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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하시고(2)
다 이루었다
요 19:30 / 조용기 목사
<서론>
“다 이루었다” 마지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세기 13장 14~1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 본론>
1. 다 이루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을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내용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다 이루었다’하신 것은 죄의 값을 다 청산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장 22절)’ 십자가에 못 박혀 예수님이 거룩한 피를 흘리셨는데, 그 피흘림이 없이는 인류의 죄는 사하여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로 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속죄를 하고, 하나님 존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제 예수님 하나님 피를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면 영원한 속죄피라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우리 성가대가 성가를 부르는 대로 영원히, 영원히 죄를 용서하는 제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시고 피를 흘리시는데, 그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통해서 의의 선물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롭다는 말은 내용이 깊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이 의인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죄를 지으면 의가 되지 못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혈의 능력으로 영원히 의롭다 하신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한 번도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만들어 주신다. 어지럽습니다. 그렇게 의로움을 인간의 힘으로 이룩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믿는 사람은 죄로 단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선물로 받는 것인데, 세계 최대의 종교건축물인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가면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돌계단을 기어 올라가는데, 소위 신들이 사는 땅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그렇게 한답니다. 이처럼 모든 종교는 인간의 고행이나 선행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하늘까지 올라가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셉 프린스라는 사람은 ‘잊혀진 은혜’라는 책에서 은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아래에선 최고의 인간조차 실패하지만, 은혜 아래에선 최악의 인간도 구원받을 수가 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구원받는 것은 바로 구원은 은혜로 선물로 받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가 있은 것입니다.
2. 다 이루었다
두 번째로 ‘다 이루었다’하는 의미를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깨달아야 될 것은, 허물을 다 씻어 깨끗하게 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로 통해서 우리가 전염병처럼 죄를 받은 것 이 외에, 허물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와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허물은 나쁜 행위나 습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예수의 보혈로 다 씻어서 나쁜 행위나 습관을 성화시켜 성령을 모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가 속죄함을 받을 때, 죄와 허물로부터 속죄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sin and transgression라고 말합니다. 죄는 전달되어온 죄 그것을 죄라고 말하고, 허물은 행실이 비뚤어지고 고약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에베소서 2장 1절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허물이라는 것은 옛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제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면 성령님을 모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다 이루었다
셋째 ‘다 이루었다’는 뜻은 예수님께서 죄와 더불어 끝까지 물리치신 것이 병이었습니다. 예수님 사역은 3분지 2가 병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요사이 교회가 병 고치는 일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이 문명사회에 교회 나와서 병 고친다는 것은 무식하고, 덜 된 인간처럼 생각이 되기 때문에 병 고치는 일을 안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곳에 가나 죄 사함을 주시고, 병 고침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병 고침의 덕을 많이 보아왔고, 또 많이 병 고침을 받고 있는데, 일본에 요번에 선교 갔다가 들어와서 굉장히 몸살이 날 징후가 농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도 몸이 굉장히 피곤했는데, 2부 예배 때 우리 당회장 이영훈 목사가 설교 마치고 난 다음 “병 든 사람들은 다 일어나서 아픈 데 손을 얹으라.”하니까는 내가 아픈 데 손을 얹었죠. 아이 뭐 기도를 하는데 따라서 “아멘”하고나니깐 몸이 화끈하고, 몸살기가 다 없어져 버리고 오늘 여러분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서로 고백하고, 서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한다고 효과가 있겠는가?’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의 손길을 끌어오는 수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그 기도줄을 타고 오셔서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치료하라하면 어떻게 병을 치료합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셔서, 그 기도를 따라서 기적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나니라’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셨습니다. 병의 빚을 다 청산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신이 청산한 병을 처리하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은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 뜰에 들어와서 아픈 환자를 안식일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쳤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0절로 13절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누가복음 13장 14절로 17절에 보면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더라’ 우리가 예수님 하시는 일을 보면 철저히 종교의식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종교의 노예가 되게 하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4. 다 이루었다
네 번째로 우리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될 것은 가난과 저주를 다 청산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가난해졌습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부요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유하신 자가 아닙니까? 천지를 다 지으신 하나님이 왜 가난할까요?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셔서 가난하게 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마음속에 ‘부요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이 참 슬픈 일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는 가난하다. 우리는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는 부자가 아니다, 가난하다, 자기를 가난한 사람 편에 자꾸 세워서 부정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요하다.”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한 그 생각이 그러한 세계로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자꾸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부요하지 않다.” 그러면 그와 같은 형편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내가 네게 복 주고 복 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될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를 다 청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를 받았다. 그러니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고 조건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하지 않습니다. 저주받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것은 예수님이 다 청산해버렸었으니, 예수님도 청산한 것을 왜 우리가 또 맡아서 청산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다 이루었다’고 주님 말씀하실 때, 무엇을 다 이루었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림을 청산했다는 것입니다.
