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헤드
차근차근 살피며 천천히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자마자 십년지기처럼 급격하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도 있다. 산도 마찬가지다. 완만한 둘레길을 에둘러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정상에 오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급격한 경사를 통해 정상으로 오르게 하는 산도 있다. 하와이의 다이아몬드 헤드가 전자라면 코코헤드는 후자다.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정상까지 선로를 놓고 그 아래 침목으로 받쳐놓은 코코헤드의 등산로는 사람을 처음부터 기함하게 만든다. 개흉 수술을 마친 환자의 수술 자국 같은 선로가 운치 있는 산세를 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기가 솟는다. 올라보고 싶은 마음에 허벅지가 불끈불끈 꿈틀거린다. 지친다고 잠시 그늘진 곳에서 햇볕을 피할 곳도 없는 직선거리의 산. 오르락내리락 변화도 없이 오로지 오르막만 지닌 도도한 산. 일단 발을 디뎠으니 후퇴는 없다. 이번 산행은 고등학생 아들아이와 동행이다. 다 큰 아들아이를 아직도 어린애처럼 대해 주변에서 걱정이 많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면 아이 대신 자전거를 번쩍 들어 베란다로 옮겨주고, 채소를 안 먹는다고 상추쌈을 만들어 먹여주던 것이 버릇이 되어 주변에서 그러지 말라 충고한다. 겉으로는 알았다고 해놓고 속으로는 ‘해주고 싶어도 자취하고 군대 가고 또 장가가면 이것도 끝이네’ 하면서 몰래몰래 아이 뒤치다꺼리를 했다. 오늘도 저 높은 곳을 이 아이가 과연 올라갈까 걱정이 앞섰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이인데 넓은 침목 사이로 빠지면 어쩌나 노심초사다. 7부 능선쯤 올랐을 때 나의 발걸음이 늦어지니 이제야 아들아이는 자신이 앞에 서도 되냐고 묻는다. 그동안은 뒤에서 나를 살펴주고 보조를 맞췄는데 1시간 안에 돌아오겠다고 투어해주는 분께 말했는데 이런 속도면 좀 어려울 거 같아 자기가 앞장서겠다면서 조심해서 올라오라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보더니 본인은 입만 축이고서 내게 넘긴다. 아이가 디디는 안전한 곳으로 나의 발길을 옮겼을 뿐인데 어느새 정상이다. 내가 안전하게 오른 걸 보자 내처 발걸음을 빨리해 정상 뒤쪽까지 탐색한다. 저렇게 다 큰아이를 맨날 애기처럼 대했구나싶어서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허전했다. 이제 나는 저 아이에게서 퇴장할 일만 남았기에.
마침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동네 뒷산처럼 자주 오르는지 현지의 미국 청년이 우리에게 저쪽으로 가면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알려준다. 뒤쪽에는 과연 제주의 아부오름처럼 분화구가 펼쳐져 있다. 스페인 청춘 남녀가 노래를 부른다. 산 아래에는 태평양의 너른 바다와 와이키키 해변의 빌딩들과 오밀조밀 인가를 이룬 도시가 펼쳐져 있다. 지는 해는 모든 사물을 오렌지빛으로 덮어 준다.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사진 구도를 잘못 잡는 나를 위해 먼저 자신이 찍은 뒤 내게 인물을 어디에 두고 배경은 어떻게 잡을지 상세하게 알려 준다.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오른 코코헤드보다 더 값진 것은 아이의 성장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 이제 아이는 나를 위해 짐을 들어주고 물을 양보하고 사진을 찍어준다. 뒤바뀌어진 위치를 이곳 하와이에서 체감한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단둘의 여행. 가파른 산은 마치 스무 살이 된 아들의 통과의례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산길은 수월했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온 세상을 바라보며 올라갈 때 몰랐던 아들의 성장을 내려올 때 깨닫는다. 좋은 산행이란 오르기 전과 오르고 난 뒤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로 달라진다. 코코헤드 트레킹은 좋은 산행이었다.
첫댓글 카우아이 섬에 가서 트레킹 하셨으면. 후기만 3박 4일 쓰셨을듯...^^
카우아이 트래킹이 그리 멋지다니!다음에는 카우아이를 꼭 가야겠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