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벌써 아침인가…아직 일어나기 싫은데…그치만 해가 중천에 떠있는 걸 보니 아침은커녕 정오가 지난 것 같다. 정말 어제는 무리했지…아, 머리야. 기억도 잘 안 나고…하하하, 그렇게 술을 부어라 마셔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하지만 내가 무방비인 틈을 타서 어떻게 헤코지한 녀석은 없겠지? 있다면 당장에 엉덩이를 차 줄 거야. 아니, 평생 치질로 고생하도록 항문을 쑤셔주는 것도 좋겠지. 오호호호호.
“아~잘잤다.”
나는 기지개를 폈다.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는데 뼈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자서 그런 건가? 몸이 상당히 불편하다. 아니면 이런 평화에 익숙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
정말 요즘엔 평화스러운 날들 뿐이다. 의외로 트리트란과 다른 세력의 마찰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 걸 거다. 아, 먼저 나를 소개해야겠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트리트란의 최전방 부대의 홍일점인 엘렌. 매력 포인트는 블루블랙의 긴 머리칼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외모는 요정의 피를 이어 받은 자답게 여느 왕국의 공주보다도 아름답다고 자부한다.
지금 공주병이라고 생각했지? 흠…뭐 어쩔 수 없지. 예쁜 건 예쁜 거니까. 호호호호호. 아, 분위기를 흐렸군. 미안.
어쨌거나 이렇게 평화로운 날을 즐기는 것도 오랜만이야. 내가 있는 곳은 트리트란의 최전방이기 때문에 가장 전쟁이 잦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전투가 있었는데 일주일 간이나 전투는커녕 세작조차 보이질 않으니…뭔가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아, 모든 게 평화로워. 하지만 딱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면 두 바보 녀석들의 혈투라고나 할까. 혈투라고 해봤자 저속한 말을 내뱉으며 몸으로 부딫히는 게 다지만 말이야.
“이번에야 말로 죽여주마!”
“닥쳐! 이 프루딩딩한 도깨비! 나야말로 이번엔 네 엉덩이를 차 주마!”
어김없구나. 동이 튼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싸움질인지…그렇게 싸움이 좋으면 혼자 도깨비 진영으로 뛰어드는 편이 좋을 텐데…조금 위험한가? 아아, 조금이 아니구나. 어쨌든 이런 오랜만의 평화를 깨는 멍청한 녀석들을 용서할 순 없지.
“둘 다 닥쳐! 활로 눈알을 뚫어버리기 전에!”
그러자 초록색 도깨비가 움찔한다. 저 녀석의 이름은 두억시니라고 하는데 한 자루 방망이를 잘 쓰는 녀석이다. 그 방망이에는 길고 짧은 가시가 여러 개 박혀 있어서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두억시니가 쓰는 방망이는 평범한 방망이가 아닌 마법의 방망이이가도 하고. 그걸로 동족의 머리를 터뜨리는 모습은 잔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다. 초록색 괴물끼리 엉켜서 두개골을 깨부수고 심장을 후벼파는 건 일종의 행위예술이 아닐까? 아닌가? 내 취향이 이상한 거야? 아니겠지 뭐.
그렇게 강하고 잔인한 도깨비이긴 하지만 이 녀석도 약점은 있다. 바로 예쁜 여자한테 약하다는 것. 게다가 이 녀석은 특이하게도 인간과 동일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찍소리도 못하지. 하지만…
“닥쳐!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야, 멍청한 도깨비! 네 놈도 저딴 년 말은 듣지 말고 빨랑 나랑 자웅을 가리자!”
이 두뇌까지 근육으로 됐을 듯한 우락부락한 남정네는 전혀 다르다. 이 녀석은 도깨비나 오크와 같은 심미안을 가졌는지 나는커녕 트리트란을 비롯한 전 요정 족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네페르타리 언니에게도 바락바락 대드는 녀석이니…이 녀석 혹시 게이? 그거까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 알 자르는 확실히 이상한 녀석인 거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주름하나 없는 얼굴, 약간 우락부락하지만 균형이 잘 잡힌 근육, 약간 뭉뚝한 코만 아니라면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의 얼굴인데 애인하나 없다는 건…역시 이 녀석은 게이!
어찌됐든 나에게 ‘년’이라고 한 녀석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정말로 눈을 뚫어 버릴 수는 없지만 본때를 보여주겠어!
나는 일어서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아직도 두억시니에게 욕지기를 내뱉으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두억시니는 나를 바라보면서 머리만 긁적였다. 나는 살짝 윙크를 해 주고는 빠른 속도로 자르에게 다가갔다. 요정 족답게 소리도 내지 않고 빠르게 공격 가능한 범위로 들어 간 거다…?아니 들어가려고 노력했다…?아니 해 봤다…….
자르는 흠칫하면서 뒤로 물러섰지만 내가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느리다. 물론 이 녀석이 근육만 주렁주렁 달고 있지 않았다면 사정은 달라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이 녀석의 움직임은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뒤로 물러서는 녀석에게 다시 한 번 뛰어서 간격을 좁혔다. 코와 코가 닿을 거리에서 나는 팔꿈치로 녀석의 명치를 쑤셨다. 아무리 근육으로 몸을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다고는 하나 급소는 방어하지 못하겠지?