5. 다 이루었다
다섯 번째 ‘다 이루었다’고 하신 내용은 죽고 장사 지낸 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을 주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죽은 지 3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이요, 생명은 예수님이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부활이요, 생명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우리의 생명이 일체가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은 죽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다 청산하고, 부활 영생을 주시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에 일생을 바치신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처음 중국 선교를 할 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 무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면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네 안에 계시므로 너를 의지하지 말고 네 안에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고 살아라.’ 그날부터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내 속에 예수님이 나의 생명을 살아주신다’라고 믿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굉장한 기도의 힘이 생겨나고, 믿음이 생기고, 활력이 생기고,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꿈꾸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믿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고, 부활의 사람, 영생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산다고 따라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 결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하시고 영혼이 떠나시자 하나님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시킨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졌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성전에 휘장이 있는데, 우리는 그 휘장 바깥에 거기에 서서 제사를 드리지 안에는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피를 가지고 그 휘장을 넘어서 안에 들어가면 법궤가 있고, 진설병이 있고, 촛대가 있는 곳에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하시니까는 이제 그런 것도 필요 없이 휘장이 찢어지고, 바로 하나님 앞에 다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속죄와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제사장과 제물이 되시고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빚은 갚을 때까지 상속이 되는 겁니다. 재산뿐 아니라 빚도 상속이 됩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지 몰랐던지 상관없이, 상속인이 빚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보다 빚이 많은 경우에는 상속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상속을 포기하면 다음 순위의 상속인에게 빚이 또 상속됩니다. 지난 해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보면 할머니가 사망하면서 재산보다 빚을 더 많이 남겨놓았는데, 그래서 두 아들이 상속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빚이 6살, 10살 손주들에게 상속되어 그 어린 손주들이 각각 9천 만 원씩 빚을 갚아야 한다고 법원에서 판결이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가 할머니 빚을 상속을 포기하고 나가니깐, 그 빚이 손주, 손녀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주 빚이 무서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빚은 이처럼 갚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일가친척까지 빚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빚은 돈을 빚진 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이 지은 죄를 상속받고 태어나는데, 이러한 죄의 빚을 상속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갚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빚쟁이로 태어납니다. 아담이,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의 빚을 상속받아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 독촉이 얼마나 무서운지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문풍지 소리만 나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앉아서 “하아,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쉽니다. 불안과 공포를 가라앉히려고 애를 쓸 때가 많습니다. 왜 내가 빚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아느냐 하면, 저는 제가 서있는 이 강단이 있는 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지을 때 엄청난 빚 독촉의 고통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빚 독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엔 받아서 일을 할지라도, 빚은 지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철골 밑에 제가 꿇어앉아서 “하나님 이 철골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서 합법적으로 죽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갈 테니깐 자살을 할 수 없는데, 이 빚을 어떻게 합니까? 