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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우리 땅(창녕, 의령)
강순희(향원)
8월의 마지막 날, 대구박물관회에서 창녕과 의령으로 정기답사를 다녀왔다.
집을 나서자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출발할 무렵에는 세찬 비가 쏟아졌다. 버스 3대에 나누어 탄 130여명의 회원들은 7시 정각 대구박물관주차장을 출발했다. 회장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답사를 다녀왔지만 날씨 때문에 못 간 일은 없었다며 창녕, 의령 지방은 비가 내리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대구박물관대학은 올해로 23기 수료생을 배출했다. 박물관대학을 수료한 나이 지긋한 회원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열정은 날씨도 말리지 못했다. 봉사위원께서 따뜻한 백설기와 생수를 나누어 주셨다. 또 해설위원께서는 답사할 곳의 문화 유적에 대한 자료를 나누어 주시며 “오늘은 문화 유적보다 인물에 대한 답사가 될 겁니다.”하시며 연륜만큼 폭넓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 놓으셨다. 대구박물관회 답사를 위해 매달 봉사해주시는 그분들이 존경스러웠다. 하늘은 잿빛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지만 버스는 안개와 거센 빗줄기를 뚫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1. 창녕 교동고분군
창녕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크고 작은 고분들이 많이 있었다. 근처에 창녕박물관이 보였지만 박물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고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고분들을 살펴보았다. 가장자리에 둘레돌이 있는 큰 고분이 눈에 띄었다. 교동고분군은 인접한 송현동고분군과 더불어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축조된 가야시대 고분이라고 한다. 이 고분군은 창녕지역 유력 집단의 수장급 무덤인 대형분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 가족이나 친연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중·소형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복원된 36기외에 65기의 고분을 추가로 확인하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했다. 이 고분군에서 경주에 분포하는 돌무지덧널무덤 다음으로 많은 양의 신라 계통 금속유물이 발굴되어 그 당시 창녕지역이 신라 중앙과 정치적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2. 창녕 만옥정 공원
다시 버스를 타고 창녕 만옥정 공원으로 갔다. 공원 뒤쪽 언덕의 비각 안에 신라진흥왕척경비가 있었다.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제 33호)는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 : 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라고 한다. 비석의 높이는 162㎝, 너비는 174㎝, 두께는 30∼51㎝이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비면의 둘레에는 윤곽을 선으로 새겼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 안에 모셔 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는 해설을 들었다. 비에 전답(田畓)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畓’이라는 한자는 여기서 최초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씨라고 하셨다.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다고 한다. 또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오래된 금석문이 잘 보존되고 있는 점이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공원을 돌아 나오면서 창녕 척화비를 보았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고종 8년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 일제히 세운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日本公使)의 요구에 의하여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몇 기의 비가 곳곳에 남아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3. 의령 봉황산 일붕사
창녕을 떠나 의령군 궁류면 일붕사(一鵬寺)에 도착했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니 병풍처럼 서 있는 기암괴석이 보이고 절벽 틈에서 시원한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천혜의 자연 요건을 갖춘 봉황대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일붕사는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최고의 격전지였다고 하며 서기 727년 신라의 혜초 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현재 일붕사 전신이다. 알 수 없는 화재로 사찰이 자주 소실되어 감히 복원을 못하고 있던 터에 1987년 산의 정기가 너무 강하여 화기를 빼야 한다는 큰 스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연 그대로의 거대한 바위를 이용하여 동굴법당의 대불사를 하게 되었으며 일붕사로 명명하고 동굴법당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석굴 대웅전 456.2m²(138평), 석굴무량수전 297.5m²(90평)이 그것이다. 석굴 대웅전에 먼저 들어가 보았다. 정면에는 모두 화강암으로 조각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노사나불(盧舍那佛), 석가모니불을 모셔두었다. 법당 좌우에는 정교하게 채색된 8대 보살상이 세워져 있었다. 옆에 있는 석굴무량수전에도 들어가 보았다. 자연석을 깎아 낸 둥그런 천정을 보며 지극한 정성과 불심이 느껴졌다. 그 외에도 관음전, 약사전 등 건물이 높이가 다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붕선교종’의 창종주 일붕 서경보 큰스님의 독특한 필체로 쓴 현판과 액자가 곳곳에 걸려 있었고 경내에는 행적비와 사리탑도 있었다.
