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옥동네의 전설•3
일루전ILLUSION
제1부 폭동 전후(제100~105회)
15. 짧은 행복 (14~19)
“어려운 말인가요?”
“판단이 필요한 기라 …… 좀 그럴 깁니다.”
“수수께낀가예?”
매리가 웃으며 말했다.
“해석은 쉽지만 행동하기는 쉽지 않심다. 결단이 필요하니까예.”
“결단?”
“매리 동지는 혼자 이곳을 탈출해야 할 깁니더.”
“지 혼자라 캤십니꺼? 곽 선생은예?”
“하, 선생……흐.”
그러고보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다. 양수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헛웃음을 웃다가 고개를 들고 매리를 마주보면서,
“나도 내빼야지요.”
“그라마 와 같이 안 가고?”
“내가 가는 곳으로 매리 동무는 갈 수 없으니까.”
“어디로 가실 긴데예?”
“음, 저는 ……저 나는 위원장 동지와 함께 삼팔선을 넘을 깁니다.”
“그럼 월북? 어디로요? 당수동지가 있는 곳으로요?”
“글세, 우찌 될란지 아직 잘 모르겠소. 우리를 델꼬 갈 사람이 오게되어 있소.”
“언젠데요?”
“아직 날짜 확정 받지는 못했소. 아마도 오늘 중으로 명령이 있을 깁니다.”
매리는 너무나 뜻밖의 말을 뜻밖의 순간에 전혀 예고 없이 듣는 말이라 현실감이 없다.
“세에…상에, 우째 그런 일이?”
매리는 입을 벌리고 더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양수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을 누가 결정했는데예? 곽 선생님이 가고 싶다 캤십니꺼?”
“아니오. 형편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안되게 돼버린 거요. 그래서 위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우에? 위가 어덴데예? 도당? 중앙당? 평양 김일성?”
“하하하, 웬 김일성은! 김일성이 와 우리 위가 되오?”
“지금 형편이 그렇다면서요?”
“지금 형편이 우리 남로당이 북로당한테 매였다는 뜻으로 들었소, 시방?”
“헷갈리잖아예? 확실하게 말해 주세야지예.”
“중앙당이오.”
“지금 중앙당이 어데 있는데예?”
“그라마 우리 당이 중앙당 없는 당이요?”
“글세 중앙당이 어데 있는가 묻잖십니꺼?”
“하하하, 미치겠네. 어데 있어도 있으니까 걱정 안하시도 되거든요, 여성동지!”
“그라마 나는 어데로 가야하는데요?”
“어데로 가고 싶소? 매리 씨 고향이 수원이라 캤지요? 아버님께서 지금 수원에 계신답니다.”
“그걸 우째 곽 선생이 아십니꺼?”
“우리쪽 정보통이 알려온 거요.”
“언제예?”
“며칠 전입니다.”
“그라마 와 지한테는?”
“지금 말하지 않소. 그 동안 우리는 만날 새가 없었잖소.”
매리는 고개를 양수와 반대쪽으로 돌리고 눈물을 참고 있었다.
아버지 전 목사가 고향으로 낙향했다고? 낯선 소식이다. 뜻밖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저러나 당에서 개인에 관한 이런 사사로운 동향까지 뒷조사하듯이 살피는 것인가? 그럼 나도 수원으로 가야하나?
하기는 대구에 몸 붙일 곳이 있는 곳도 아니고, 오히려 당국이 주목하거나 어쩌면 지명수배자일지도 모르는 처지이니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호랑이굴을 찾아가는 격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수원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선 곳이다.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아버지조차 그곳을 고향이라고 찾아간 적이 있었는지 매리의 기억에는 없었다.
그런 곳을 아버지가 찾아가셨다면 대구에서는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 자신이 죄를 지어도 엄청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양수는 매리가 말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겠다는 듯이 역시 아무 말없이 기다렸다.
출입문의 창호지가 환하게 밝아왔다. 볕이 나나 보았다. 덩달아 방 안도 훤해졌다.
양수는 계속 매리의 옆 모습을 돌아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쪽에 인연이 있습니꺼?”
매리가 양수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있을 턱이 어데 있겠십니까? 내가 일제 말기에 왜놈 경찰을 피해서 대구로 숨어들 때도 무슨 인연을 찾아서 들어온 건 아니었거든예. 그냥 가보는 기지예.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십니꺼?”