매일같이 협박, 공갈을 당하고, 법원에 불려가고 하나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 대답을 안 하셨는데, 지나고 보니 요렇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죄악의 빚을 청산해 주었다고 생각할 때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인간으로서는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예수님을 통해서 갚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한복음 8장 3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 때문에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모두가 죄의 빚쟁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남의 빚을 대신 갚아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 없이 태어나신 예수님만 죄의 빚을 대신 갚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값을 다 지불했다. 다 갚았다” 그렇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값을 청산하시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속을 방문하고 거기서 집회를 한 적이 있는데, 마사이족 교회에 제일 잘 산다는 집사님 댁으로 초청을 받아서 갔습니다. 저만 간 것이 아니라 같이 마사이족 전도에 따라갔던 장로님들도 여러 명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마사이족은 우리하고 뭐가 다르냐하면, 소똥을 가지고 삽니다. 소를 신성시하고, 집은 완전히 소똥으로 가지고서 지었습니다. 방바닥, 벽도 다 소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갈 때도 장로님들 모시고 마사이족 집사님 집에 갔는데, 소똥으로 지어져서 천장도, 벽도 전부 똥으로 질퍽질퍽합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우리를 대접한다고 소똥 묻은 손으로 커피를 큰 냄비에 부어가지고서 그 소똥 묻은 손으로 휘휘휘휘 저어가지고서, 아 그래가 소똥 불로써 화로에 불이 퍼진 곳에 냄비를 얹어가지고서 끓여서, 자기가 휘휘 저어서 한번 맛보고, 아 그 다음에 잡수시라고 참 좋다고 커피를 주는데 기가 막힙디다. 근데 장로님들은 경험이 있었던지 마시는 채 하고서 전부 발밑에 다 부어버리는데, 나는 순진하게 그걸 다 받아 마시고 난 다음에 호텔로 돌아오는데 배속에 전쟁이 일어나가지고서 아주 굉장히 고통을 당했습니다. 소똥커피를 먹는 것도 그렇게 절단강산인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 인생의 죄악의 똥물을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 마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악의 똥물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죄악을 주님께서 다 마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종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똥물이 아니라 지옥에라도 내려가려고 하신 것이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인류의 모든 더러운 죄가 담긴 잔을 다 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 못 박히고 난 다음에, “내가 다 이루었다” 우리 사람, 우리 힘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을 주님이 다 이룬 것입니다. 죄악의 잔을 마시고, 허물의 잔을 다 마셨습니다. 질병의 잔을 마시고, 저주의 잔을 다 마신 것입니다. 죽음의 잔을 마시고, 우리를 위해서 잔을 다 마시고,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잔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 종살이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방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의로운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이요, 예수님 안에서 질병을 이긴 사람이요, 가난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늘 축복받은 사람인 걸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여러분과 나는 죽음이 다가와도 겁나지 않는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멘.
다 이루었다
요 19:30 / 강성찬 목사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모사 제갈 공명이 어느 날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화공이 느닷없이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의 도모는 인간이 하지만 성패의 가름은 하늘이 하니, 인간은 그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릴지니라(謀事在人, 成事在天 盡人事待天命)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비롱(1524-1592)이라는 장군이 중명에 걸려 위독해지자 최후의 말을 남기려고 몇 사람의 절친한 친구를 불렷습니다. 친구들이 모이자 비롱은 내가 하나님께 그리고 국왕 폐화와 국가, 사회에 못다 갚은..라고 하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친구하나가 부드럽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만두게나. 결국 다 못 갚을 테니까 임종 때 할일을 다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다 이루었다.
세상일에는 미완성이 많으나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주님은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외침을 하십니다.
크롬마카는 " 이 말을 들을 때 구속의 사슬은 풀리고 감옥의 담은 무너지고 수천 년 닫혔던 장막도 대문도 열린다"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텔레오)는 끝내다, 끝나다, 완성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 라는 뜻이 있는데 1,2세기에 와서 이루다 또는 빚을 갚다 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으며 흔히 영수증에 쓰여 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외치심은 전액 지불의 뜻이 있다고 이해합니다.
