는지 정확한 이유는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한 시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면서,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타는 목마름을 참고, 견디고, 받아 들이시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덜고 싶은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 고통을 모두 받으셨습니다. 신 포도주를 마시면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일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신포도주를 입에 대셨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가 요한복음 19:28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Jesus knew that his mission was now finished, and to fulfill Scripture)”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바로 시편 22:15과 69:21, 이 두 시편 말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시편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들어 있는 시편인데요. 거기에 “내 힘이 다 말라 버려 깨어진 질그릇 조각같이 되었으며, 내 혓바닥은 입천장에 붙어 버렸습니다”라는 말씀과 “그들은 내 음식에 쓴 것을 넣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에 식초를 주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죄수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군인들은 솜뭉치에 신 포도주를 찍어서 죄수들의 입에 대 줬습니다. 죄수들은 그 솜뭉치에 묻은 신 포도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 먹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죄수들을 마지막으로 배려해 주는 것이 군인들의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입에 대기는 하셨지만 마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군인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사람에 대한 별다른 관심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아주 특별한 분이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십자가를 진 것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때문이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고개를 떨구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죽은 사람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돌아가시기 까지 별로 해 놓은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이루어 놓은 업적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절대로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은 아닙니다. 업적이라고 내 놓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그 흔한 설교집 한 권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출판된 논문이 한 편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 놓은 뚜렷한 업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기적을 행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허무하게 죽은 이 사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이런 글을 쓴 것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면서 운명하셨다는 성경 말씀은 어린 아이가 베개에 머리를 기댄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예수의 투쟁은 끝났다. 그리고 그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만족하게 생을 마친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완성하고, 만족과 평안 가운데 몸을 기대는 사람의 안식을 예수는 맛보신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업적으로 평가하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성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완전하게 이루신 분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은 이런 detail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요한은 그 시간에 십자가 밑에 있었던 유일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기록한 이 detail한 말씀은 그가 목격한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서기 85-90년 경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그리스 문화와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특히 그 중에도 영지주의 (Gnosticism)라는 사상이 교회까지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협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일종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영은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가 아래에서 목격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아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몸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와 똑 같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증언했습니다.
이런 딱딱하고 재미없는 신학적인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494장 “만세 반석 열리니” 다 아시지요?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이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 이 찬송가는 A. M. Toplady (1740-1778)가 시를 쓰고 작곡했습니다. 그는 군인들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더니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 허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만세 반석이 열리는 신비한 영감을 얻었고, “내게로 들어 오라!”고 죄인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여러분과 나눌 말씀이 있습니다. 3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성경에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볼 것이다 (They will look on the one they pierced)’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스가랴 12:10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수기 21:8-9에 나오는 불 뱀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 뱀을 보냈습니다. 여기 저기서 불 뱀에게 물려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이 장면을 본 모세가 하나님께 이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구리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들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복음입니다. 아주 쉽고, 간단하고,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했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대에 매 단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 3:14-15)
다시 오늘 읽은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볼 것이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누구든지, 심지어 예수님을 창으로 찌른 사람들이라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나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 보십시오. 아직까지 한번도 그분을 바라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으면 지금 그 분을 바라 보십시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라고 했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분을 믿고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 성서아카데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간적으로서 감당해야 할 마지막 진통을 신음 소리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요한은 시편 69:21과 연결지어서 이 신음을 해석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죽음에서 목마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의 70%가 물로 구성된 육체에서 피와 진액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십자가 처형은 물을 찾게 만듭니다. 보통 우리가 운동을 하고 난 후에 느끼는 갈증도 참기 힘든데, 실제로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경우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반국가사범에게 내리는 십자가 형에 사용된 십자가는 원래 십자(十字)가 아니라 T자(字)로 되어 있습니다. 두 팔을 가로 막대에 벌려서 간단히 묶고 손바닥에 못질을 합니다. 엉덩이는 약간 불룩하게 나온 밭침대에 올려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몸무게가 손바닥에 적당하게 실리게 됨으로써 시나브로 찢기면서 피가 흘러나옵니다. 사형수는 단숨에 죽는 게 아니라 며칠 씩 그 십자가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오락가락하며 죽음의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6시간만에 운명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건강이 나빴든지 아니면 그에게 연민을 느낀 로마 병정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빨리 죽게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십자가 상에서 그렇게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심한 갈증을 느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갈증이 어디 그런 육체적인 것만이었겠습니까?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람은 외로우며, 그 마음의 외로움은 육체적인 갈증까지 불러옵니다. 마음과 몸은 사실 하나 처럼 움직이니까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마음에 갈증을 느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도 역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일반 대중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정치인 빌라도는 접어두고, 자기 제자들로부터도 역시 버림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은 그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젊은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참척의 슬픔에 빠진 마리아나 인간적으로 깊은 연대감을 갖고 있던 제자 요한 정도가 그 십자가 현장에 있을 뿐입니다. 비록 그 곁에 모여 섰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 처형 순간에만 갈증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이미 공생애 중에도 그랬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자기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푸념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구름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모인 적도 있지만 그들은 제각각의 관심 때문에 온 것이지 더불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설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혼자였고, 공생애 중에서도 역시 혼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이며 록가수였다고 알려진 아무개 씨의 노래 제목이 "물 좀 주소"였다고 합니다. 60년대라는 국제 사회와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런 목마름을 불러일으켰는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목말라할 말못할사연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독특한 가사와 전혀 새로운 노래 형식으로 인해서 기존의 가수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지하 씨도 젊었을 때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책을 쓴 적이 있지요. 그런 가수나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조금만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 차원에 목마름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우리 인간은 외롭습니다. 외롭다는 말은 옆에 누가 없어서 허전하다는 뜻인데, 단순히 누가 없다기 보다는 자기와 생각을 같이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사람을 찾습니다.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도 여기 저기 기웃거립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계>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외로움을 달래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문제는 아무리 우리가 여기 저기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들과 이런 저런 이벤트를 꾸며보아도 역시 이 궁극적인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림자처럼 인간을 따라다니는 외로움은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곧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연결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무한한 고독과 불안이 우리 인간의 실존인 셈입니다. 이런 문제는 이미 키에르케고올이 기독교의 죄론과 연결해서 자세하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간혹 서로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들이 상대방으로 인해서 무한히 행복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는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면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은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비아냥거리듯이 말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사랑과 정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그 사람도 십자가로 죽어야 하면, 더욱이 죽음까지 함께 통과해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동반자살한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데서 외로움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참되게 하나가 되어주는 대상에게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곧 하나님입니다. 조금 바꿔 말하면 영적인 실체(spritual reality)입니다. 이 스피리쳘 리얼리티는 곧 창조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고, 부활의 영입니다. 종말에 이 세상을 완성시키는 영입니다. 예술가들이나 철학자들도 간혹 이런 경험을 합니다. 예술적 영감을 통해서 인간적 외로움을 극복하기도 하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자연과 도가 바로 이런 영적 실체일 수도 있도,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가 바로 그것일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이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경험하는 생명의 깊이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영입니다. 이런 영과의 일치가 곧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영에 충만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여전히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까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런 인간적 한계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건은 훨씬 심원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고통과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길은 진정한 구원의 길로 자리매김 된다고 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산신령처럼, 또는 마술사처럼 신출귀몰하게 살았거나 인간의 희노애락을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면 십자가 사건은 무의미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정해진 십자가의 길을 순순히 갔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선택 문제입니다. 이미 그렇게 주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서 선택적으로 가야만 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목마름"의 절박함을 경험한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입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목마름"에 기진한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요한은 이어서 생수의 강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원천인 예수님 스스로 목말라할 줄 알았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목말랐던 예수님은 현재 영을 통해서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이성직 목사
성도 여러 분은 매 주일 예배를 위해 이 성전에 나오실 때마다 강단에 높이 걸린 십자가를 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온갖 고통을 당하시면서 피를 다 흘리시고 돌아가신 형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달려 있는 동안 그의 모든 뼈마디는 탈골 되는 고통을 입었습니다. 태양도 어두움에 가리워지고 땅도 심하게 흔들립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버린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서 남기신 최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흐르게 하시고 목마른 백성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인 우리에게 생수를 마시게 하시려고 예수님 자신은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주님은 우리로 마시우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처럼 우리의 영혼과 몸을 다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마지막 순간에 목을 축이기 위한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시었습니다. 여인은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성도 여러 분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 갈증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 앞에 나올 때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주님의 타 들어 가는 목과 혀를 우리의 눈물로 적셔 드려야 합니다. 이 고난 주간만이라도 내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는 눈물로,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뜨거운 눈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는 주님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은 주님께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기 전에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맛을 보시고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실 때에 누가복음 23장에는 군인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야 그러면 네가 너를 구원해라"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는데 주님은 마지막에 가장 천한 것을 입에 대셨습니다. 막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쓴 물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처음 하신 일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었습니다. 그 포도주를 맛본 사람은 이제서야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마시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받고서 하나님께 악한 것, 저주 받은 것, 흉한 것으로 되돌려 드립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지막 순간에 인간에게 가장 나쁘고 천한 포도주를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주시고 자신은 마실 수 조차 없는 포도주를 입에 대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죄가 없으신 분이 형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둠에 버려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승리의 잔을 들게 하시고 주님 자신은 죽음의 잔에 입을 대시게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의 피조물들에 의해서 저주와 조롱을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적 고난이 비로소 끝났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살게 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신 일을 누가 시작했습니까? 골고다 언덕에 왜 십자가가 서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셔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하늘에 닿도록 쌓아 놓았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죽음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우리가 죄로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것을 생명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지옥의 고통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누가 이와 같이 "다 이루었다"말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녀들이 죄의 사슬이 끊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죄와 죽음의 사슬이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이 신앙으로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께 계속해서 쓸개 탄 포도주와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행악 자들 만이 하는 일입니다. 죄를 즐기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 교만 한 자들, 어둠 가운데 은밀히 있는 자들은 주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라고 종용합니다. 우리가 신자들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들은 신포도주를 주님의 입에 갖다 대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됩니다.