4. 충익사, 의병박물관
의령은 곽재우 장군이 태어난 곳이고 이곳이 외가이다. 충익사는 임진왜란 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 곽재우장군과 17장수의 위패를 보신 곳으로 곽재우 장군의 시호를 따서 지은 사당의 이름이다.
충익사는 높다랗게 솟은 의병탑과 홍살문, 충의문, 유적정화기념비, 충의각, 홍의문, 사당, 기념관 등 9동의 건물이 있으며 기념관에는 곽재우 장군의 기마도와 의병창의도 등 5점의 기록화와 망우정이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충익사로 들어서자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18개의 백색 고리는 곽재우 장군과 17명의 장수를 뜻하고 팔자형 기둥은 횃불을 의미한다고 한다. 충의각은 다포 팔작식 목조건물인데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고 기술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것이라 한다. 단청이 화려해서 멀리서 보니 꽃상여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충의각 안에는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의 증직명과 관향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하고 있었다. 사당은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17장령 및 수많은 무명의병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4월 22일 추모제향을 드리는 곳이라고 한다. 사당 앞에서 단체로 묵념을 했다. 경내에는 높이 10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4m에 이르는 수령 500년의 노거수가 있는데 이 나무가 경상남도 지방기념물 83호로 지정된 모과나무이다. 국내에서 조사된 모과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가지를 멋지게 뻗은 큰 배롱나무도 있었고 반송 등 정성껏 가꾼 수목들이 경내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안쪽에 있는 의병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고고역사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의병유물전시실을 돌아보았다. 의병유물전시실에는 보물 671호로 지정된 장검, 말안장, 팔각대접 등 곽재우 유물일괄과 윤탁, 오운, 이운장, 강언룡, 안기종 등 17장군 관련 유물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조선관군 및 의병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장검, 말안장, 팔각대접, 연적, 갓끈 등이 보전되고 있어 놀라웠고 장검과 말안장을 보는 순간 의병을 호령하는 홍의장군의 용맹함이 느껴졌다.
「곽재우 장군은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임진년 6월 1일
발길을 재촉하는 회장님의 확성기 소리를 따라 아쉬움을 안고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점심시간이었다. 의령읍의 소문난 식당에서 소고기 국밥을 먹었다. 옛날 장터 국밥의 맛이 느껴졌다. 의령에는 망개떡, 의령 소바(메밀국수), 토요애한우가 향토음식으로 꼽힌다고 한다.
5. 의령관문, 정암루, 솥바위
점심을 먹고 곽재우장군 문화공원 및 정암유적지로 향했다.
의령관문은 길이 45.14m, 높이 12.8m의 철근콘크리트 구조 전통 한옥 지붕양식 건물이다. 서부 경남과 북부 호남을 연결하며 남강변의 자연경관과 함께 조형미가 아름답다고 한다. 의령관문 아래 인도에서 남강을 가로지르는 철교인 정암교로 연결되는 길이 있고 관문 옆으로는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계단을 올라 성벽을 따라 가니 정암루가 보였다. 정암루에 오르면 곽재우 장군이 수많은 왜군을 몰살시킨 정암진(鼎巖津, 정암나루)이 펼쳐진다. 정암나루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로 육상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했다.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와 그 휘하 의병들이 목숨을 다하여 왜군을 무찔렀던 승첩지이다. 정암루에서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았다. 내린 비로 누런 황토색 강물이 불어 나 있었다. 왼쪽으로 멀리 철교가 보이고 철교 아래로 작은 바위섬이 보였다. 그곳이 정암(솥바위)이라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통로를 따라 관문을 지나서 정암교로 가기로 했다. 통로를 빠져나오자 의병광장이 나타났다. 홍의장군 동상은 기단을 합쳐 높이 17m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 백마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며 호령하는 웅장한 기상을 담고 있다. 또 벽면 전시대 두 곳에는 왜군들과의 전투에 임하는, 홍의장군을 비롯한 18장령의 비장한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치열했던 전투를 떠올리게 했고 부조를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광장을 지나 정암교 위를 걸었다. 솥바위를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가마솥을 닮아 솥바위(부자바위)라고 불리는 정암은 이 바위를 기준으로 동서남북 12km 이내에서 부자가 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전설이 현실이 된 것인지 S, L, H 그룹의 창시자들이 근처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기했다. 요즘도 솥바위의 기운을 받으려고 창업이나 입시를 앞둔 분들이 와서 기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솥바위가 잘 보이는 곳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6. 호암 이병철 생가
