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31: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개역개정판)
잠언 31: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쏟지 마라. 왕을 멸망시킨 여자들에게 네 기력을 탕진하지 마라. (쉬운성경판)
잠언 31:3 여자에게 너의 힘을 쓰지 말아라. 여자는 임금도 망하게 할 수 있으니, 여자에게 너의 길을 맡기지 말아라. (새번역성경)
이사야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개역개정판)
이사야 31:2 그러나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시니 재난이 닥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짓 하는 사람들의 집을, 여호와께서 일어나셔서 치실 것입니다.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을 치실 것입니다 (새한글성경)
조금 놀랐다.
지금까지 잠언 31장에서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라는 교훈과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라는 교훈을 별개로 보았다.
그게 아니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른 번역을 보니..
힘을 여자들에게 쏟는 일, 곧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라는 뜻이었구나.
여자들에게 힘을 쏟는다는 것...
연프(연애프로그램)의 시대
남자가 아무리 비주얼이 좋아도
결국 주도권을 쥐는 것은 여자이며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이 시청하지만
결국 스토리의 축은 여자들이 완성(?)하는 내용들이 대부분 아닌가?
별로 그런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마다 자기의 일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은 받는다.
대학시절
기숙사 방장님은
누구도 요청하지 않았지만 여자 기숙사 방과의 방(소개)팅을 주선하려고
그 바쁜 와중에서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여자 친구가 있는 다른 방원은 심드렁했고
남자 친구들도 별로 없던 나는 믿지 않는 여자들과의 식사 자리가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별명이 유대인, 그리고 바리새인이었는데...)
방장님은
이런 뜨뜨미지근한 반응에 격노했으면서도
다른 방과 연합하여 방(소개)팅을 기어이 주선했다.
아침 식사...
세수도 제대로 하고 나오지 않은
과제에, 시험 공부에, 저마다의 사연으로 분주하고 피곤했던 사람들은
이미 의미 없는 한 끼의 식사 시간이 어떤 의미였을까?
아침부터 일종의 회식 자리 느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당시 그 시간을 성의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똥씹은 표정으로 밥만 씹었던 것은 잘못이었다.
그것은 방장에게도, 같이 자리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누구에도 정중하지 못한
미성숙한 이의 괴짜짓에 불과했을 뿐
전혀 신앙인의 행동도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혼자 기도했던 (남자 한 분이 성호를 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립되어 있고, 고집스러웠던 이의 여러 이상한 행동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아니, 아니...
여자들에게 힘을 쏟지 않았다고
연애프로그램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내가 말씀을 지키고 살아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내가 의지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신앙도 아니었다.
그나마 세수, 샤워 다하고, 깔끔하게 앉아있던 나에게 힐긋 눈길을 주던 여자분들(몇 명은 누나...)의 시선을 물리치면서까지
무엇을 위해서 열심을 다했는지도 모를 공부 그 자체였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무언가가 될 줄 알고
더 정확히는
무언가가 못될까봐
사실은 배설물에 불과한 세상 것들을 붙잡느라
공부해야할 소중한 시간에 이 따위 짓을 하고 앉았냐며
아무도 귀울이지 않는 꾸짖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해댔던
그렇게 이상한 반응으로 살아왔던 부끄러운 날들이
지금은 수치스럽게까지 여겨진다.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개역개정판)
이 말씀이 아니었다.
이 말씀을 레버리지 삼아
고난이 없는 삶을 살고 싶었고
고난 당하는 헌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리에 머물겠다는
비겁할지언정 편안한 삶을 살고 싶었다.
앗수르 같이 험하고 거친 세상에서
애굽 같이 강하고 힘있는 (돈많은...) 무언가를 의지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의지하는 것보다는 확실해 보이니까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여자(들)에게 내 힘을 쓴 적은 (별로..) 없어도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오지 못했다.
오히려 세상을 사랑했던 음녀에 가까웠다.
현숙한 여인, 곧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는 나 자신은
이사야 31장에 나오는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과 닮아있었고,
지금도 그런 것 같다.
돈도, 건강도, 관계와 영향력도, 지식과 경력도, 경험도
모두 배설물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의 힘을 무시하시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것들을 경계하신다.
실제적인 힘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피조물(내지는 배설물)이 가지는 힘을
창조주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을 의지하는 행동이다.
그것이 우상숭배다.
그러한 세상을 탐하는 것이
왕의 자녀된 우리를
멸망의 자리로 이끌 수 있다. (잠 31:3)
예배의 자리로 가는 길에도, 다녀 오는 길에도
자신을 예쁘게 꾸민 여자들은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래도 하나 분명한 것은
그녀들에게 내 삶이 빼앗길 일은 없으며
그녀들과의 5분 정도의 대화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겠지...)
복음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사실 5분은커녕 5초도 아까울 뿐이다.
내가 힘쓰는 바는 무엇인가
그 힘쓰는 바가
도리어 나를 멸망의 자리로 이끄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의지하는 바는 무엇인가?
애굽 아닌가?
잠언의 지혜를 구하고자 한 것도
사실은 뭐 좀 잘난 척하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닌가?
세상에서 잘 살아보기 위한 레버리지가 필요해서 아니었나?
지혜로우신 하나님(사 31:2)은 심판하신다.
그 심판은 지혜로운 심판이다.
내가 헛된 것을 의지한 채로 계속 번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지혜가 거기에 있다.
돈이 흔들리고, 사람이 떠나고, 계획이 무너지게 하시고
결국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이 안전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믿고 살아왔는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시는 시점은 바로 이때이다.
고로 그 지혜로운 심판은
파괴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의지의 대상을 제거하고,
유일하고 참된 의지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과정이다.
이사야 31: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개역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