주님이 심판하실 때 주님을 구세주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토록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목이 마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우리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주님 앞에 겸손하며 순종하는 성도들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끊임없이 마실 것입니다. 또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은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처럼 항상 최상의 잔을 들고 승리의 찬송을 부르며 주님의 새로운 은혜가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강하고 담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이름이 아니라 오직 내 죄 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겸손하고 그 앞에 내 죄를 가지고 나아갈 때만이 내 목이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나라와 민족의 죄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눠지고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 죄의 짐은 세상 사람들이 쌓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길을 밝히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겸손한 사람들만이 생명의 잔을 마시며 승리의 잔을 높이 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녀들에게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 분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겸손함으로 여러 분의 잔을 높이 드십시오. 주님께서 다 이루신 그 신비한 구원의 능력과 은혜들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요 18:28-30 / 최응회 목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들이 순서를 따라서 한곳에 다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순서를 생각하며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 중에 제일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예수님은 이렇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다 이루신 분입니까?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처절한 모습으로 거기 나무 위에 달리셨으면서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나약한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버림받은 모습으로, 거기 그렇게 나무에 달려 죽으시면서 무엇을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인류 구원을 위한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셨습니다. 구약을 통하여 수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말씀들, 모든 구약의 제사와 예배를 통하여 그림자처럼 보여주셨던 죄사함의 은혜들, 끊임없이 말씀으로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의 약속들, 그 모든 것의 완성, 그 모든 것의 성취, 그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만물의 창조도 주님이 이루셨습니다. 인류를 위하여 당신이 몸소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서 그 구원을 다 이루시었습니다. 죄의 사슬에 매여 영원히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은 패배자의 외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의 외침이 아닙니다. 승리자의 외침이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한 자의 외침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로마서3:23-24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2:1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2:8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 33명의 칠레 광부들을 구조 하고 나서 구조대원들이 갱 속에서 펼쳐든 플래카드에 “Mision Cumplida”(사명완수)라고 써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사명완수, 주어진 일을 끝까지 잘 감당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622m 지하에 갇혀서 도무지 앞날을 알 수 없을 때, 그 얼마나 절망이었겠습니까! 17일 동안 죽을지 살지 알수 없는 시간을 이틀에 참치 두 스푼, 과자 반개, 우유 반 컵씩을 나누어 먹으며 견뎠다고 합니다. 드디어 바늘구멍 같은 13cm의 탐사봉이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그후부터는 이 13cm의 통로가 세상과 연결하는 희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69일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작업반장 ‘루이스 우스루아’(54)가 잘 했기 때문이라고들 얘기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그곳에서 버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자기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지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 그 소망, 그것 때문에 그 극한 상황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그런 극한 상황을 그 누구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믿음 좋은 ‘엔리케’라는 광부를 중심으로 기도하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날의 승리는 ①양보와 희생 ②완벽한 구출 ③국민적 인내 ④지구촌 관심에서 온 결과이지만 무엇보다 ⑤신앙심과 희망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승리가 아니라 끝까지 수고하며 사명을 감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의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구조대원들이 “Mision Cumplida”(사명완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 이루었다”는 말은 맡겨진 사명을 다 마친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광부구조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인류구원의 사명을 다 마치신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거짓을 이기고 진리로 다 이루셨습니다. 구원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그 ‘다 이루신’ 구원의 역사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되었고, 영원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도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다 이루었다” τελεω(텔레오) "It is finished" 주님의 이 외치심 속에서 저 개인으로서는 나의 삶의 숙제를 받는 느낌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듯이 나도 다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할 텐데....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듯이 나도 나의 마지막 말이 그렇게 기쁘게 ‘다 이루었다’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다 이루는 삶을 사시고 있습니까?
다 이루는 삶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사명을 가지고 있어야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믿음 안에 세워 가지고 있어야 다 이루는 삶을 살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십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이루고자 하십니까? 어떻게 자녀를 믿음 가운데 양육하고자 하십니까? 그런 믿음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자신의 그리스도인 상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투사할 때, 더 아름다운 신앙으로 성숙되어 나갈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믿음의 비젼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다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루어가고 있는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표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됐을 때, ‘주님, 맡겨주신 일 저도 다 이루었습니다.’' 저에게 주신 다섯 달란트로 저도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우리는 다 이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다 이루는 삶이란 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은 완성된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최선의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다섯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그 주인의 칭찬은 똑같았습니다. 왜 입니까? 그 결과가 아니라 그 최선을 다한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다 이룰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다 이루려면 그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때로는 그 외의 것들을 버리기도 하고, 노력도 하고, 방해되는 요소들과 투쟁도 해야 합니다. 이룬다는 것은 무언가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흘러가다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이루는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100m 선수는 0.01 초를 앞당기기 위해서 피를 말리는 훈련을 합니다. 전문가는 그 일을 위해서 나머지 모든 가능성을 내던져 버립니다. 피겨선수 김연아는 세계에 우뚝 서기 위해서 나머지 즐기는 것과 사귀는 것과 편한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믿음도 그러합니다. 다 이루려면 그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힘쓰고 애 써야 합니다. 계획과 생각만 무성한 목표는 꿈이 아니라 망상이요, 이룰 것이 없는 텅 빈 인생입니다. 다 이루기 위해서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디모데전서6:11-12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이루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힘쓰고 애쓰고 영적 선한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힘쓰고 애씀으로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다 이루었다’ 선언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끝까지 달려가야 다 이룰 수 있습니다.
다 이루는 것은 끝까지 달려갔다는 말입니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어렵고 고달퍼도, 유혹과 나쁜 환경 속에서도, 실패하고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간 사람만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지쳐 중도에 쓰러지고 포기하려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뎀나무 아래 쓰러진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다시 세우시고 힘주시어 끝까지 달려가게 하셨습니다. 세우시는 ‘야긴’의 은혜, 힘주시는 ‘보아스’의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나 끝까지 달려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다 이룬다는 것은 말씀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달려가는 데 있습니다. 인생이 힘들어도 말씀 붙잡고 끝까지 달려가 다 이루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피곤하여 지치고 넘어질 때에도 세워주시는 ‘야긴’의 하나님(왕상7:21) 바라보시면서 다시 일어나 끝까지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포기하고 싶어질 때에도 능력이신 ‘보아스’의 하나님 붙잡으면서 다시 새 힘 얻어 힘있게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칠레 광부 33명의 구조, 세계를 감동시키고, 그 광부들의 인내를 칭송하지만, 실상 이들의 구조에 정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30번의 실패를 이기고 끝까지 시도한 탐사봉에 있습니다. 13cm의 탐사봉을 그들이 갇힌 곳을 찾아 뚫어내린 것은 사막에서 바늘찾기처럼 거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29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끝까지 시도함으로서 그들이 있는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탐사봉을 통해서 각종 생존용품들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달려가는 것, 그것이 이루는 일에 핵심이기도 합니다.
바울사도도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4:7-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외치시고 운명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외침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만 외칠 수 있는 외침입니다. 끝까지 달려간 사람만 외칠 수 있는 외침입니다. 짧게는 하루의 삶 속에서, 길게는 일년의 삶 속에서, 마침내 내 인생 전체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다 이루었다
뇨 `9:18-20 / 문기태 목사
위대한 걸작들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중에 작품이 미완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미완성교향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슈베르트가 만든 마지막 곡에는 종장이 없다고 합니다.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도 완성되지 못한 채 버려져 발표하지 않은 그림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인간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학문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빌딩을 지었다, 학교를 세웠다, 사업을 크게 했다,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말하지만 인생은 대부분 미완성 작품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운데 최대의 완성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설흔 셋의 나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이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끝났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을 처음에 기록한 그리이스말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에 흔히 쓰는 말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많은 고대 그리이스의 기록들을 파낸 결과 이 말이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 니다. 과연 예수님이 짧은 생애를 사시며 다 이루신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채 십자가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시며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1. 테텔레스타이는 종들이 흔히 쓰는 말이었습니다.-제게 시키신 일을 다 햇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가서 무언가를 하라고 하여, 그 일을 다 마치면 종은 돌아와서 "테텔레스타이"-'제게 시키신 일을 다 햇습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고통받는 종이었습니다. 빌2;6,7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요17;4에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막10;45'인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항상 성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의식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모두 완수하신것 입니다. 그래서 '테텔레스타이'하고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다리를 놓는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분리하는 죄의 존재를 드러내고 죄의 세력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실패가 아니라 사명의 완수엿습니다.
2. 화가들이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작품을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한 화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실에 들어갑니다.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려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크게 기뻐하고 뒤로 물러서서 '테텔레스타이'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그림을 다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을때 우리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자주 만납니다. 거기에는 많은 의식, 예언, 표적, 그리고 불가사의한 상징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미완성의 그림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화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이해하기 어렵게 보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모든 그림은 완성되었고 감추인 빛이 모두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완성하신 분이셨습니다. 모세에서 부터 모든 선지자들에게 부분적으로 그림을 보여 주셨던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갈보리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셨습니다.
1) 구약의 모든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단번에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년동안 정성껏 제물로 드릴 양을 길러야합니다. 흠없는 제물이 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제물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흠도 점도 없는 완벽한 제물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 단번에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물로 양이나 소를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완벽한 제물인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구약의 성전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 완성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세운 어떤 성전보다도 가장 완벽한 성전입니다.
3) 구약의 모든 율법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슴하셨습니다.
4)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모두 완성되셨습니다. 메시야탄생, 사역, 생애, 배반당하심, 죽음과 부활등의 모든 예언이 그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즉흥적으로 사시지 않고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던 분입니다.
5) 구약성경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슴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직후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고 본래의 계획대로 회복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할 때에도 집집마다 그 집의 대표인 장자가 죽은 재앙속에서도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집들은 다 죽음의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구원의 그림을 보여 주셨는데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구원을 상징해주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심으로 구원의 약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모두 완성되셨습니다.
3. 상인들이 흔히 쓰는 말이었습니다.-돈을 다 받았다.
많은 생산 업체들이 물건을 만들어 한 유통업계에 납품을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 유통업자가 부도를 내야할 위기에 놓입니다.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하고 자신은 법적인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때 맘 좋고 실력있는 투자자가 나옵니다. 넉넉한 자금을 그 회사에 투자합니다. 이때 생산자에게 물건값을 갚고 영수증을 받으며 '테텔레스타이',곧 "다 갚았습니다"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했고 죄의 빚을 지고 삽니다. 그것은 죄를 향한 율법의 정죄이며 사람의 힘으로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이요 감당하기 어려운 빚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삯인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시고 우리의 빚을 남김없이 속량하시며 십자가상에서 '테텔레스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빚은 완전히 갚아졌습니다.
죄인으로서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께 큰 빚이 있는데 그걸 우리힘으로는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어겨왔는데 그 죄를 청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양심을 어겨 왔는데 그 죄를 청산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죄값을 치룰 수 밖에 없습니다.