비는 그치고 하늘이 파랗게 열렸다. 하얀 구름이 점점이 깔리고 벼 이삭이 피어난 풍성한 들판이 펼쳐졌다. 부자분식집, 부자민박집 등 온통 ‘부자’라는 낱말이 들어간 간판들과 눈을 맞추며 부잣길을 걸어 호암 이병철 생가로 향했다.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래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호암생가는 일자형 평면 형태로 그동안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은은하고 고고한 멋을 풍기는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며 부유한 선비의 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음식을 남기는 것을 아주 싫어했을 정도로 낭비에 대해서는 용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서향으로 지어진 일자형 생가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담한 토담과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뒷산 대나무와 함께 운치를 더해준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 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각 터에 혈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부잣집의 광이 궁금하여 들어가 보았다. 오른쪽에 장독들이 있고 정면에는 옆으로 길쭉하고 커다란 쌀뒤주와 됫박, 바구니 등이 놓여 있었다. 생가와 호암선생에 대한 해설을 해 주시는 분이 사투리를 쓰면서 변사처럼 어찌나 구수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두 웃었다. 부자의 기운을 받으려면 안채 마당의 단풍나무에서 우물까지 5번을 왔다 갔다 하라고 하셨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생가를 떠나기 전 부지런히 걸으면서 부자의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빡빡했지만 알찬 하루의 답사 일정이 끝나고 대구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국보급 문화재가 많은 창녕은 유서 깊은 땅이고 의령은 ‘의병의 수도’임이 분명했다. 의병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의령 땅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백성들의 애국심을 가슴 깊이 새겼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곽재우 장군 생가와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도 꼭 찾고 싶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우리 땅 어느 곳이든 그저 스쳐 지나지 않고 내 눈에, 마음에 잘 보이기를 소망해본다.
2018년 9월
* 문화 유적에 대한 유인물을 참고하여 글을 적다보니 너무 길기만 하고 알맹이가 없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첫댓글 재미 있는역사 공부, 많이 했습니다. 관심이 있는 곳에 생각이 깃들고
그 생각이 글이 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창녕의 고분군과 만옥정, 의령땅의 일붕사와 의병박물관 부자 솥 바위 그리고 호암의 생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입니다.
너무나 상세하게 보시고 해설을 더해 쓰신 글을 읽으니, 현장에서 보는 생동감과 느낌이 살아 숨쉼니다. 많은 것을 알고 배우는 게기가 된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요즘 여야를 망론하고 창녕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것은 지역의 정기를 받아서 대성하는것 같습니다. 의령도 부자와 의병은 고장과 연관이 큰것 같습니다. 덕분에 두지역의 인물과 역사공부 많이하였습니다. 좋은글 잘 일었습니다.
창녕지방의 유적과 기념이 될만한 장소 우람기를 일고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박물관에서 하는 뜻깊은 행사가 보람있고 유익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의미있는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현장을 답사하면서 보고 느끼는 공부가 참된 공부겠지요. 덕분에 저도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퇴직후 박물관대학에 다닌다는 동기들을 만난후 언젠가 나도 수료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답사를 다녀온 글을 읽으니
마음이 바빠짐을 느낍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창녕 의령의 문화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박물관대학 초창기 선배입니다. 박물관에서 가는 문화유산 답사 일분도 허용않고 시간되면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하루는 놓친 기억이 납니다. 창녕의령지방을 다녀오셨군요. 글 속에 저가 다녀온듯 기억이 납나다 좋은 곳에 다녀오셨습니다.
선생님의 박물관대학 문화유적 답사기를 읽으며 저는 방안에서 편안하게 소중한 문화유적을 답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는 것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는 말도 있던군요. 선생님의 글에서 많은 것을 알았으니 다음에 답사할 기회가 생기면 많은 것을 보고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문화재 공부 잘 하였습니다. 답사 다녀온 글을 보니 저도 은근히 가고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덕분에 문화 유적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의령은 부자들의 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엘지.효성 등 창업주들이 태어난 고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병철회장 생가 입구에 늘어 서 있는 솔방울이 풍성한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음미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문화유적 탐방 후의 기록을 정리해 본다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기록 하나하나가 한편의 수필로 재 탄생 할 수도 있으니까. 덕택에 역사공부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