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하는 스님(선승)하면 알듯 모를 듯한 선문답, 괴팍한 화두, 기행 등이 먼저 떠오른다. 이는 아마도 대중들이 용맹정진하는 수도승에 대한 '외경'에서 비롯될 법하다. 그런데 불문에든 지 47년을 산중 선방에서 수행에만 힘써온 전남 곡성 태안사 조실 청화(71) 스님은 이런 '기대'를 비켜간다. 보통 키에 깡마른 체구, 해맑은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 담담 한 말투는 천상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의모습이다. 다만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형형한 눈빛이 수도승으로서의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선법수행체계 확립>>>
눕지 않고 앉아서 잠을 자며 좌선하는 '장좌불와'의 수행법을 지켜온 청화 스님은 또한 수년 동안 말을 하지 않는 묵언수도를 해온 당대의 우 뚝한 선승으로 꼽힌다. 그런가 하면 47년간 줄곳 하루 한 끼 공양(식사) 만을 고수한 채, 철저한 참선수행을 해 청빈한 '고행자상' 의 스님으로 선법수행 체계를 이룬 독보적 존재로 알려져 있다. 여느 스님과 신도들 은 그를 친견할 때면 으레껏 삼배의 예를 갖춘다.
"중생들이 만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 모습만을 집착해 탐착하고 분노하고 아귀다툼을 벌여 파멸의 구렁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불탄일을 앞둔 요즘 청화 스님은 전국 곳곳에서 법회 요청이 잇따라 한창 바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나와 남이 없고 천지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 인 부처님이 되는 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셨기에 인간은 비로소 억겁으로 쌓인 무명과 번뇌를 벗어나서 참다운 인간이 되는 길을 알았으 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 평화롭고 안온한 영생의 고향을 찾을 수가 있 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을 맞아 인생의 본래의 모습인 '참나' (진아)의 존 엄성을 깨달을 때만이 바른 가치관이 서고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함에도 어두운 번뇌에 가린 중생들이 그러한 자기 근원을 모르고 만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 따라 이루어진 무상한 가 짜 모습만을 집착해 너요, 나요, 내것이요 하며 탐착하고 분노하고 아귀 다툼을 벌여 파멸의 구렁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으로 민족계몽>>>
전남 무안군 운남면에서 태어난 청화 스님의 속명은 강호성. 그는 광 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한 뒤 민족 자각의식을 깨우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국내에 들어와 친구들과 함께 고향에 고등공 립학교(현 망운중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소 동양철학에 심 취했고 진보적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극한적인 좌, 우익의 대립을 목도 하고 심적갈등을 겪으며 보다 큰 진리공부를 위해 출가하기로 뜻을 굳힌 다. 24살 때 속세를 등지고 장성 백양사 운문암을 찾아가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인 금타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문에 들었다 그에게서 '청화' 라 는 법명을 받고 가없는 구도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금타화상은 하루 한 끼를 공양하고 짚신을 손수 삼아 신는 등 청빈이 몸에 밴 스님으로 좌선 을 해온 선승이다. 또한 현대물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금타화상은 한국 불교의 정통인 통불교(統佛敎)를 주창해왔는데, 그의 이런 수행법과 사 상은 청화 스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밤낮으로 수행을 하며 탁발을 돌 면서도 스승의 참뜻을 따라 그때부터 하루 한 끼 공양과 좌선수행을 위 한 장좌불와를 평생의 신조로 삼는다. "장좌불와의 수련법은 나 뿐만 아니라 수행자라면 모든 사람들이 취하 고 있어 특별히 신기한 게 아닙니다. 원래 각종 참선자세에서 좌선이 가 장 안정감을 주는데 이 자세가 삼각형을 그려내는 형태이지요. 똑바로 앉아서 두 손을 무릎에 얹어 놓으면 편하고 머리가 맑아집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 안목 가져야,>>>