@ 빚으로 초래되는 결과
종으로 팔림, 가난해짐.........레25:39,47;잠6:1-5
어린 자녀를 노예로 저당잡힘.........왕하4:1;마18:25
법의 보호를 박탈당함................. ..삼상22:2
재산을 빼앗김...............느5:3,4;잠22:26,27
감옥에 갇힘.................마5:25,26;눅12:58,59
예)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누출사고 - 주변 200킬로까지 저주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산 사람에게도 그 저주는 지금까지 임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발육하지 못합니다. 어른 임신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폐병, 갑상선등의 수많은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죽어갑니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다모여도 치료약이 없습니다.
지금 북한의 로켓발사를 제일 두려워하는 나라는 일본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일본은 핵공격을 받아본 나라입니다. 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민감합니다. 그런데 핵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죄입니다. 인간
의 지혜로, 인간의 방법으로 치료약이 없습니다. 핵보다 몇만배 무서운 형벌이 기다립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그러나 염려마십시오.
예수께서 오셔서 그 빚을 대신 갚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마지막으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외치십니다. 다시말해 모든 인류의 빚은 내가 다 대신해서 값았노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의 빚을 청산하심을 믿습니까?
마귀가 다시는 찾아와서 여러분의 양심에 죄인이라고 비난할 수 없음을 믿습니까?
죄책감은 물론 모든 죄의 형벌이 여러분의 괴롭힐 수 없음을 믿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지불하시고 테텔레스타이라고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우턴이라는 괴짜 복음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사람이 찾아와 다소 비꼬는 투로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고 물었습니다. 우턴은 그가 진지하지 않음을 알고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정색을 하고는 "안됩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제발 구원받는 길을 가르쳐 주세요?"하고 간청했습니다. 우턴은 빙그레 웃으며 "늦었습니다! 이미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1829년 펜실베니아의 조지 윌슨은 공범과 함께 집배원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벌이다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공범은 1830년에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윌슨은 영향력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친구들은 그의 사면운동을 했습니다. 결국 앤드르루 잭슨 대통령이 처형 예정일 한 달전에 사면장에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윌슨이 사면을 거절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어찌할바를 몰랐습니다. 대통령 사면장이 송달되어 책상위에 있는데 교수형을 집행할수도 없고 당사자는 사면을 거부하고 하여 고심끝에 대법원에 이 문제의 결정을 요청했습니다. 대법원장은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사면은 은혜의 행위이다. 그러나 대상자가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면은 집행이 완료되지 않는다. 대상자가 사면을 거부할 경우 법원은 그것을 강제할 힘이 없다.' 그래서 조지 윌슨은 대통령의 사면이 내려졌는데고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로 멸망당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제 죄에서 영원히 놓임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사면장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면장을 거부하는 고집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넓이와 깊이
요 19:28-30 / 손인식 목사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생애를 두 마디로 압축한다면 ‘감사’와 ‘후회’일 것입니다. 지나온 57년의 제 생애를 돌아봐도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믿음의 기도하는 어머니와 날이 갈수록 더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가정을 주셨고,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셨고, 미국까지 보내주셔서 목회를 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무엇이든 잘 믿지 못하던 성격의 저를 변화시켜 예수님을 잘 믿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를 잘 하기보다는 예수를 아주 잘 믿는 목사입니다. 또 좋은 사람들과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수십 년 전 김상복 목사님을 만난이래, 목사님이 제게 본이 되어주시고 가르쳐주시고 훈련시켜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오늘과 같은 목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목사님은 설교할 때 제스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심지어 영어발음까지 교정해주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그런 목사님 옆에서 오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아울러 저에게 건강도 주셨고 제 삶 속에 기회를 주셔서 오늘도 이 땅을 살게 하신 것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후회의 문제도 있습니다. 후회할 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왜 그 때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거기 휩쓸려 그렇게 살았는지, 내가 왜 그를 그렇게 대했는지, 그 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돌이켜보면 뼈아프게 후회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들에 대해 뼈아픈 후회를 하고 있는 오늘도 내일 후회할 일을 하기도 합니다. 후회라는 측면에서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구주이시며, 이 땅의 우리를 사랑하셔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요 우리 생명의 주인 아니겠습니까? 그런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인간에게 시달린 분이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주님에게 우리처럼 후회가 있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입니다(요19:30). ‘내가 몸을 찢기고 보혈을 흘려서 내 몸으로 너희 죄 값을 다 치러 주었다. 내가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이겠습니까?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와서 유감없이 살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후회 없이 사신 주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자라서 후회가 없으셨고 세상 권세를 누렸기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넓이나 기록이나 어떤 가시적인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을 기울여서 깊이 있게 모두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주의 은혜로 구원 받고 이 땅에서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진정 주님을 본 받기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넓이가 아닌 깊이로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배워야 될 깊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신앙의 깊이입니다.
신앙은 명함에 써가지고 다니거나, 태생이나 배경이나, 어떤 기록이나 넓이로 따질 일이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한 횟수가 곧 우리 신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깊이입니다. 예배도, 주님과의 관계도, 주님을 섬기는 마음도, 신앙의 인격도, 진리의 깨달음도 다 깊이에 속한 일들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과실을 맺는 것은 주의 말씀의 생수에 깊이 뿌리내려 영성이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지금 우리는 민족의 위기와 어려움들이 우리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깊이로 살지 않으면 이 위기 속에서 헤어나기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생활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 분의 평소 신앙생활에 깊이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러냐고 했더니, 식사기도를 세 번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식사기도는 고개만 까닥하고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 처제인데 그 날 저에게 눈물나도록 혼났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깊이입니다. 깊이 있는 기도를 드리면서 위로부터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깊은 영혼까지 주의 임재로 충만케 될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나지, 껍데기로 하는 기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번은 아내와 함께 LA 한국식당에 갔는데 옆에 30대 초반의 두 젊은이가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퍽 친한 친구사이로 보이는데 그 중 한사람이 “야, 네가 무슨 교인이냐?”하니 “야, 무슨 교인이 별건 줄 아냐?”라고 대답하더군요. 저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교인이 왜 별거 아냐?”하려다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 신앙인으로서 제 마음에서는 얼마나 억울한지, 사실 그렇게 얘기한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깊이로, 믿음과 예배와 기도와 인격의 깊이로 나타나지 못하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이런 취급당하며 ‘네가 무슨 교인이냐’며 손가락질 당하는 것 아닙니까? 그 생각만 하면 얼마나 정신이 번쩍 드는지 모릅니다. 깊이로 살수 있으면 후회 없는 신앙생활을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인터넷과 컴퓨터, 휴대폰 등을 멋지게 만들어 놓고 그 문명의 화장품들에 취해 오히려 가장 소중한 신앙의 깊이는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윗세대만 해도 마치 사도바울이 보았던 것 같은 신앙의 깊이가 있었습니다.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서...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었으니”(고후12:2-4). 그는 표현할 수조차 없는 놀라운 일들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영적 체험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던지, 자기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두 번씩이나 괄호를 열고 닫아가며 강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이 왜 이렇게 허약해졌습니까? 신앙의 깊이의 문제입니다. 몇 년 전 분당의 한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 한 권사님이 지금 지옥이 대대적으로 내부수리중이라고 하시더군요. 한국 여성들이 찜질방에서 하도 몸을 지져 온도감각이 없어져서 지옥의 온도를 대폭 올리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또 천국은 대혼란중이랍니다. 특별히 강남의 여성들이 눈, 코, 입을 하도 뜯어고쳐서 이름과 얼굴이 매치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조크입니다. 같이 웃긴 했지만 왠지 제 가슴에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형벌의 영원한 지옥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가서는 안 될 곳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는데, 왜 지옥입니까?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천국은 반드시 주님으로 인하여 가야 될 곳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또 우리를 천국에 가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목숨을 주시면서 까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어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데, 그 천국과 지옥이 그런 농담의 소재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의 본질이 깊이에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도 깊이이고 주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깊이입니다. 우리 삶의 전체를 넓이로 살지 아니하고 깊이로 산다면 우리들은 감사가 늘어나 결코 후회가 늘어나는 인생으로 마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닮으십시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인생의 깊이와 믿음의 깊이를 닮아서 이루어낼 수 있도록 우리가 힘쓰면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의 깊이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자 하면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 위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다 이루시는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마지막 그의 영혼이 떠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를 향해 퍼부어주신 그의 사랑에 대한 마지막 종결장입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까지 사랑했노라” 하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고 사랑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지금 이 땅의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 결혼하고 사랑을 위해서 한 가정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사랑의 깊이 문제입니다. 저도 한 아들로서 어머니를 사랑한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에 보니 사랑의 깊이까지 들어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또 지난 30년을 한 남편으로 살아오는데 아내 앞에 설 때마다 정작 사랑의 깊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한 아버지이지만 자식들 앞에서 사랑의 깊이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저 중심으로 사랑하고 살아왔습니다. 목사로서 수많은 양의 무리를 섬기고 있지만 ‘정말 주님처럼 목숨을 다하여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사랑해 왔는가?’ 라는 질문에 할 말이 없어집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기보다는 사랑의 깊이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랑이 떠나면 그 관계는 아픔으로 변할 뿐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사랑의 깊이를 다시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후회를 줄여가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번은 거실에서 한국비디오를 보던 제 아내와 딸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심금을 울렸던 유명한 드라마 장면들 중에서 수상을 받은 ‘다모’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쳤을 때 사랑하는 남자가 그를 치료해주면서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아프냐?” “아픕니다.” “나도 아프다.” 저는 “뭐 저런 시시한 걸 가지고 전국을 눈물로 젖게 했다는 말이냐?”고 하며 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 일을 계속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도 자꾸 “아프냐?”고 묻고 싶어졌습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 사랑의 욕구는 넘쳐나지만 진정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 “아프냐?” “아파요.” “나도 당신처럼 아픕니다.” 이렇게 대화해 본 지가 참 오래 되었기에 시시해 보이는 그 한 장면이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구나! 목사가 연속극보고 은혜 받아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이 이 땅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서 우리에게 오셔서 사실상 ‘아프냐? 괴롭냐? 고독하냐? 병들고 죽을 것 같으냐? 외로우냐? 절망이냐? 캄캄한 암흑 속에서 누구도 너를 돌보지 않느냐? 나도 아프다. 내가 너와 같이 눈물을 흘린다’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껍데기와 넓이가 아니라 깊이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이 놀라운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받았는데 만약 사랑의 깊이를 잃어버린다면 우리 신앙도 함께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느 집에 갔더니 강아지가 안경을 쓰고 있더군요. ‘안경을 쓴 개’ 대단히 웃깁니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한줄 알고 “개가 왜 안경을 쓰고 다니냐?” 물었더니 개가 나이 들어 시력이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벽에 부딪쳐서 안경을 씌웠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상하게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의 고충까지 처리해준 그 집의 둘째아들은 정작 삼 개월 째 집에서 쫓겨나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대학에서 아버지가 원하는 과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한다고 오늘날 21세기 교포사회에서 쫓아내 오고 싶어도 못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입니까? 이건 사랑의 깊이의 문제입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주었을 뿐이지, “네가 얼마나 아프냐? 네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느냐? 내가 너보다 사실 더 아프다”는 주님의 사랑의 깊이까지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결국 후회만 남을 뿐입니다.