내 예상대로 녀석은 명치를 맞자마자 비틀대면서 무릎을 꿇었다. 당연히 그 다음에는 먹었던 음식 군을 내뱉는 과정이 시작됐다. 나는 폴짝 옆으로 뛰어서 음식 군들을 피했다.
“웨엑!”
“흥흥, 또 년이라고 해 봐. 그 때는 아예 결혼을 못하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나는 그렇게 얘기하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내가 이렇게 자르에게 모욕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나를 노려 볼 뿐이었다.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깨진 이상 할 말이 없는 거지. 게다가 이 녀석은 아직도 음식 군을 다 토해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숲 속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새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정령들과도 놀고~흠…어른 들이 말하는 이형의 아이라서 조금 쌀쌀 맡은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정령 왕한테도 놀러 가 봐야겠다. 이것도 얼마 후엔 못할 지도 모르니까.
“루나디스파랄루즈벤요(luna disparar luz ven yo)"
세 개의 육망성의 진이 내 곁에 펼쳐졌다. 하지만 그 모습이 조금씩 달랐다. 먼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꼭지 점마다 일렁거리는 불이 붙어 있었고 내 오른 쪽에 있는 것은 꼭지점 마다 번개가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의 꼭지 점에는 초생 달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각기 불, 빛, 달의 요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에서는 자그마한 정령들이 나타났다. 빛의 정령 왕은 그 이미지답게 찬란하게 빛나는 예쁜 소녀였고 불의 정령왕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어린 소년, 달의 정령왕은 성숙하고 아름다운 숙녀의 모습이었다.
“야~오랜만이야. 이틀만이지? 엘렌은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모를 거야. 이 바보들은 얘기도 잘 하지 않는다구. 특히나 이 바보 디스파랄은 뭐라고 얘기만 하면 막 화를 내는 거 있지? 루나 언니는 상대는 해 주지만 너무 쌀쌀맞아서 같이 있으면 추운 것 같아.”
빛의 정령인 루즈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장난스런 모습에 웃음을 터뜨려버렸고 루즈도 내가 웃는 것을 보자 언제 짜증냈냐는 듯이 베시시 웃는다. 그 순간 달의 정령인 루나가 내 어깨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무 하네 루즈. 나도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상대해 준 거라고.”
루나는 그것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빤히 바라 볼 뿐 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디스파랄이 루즈에게 버럭 달려들었다.
“루즈! 그건 네가 하도 귀찮게 해서 그런 거라고!”
“흥! 흥! 말만 꺼내면 시끄럽다고 했으면서?”
“파하하하하하하!”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정령 왕이라는 녀석들이 전혀 체통이 없다. 물론 다른 정령들 앞에서야 근엄한 척 있겠지만 이 녀석들의 본심은 어린 아이나 다른 없지 않은 가? 웃겨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다. 그나마 정령 왕에 걸 맞는 녀석이라면 루나 뿐 이랄까? 하지만 가끔 엉뚱한 짓을 하는 걸 보면 루나조차도 그다지 정령 왕 같지 않은 녀석으로 보인다. 물론 인간이나 다른 종족, 그리고 생활상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긴 하지만.
아,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나네. 전쟁 동안 싸여왔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위험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어. 정확히 이곳으로. 마가 강림하려는 걸까?”
루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음험한 기운, 음기, 찬란한 어둠이 도래 할 거야. 조심해 엘렌. 너는 그 소용돌이의 중앙에 있어. 가장 안전하지만 한 발짝만 잘못 움직이면 바로 죽음으로 가는 그런 위험한 곳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달의 정령 왕인 루나의 능력인가? 홀로 밤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답게 어둠의 미래를 예견하는 그런 것인가? 나는 루나의 이야기를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루나가 워낙에 진지한 성격이기도 하고 지금 같은 얘기일 경우 한 번 내뱉은 뒤에는 수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디스파랄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느껴지는 군. 루나처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 엄청난 마의 기운은 확실히 위험하다. 천사, 혹은 사도가 현세에 강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자 루즈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박했다.
“말도 안돼! 사도의 마기는 우리 같은 정령 정도가 아니야. 악마에 버금가는 마기를 가진 녀석들인데 어떻게 현세에 발을 들여 놔?”
“그건 그렇지만…”
세 명은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나도 사도, 악마, 정령 등에 대한 기본지식은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령 왕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옆에 있는 참새와 대화를 할 뿐이었다. 나는 참새를 내 손등에 올려놓은 채 중얼거렸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안 그러니 참새야?”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쁘다. 하지만 동시에 섬칫하기도 하다. 핏빛은 언제 봐도 무섭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이래뵈도 감수성 예민한 소녀라고. 나이도 19밖에 안 됐는데 뭐.
-주저리의 장-
왠지 들뜬 분위기의 소설이죠? 사실 그 동안 써왔던 게 전부 우울 모드의 소설이었거든요. 아, 그리고 달라진 건 그 뿐이 아니랍니다. 처음으로 여자가 주인공인 거죠. 훗훗. 여러가지로 제가 도전하는 소설이니까.....아....그럼 허접한 소설이 될라나? 뭐 그러지 않기를 빌어야죠. 그럼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그, 근데 또 구걸하면 화내실 건가요?(파캉)
첫댓글 뭘까, 처음부터 좀 정신없는 감이 없지 않아 있네요. 아직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전에 처음부터 좀 강렬했던 듯. 건필하세요.
컹....마녀 님 꼬릿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