47년을 하루 한끼만을 공양하고 있는 청화 스님은 음식이란 사람의 신 체와 정신을 유지시켜주는 최소한의 수단일 뿐,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음식을 많이 먹는 것보다 적게 먹는 것이 건강 유지에도 좋고 배설량이 적어 수행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정견은 바른 인생,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과 같은 뜻입니다. 무명으 로 인한 진리에 맞지 않는 업으로 우리가 고통을 받으니까 행복을 위해 서는 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거기에 따른 행동도 실천해야 합니다. 중 도실상의 안목을 가지고 바른 생활을 해야만 바른 깨달음이 생긴다는 뜻 이죠." 청화 스님은 40여년 동안 두륜산 대흥사, 월출산 상견성암, 지리산 백 장암 등 전국 각지의 사찰과 암자의 토굴에서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수 도 정진했다. 지금도 새벽 2시 30분에 참선에서 일어나 3시에 예불을 드 리고 곧바로 2시간 동안 참선에 들어간다. 아침좌선은 오전 8시부터 10 시까지며, 오전 11시에 공양을 마치면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좌선을 하 고 저녁 예불을 한 뒤 또다시 참선에 들어간다. 그의 탁발수행과 떠돌이 선방좌선은 지난 83년 태안사에 주석하면서 끝난다. 신라 말까지만 해도 9산선문의 하나였던 고찰 태안사는 당시 6. 25전란 때 불타버려 폐허를 방불케 했다. 이런 퇴락한 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그는 그해 10월, 20여명의 도반 과 함께 3년 동안 묵언수도 하며 일주문 밖에 나가지 않는 3년결사를 벌 였다. 이 결사는 당시 수도정진을 게을리했던 불가에 신성한 충격을 주 었으며, 전국 곳곳에서 시주가 들어와 태안사를 중흥시키는 원동력이 돼 선풍도량으로 옛 명성을 되찾게 해주었다.
<<<진리 알맹이 모아 통종교(通宗敎) 가능>>>
"선이란 우리 마음을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란하게 하지 않는 수행법입니다. 이런 수행을 계속하면 마치 흐림 물이 쉴새없 이 흘러 그 자정작용에 의해 저절로 맑아지는 것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가뭇없이 스러지고 필경은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생명의 근본목적을 이 루게 해줍니다." 선을 닦아 삼명육통이 되면 과거나 현재, 미래를 알고 천지우주를 두 루 통관하는 안목과 자기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을 얻어 최 상의 영생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불타의 경지다. 참선을 많이 했다는 사람들이 도인연하며 함부로 음식을 먹고 계행을 파괴하는 것은 진정한 참선을 하지 않았다는 증좌라며 청화 스님은 언짢 아 한다. 그는 참선을 할 때는 심지어 석달 열흘동안 물만 먹고 정진한 일이 있다. 선법 수행체계를 확립한 청화 스님은 모든 수행을 정견을 바탕으로 불 성체험에 역점을 두는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개념적으로 깨닫는 것) 로 정진해 불성에 안주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지난해 11월 미국에 건너가 미주 금강선원이라는 선방을 개설하 고 3개월 동안 동안거에 들어갔는데, 이는 미주 한국불교사상 처음 있는 일로 수행독려와 포교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당시 법회는 대성황을 이 뤘는데 일반 선승들이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법문도 비논리 적인 데 반해 교리에 기본을 두고 논리적인 사고와 풍부한 자연과학 지 식, 그리고 깊은 통찰을 통한 청화 스님의 법문에 찬탄을 보내기도 했다 고 한다.
<<<종파성 지양하고 통불교(通佛敎)로>>>
"중도실상에 입각하면 회통이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원통무 애한 모든 것을 종합지향하는 것으로 마땅히 종파성을 지양한 원통불교 를 이끌어 내야 합니다" 청화 스님은 하느님이든 알라신이든 부처님이든 관계없이 진리의 알맹 이만 통합한다면 불교인들이 갈망하는 통불교뿐 아니라 타종교와의 벽도 무너뜨려 통종교까지도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정진하고 있다.
설령산 성륜사
"인연이 아닌 것은 따르지 마라"
설령산 성륜사
[출처 : http://www.ohmynews.com/] 재 편집:곰발바닥
▲ 청화 큰스님이 창건한 성륜사 일주문엔 님 보낸 서러움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2003 임윤수
"사람 드는 것은 표 나지 않으나 사람 나는 것은 표 난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있을 거란 기대는 갖지 않지만 며칠 전 다녀온 성륜사를 다시 찾아가는 길은 왠지 마음부터 허전하고 썰렁한 기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연화대로 오르셨던 "청화 큰스님은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하는 부질없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곳에선 가셨지만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남을 알고 계실 테니 오는 듯이 가셨고 가신 듯이 다시 오시리라 생각하니 막연한 위안이 생긴다.