어느 날 늦은 밤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스 1세는 병사의 복장을 하고 진중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한 장교의 숙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장교는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의 아들로서 평소에 아끼는 젊은이였습니다. 이 장교는 군대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사 문을 들쳐보니 그는 책상에 엎드려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오른손에는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쓰던 글이 남아 있었습니다. 글을 읽어보니 이 젊은 장교는 도박에 손을 대어 마지막에는 군대 자금까지 동원했고, 이제는 갚을 길이 막막하여 자살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는 유서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글의 맨 마지막 줄은 <이 많은 빚을 누가 갚을 것인가?>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황제는 모든 사정을 짐작했습니다. 황제는 펜을 들어 종이 여백에 크게 적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다 갚겠노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 그리고 황제는 조용히 막사를 나왔습니다.
한 나라의 황제로서 한 장교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일유의 문제를 해결 하시며 다 이루었다고 외치십니다.
헌터는 "그리스도 자신의 인상적인 말씀은 나는 잔을 쭉 마셔 버렸다. 나는 갈 길을 다 갔다. 나는 값을 다 치루었다."라고 해석 했습니다.
스펄죤은 "모든 모형 약속 예언이 성취 되었고 모든 제사법이 끝났고 그의 완전한 순종이 끝났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을 채웠고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려 이겼다"라고 했습니다.
1. 예언을 다 이루었다
초림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 졌고 생애에 대한 예언도 다 이루어 졌고 구원의 사역도 다 이루여 졌다고 외치십니다. 이와 같이 재림에 대한 예언도 다 이루어 질 것을 말씀 합니다.
일본의 하라사끼 목사의 사모님이 43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폐암 말기의 고통은 병으로 받는 고통 중에서 제일 괴로운 고통입니다. 그분은 자기의 생명이 며칠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준비를 합니다. 일기를 썼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이루도다'라는 암호를 사용했는데 의식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입으로 말을 못하니까 손에다가 '이루도다'라고 쓰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일기장에는 고통 속에서도 감사한다는 말뿐이었습니다. 어제보다 고통이 덜했던 것을 감사했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믿고 기뻐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아이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감사했고 더욱 신앙생활에 정진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행복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을 이길 힘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다 이루신 주님께서 사랑으로, 절대 은총으로 다 이루신 주님께서 감당하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이러한 주님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이 주에게 바치며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기를 원할 때 주님께서는 더 큰 평안과 은총을 주십니다.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의지 할 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주님께서 절대 은총, 절대 은혜를 어떠한 상황에서나 주십니다. (디럭스바이블-이루도다)
2. 구약 제사 제도를 다 이루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죄인이 용서를 구하며 드리는 제사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졌고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4)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7)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8)하십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히 7:2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6)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7:27) 하신 말씀대로 구약의 모든 제사를 십자가로 완성 하시고 이루신 일이 있습니다.
1) 이방과 유대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2,13)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엡 3:6)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2)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길을 여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7)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8)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19)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0:20)
3)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골 1:21)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2)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8)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9)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0)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
주정꾼 남편으로 아내를 학대하던 자가 바닷가에 나가 배의 난간에 엎드려 자다가 떨어지면 죽을 것으로 생각 했으나 죽지 않고 별이 총총 빛나는 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는 자기의 셔츠를 다림질 하며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487장 1절)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487장 2절)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아멘 (487장 3절)"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한 밤중 아내로 하여금 노래 할 수 있게 하는 예수라면 나를 도와주실 수 있을 것이요 어떻게 하면 나도 구원 받을 수 있겠소?" 라 하여 그는 구원을 얻게 되고 아내와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화평이십니다.
3. 사명을 다 이루었다.
1) 지상 생활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하신 주님 자상 사역을 다 이루셨다고 하십니다.
2) 마귀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승리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하신 말씀대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5)고 합니다.