어느 날 LA 타임스를 보니 어느 남편이 경범죄로 체포당했습니다. 퇴근할 때 일주일에 몇 번씩 꽃을 갖다 줘서 그 아내는 아주 고맙게 받았었는데 사실은 묘지에 놓인 꽃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 아내는 분노해서 이혼하겠다고 했습니다. 묘지의 꽃을 아내에게 가져다 준 짧고 얕은 사랑노름에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사랑은 깊이의 본질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 살아도 이 사랑의 깊이까지 들어가지 못하면 남는 것은 아픈 후회들뿐입니다. 가져보셨습니까? 다 누려보셨습니까? 지금도 이것저것 다하고 계십니까? 바쁘십니까? 안됩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제일 중요한 것은 후회 없는 인생을 하나님의 성도들이 살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라는 말씀은 요한1서에서 이렇게 응답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3:16). 주님이 이 땅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그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며 그 사랑 주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오늘부터라도 남은 생애동안 후회 없이 살기를 간절히 원하시거든 사랑에 관한 한 깊이의 문제로 다루십시다. 넓이가 아닙니다. 삶을 넓이로 살아가다간 크게 다치고 후회합니다. 사랑은 깊이입니다.
마지막으로, 순종의 깊이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깊이 중의 깊이는 순종의 깊이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유감없이 살았다, 받은 삶을 후회 없이 살았다,” 즉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신 그 뜻을 다 이루어드렸다는 뜻입니다. 순종의 깊이까지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그 유명한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입니다. 특별히 순종의 깊이입니다.
교포들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건축도 잘하고 영어도 썩 잘합니다. 그리고 순종을 훈련해주면 “주여 목숨 다해 순종하겠나이다”고 결심도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의 기질에는 순종이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순종의 훈련은 잘 받는데 정작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이 대목에 가서는 잘 안 맞습니다. 심지어 구역예배 후 음식을 먹으면서 두 집사님이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 무엇이냐?’며 성경공부나 구역예배와는 아무 관계없는 아마존강과 양자강을 두고 언쟁을 부립니다. 결국 백과사전에 힘을 빌려 아마존강이 제일 길다고 해도 양자강이 제일 길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은 입으로만 하는 순종이지 정작 나와 내 마음과 내 성질을 꺾는 순종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지 못한 채 순종의 깊이 없이 살다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가장 뼈아플 부분이 바로 후회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에게 순종할 걸...” 순종은 깊이 들어갈수록 신비한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주고 하나님 앞의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해주십니다. 영국의 조지 윗필드라는 목사님은 주님을 위해 자기 몸을 있는 대로 다 쓰며 순종하며 살다보니 주님처럼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친구들이 몸을 잘 보전하라고 권했을 때 그가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 몸을 잘 보존했다가 녹슬어서 없어지기 보다는, 주를 위해 쓰고 쓰다가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그 말씀은 제가 사역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책상 앞에 적혀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양을 내며 잘 보존해도 녹슬어 없어지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주님 위해 쓰이다가 닳아 없어지는 존재도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넓이보다도 중요한 것이 깊이인 것처럼,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인 것처럼, 우리에게 정말 의미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잘 위하는 것보다 우리의 존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이루어드려야 될 이유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존재하는 이유를 주님 앞에 순종함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보십시다.
LA에는 지진이 가끔 옵니다. 한번은 7.1도짜리 지진이 LA 북쪽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 발생했습니다. 집집마다 금이 가거나 물건들이 쏟아지고 파괴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이민에 성공하고 자리 잡은 부인들은 마치 성공을 과시하듯 찬장을 하나씩 사다놓고 고가의 접시들을 멋진 조명아래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남편에게 조차 커피를 담아 주지 않고 아끼던 이 그릇들이 지진에 몽땅 넘어져 깨졌습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깨지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이는 물 뿌리고 설거지할 때 쓰는 플라스틱바가지였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느꼈습니다. 내 존재가 플라스틱바가지처럼, 존재하는 이유를 위해서 닳고 닳으며 쓰여 진다면 우리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더 도와주시고 우리를 강하게 쓰실 것이요, 도구를 더 오래 두고 쓰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삼백만이 굶어죽었다는 북한 동족들과 옥에 갇힌 분들, 헐벗은 분들, 고통 받고 눈물 흘린 분들과 소외당하는 분들을 위해서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주를 위해서 순종하고 더 닳도록 쓰이는 주님의 플라스틱바가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순종의 깊이는 주님처럼 이 땅을 떠날 때 감히 “주님의 제자답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나이다” 하고 주께 말씀드릴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치매를 앓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한국에 있는 그 분의 둘째아들이 소식을 접하고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사랑하는 둘째아들을 못 알아보시자, 그 아들이 비통하게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어머니 날 못 알아봐요?” “너 누구냐?”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훗날 우리가 주 앞에 섰을 때 그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또 다른 비극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내게서 떠나가라”(마7:23)하시면, “내가 교회를 다녔고 성경공부도 했고 성도들과 어울려 다녔는데요”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순종의 깊이에 들어가 보지 못하여 주께서 “내가 너를 모르노라”하는 그런 비극을 겪을까 오히려 두렵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도 순종하며 사랑의 깊이를 캐며 믿음의 깊이를 더하여서 우리 나머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오늘 결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말씀입니다. 믿음의 삶은 넓이가 아닙니다. 깊이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요 19:28-30 / 류영모 목사
I. 해갈의 욕구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알라딘 램프를 주웠습니다. 작은 거인이 튀어나와 굽실거리며 말합니다. "주인님, 어떤 소원이든지 한가지를 말해 주십시요." 얼마나 기다렸던 말입니까? 돈도 필요하고 예쁜 여자도 있음 좋겠고 재빨리 결혼도 하고 싶구나. 돈/ 여자/ 결혼 - 야호! 그래서 즉시 이 사람 - "돈 여자와 결혼"을 했더랍니다. 사람의 욕망, 욕구란 끝이 없지요.
수많은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생리적 욕구입니다. 이 생리적 욕구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초적이고 강한 욕구는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하는 해갈의 욕구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는 97%가 물이고 신생아는 77%가 물입니다. 어린아이는 70%, 성인은 60%, 노인이 되면 수분이 50%로 줄어듭니다. 결국 사람은 물이 모자라 죽는 겁니다.
우리가 병원에 입원하면 무조건 링겔부터 팔뚝에 꽂습니다. 링거액이란게 별거 아닙니다. 거의 맹물입니다. 물이 모자라 아픈 것입니다.
이는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부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 지역에는 거대한 동물 보호구역이 있습니다. 해마다 이 동물 보호구역에서는 야생동물의 대이동이 일어납니다. 매년 5월부터 12월까지 150만 마리의 누, 20만 마리의 얼룩말, 2만 마리의 일런드, 50만 바리의 가젤이 옮겨다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물과 풀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비가 내려서 풀이 많아지는 지역으로 점점 이동을 하는 겁니다. 12월에서 4월까지의 우기에는 탄자니아의 응고롱고로 동물보호구역에서 지내다가, 우기가 그치고 풀이 모자라면 북쪽의 세렝게티 국립공원 지역으로 이동을 해서 5월부터 7월까지 보냅니다. 거기서도 모자라면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8월부터 11월까지 마사이마라에서 보냅니다. 이렇게 이동하는 거리는 320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마시지 못하자 이성도 잊어버리고 신앙도 버리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병사들이 사막을 걸어가는데 목이 너무 말랐습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신기루가 보였습니다. 저 사막끝에 강물이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쏜살같이 달려가 첨벙첨벙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껏 물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다 죽었습니다. 얼마 후 정찰대가 그들을 찾았는데 그 병사들은 모두 목에 모래가 가득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래를 물인 줄 알고 퍼 마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모래가 목에 가득 차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수 아닌 것을 생명수로 알고 그것을 마시다 죽어가고 있습니까?
II. 헛된 목마름
요즘 얼굴 잘 생긴 사람을 얼짱, 몸매좋은 사람을 몸짱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얼짱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성형수술을 한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형수술이 아니라 성령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얼짱이 아니라 영적인 얼짱, 즉 영적 거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몸짱도 좋지만 영적인 몸짱이 되어 복음전할 만큼 발이 잘 생기고, 섬기기 좋을 만큼 손이 건강하고, 충성헌신하기 알맞게끔 몸이 다듬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진정한 얼짱이요 몸짱입니다.
인생의 갈증이란 끝이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배부르게 밥 먹는게 소원입니다. 배부르게 밥 먹고 사는 우리는 갈증이 없습니까? 우리나라 술 소비량이 세계 1위랍니다. 월평균 수입의 20% 가까이를 술값으로 소비 한답니다. 왜 그렇게 술을 마십니까? 뭔가에 취해야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나라 점쟁이 숫자가 기독교 성직자 수의 1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무당을 만나고 나오는 사람에게 "왜 이런데 오느냐"고 물었더니 "답답해서 왔다"고 하더랍니다.
밥만 먹으면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돈 때문에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목마름 때문에 도박을 하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어떤 사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최고급 벤츠 승용차와 다이야 몬드가 박힌 로렉스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로렉스 시계를 차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울고 서 있더랍니다. "내 벤츠 승용차, 벤츠, 벤츠...." 구조대가 "벤츠가 문제입니까? 당신 팔뚝이 달아났습니다." 이번엔 이 사람 - "아이쿠, 내 로렉스 시계, 로렉스, 로렉스..." 하더랍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물질에, 권력에, 정욕에, 예술에, 명예에, 인기에, 목이 말라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헛된 목마름은 세상 어디에서도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희랍신화에 탄타루스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탄타루스 왕이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는 제우스 신의 음식을 훔쳐먹었습니다. 그 죄로 그는 평생 배고프고 목말라야 하는 고통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이 마시고 싶어서 앞에 있는 물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물잔이 뒤로 쓱 물러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앞에 있는 나무에 열린 과실을 따 먹으려고 손을 내밀면 그 나무 과실이 하늘로 휙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마시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하나도 입에 넣을 수가 없는 고통을 영원토록 겪어야 했습니다.