춘향골 남원과 곡성을 지나 27번 국도를 달리다 보니 저만치 전남과학대학이 보이고 옥과면을 외호하듯 둘러싼 설령산(雪靈山)이 보인다. 넓은 주변 탓인지 높게 보이지 않으나 범상치 않게 보인다.
성륜사 사무장의 전언에 의하면 나라 방방곡곡서 살생과 동족상잔이 벌어졌던 6·25때도 설령산에서 피난을 하였던 사람은 단 한 명도 다치거나 상하지 않았다고 하니 범상치 않은 산세에서 태평성세란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범종각과 승방을 지나게 되면 지장전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갈림길 나온다. 오른쪽으로 지장전이 보인다.
ⓒ2003 임윤수
풍수지리에선 산을 용이라고 한다. 산을 용이라고 하는 까닭은 산의 흐림이 마치 꿈틀대는 생용(生龍)과 같기 때문이란다. 좌우로 굽이치고(左右屈曲) 위 아래로 꿈틀대며(上下起伏) 홀연히 굵어졌다 홀연히 가늘어지는(忽大忽小) 산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살아 꿈틀대는 용과 같다.
꿈틀대는 용이 뭔가를 휘감듯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그곳, 설령산 중턱 아늑한 곳에 성륜사가 있으니 경내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벽산당 금타화상 탑비와 부도탑 그리고 조선당(組禪堂)이 멀찌감치 가물가물 보인다.
시골의 작은 면소재지인 옥과면에서 지동천이라 하는 개울을 끼고 있는 도로로 접어드니 전형적인 시골 마을 가는 길이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시골 마을은 한적해 보인다. 사실 외형으로만 한적해 보이지 김장을 하고 월동 준비를 하느라 나름대로 분주할 것임을 알면서도 마음속엔 한가롭게 그려진다.
농로를 겨우 면한 정도의 포장길을 따라 차를 몰다 보면 야트막한 고개도 넘고 작은 다리도 건넌다. 보이지 않으나 촌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 농촌 마을로 들어서는 비포장 도로도 지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뜸해지던 집들이 작은 고개를 넘으니 보이질 않는다. 면소재지에서 10리쯤은 들어 온 모양으로 어느새 성륜사 일주문 앞에 서게 된다.
▲ 곱게 물든 단풍나무 사이로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의 문살이 아주 곱고 화사하다.
ⓒ2003 임윤수
며칠 전, 청화 큰스님의 영결식이 있던 그 때 군중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설화처럼 이야기하던 큰스님의 청빈한 삶이 그려질 듯 그려질 듯 머릿속에 펼친 캔버스에 아롱대나 잘 그려지진 않는다.
온갖 잡다한 짓 다하고 돌아다니는 속물 중의 속물이 감히 선승 큰스님의 고고한 일상을 한순간에 그리려니 감조차 잡히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인파로 빼곡하였던 다비장과 주변이 휑하니 비었건만 비었다는 느낌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발길이 일주문을 들어서니 성륜사가 텅 빈 듯한 느낌이다. 청화 큰스님의 그늘이 성륜사를 꽉 채우더니 그 그늘이 사라진 탓인지 허전하단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성륜사는 20여 년 전 청화 큰스님이 원력을 세워 이곳,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설령산에 10여만 평의 터에 창건한 절로 특정 본사에 귀속된 말사가 아니고 대한불교 조계종 성륜불교문화재단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경내는 한적하기만 하다. 사진 중앙쯤의 건물 가운데 마당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2003 임윤수
청화 스님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24세(1947년)가 되던 해 송만암 스님의 상좌인 금타(金陀) 스님을 은사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은사 스님인 금타 스님에게서 "청화(淸華)"라는 법명을 받게 되며, 불문에 들어 47년을 산중 선방에서 수행에만 전념하신 산승(山僧)이며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이라고들 한다.
큰스님은 전국 각지를 돌며 수행하다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고찰 태안사를 복원하고 서울의 광륜사와 이곳 성륜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청화 큰스님은 장좌불와(눕지 않는 생활)와 1종식(하루 한 끼만 먹는 생활)으로 평생을 수행하며 청빈한 구도자의 길을 솔선수범하신 분으로 입적하시기 전까지 성륜사에 주석해 계셨다고 한다.
