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은 역사적인 仁川上陸作戰이 있었던 날이다. 1950년 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衆寡不敵,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이 연합군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를 하고 있던 국가 운명이 실로 百尺竿頭에서 헤메고 있을 때 미국 합동 참모본부는 물론 자기 첨모둘까지도 인천만은 수심이 낮고 진흙바닥이 두꺼우며 간만의 차이가 심하다는 등의 여러가지 지리적, 군사적인 약점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만큼 기습효과가 클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택하고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육-해-공군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한 날이다.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9월 29일에는 탈환한 수도 서울의 引渡式을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임석하에 가졌다. 그 주역이 바로 당년 70세의 맥아더 원수였다. 仁川上陸作戰이 성공함으로써 破竹之勢로 밀려오던 공산군의 세력은 남북으로 兩分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적인 북진이 시작되었다.
나는 仁川上陸作戰이 있었던 9월 15일을 앞두고 이미 고인이 된 맥아더 원수의 편모를 살펴보고 한국을 위하여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하여 그가 바친 헌신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저 한다.
1945년 8월 30일, 나는 그가 아직도 전운이 감도는 패전 일본의 공항에 착륙, 비무장으로 애기 ‘바타안號’에서 트랩을 내려 오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쪼글쪼글한 원수 모(帽)에 검은 색 안경을 끼고 한손에는 애용하는 옥수수대로 만든 파이프를 든 그의 모습에서는 승자의 위세나 교만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원수 모는 미 육군의 제모가 아니다. 그가 1935년 미 육군 참모총장을 마치고 필리핀 육군 원수로 취임했을 때 ‘케손’ 대통령이 그를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것으로서 그 이후 그는 늘 미 육군의 제모 대신 필리핀 육군 원수모를 쓰고 한번도 미군의 제모를 쓴 일이 없다. 남의 나라 모자이지만 그 것을 애용한 까닭은 군 최고 계급인 원수를 상징하는 모자이고 자신만을 위하여 특별히 디자인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휘관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인 統御力은 이 모자가 상징하는 『남에게 比肩될 수 없다』는 出衆한 특성이야 말로 통어력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실행한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나는 그가 서양인이면서도 매우 동양적이며 동양에 관하여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는데 호감을 갖는다.
그에 관한 보도, 전기 등에 나타난 사진에 어느 곳에도 훈장을 패용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모한다. 미국 최고 훈장인 의회훈장을 포함하여 미 유군 역사상 가장 많은 수효의 훈장이 주어진 것을 아는 나로서는 그의 謙虛가 매우 인상적이다. 모든 공훈은 그의 부하들에게 돌리고 싶은 심정에서 이었을 것이다.
1951년 4월 11일, 그는 중공대륙 연안의 봉쇄, 만주 산업지대의 폭격 등의 주장으로 본국 정부와의 심한 의견차이로 말미암아 전격적으로 UN군 총사령관, 일본 점령군 사령관 등의 모든 공직에서 하루 아침에 해임된다. 전속부관으로부터 해임통고 전보가 왔다는 보고를 오찬 중에 받고 그는 부인에게 『지인, 이제 겨우 본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됐소』라고 했다. 그는 실로 16년간이나 계속된 해외 근무로 본토엘 가보지 못한 것이었다.
극적으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된 원수는 일본 조야의 일직이 없었던 성대한 석별의 환송을 받는 가운데 귀국길에 오른다. 도중 하와이에 기착한 그에게 기지 사령관이 걸어 주려고 한 화환을 거절하고 그 길로 펀치볼에 있는 무명용사묘로 달려가 유명을 달리한 옛 부하들의 명복을 빈다. 또한 그의 수많은 사진 가운데 미국사람들 고유의 웃는 표정을 못 본다. 그저 근엄하기만 하다. 이는 어쩌면 그가동양의 유교문화에 영향을 받은 탓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