이 탄타루스 왕의 신화에서 영어 단어가 하나 생겼습니다. '텐터라이징(Tantalizing)' 이라는 단어입니다. '감질나는, 애간장을 태우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마시지 못하고 먹지 못합니다.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는데 얼마나 안달이 나겠습니까? 얼마나 감질이 나겠습니까? 사람들이 쉬지않고 추구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목마름은 다 이런 것입니다. - 텐터라이징!
감질나는 세상, 목마른 세상입니다. 내가 손에 넣을만 하면 손에서 빠져나갑니다. 설사 얻었다 할지라도 만족이 없습니다. 얻을수록 갈증은 더 생기고, 배는 더 고프게 됩니다.
호주에는 '나도'라는 식물이 있는데 이것으로 분말을 만들어 빵을 만들어 놓으면 밀가루로 만든 빵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도' 가루에는 전혀 양분이 없기 때문에 나도 빵을 먹으면 배고픔은 몰라도 영양실조로 죽지요.
이 땅의 그 무엇으로 자신의 목마름을 채워 보고자 했던 사람들은 모두 심한 갈증으로 죽어갔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마시면 영양가 없어 헛배만 부르게 됩니다.
사탕을 먹은 아이가 위장은 텅 비어 있는데도 당분으로 헛배가 불러서 밥상 앞에서도 밥을 외면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이 세상의 죄악된 쾌락들에 빠져 있어서 영적인 것들에 대한 식욕이 없습니다. 빌리 그래함의 말처럼 "우리는 마귀의 진수성찬을 너무 많이 먹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 아모스 선지자는 이 시대를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 얼짱들과 젊은 남자 몸짱들이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구하여도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거지요. 얼짱되고 몸짱되어도 갈증은 더 심해진다는 것이지요.
여기 '탄다'는 것은 불과 관계되어 있고 '목마르다'는 것은 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물이 불탄다! 너무나 목이 갈해져 입안에 불이 훨훨 타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리나라는 지금 정치적 성숙과 안정에 목이 말라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우리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우리는 화해를 갈망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우리는 통일을 갈망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우리는 정치적 성숙을 갈망합니다.
III. 예수: 내가 목마르다
보십시요. 불타는 목마름의 절규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십자가 상에서 들려온 예수님의 신음 소리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우리 말로는 두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어로는 단 하나의 단어입니다. - 딥소(Dipso)
트루맨 데이비스라는 내과 의사가 쓴 "현대의학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대로 조금 읽어 봅니다.
주님의 육체적 수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된다. 초반의 고통에서 생리학적으로 흥미있는 사실은 주님이 피같은 땀을 흘리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복음서 중에서도 오직 의사출신인 누가만이 이 사실을 기록했다.
누가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고 기록한다. 의학적으로 매우 희귀하기는 해도 '히마티디로시스'라는 현상이 있다. 극도의 감정적인 과로상태에는 작은 모세관이 땀샘에서 파괴되어 피와 땀이 섞일 수 있다.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후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회와 대제사장 가야바 앞으로 끌려갔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외상을 당하신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에 아무 대답없이 잠잠히 계시다는 이유 하나로 사환 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그 후 성전 경비대원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비웃고 침뱉고 얼굴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빌라도 법정에서는 마침내 채찍질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죄수의 옷이 벗겨지고 두 손은 머리 위에 있는 기둥에 묶여 졌다. 유대법에는 40에 하나 감한 39번을 때리도록 되어있다. 로마군병의 채찍에는 끝에 둥그런 쇠납덩이들이 달려있다. 처음엔 가죽끈들이 피부만을 찢으나 계속 내리침에 가죽 끈들이 피하조직을 찢고 파고들자 모세관과 혈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드디어 근육속에 있는 혈관에서 피가 뿜어나오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는 그분의 등 살 가죽이 마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등 전체는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고 피로 범벅이 된 살덩이가 된다.
로마군병들이 왕이라고 자칭하는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한다. 그분의 어깨 위로 자색 옷을 입히고 그 손에 왕의 홀 대신 갈대를 쥐어준다. 그리고 조롱의 면류관을 만들기 시작한다. 쿡 눌러 씌울 때 이마에 피가 흘러나온다. 머리카락 부위는 신체 중 많은 혈관이 있는 곳이다. 비웃고 얼굴을 때리고 군병들은 가시 면류관을 머리 깊숙이 씌우기 위해 예수님의 손에서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친다.
잔인한 장난에 싫증이 나자 그들은 예수 위에 덮혀있던 자색옷을 잡아챘다. 그 자색 옷에는 이미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상처에 있는 혈청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것은 외과용 붕대를 마구 잡아 뜯어내는 것과 같았다. 또 다시 채찍에 맞아 상처난 곳이 재차 터져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홍포를 입힌다.
무거운 십자가의 가로대가 예수님의 어깨를 가로질러 묶여졌다.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의 행렬이 두 강도와 로마의 군병들과 함께 비아돌로로사의 길을 향하기 시작한다. 똑바로 서서 걸으려고 애를 쓰셨으나 많은 피를 흘린 충격으로 그 거친 나무 기둥은 그분의 어깨와 찢어진 피부 속의 근육을 도려내듯이 비벼댔다.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인간 근육의 힘이 견디어 낼 수 있는 한도를 이미 넘어섰다. 백부장은 빨리 십자가 형을 집행할 목적으로 북아프리카의 구경꾼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다. 예수님은 여전히 피와 끈적 끈적한 땀을 흘리며 행렬을 따라 갔다.
안토니아 요새로부터 골고다 언덕까지 600m 행렬이 끝나자 극한의 수치를 더하기 위해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다 벗겼다. 십자가의 가로대 위에 예수님의 두 어깨가 뉘어졌다. 손목위에 약간 오목한 곳에 무거운 육각 쇠말뚝 못은 손목을 뚫고 나무에 박힌다. 재빨리 반대편 손목에도 못이 박힌다. 십자가의 가로대를 올려 세우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그 위에 세운다. 왼쪽발을 오른쪽 발에 포개어 발가락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무릎을 적당히 움직일 수 있게 한 다음 발목에 못을 박기 시작한다.
점차 힘이 빠져 손목에 박혀 있는 못이 몸무게를 지탱하자 무서운 아픔이 예수님의 손가락과 발가락 뇌로 전달된다. 중추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몸을 위로 밀어 올리자 몸무게 전체가 다리에 박힌 못에 지워졌다. 바로 이때 또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팔들이 피로해지자 그 경련이 근육 전체에 급속하게 퍼졌는데 그것은 깊고 사정없이 쑤셔대는 아픔이었다.
팔에 몸무게가 실리자 가슴 근육이 마비되고 늑간 근육도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 공기를 흡입할 수 있지만 내쉴 수는 없다. 짧은 호흡이라도 얻기 위해 예수님은 몸을 위로 밀어올리고자 안간힘을 쓰신다. 이산화탄소가 허파와 혈류에 채워지자 근육의 경련이 부분적으로 가라앉았다. 발작적으로 그분은 숨을 내쉬기 위해 몸을 위로 밀어올리고 산소를 들이마셨다.
오전 9시에 못 박힌 그분은 3시간을 견디셨다. 정오에 갑자기 내리덮힌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분은 계속 아파하셨다. 다섯 시간이 지나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 관절마디를 부수는 듯한 경련, 때때로 일어나는 부분적인 질식, 그리고 거친 나무 기둥을 대고 위아래로 몸을 밀어 올리고 내릴 때마다 찢겨진 등허리를 또 찢는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며 또다른 고통이 몰려온다. 심장이 압박되기 시작하자 심하게 으깨는 듯한 고통이 가슴 깊숙이 파고 들었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끝이나 가고 있었다. 남은 피를 세포조직에 보내기 위해 애쓰고 시달림 받는 폐는 약간의 공기라도 흡입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계속한다. 탈수가 많은 세포조직은 다량의 자극을 뇌에 전달한다. 예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갔다.
그분은 마침내 고통의 극한 상황을 토해낸다.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
IV. 우리의 목마름(갈증)을 해결하셨다
예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갔다. 그분은 마침내 고통의 극한 상황을 토해낸다. 딥소 -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이 목마르셨다니 이해가 되십니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친히 말씀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 아니십니까? 모든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시겠다던 예수님이 목마르셨다니 좀처럼 이해가 안됩니다. 그분은 오대양 육대주 모든 바다와 강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생수와 약수를 만드신 바로 그분이 "목마르다" 절규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샘을 터뜨려 타는 목마름을 한순간에 해결하실 수 있는 그분이 친히 목말라 하신 이유는 바로 나와 여러분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교회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곳입니다. 이 땅의 목마른 인생들이 몰려와 생명수 샘물을 나누어 받는 곳입니다. 설교는 목마름을 풀어주는 하늘의 약속입니다. 찬양은 목마름을 해결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이요 간증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이 땅에 태어나자마자 응아응아 울음을 터뜨립니다. 목마름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건물이 무너져 깊은 건물더미에 오랫동안 갇힌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갈증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열흘만에 구조된 젊은이가 첫번 째로 토한 일성이 무엇이었습니까? "콜라가 먹고 싶다. 물을 마시고 싶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에 한 여인이 우물에 물을 길러 나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남편을 바꿔가며 자신의 갈증을 해결해 보려 했습니다.