멀리서 볼 때는 역동하듯 힘차게 흐르던 설령산 산세가 경내로 들어서니 아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양팔처럼 부드럽게 성륜사를 안고 있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듯 하지만 그보다는 아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양팔처럼 부드럽게 안으로 굽은 산세가 성륜사를 외호하고 있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장고한 역사가 없기에 역사성에서는 미천해 보이지만 당대를 대표할 최고의 선승이 창건하고 주석하였던 곳인만큼 성륜사는 선풍이 분명한 곳이다.
▲ 청화 큰스님의 사리 습과가 이루어지고 있던 조선당은 깔끔한 한옥으로 전망이 탁 트여 산하와 진입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003 임윤수
일주문으로 들어서 금강문(천왕문)을 지나게 되면 좌측으로 종무소가 있다. 종무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며 보이는 건물들 대부분은 스님들이 공부하며 참선하는 승방이며 선방이다.
일반 절들에 비해 유달리 무단청의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그런 건물 대부분이 승방이나 선방이니 성륜사는 경내 자체가 선방이며 참선의 공간인 듯하다.
2층으로 된 범종각을 지나면 설법전이 나온다. 대중들이 생전 청화 큰스님의 설법을 들었을 공간이나 현재는 분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또한 이 설법전에는 스리랑카 정부에서 기탁 받아 봉안하고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에 평소에는 이를 친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단다.
좌우로 늘어선 승방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그곳에 지장전이 있고 지장전 위로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과 비슷한 높이지만 조금 떨어진 좌측에 커다란 건물이 있으니 바로 옥과미술관이다.
▲ 조선당 앞에는 군더더기 없이 단촐 한 바위와 절구가 놓여 있다. 큰스님의 청빈한 삶 또한 이처럼 깔끔했었을 듯하다.
ⓒ2003 임윤수
전라남도 옥과미술관은 아산 조방원 화백(雅山 趙邦元 畵伯)이 평생 동안 수집한 간찰(簡札, 오늘날 편지)과 서화(書畵), 서첩류(書帖類), 성리대전 목판각(性理大全 木板刻)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백제·통일신라 시대 암·수막새와 고문서, 전남 중진작가들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대웅전에서 조금 더 가파른 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선방으로 가게 된다. 선방은 영결식 날 사람들이 말하던 청화 큰스님의 맑은 모습이 떠오를 만큼 깨끗한 한옥의 건물로, 탁 트인 전망이 막힌 마음도 뚫어줄 듯하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조선당(組禪堂)과 청화 큰스님의 은사 스님인 벽산당 금타 화상의 탑비와 부도탑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청화 큰스님은 은사 스님에 대한 공경과 예를 탑비와 부도탑으로 후세에 남겼으니 이 또한 실천적 설법이라 생각된다.
조선당은 성륜사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건물로 한마디로 마음조차 깨끗하게 해 줄 만큼 깔끔한 주변에 깔끔한 구조다. 동그랗게 둘러싼 산의 중앙에 자리잡아 포근하게 안겨 있고 산하를 굽어보듯 시야가 넓어지니 혼탁한 마음이 사라질 듯하다.
조선당의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뭔가에 열중하던 스님이 흠칫 놀라며 손짓으로 나가라 하신다. 언뜻 보아도 청화 큰스님의 사리를 습과하는 과정인 듯하다.
▲ 성류사 제일 높은 위치에 청화 큰스님의 은사스님 되는 벽산당 금타화상의 탑비와 부도탑이 있다. 청화큰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공경과 예를 탑비와 부도탑으로 후세에 남겼으니 이 또한 실천적 설법이라 생각된다.
ⓒ2003 임윤수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다시는 못 보게 될 저 광경, 큰스님의 사리를 습과하고 있는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꾸중 한 번 듣고 기회의 사진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선뜻 결정이 되지 않는다. 멈칫거리며 스님의 손짓에 따라 일단 문을 닫고 나니 "인연이 아닌 것은 따르지 말라"는 생각이 홀연히 찾아 든다. 큰스님은 입적하시기 전에 "올 때도 빈손으로 왔는데 굳이 마지막 가는 길 호화롭게 할 필요 있냐"며 "죽은 뒤 거적에 말아 일반 화장터에서 화장해 아낀 돈은 불우 이웃 돕기에 써달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한다.
이 말씀엔 "사리를 거두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유추된다. 자칫 선(禪)과 법력의 척도를 사리의 유무와 다소만으로 판가늠할 속인들의 우매한 입방아를 사전에 차단하며 또 다른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큰스님은 전신이 사리라 할 만큼 부지기수의 사리가 습과되고 있다고 한다.
