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편한 모임
살다보니 이런저런 모임에 속해 있다. 공적인 모임과 자유로운 모임이 있는데 내 성격대로 공적인 모임은 적고 자유로운 모임이 몇 개 된다. 그 중 하나 무해무득한 모임이 있다. 유명무실이란 말이 어울릴듯한데 모임 이름이 무명회니 유명은 아니다. 그럼 무명무실인가? 무명무실이면 없는 것 아닌가? 네 명이 회원인데 모두 같은 교단 목회자다.
모임을 시작한지는 몇 년 되는 것 같지만 정확한 것은 누구도 모른다. 어떤 때는 반년도 모이지 않고 지나가고 때로는 자주 모이기도 한다. 모임에 딱히 임원도 없고 회비나 규칙도 없다. 최근 들어 한 달에 만원씩 적립을 하자고 하더니 둘은 자동이체로 꼬박꼬박 적립을 했고, 한 사람은 안 냈고, 제안자는 한 번 딱 냈다. 어쩌다 모이면 누군가 비용을 내곤 했는데 내가 낸 기억은 생각나지 않는다. 청주 어디서 모여도 한 시간이면 다 올 수 있는데 무엇이 그리 바쁜지 관심이 적어선지 잘 모여지지 않는다.
자주 모이지 않는 게 다행인 것인가? 서로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모일 텐데 그런 일이 없다는 반증 같기도 해 뭐라 잘라 말하기 어렵다. 오랜만에 내가 한번 모이자고 문자를 보냈더니 모두 그러잔다. 토요일인 어제 약속장소인 묵 집에서 만났다. 만나면 서로 반갑고 헤어져 있던 세월의 간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마침 봄 가뭄을 해갈하고 미세먼지를 쓸어낼 것 같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유리창 밖으로 연초록 나무순들이 돋아난 걸 보면서 빗소리를 들으며 함께 하는 식사가 운치 있었다.
분명한 목적이 없으니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고 자유롭다. 밥값을 내는 문제에 이르러 한 사람이 내겠다는 걸 그러면 앞으로 누군가 계속 부담스럽고 암묵적으로 모두 마음이 쓰일 테니 지출을 인원으로 나누어 내자고 했다. 요즘 합리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1/n계산이다.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그렇게 합의를 이뤘다. 1/n 기념으로 찻집에 가기로 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었다. 공원묘지로 가는 길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어 바깥풍경이 아름다웠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연스레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로 화제가 쏠린다. 한 사람은 교정선교를 하면서 큰 상을 받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부친이 지역에서 유명한 목회자이셨는데 소천 후에 상패만 몇 부대를 버리느라고 고생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가능하면 상을 받지 않으려 했는데 계속 사양만 할 수도 없어 받게 되었노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이클과 수영으로 체력 관리를 가장 잘 하는 것 같은 사람은 주일저녁 예배 막바지에 축도를 했더니 교인들이 모두 따라해 당황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주기도문을 축도로 착각해 외우고 있었다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
만난 지 수십 년이 되어가니 별 일화들이 다 생긴다. 그분이 어떤 모임을 이야기하며 나를 띄운다. 그런 때는 이런저런 변명보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 모임이 최근이고 대면 모임을 처음 했는데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모임 중에 나도 몇 줄이라도 글들을 써볼까 했다니 고무적이다. 일본의 할머니 백세 시인이야기도 하고 한글을 익히고 그분들이 쓰는 시 이야기도 나눴다. 그 속에 순수한 날 것 같은 진실함이 있음을 공감했다.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내가 몇 마디 했다. 잘 쓰려 한다고 잘 써지는 것이 아니니 자신을 돌아보며 진실하게 쓰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 했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최고를 생각하면 언제나 한 사람뿐이니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글쓰기 실력이 어느 날 갑자기 솟구치는 것이 아니니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는 일이 우선이다. 문외한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도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호사스러웠다.
변하지 않는 게 무엇이 있느냐며 오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했다.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 가르치고 배웠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정치경제를 가르치던 교사들은 그것을 반상회에 출석해 참여한 이들을 설득해야 했으니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이름도 근사했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해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던 찬성률을 거론하기도 하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추천하던 것을 화제로 삼기도 했다.
함께 모여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니 가슴이 시원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 맞은 나무들은 푸르고 짧은 시간 내린 비에도 개울물은 탁하다. 기약 없이 다음에 보자는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동행한 이로부터 여러 이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의 대단한 열심이 언제부턴가 빗나가고 변질되어 일탈하고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친다. 그 일에 있어 기본적인 상식의 부족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이 될 수 있는지에 공감했다.
목회자들이 하는 일은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열매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문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에 충실해야 하는 게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된다’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듯하다.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채 돌아가는 현실이 당황스럽다. 이 현실의 책임에서 기독인이라면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중에 가장 큰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집에 도착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옛날 순수함이 그립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