첫째 남편은 정서방입니다. 그 정서방과 정욕을 불태워 보았지만 인생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남편은 김서방입니다. 그 김서방의 돈으로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셋째 남편은 지서방. 지식으로. 넷째 남편은 권서방. 권세로. 다섯째 명서방. 명예로. 인생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여기 주님이 주는 물은 영적인 물입니다. 영생의 샘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 목마름은 단순한 육체적 목마름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채워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라시는 하나님의 명령, 즉 사명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요. 온전히 나아오십시요. 주님은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대신하여 목말라 하셨습니다. 이시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갈증을 맡아 해결해 주십니다. 생수의 강이 넘쳐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요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우리가 기쁘게 살도록 슬프게 되셨고, 우리가 건강하게 살도록 육체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외쳤습니다.(53:5)
"내가 목마르다" 이것은 지옥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부르짖음이지요. 전쟁터의 임시 병동에서 여기 저기 환자들이 잘린 발과 손에 붕대를 감고 부르짖는 소리가 물을 달라는 아우성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들려주신 지옥 이야기 '부자와 나사로'에서도 음부에 떨어진 부자의 간구는 물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이 꺼질 줄 모르는 목마름의 고통, 한방울의 물을 호소하는 해갈이 없는 영원한 고통의 불못을 바라보십시요.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요한계시록 7:16 입니다.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다시 목마르지도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V. 무엇에 목이 마른가?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다 마음속에 이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채울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갈증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유명한 교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 없나이다" 어린아이가 엄마한테로 돌아가기 전에는 평안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목이 말라있습니까? 당신이 무엇에 목이 말라 있는가? 이것이 당신의 신앙이요 인격이요 영적 수준입니다. 다윗이 반란군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났을때 부른 시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명예를 회복하기에 갈급하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왕궁 침실을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덥고 건조한 중동지방에서 물을 마시지 못해 혓바닥을 내밀고 이골짝 저골짝을 헤매는 목마른 한마리 사슴처럼 주를 갈망한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길 뿐입니다. 우리가 풍성함을 누리는 길도 이길 뿐입니다. 축복받은 길도 이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일입니다.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원문에서 "아락"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순서를 밟아 차근 차근 찾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락 바락 소리를 지르며 열광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원래 사슴은 그 자태가 귀족처럼 신사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평상시에는 점잖고 조용해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목이 말라 물을 찾을 때는 너무나 고통이 심해 바락 바락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일에 있어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설립과 복음전도에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에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진리에, 기도에, 말씀 묵상에, 셀번성에 목이 말라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신령한 은혜에 목이 마른 그 분야가 바로 축복입니다. 목이 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은혜를 그곳에 부어주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기도에 목이 마르십니까? 열심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응답을 주십니다. 용서에 목이 마르십니까? 용서하세요. 하나님이 지금 사랑과 평화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목마른 자는 누구나 주께로 오십시요. 세상 헛된 곳에 갈증을 느끼시는 분들 주께로 오십시요. 주님을 마시면 어떤 목마름도 사라질 것입니다. 신앙인의 한가지 목마름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주님의 초청과 권유도 목마른 자는 오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마지막 초청을 들어보십시오. 계시록 22:6 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시록 22:17 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와서 예수를 마시라. 성령을 마시라. 그리하면 기쁨을 얻으리라. 만족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전세계인의 주목을 끌고 있는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헐리우드의 한 스타가 3백 60억원의 사제를 털어 제작한 The Passion of the Christ -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멜 깁슨의 작품입니다. 얼마전 미국 ABC 방송에 출연한 멜 깁슨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20대에 이미 돈과 명예, 대중의 환호에 파묻혀 속세가 제공하는 유토피아의 정점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전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술과 마약, 도박에 빠져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삶은 나에게 지루했고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고층 빌딩의 창밖을 내다보며 내가 왜 여기서 뛰어내리면 안되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났을때 나의 인생의 모든 갈증은 해결되어졌습니다. 나의 남은 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해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재능과 경험과 내 재산을 털어 예수님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미국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 한편으로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시대 이 영화를 사용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멜 깁슨을 쓰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를 쓰기를 원하신다.
목마르다
요 18:28-30 / 김경호 목사
제가 성지 순례 이야기를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난절에 맞추어 드디어 예루살렘 이야기 입니다. 예루살렘 성 맞은편에 올리브산, 또는 감람산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의 아랫 자락에겟세마네 동산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 기도하시던 큰 바위를 중심으로 아름다은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미사 뒷자락에서 동행했던 일행 중 하나인 전도사님 부부가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사실 어떤 느낌에 젖어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일단 부지런히 보아두자"하고 애써 감정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 부부의 얼굴이 자꾸 눈에 뜨이면서 눈물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저사람, 괜히 주책없이 울어가지고 나까지 울려!" 투덜대면서 사진을 계속 찍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닥아내고, 한쪽으로는 카메라를 연신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주는 경건성이 저의 부질없는 분주함을 압도해 버렸습니다. 그 바위 위에 예수님께서 "아무개야 잠시도 깨어있을 수 없냐? 날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없겠느냐?"하고 외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그냥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 했습니다. 그 시간 그렇게 기도하고 싶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 고파요.'하는 표현이 절로 나왔습니다. 눈을 감자 깊은 평화가 제게 찾아왔습니다. 잠시 후에 누가 등을 쳤습니다. "빨리 나오래요!"라는 재촉이 떨어져 "주님, 이따가 만나요."하고 기념 교회를 나왔습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성안에, 버스로 들어가며 우리 일행은 "거룩한 성"을 합창했습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 오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합창을 하면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주차장 까지 늘어선 매우 긴줄의 인파가 있었습니다. '여기 줄서서 언제 기다리나'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이드가 오더니 우리를 따로 불러 그 줄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줄 섰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제지를 합니다. 가이드가 아랍 말로 몇 마디한 후에, 우리는 인파를 헤쳐 당당하게 앞 으로 나아 갔습니다. 알고보니 그 줄은 회교도들, 또는 관광객들이 지금은 회교도 들의 최고의 성지가 된(옛날 예루살렘 성전 터) 회교성전을 순례하는 줄이었습니다. 회교도들은 이 성전을 한번 방문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고 의무라고 합니다. 성지를 순례하고 난 다음에는 이름까지 새로 지어주고 대우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제가 보는 그들은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정해진 시간만 되면 이 성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합니다. 그러다가 코를 땅에다 박고 기도를 합니다. 양치는 목동이건, 햇빛이 작열하는 사막이건, 들이건, 도시안 시장이건 그들의 철저한 철칙이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들의 반의 반만 신앙을 갖게 되더라도..."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처인 통곡의 벽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벽 중 다 허물어지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분인데, 아래에서 3-4단 정도가 옛 성벽입니다. 구약에 "이 성전을 보고 기도하거든 이 기도를 들어 주시고..."라는 구절이 있어 사람들이 이 통곡의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기 위해 순례하는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줄이 쳐저있어 남자 기도처와 여자 기도처가 구분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키파라는 모자를 쓰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전부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기도 박람회와도 갔았습니다. 다른 언어, 다른 복장의 사람이들이 경건하게 기도하는 그 음률이 저절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게 했습니다. 저도 무너진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생각나는 대로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벽에 무수한 기도문들이 꽂혀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그곳까지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기도문을 인터넷으로 접수받아 통곡의 벽에 꽂아 놓는 대행업체 까지 있다고 합니다. 비아 돌로로사, 예수님 십자가행의 14처, 매우 의미있는 장소들이지만 지금은 장터가되고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상업화된 도시 길이었습니다. "원달라"를 외치며 이것 사라, 저것 사라고 조르는 사람들 틈으로 예수님께서 쓰러지신 곳, 여인들을 만나 "네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신 곳 등을 알리는 조그만 알림간판 역시 상품의 하나 처럼 걸려있습니다. 마침내 에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것을 기념하는 골고다 기념 교회에 닿았습니다. 이 곳은 비잔틴 시대에 희랍신전이 있는 자리가 옛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리라는 증언에 의해 희랍 신전을 허믈어 내고 그 밑에 큰 바위를 발굴하여 그 바위를 중심으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성전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상이 서있는데 흔히 보는 카도릭의 십자가 상이었습니다. 그 주변의 예수님의 흔적이 없을까를 살펴보았는데 별다른 흔적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사당 같이 촛불켜고 촛농이 녹아내려 지저분한 모습, 우리 민화 같은 그림 초상이 요란해서 예수님의 흔적은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상, 그 아래 큰 바위가 노출되어 있었고 그 바위에는 나무 기둥을 꽂을 만한 자연스런 구멍이 보였습니다. 그 바위 구멍, 그것은 예수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가 꽂혀있던 그 구멍, 바로 그 구멍이었습니다. 바로 그 구멍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습니다.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 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겉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쏫아져 내렸습니다. 주변을 보니 모두가 눈시울이 빨개 졌습니다. 누군가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자연스럽게 찬송을 흥얼거렸고 곧 합창이되었습니다. 독일 사람, 미국 사람, 프랑스 사람 모두가 따라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합창이 되었습니다. 각각 다른 말로 불렀지만 이들이 흘리는 눈물 만큼은 하나였습니다. (다같이 찬송-"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를 부름) 제가 그 골고다 기념교회를 나오면서 전혀 눈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왜 울었어? 예수님이 반가와서 울었어? 불쌍해서 울었어?"하고 짖궂게 물었더니 "글쎄, 십가가의 그 자리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오데..."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만 보면 눈물이 나오고 심자가 만 보면 기도가 나오지요.