▲ 경내 건너 쪽에 전라남도옥과미술관이 보인다.
ⓒ2003 임윤수
어제 18일 오후, 가슴을 뛰게 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다름 아닌 큰스님의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19일 오후 5시까지 주어진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수백 리 길 마다 않고 부랴부랴 찾아가니 계획이 변경되어 사리는 친견을 할 수 없단다.
18일 하루는 참배자들에게 친견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18일 저녁 문도회에서 큰스님의 유지에 대한 견해 차로 당장의 사리 친견은 취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추후에도 그 사리를 신도들에게 친견(공개)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아직 서지 않았다고 한다.
▲ 성륜사에 곳곳에는 승방과 선방이 있다. 무단청의 건물이 한층 깔끔해 보인다.
ⓒ2003 임윤수
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받거나 소식을 듣고 큰스님의 사리를 친견하고 카메라에 담아 보겠다 불원천리 성륜사를 찾아 온 기자를 포함한 적지 않은 내방객들에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인연이 아닌 것을. 인연이 아니려니 하고 마음을 접어도 아쉬움은 감출 수가 없다. 한적한 성륜사 곳곳을 들려 참배하고 둘러보며 일주문을 뒤로하고 터벅터벅 걷다 보니 "청화 큰스님이 생존해 계시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반문이 생긴다.
사리 자체를 거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성급했던, 실수였던 일단 친견을 공개하였었다면 그것을 실천하였을 듯하다. 성급함이나 실수에 따른 과오는 당신이 평생 떨치고자 하였던 삼독(三毒)의 하나인 치(癡, 어리석음)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곤 그 어리석음에서 온 실수를 깨치기 위해 더더욱 수행에 정진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승가의 율을 알지 못하는 속인의 옹졸함일까?
▲ 설법전에는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기증 받아 봉안중인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고 평소에는 친견도 가능하다고 한다. 현재는 청화 큰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2003 임윤수
어찌되었던 번복된 결정은 많은 사람들을 황당하게 하고 혼동시켰으며 입장을 곤란하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차제에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고 가신 큰스님의 유지가 잘 지켜지고 전이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간절하다.
성륜사는 호남의 길지(吉地)에 아름답게 피어난 피안의 길목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선승이 창건하고 그 선풍이 그늘처럼 곳곳에 드리웠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창건주 선승 청화 큰스님의 고명에 걸맞는 명찰로 속인들에게 길이길이 속세의 번뇌를 끊고 피안의 언덕으로 들게 하는 커다란 법계의 일주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륜사 찾아가는 길
아산 조방원 화백(1922년 전남 무안출생)이 자신의 노후 작품 활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육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키 위해 평생 모아온 미술품 6천 7백여점과 부지 4천 2백여평을 전라남도에 기증함으로써 지난 88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96년 완공된 전라남도 옥과 미술관은 옥과면 옥과리에 소재하여 4천 2백여평의 부지에 2층으로 3백여평 규모의 전시관을 구비한 현대식 미술관이다.
옥과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찾아 가려면 옥과면 소재지에서 죽림천을 따라 포장도로 10여분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지동마을이 나오고 다시 왼편으로 조금 더 가다 보면 검정 기와 지붕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옥과미술관과 숲속에 은근히 성륜사가 나타난다.
옥과미술관 1층 전시실에는 남도 중진 및 중견작가 작품 등, 동·서양화 4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는 아산 조방원 선생이 기증한 소치 허련 선생의 사군자 , 모란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간문 , 퇴계 이황 선생의 詩 그리고 아산 조방원 선생의 작품 歸路 , 田家 등이 전시되어 가족 방문객과 미술 관람객들의 발길이 계속되고 있으며 전남 미술의 진수를 한눈에 느낄 수 있고 전남 예술인들의 창작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전당이 되고 있다.
전라남도 옥과미술관은 아산 조방원화백(雅山 趙邦元 畵伯)이 평생 동안 수집한 6,800 여점의 소장품과 부지 4,263평을 1988년 전라남도에 기증함으로써 설립되었다. 그리고 민족문화와 전통예술의 창달을 위하여 민족의 전통 문화 예술을 연구 계승 보존하며, 또 이를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시키는 사업을 행하고, 정부시책에 부응하는 문화예술사업을 시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