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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 팀 드레이크 [TEAM DR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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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정화함대
스키퍼 추천 0 조회 187 06.12.29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화의 초상화
 
정화 함대
 
명나라 시대의 한 인물
중국의 해상 왕인 명 대의 제독 정화(鄭和)가 그 주인공이다.
600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중국 대륙에 열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정화는 운남 사람으로  본성은 마씨였고 아버지 때부터 이스람 교도였다
영락 제가 연 왕 시절에 환관이 되어 주체 왕자와 같이 궁정의 법도를 배우고 공부했다
그 후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정씨 성을 하사 받고 환관 장이 되었다
그는 영락 3년 1405년부터 28 년 간 7회에 걸쳐 남해 방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대 원정 항해를 강행했다

기록에 의하면 조카 건문제의 행방을 비밀리에 탐색하고
또한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라 고 한다
이 남해 대 원정은 영락제의 꿈의 실현이다
외국 무역을 겸한 보물찾기의 성격이 강한 항해였다

그 당시에는 장쾌하고 모험심이 강한 서유기가 베스트셀러  시대였다
정화의 원정은 서유기 적인 영락제의 공상과 꿈을 싣고 강행된 것이다
당 나라 이래 이미 이슬람 상인들은 이국적인 기이한 서양 물품들을 많이 실어 왔었다
이러한 서양 풍물이 호사를 즐기는 영락 제에게는 구미가 당겼다
영락제 때의 서양은 오늘날 유럽이 아니고 푸젠성의 찬조우를 중심으로 선을 긋고
동쪽은 동양 서쪽은 서양이라고 하였다

영락 3년 정화는 첫 원정길에 올랐다
큰배만  62척에다 장병이 2만 7,000명
당당한 함대로 길이 145미터 폭이 55미터 돛대가 셋 달린 배에는
500명 이상의 인원이 탈수가 있었다

이 배는 멀리 아라비아 동해안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
해적을 소탕하고 말레이 반도에서는 이스람 왕국을 다스리는 등 국위를 선양했다
정화는 30개국을 찾아 다녔으며 그 후에 이 나라에서 공물을 바쳤으며
무역하는 형태로 진귀한 특산물들을 물물교환 하기도 하였다

그 때 원정대장이었던 정화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남아시아와 서 아시아에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당시 수행원들이 쓴 서양번국지등 여행기나 견문록이 간행되어
중국인간에 남아시아나 인도 등지에 관한 지식이 높아지고 이민도 활발해 졌다
오늘날 동남 아시아의 활약하고 있는 수많은 화교들의 조상을 더듬어 보면 이때
이후에 이민한 사람들이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수백 척의 함선을 이끌고 28년 동안 7번에 걸쳐 세계의 바닷길을 가르며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까지 원정했던 정화.
명 대의 앞선 조선기술과 항해술로 그가 콜럼버스보다 70여 년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하지만 믿어지지는 않는다
정화의 선단이 항해한 거리는 18만5000㎞에 이른다.
정화가 콜럼버스보다 아메리카를 먼저 발견했다는 이 주장이 세계 학계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많은 학자들이 당시 중국의 항해 기술이 선진적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선박 3척에 120명의 선원을 이끌고 갔으며
가장 큰배 산타마리아호의 길이는 23m 이었다 고 한다
15세기 중국에 이처럼 큰배가 존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1957년 난징(南京)에 있는
명 대의 조선소 유적지에서 11.07m에 이르는 거대한 방향키의 손잡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정화 함대의 배 바닥 모양은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배와 비슷해서 뾰족하다고 한다
물의 저항을 덜 받기 위해  바닥이 평평한 배보다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정화의 죽음으로 문신들은 환관의 돈줄이었던 원양 선을 파괴하고
무역을 금지시키면서 명나라는 해양제국의 지위를 스스로 내놓았다.
유학자들은 1477년 정화의 항해기록을 불태웠으며 한때 3500척에 이르렀던 함대를
해산시키고 1500년에는 민간에서 배를 건조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시켰다.
1525년에는 모든 원양 선박을 없애버렸다.

이로 인해 중국은 내륙국가로 전락했고 명나라가 해외에 등을 돌림으로써
세계 패권을 유럽에 넘겨주었고 이는 중국 문명권의 나라들이 퇴락의 길로 들어섰다
영락제 이후의 명나라는 특출한 군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영락제는 홍무의 둘째 왕비 고려인의 소생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장래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인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어떤 것인가  
동서고금의 역사는 후세에 많은 교훈을 남겨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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