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뇨의 증기차를 현대적으로 복제한 것입니다.
실제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니콜라스 조셉 쿠뇨
1769년 프랑스의 니콜라 퀴뇨가 처음 발명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이다. 처음에는 화포 견인용으로 발명했는데 당시 증기기관 자체가 성능이 열악해서 속도는 약 4km/h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 속도는 4톤짜리 포차를 끌고 가면서 기록한 것이므로 당시 군대의 행군을 따라갈 정도의 성능은 되는 수준이었지만 브레이크가 없어서 조향 실수로 주택의 외벽을 박는 세계 최초의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퀴뇨는 위험한 기계장치로 대중에게 겁을 준 죄로 2년형을 받고 수감되고 채용은 없던 것이 되었다. 다만 루이 15세는 600리브르의 상금을 하사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상 최초의 교통사고라고 부르는 사건(파르디외와 파리 무기고 벽의 충돌
이후 19세기 말까지 유일한 자동차 동력원으로서 활동하다가 내연기관의 발달로 점차 쇠퇴했다.
다만, 초기 내연기관에 비해 열등하여서 퇴출당한 것은 아닌데, 우월한 토크를 바탕으로 한 가속력과, 증기 응축기의 도입으로 증대된 운행거리, 백여년간 증기기관이 사용되며 쌓인 안정적인 설계 노하우 등을 기반으로 훨씬 안전하고 빠르며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었다. 철도에서 증기 기관차가 오랫동안 사용된 이유와 동일하다.
심지어 편의성마저 초기 내연기관에 비해 우월하였는데, 우월한 토크덕에 클러치나 트랜스미션이 필요하지 않아 운전도 편리했고, 외연기관의 고질적인 단점인 즉답성 문제도 당시 내연기관 자동차들이 크랭크로 시동을 걸던 시기였기에 크게 대두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운전석에서 점화장치를 가동하고 수 초만 기다리면 되었기에 간편하다 여겨졌다.
다만, 외연기관은 소형화하기 힘들다는 단점으로 인해 퍼포먼스보단 생산성이 중요한 저가 승용차 시장에서는 서서히 밀려나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큰 출력을 필요로 하는 트럭 이나 트랙터로는 1920년대까지 우수한 정숙성과 저공해 조작의 용이함 덕에 고급 자동차로는 1930년대까지 생산되었다.(나무위키)
Fardier의 미래 창시자가 공부했던 Mezières의 군사 공학 학교
증기 트랙터 제작 서사시의 다른 캐릭터는 다음과 같습니다. Gribeauval 장군, Choisier 장관, 프랑스의 Louis XV 왕
우아한 증기기관 계획. 보일러, 엔진, 스프링이 없는 리어 액슬, 브레이크가 전혀 없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그림은 1770년 4월 고객에게 선보인 테스트 준비가 완료된 작은 Fardier 사본을 보여줍니다.
실물 크기의 Grand Fardier는 원래 버전보다 약 2.5배 더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진에서 Cugno의 카트를 움직이게 하는 레버-래칫 메커니즘의 디자인을 볼 수 있습니다.
Fardier의 총신은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장착되어야 했습니다.
쿠뇨 카트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원래의 디자인이 오늘날까지도 우수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Grand Fardier는 이전 Arsenal 건물에 위치한 예술 공예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Fardier”의 “역사적” 여행을 재구성하면 항상 시끄럽고 연기가 자욱하며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