요즈음 강동송파가 첨예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제가 강동송파의 총선시민연대의 상임대표를 맡고있어 요즈음 열심히 낙선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복이 터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강동지역이 낙선운동이 표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핵심지역이 되었습니다. 낙선 대상자 86명 중, 아예 당선 가능성 없는 사람도 많고, 영남, 호남에서는 아무리 명단이 발표가 되더라도 소용이 없이 여전히 지역주의로 나타날 것이고 쟁점이 되는 지역들이 수도권 인데 강동을에 김중위, 종로에 이종찬, 부천 이사철, 구리 이건개 정도가 표로 나타날 수 있는 낙선 대상자들입니다. 서울에서의두 곳 중에도 이곳은 더욱 의미가 있는 지역이기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 맨 처럼 양쪽에 글씨가 쓰여있는 조끼를 입고 음식점과 경로당을 돌기도 하면서 주민들과 대화를 합니다. 선거라는 것이 참 치사한 운동입니다. 도망가는 사람을 붙들어 이야기를 해야하고 별로 원치 않는 상대의 쌀쌀한 눈살을 대하며 외쳐야하니 정말 스타일 구기는 쑥스러운 일입니다. 한쪽으로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나?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한다고 내표가 한표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 교인이 한사람이라도 늘을 것 같지도 않고, 내 주머니 털어 사람들 밥사먹이고 돈 써가며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내가 살짝 돌기 시작했는가? 아무리 보아도 저분(십자가를 가리키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분 만 아니면 내가 이렇게 무너지지 않고 체면차리며 편하게 지날 텐데... 자꾸 그 양반이 내 안에서 충동질 치는 바람에 공연히 욕먹어 가면서 이런일을 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을 얻고,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데, "내가 예수를 영접합니다.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가? 열려라 깨! 하고 주문을 외우면 문이 열리는 것 처럼, 이런 고백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주문인가? 하나님은 이 주문에 꼼짝없이 묶여서 우리에게 구원을 내려 줄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로봇이란 말인가? 예수께서 "인자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막10,45)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한사람의 죽음으로 앞으로 오는 모든 세계의 속한 사람들이 자동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가? 그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단번에 완성되는 우주적 구원의 드라마이며 단 한번으로 모든 구원을 결정짓는 완결판인가? 우리는 단지 주문을 외우거나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가? 아닙니다. 내용없는 십자가는 단지 악세사리일 뿐입니다. 주문 외면 구원이 떨어지고 십자가의 부적을 부착하면 하늘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의 주문대로 가만히 앉아서 신통력을 행사하는 도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지금 물리적 십자가가 있숩니까? 우리가 매일 "십자가, 십자가" 하고 고백하지만 요즈음 거리에 누가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사람있습니까? 사실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정치범을 다루는 형틀인데, 지금은 로마도 없고, 십자가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 그 일의 한 자락을 굳이 내가 지고가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외면하고 갈 수도 있는 일, 그 일을 부득불 내가 나서 걸머지고 가는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누군가 치워야할 이 역사의 짐덩어리를 내가 팔 걷어 부치고 한쪽으로 치워놓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 인 것입니다. 오늘 이런 십자가는 약간 맛이 간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제 일에 손익 게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 예수께서 가신 길이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는 놀라운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바로 총선시민연대 전국대표자 회의가 있어 동두천 쪽에 외떨어진 수련관에 모였습니다. 회의장에 도착하자마자 보안을 위해 핸드폰도 맡기고 나가지 못하게 차 열쇄도 맡겼습니다. 지난 번 낙천자 발표시 기자회견을 하고 발표하기로 하였는데 사전에 명단이 유출되어서 회견 전에 명단 보도가 나가버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밤이 꼬박 새도록 회의를 하고 다음날인 월요일 총선시민연대에서는 낙선 대상자 86명을 발표했습니다. 대상자 한명 한명을 검토하면서 밤을 꼬박 새우고 토론을 했습니다. 각 지역 총선연대 대표들이 강한 사투리로 발언을 했습니다. 역시 극성 스럽기는 단연 대구 대표였습니다. 두 사람이 나와서 서로 번갈아 이야기하며 거의 독점하다시피 반복되는 주장을 했습니다. 사회자와 다른 대표들의 핀잔을 받아가며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광주 대표도 이에 못지 않았습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발언 태도나 강한 사투리 억양이 번갈아 가며 피곤한 회의를 더욱 길게 만들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대구 대표건, 광주 대표건 이 사람은 꼭 넣어야 된다는 것이고 중앙 총선연대의 입장은 그 정도의 증거로는 명단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구 대표는 이 사람이 말끝마다 "이 정부가 대구 공장 다 부도내고 전부 호남으로 빼돌렸다"고 하는 사람인데 왜 안넣느냐는 것이고 광주 대표 역시 이 사람 말끝마다 "호남인이여 단결하자"를 외치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인데 꼭 넣어야한다 발언이었습니다. 강한 억양의 사투리 틈새로 영남도 호남도 아닌 다른 실체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민족이란 실체가 만져졌고 민주시민의 양심이 느껴지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한 지역에서는 7선 의원인데 개인 재산이 320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세입자들의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고 버티다가 고법 판결이 나서야 전세금을 반환하는 아주 나쁜 악덕 인사라는 것입니다. 그래 이 지역에서 만장일치로 우선적인 낙선대상자로 올린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들어가고 이 사람 빠진 것이 무슨 이유인가를 따졌습니다. 대구 대표도, 광주대표도 모두가 일등 대상자를 빼놓은 것에 반발했습니다. 그 사람을 잘 아는 그 지역의 정서로는 분명히 그들이 더 더욱 나쁜 사람들입니다. 다른 대상자보다 훨씬 나쁜 사람이다는 그 지역의 강력한 주장있었으나 그들은 법으로 걸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들은 투표를 통해 이들은 낙선 대상에서 제외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낙선 대상자를 86명 선정하기는 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선정하지 못한 더욱 나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시민운동이 국민의 80%의 지지를 받니 뭐니해도 과연 몇 석을 갈아내고 표로 나타내 보일까는 지극히 의심 스럽습니다. 오늘의 이런 정치상황을 보면 예수님은 "목마르다!"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이 제일 많이 애원하는 것이 "목마르다"는 애원입니다. 십자가는 손과 발에 못을 치더라도 이 것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습니다. 금방 피가 응고되고 대신 사막의 뜨거운 햇빛에 온몸을 말려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극도의 갈증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름, 한달씩 목숨이 유지되며 십자가 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한방울 만 혀에 찍어 달라는 애원을 하다가 숨지는 것입니다. 마치 생선을 햇빛에 말리듯 사람을 말려 죽이는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시편 69,21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약을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신포도주는 예수님의 갈증을 적셔주기 위해서 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신 포도주는 예수님의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니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더욱 갈증을 유발시키는 독약과 같은 것을 적셔드린 것입니다. 목이 마른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지요, 목이 말라 애원하는 분에게 그런 것을 내 놓는 현실이 바로 목마른 현실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께서 예비된 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마지막 탄성과 같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주머니가 채워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자신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오히려 배반당하고 찢기우고,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의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 5)
그러면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내 몫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는 상받을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목을 채우는 일보다는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그들을 위한 음료로 내어주시고 그들을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는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목마르다"라고 소리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남의 메마른 가슴에는 샘물을 파주면서 자신은 끝내 목말라야 했습니다.
파송)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에 목말라 하십니까? 조롱처럼 신 포도주가 여러분 입에 물려질때라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신기한 부적입니까? 여러분 몫의 십자가를 기다리는 구원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골고다의 십자가들이 지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목마르다" 고 저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
요 19:30- / 최낙중 목사
1960년대에 미국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절세미인 마를린 먼로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모든 남성들이 그녀에게 사로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인기절정의 그녀가 매주 번돈은 2만달러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전 재산은 2억불이 넘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2400억이 넘는 돈입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영혼의 갈증은 미모나 명예나 돈으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만족시켜줄 남자를 맞아서 세 번이나 결혼하였지만 마음의 공허는 매꿔지지 않았습니다. 잠못드는 밤이 많아지면서 수면제를 의지하고 지냅니다. 어느날 그녀는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서 “나는 이세상 여자중에서 가장 성공한 여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이다.”라는 말을 하고 그날 밤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36살의 나이에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명예와 돈으로 매꿀수 없는 영혼의 공허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죄로 타락한 인생들은 남이 갖지 못한 미모, 명예, 권세, 그리고 많은 돈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 많은 재벌 회장도 마음의 번뇌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거북이는 300년을 산다지만 우리 인생은 100년 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나그네 인생길을 살면서도 공고한 날이 얼마나 많습니까? 히9:20 ‘한번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누가 우리 인생들을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에 성공을 한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한 그 원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전됨으로써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것입니다.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들어 우리집 안방으로 보낼 때 중간에 선이 끊어지면 밝은 불을 얻지 못합니다. 상수원에서 우리집까지 연결되는 수도 파이프가 중간에 막히거나 끊어지면 수돗물을 얻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인간이 지은 죄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엡 2:14이하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의 막힌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을 자기 육체로 패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라고 한 것입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는 것입니다. 소멸은 자취나 흔적도 남기지 않토록 없애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조상 아담이 지은죄와 우리의 모든죄를 일순간에 모두 없애 버리셨습니다. 우리 모든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다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흘린 피가 우리 죄를 다 없애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우리 죄를 도말해 버리십니다. 도말, 그것은 다 갈아 없애버린다.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의지만 하면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43:25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이런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은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미하고 영광 돌려야 합니다. 늘 찬송 불러야 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영원토록 내 할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마다 예수의 피를 주장하고 나가면 사탄은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 그것은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힘. 그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하셨던 일도 할 수 있다고 주님 말씀 하십니다. 요 14:12이하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일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일. 만민의 죄를 대속 하는일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일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다든지, 기도하면 병자가 고침을 받는다든지, 전도한다든지, 주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일은 주님을 본받아 할 수 있습니다.
요1서 3: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우리 안에 구주로 영접할 때 주님은 우리안에 계시고 또 나는 주님안에 있으니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례의 신학적 의미는 주님과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롬6:8에 보면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생명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마음에서 의심과 염려와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 말씀을 감사하며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은 구원의 사건을 우리가 다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은 십자가의 사건. 그것은 우리의 질병도 담담하셨고 주님이 가난하게 사신 공로 때문에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부유를 누릴 수도 있게 하셨으니 불안에서 해방되어 평한케 되었으니 다 이루셨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다 이루어 놓으셨으니 이제 주안에서 즐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빚 단련
요 19:30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빚단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빚단련을 받아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것을 체험으로 느껴 알 수 있습니다. 문풍지 소리만 나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고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짓누르는 불안과 공포를 가라앉히며 휴우~ 통탄의 한숨을 쉬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을 때 그 엄청난 빚단련의 고통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빚단련이 얼마나 무서운지 심하게는 자살에 까지 몰아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빚진 자
그런데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빚쟁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 우리 조상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에덴에서 내어 쫓긴 이후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빚을 걸머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죄 값을 하와에게 돌렸고, 하와는 뱀 탓으로 돌리고, 서로 죄를 책임 안 지려고 했지만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사망의 심판을 받고 내어 쫓기고 만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상속받은 죄, 자기의 죄를 더하여서 우리는 죄 중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의로운 삶을 가지고서 죄의 값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 의로운 행위를 가지고서 죄 값을 다 갚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요. 사람들은 자기는 죄가 없고 남만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의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 세례 받는 날 시어머니에게 세례 문답 받기 위해서 당부 당부했습니다. “어머니, 목사님이 누구 죄로 예수님이 돌아가셨느냐 그러거든 내 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세요.”“알았다.” 그런데 또 세례 문답하러 가는 직전에 “어머니, 꼭 확신하세요. 누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느냐? 하고 목사님이 묻거든 내 죄로 돌아가셨다고 말하세요.” 그러니까 “내가 안다니까 왜 자꾸 묻느냐?” 그래서 모든 교인들 앞에서 목사님이 물으셨습니다. “할머니, 누구 죄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까?” “그야 우리 며느리 죄로 돌아가셨지!!” 모두 다 자기 죄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인정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 죄요, 크고 적은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 아담의 후손으로써 원죄, 자기 자범죄를 보태여서 죄 가운데 허덕이는데 하나님은 죄의 빚을 갚으라고 그럽니다. 죄의 빚을 의로운 행위로 갚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22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인간의 힘으로 죄의 빚을 갚을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입니다.