“이 한 겨울에 당장 몸을 누일 때가 없이마 안되지예?”
“무작정 나혼자 가는 기 아이고, 그쪽에서 사람을 보내와서 그를 좇아 가는 기니까 무슨 대책을 해놓고 오라카는 기 아이겠소?”
“그라마 나도 같이 가도 되겠네예? 가는 곳에 인원을 둘로 한정한 거는 아일 긴데예?”
“매리 동지가요?”
매리는 「미망」에 이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썼다.
곽 선생의 월북 계획은 도무지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마치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읽었던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러한 언술에 맞장구치듯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의 그러한 제의는 그에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릴 것인가를 미리 셈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마치 농담을 진담처럼 펼쳐놓듯이 나도 같은 말로 되돌려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반응은 내가 그랬듯이 그도 바로 내 말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해놓고 보니 나의 그 말은, 말도 안되는 그의 생각을 깨뜨리는 효과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지금 대구에서 이곳에 올 때와 같은 그런 마음으로 그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게 아니오.”
“대구 가족은 우짜고예?”
나는 ‘나는 어찌하고’ 라고 묻고 싶은 것을 그렇게 애둘러 말했습니다.
“당에서 돌봐 줄 거요.”
그의 답변이었습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마주 쳐다보았습니다.
“당이 무슨 수로?”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묻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이 도와줄 그럴 경황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습니다. 설마 위폐를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말은 아닐 테니까요.
그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입 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듯했으나 곧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그라마 나도 같이 가도 되겠네예? 나는 괘않은데?”
“안되오. 무리할 필요도 없지만 공연히 거기 있는 동지들에게 폐가 될 것이오. 전 동지는 여기 남아 있으시오. 그 동안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리시오.”
“곽 선생의 월북은 누가 결정한 깁니꺼?”
“해주 지도부의 의지요.”
“해주의 지도부? 박헌영 동지를 말하는 깁니꺼?”
“그렇소.”
“언제 그쪽과 연락이 닿았었어예? 그동안 전혀 그런 내색이나 말을 한 적이 없지 않았어예?”
“이제 말하는 겁니다. 이 결정도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은 아니오. 파업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보고받은 해주로부터 지령을 받았소.”
“도당의 지령이 아니고예?”
“그렇소. 지금 도당도 지하로 들어가서 지휘의 기능이 위축되고 있소. 그래서 해주의 총비서 동지께 직접 보고하고 지휘를 받은 거요.”
“그라마 와 나는 같이 가면 안되는 기라예? 그 명령이 곽 선생 혼자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예?”
“해주의 명령은 나한테 직접한 것이고,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소. 그런 명령이 굳이 혼자라야 한다거나 둘이라도 좋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명령 아니지만, 그런 명령받고 움직이면서 가족을 대동한다는 것이 비상식일 것이오. 그곳은 지도부조차 피란살이처럼 숨어지내는 처진데 사람이 하나라도 더 기대게 되면 부담만 끼치는 기지요.”
“나도 가고 싶심더. 나를 버리지 마시이소.”
“버리기는 누가 버린다고 그러시오. 우리가 월북하는 것은 그곳에서 터를 잡자는 게 아니잖소. 기회를 보아 고향으로 돌아와야지요. 마치 어린애처럼 보채면 되겠소?”
“지도 같이 가겠심더. 지금 나도 여기서 헤어진다카마 갈 데가 없심더.”
“양친께서 수원으로 가셨다 안캤소?”
“그곳은 나한테는 낯선 곳이거든예.”
“부모가 기시는데 낯선 곳이라니요?”
“하여간 저를 띠놓고 갈라 카마 안됩니더.”
나는 그렇게 떼를 썼습니다.
곽 선생은 웃으며 내 등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냥 매리 씨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겠소. 하여간 우리는 서운하겠지만 당분간 이별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시깁니다. 아마도 길어도 두서너 달일 겁니다. 해주의 지도부도 지금 너무 오래되었고, 지쳐 있을 텐데 우리가 가서 힘이 되어 주어야지요. 따뜻한 봄이 오면 우리 모두가 다시 남쪽 나라 우리 이 땅으로 다시 오게 될 것이고, 그때는 더 기쁘게 만납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