그 다음엔 부정부패의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정부패한 성품을 갖고 납니다. 그것을 거룩한 삶으로 부정부패를 갚으라. 마음에 음란하고 방탕하고 시기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도박하고 세상 죄를 짓는 부정부패한 마음의 빚을 거룩함으로 갚으라고 그럽니다.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거룩함으로 나의 부정의 성품을 갚을 도리가 없습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함으로 우리의 부정부패한 마음을 청산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탄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인간이 될 수밖엔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또 질병의 빚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삶의 열매인 심신의 질병은 우리의 몸을 더 내 놓아라 독촉합니다. 가장 우리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죄와 병인 것입니다. 한평생 태어나서 병 앓지 않고 살다가 가는 것은 큰 축복인데 나이가 먹으면 원치 않는 병들이 어디에서든지 다가오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워진다든지, 귀가 안 들린다든지, 관절염, 신경통, 좌골신경통, 장, 폐, 심장 할 것 없이 다 무너져 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사망의 열매가 바로 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반드시 병을 고친 것입니다. 죄와 병은 형제간인 것입니다. 죄가 형이고 병은 아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할 때 병을 반드시 고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우리에게 몸을 더 내놓으라고 그럽니다. 너는 죄지은 사람이니까 죄 값으로 몸을 더 내놓으라. 더 병 들으라. 강하게 우리에게 강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수련을 해도 다가오는 병마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병은 끊임없이 빚 독촉을 하고 우리에게 더 많은 육체의 고통을 내놓으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저주의 빚입니다.
타락한 형벌로 주어진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가 우리의 삶을 점령하려고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더 가난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더 고통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더 낭패와 실망 당하기를 저주는 원하는 것입니다. 저주는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점령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금융 불안에 처한 것도 세계가 하나님을 떠나 살기 때문에 다가온 저주의 역사인 것입니다.
몇 해 전부터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서 전해져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을 배회하는 탈북동포들이 고생을 들어보면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폭행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도 탈출한 몸이라 고발할 수도 없고 그 견디기가 어려운 고통 속에 관원에 잡히면 북한으로 다시 북송되고, 북한에 들어가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처절한 대우를 받는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이들의 삶은 일말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저주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하나님 버리고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로 우리가 사는 생활은 어느 곳에 가나 저주와 낭패와 실망이 있는 것입니다. 축복과 은혜보다도 저주와 고통이 더 많은 삶속에서 저주는 우리에게 더 인생의 부분을 내놓으라고 그럽니다. 더 많은 저주를 받으라고 우리에게 저주의 빚을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지불해야 될 빚은 죽음과 음부의 빚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검은 손이 우리를 따라 붙이고 음부의 절망으로 우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때가 이르기도 전에 목숨을 거둬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병으로, 사고로, 전쟁으로, 기아로, 고통으로, 죽음이 우리 주위에 늘 따라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음부가 입을 크게 열고 영원한 지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압박을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 사정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모든 빚을 우리의 힘으로 갚을 도리가 없습니다. 죄의 빚도, 부정의 빚도, 질병의 빚도, 저주의 빚도, 죽음의 빚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깨에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빚 독촉 때문에 우리가 심령으로 고통을 당하고 생활에 염려, 불안, 초조, 절망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빚 갚아주려고 오신 예수님
누가 이 빚을 갚아줄 수 있습니까? 우리 부모님도 빚을 짊어지시니 못 갚아 주고 나도 빚쟁이고 우리 자손도 빚쟁이고 전부 인생들은 빚투성이니 아무도 서로 도와줄 수 없는 비참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 갚아주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빚 없이 아담의 혈통을 갖지 않고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부모의 몸에 태어났으면 빚을 상속받아 태어났지요. 그러나 아버지 없이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빚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빚 없이 잉태되고 빚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온 인류의 빚을 대신 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31절에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5절에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빚보증이 되어 오셔서 빚을 청산하고 우리를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로 6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의 빚을 갚으신 그 모습을 예수님 오시기 5백여 년 전에 이사야는 예언을 통해서 이사야 53장 4절로 8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했었습니다. 병들면 슬퍼지잖아요. 고통스럽지요. 실로 진짜로 가짜가 아니고 형식적이고 아니고 종교적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우리 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며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한 것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어린양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고 지은 적도 없는데 너의 죄, 나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책임 지으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그러므로 죄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갈보리 산에 올라가서 양손과 양발에 못이 찔리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그 고통과 그 괴로움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영원히 떠났다고 했는데 다 이루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테테레스타. 내가 다 빚을 갚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빚을 깡그리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전해준 빚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개인이 지은 일생의 죄의 빚을 주님께서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부정부패의 빚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질병의 빚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저주의 빚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빚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정의로운 삶으로 죄악을 갚으라고 하면 예수님이 나의 정의로운 삶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가 있고 부정부패를 거룩함으로 갚으라고 하면 예수님이 나의 거룩함이 되었다고 말하고 몸의 병으로 내어 놓으라고 말하면 예수님이 나의 건강이 되었다고 말하고 저주가 우리를 점령하여 저주로 너희 인생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면 예수님이 나의 축복이 되었다고 말하고 사망과 음부가 입을 열면 예수님이 나의 부활과 생명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천지에 예수님이 충만하고 예수님을 내가 모셔 들이면 예수님이 나에게 빚이 다 청산 된 것을 증언하시고 부정부패를 청산하시고 질병의 빚을 갚으시고 저주의 빚을 갚으시고 사망과 음부의 빚을 다 청산해 버린 주님께서 완전히 깨끗하게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니라"
“반쯤 이루었다. 반은 네가 책임지라. 90% 이루었다. 10% 네가 책임지라.”그렇게 말 안했어요. "100% 내가 다 책임졌다. 100% 내가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안심하라."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3.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다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만은 지나갔습니다. 죄악의 종이 되고, 부정부패의 종이 되고, 질병의 노예가 되고, 저주의 노예가 되고, 사망과 음부의 종이 된 우리 옛사람은 지나가고 청산되어 버리고 말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것이 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 어떤 새사람이 되었나요?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 우리는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디도서 3장 5절로 7절에 "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 속에는 더러움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결코 갈수가 없습니다. 배설물 속에 우리가 살수 없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그 속에 살아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새롭게 된 것은 부패와 부정은 사라지고 거룩함과 성령 충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치료받은 사람이 되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도다” 하고 말씀하셨으며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어떤 병이 들렸던지 병은 병이요, 치료하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병을 보고 늘 말해야 됩니다. “너는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 병은 내 몸에서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우리가 싸우면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항복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질병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원하기 때문에 연약한 틈을 타서 가지가지 병을 가져오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말씀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서서 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저가 너를 피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나는 나음을 입었으니 너희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 너희 폐병아 물러가라! 심장병아 물러가라! 중풍병아 물러가라! 당뇨병아 물러가라! 고혈압은 물러가라! 대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아니면 천 번이라도 대적하십시오. 치료받은 사람이 되어서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옛사람의 병을 걸머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 마음 속에 인식하고 알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에는 저주받고 가시와 엉겅퀴 속에 허덕이고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구약성경에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축복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축복의 원천인데 왜 나무에 달렸습니까? 여러분이 저주, 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나무에 달려 청산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값 주고 사주셨습니다. 여러분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복이 나와 함께 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잠을 자도 복을 받고 깨어 있어도 복을 받는다. 나는 복인이다. ” 옆에 계신 분들을 보고 당신은 복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야~ 우리는 이제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저주 의식을 저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난 의식도 저버리고 부요, 풍부 의식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외치십시오. 저주야 물러가라! 가난아 물러가라!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복의 근원이 되었다. 복이 나를 따른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주신 은총을 누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영생 복락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죽어 음부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천국 영생 복락을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세상에도 거처가 없는 사람들은 월세집, 전셋집, 정 갈데없으면 한강변에 노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천당에 올라가는 사람이 거처가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낙원에 우리의 거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낙원에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공짜로 거처를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내일에 갈 장소를 알고 있으므로 오늘 죽음이 나를 점령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못합니다.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우리는 담대하게 사망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은 내일에 영원히 살 거처가 예비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를 믿지 않는 사람은 내일의 거처가 없어요.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서 방황하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니 얼마나 불쌍한 것입니까?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새사람이 되었는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의롭게 되고 나는 거룩하게 되고 치료 받아 건강하게 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고 천국의 거처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새 사람 된 것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고 나는 새 사람이 되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특권 받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택하신 족속이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고 알고 믿고 입으로 늘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여러분 이런 것을 꿈꾸고 이런 것을 믿고 이런 것을 말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십시오. 옛날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나는 죄악투성이요, 죄로 버림받았다는 생각 버리십시오. 부정부패하고 마귀와 세상에 묶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병자로써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가난하고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미래 죽어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오중복음으로 생각을 바꾸시고 삼중축복으로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화상을 새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너는 새로운 사람이다.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 너는 거룩한 사람이다. 너는 건강한 사람이다. 너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복인이다. 너는 천국 영생을 얻은 사람이다. 자기 자화상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외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믿어야 돼요. 부정적으로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믿으십시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리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그렇게 된다고 믿으면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는 데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술의 말을 항상 긍정적으로 말하십시오. 입술의 말은 환경을 따라, 감정을 따라 ,느낌을 따라 흘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으니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폭풍우 가운데 배가 항구를 찾아가는 것은 배 밑에 있는 적은 키가 운전을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을 향하게 하는 것은 혀가 키가 되는 것입니다. 혀로 말미암아 여러분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말하면 의로운 방향으로 갑니다. 거룩하다고 말하면 거룩한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건강하다고 말하면 건강한 방향으로 가고 축복 받았다고 하면 축복받은 방향으로 가고 부활 영생 천국인이 되었다면 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올바르게 사용해서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여러분을 생각하고 여러분의 모든 퇴폐한 과거 인생을 걸머지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청산해 버리고 내가 너를 위해서 다 이루었다. 조용기야 내가 너를 위해서 다 이루었다. 여러분 이름이 누구신지 모르는데 한번 말해 보십시오. 누굽니까?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 할렐루야~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도와줄 이 구주 예수 밖에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오늘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다 책임 졌습니다. 여러분 마음과 여러분의 자화상과 믿음과 꿈속에서 옛사람을 벗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가 지어주신 새 사람을 받아 입으십시오. 여러분은 새롭게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같이 있어서 매일 매일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경제공황으로 떠들썩하고 한국도 경제적 어려움이 다가왔지만 우리는 환경을 따라 살지 않고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땅을 보고 살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마른 광야를 지나가면서도 그들은 만나를 매일같이 얻어먹었으며 바위에 물이 터져 물이 나왔으며 메추라기가 날라 와서 고기가 되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 때문에 세계 경제공황에 우리는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십니다.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 손을 꽉 붙잡으십시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십시오. 주님을 끌어 앉으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