(1) 악한 원수들의 흉계가 끝장이 났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 12:31)
(2) 사탄이 거꾸러져 끝장이 났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3) 마귀를 무저갱에 가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계 20:1)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 20:2)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계 20:3)
3) 순종을 다 이루었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죄를 남겨 주었지만 주님은 순종하심으로 구원을 허락 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7)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4) 의를 다 이루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8-19).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눅 23:47)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5) 대속을 다 이루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영국의 전도자가 천막 집회를 막 끝내고 천막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목사님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전도자는 대답 하였습니다. "젊은 친구 너무 늦었어 이미 늦었다니까" "여기 전도 집회가 끝난 다음에 왔기 때문에 늦었다는 말씀입니까?" "젊은이 구원 받고 싶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자네는 상각하고 있네 그렇다면 이미 수백 년이 늦은 셈 일세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 되었다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 지금은 자네가 구원 받기 위해서 할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네 다만 자네가 무릎을 꿇고 구세주께서 자네를 위하여 이미 행하신 일을 받아 드리기만 하면 된다네." 마침내 젊은이는 빛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어떤 미술가가 나사렛 목공소에 있는 소년 예수를 그렸는데 소년 예수가 창가에 서서 팔을 벌려 창 문 양 끝을 붙들고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줄기 빛이 반사 되어 건너편 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그 그림자는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가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서 살으심을 표현 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고통의 십자가를 친히 지시므로 모든 고난이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 예언을 다 이루시고 구약 제사제도를 다 이루시고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를 위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에 우리를 위하여 상하신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고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잔을 받는 성찬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성찬에 참여하고 경건하게 고난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 이루신 십자가
요 19:30 / 김남준 목사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시는 광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만약에 마지막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기도가 개인적인 기도였다면 ‘다 이루었다’ 하는 이 기도는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마지막 생명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 이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은 무엇을 이루셨다는 것이고,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십자가로 달려온 구원역사
먼저 예수의 십자가가 여기에 있기까지 달려왔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이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가 영적인 피조물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졌다면, 지상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을 창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만드셨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부리며 직접 다스렸지만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과 생각을 따라서 가꾸고 돌볼 왕과 같은 대리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영혼을 주심으로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아래로는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으며 옆으로는 인간들과 서로 알고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 속에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흔적을 남기셨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이루면서 창조주의 영광의 찬란한 빛을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 세상에 가득한 영광의 빛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오는 중요한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A. 언약과 인간의 타락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 앞에 타락한 것입니다. 죄가 온 창조 세계를 뒤덮었고 이 세계 안에 가득하던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은 하나님이 직접 거두셨고 그래서 이 세계는 완전한 어두움과 타락의 폐해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끊어져서 오히려 자신에게 복종할 이 세상에 지배를 받으며 복종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모든 관계가 끊어진 채 고립된 존재가 되었고, 행복하게 인생을 영위해 갈 자원을 상실한 채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불행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B.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차마 버리실수가 없어 아주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이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결과대로라면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놀라운 은총을 베푸심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없어지지 않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육체의 죽음을 유보하신 것입니다. 범죄 하는 즉시 영혼은 죽었지만, 육체의 죽음은 유보하심으로 자손들이 대를 이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발뒤꿈치를 물리라’(창 3:15)는 이 예언은 명백하게 여자의 후손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메시아 사상은 계속 이어졌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였습니다. 이런 예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III.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A. 오직 십자가에서 선언하심
예수님은 오직 단 한번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고, 오직 십자가 한 곳에서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동안 십자가 죽음보다 더 찬란한 영광이 깃들여 있는 발자취가 많았지만, 마지막 절명하는 그 순간에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B.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기에 고난을 당하여야 할 이유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인간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33년을 이 세상에 사시면서 온갖 멸시와 치욕을 받으시고 노예처럼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섬기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인간들을 위해 주심으로 헌신적인 긍휼과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비취는 찬란한 은혜의 빛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눈부신 불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인성 안에서 순종을 배워가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차마 사람의 몸을 입기 전까지는 아실 수 없었던 죄로 말미암는 인간의 모든 경험적인 지식을 체득하셨던 것입니다. 그럴수록 주님의 마음에는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지셨고, 그래서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재물로 아버지께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구속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을 구속하실 모든 근거들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주님은 마지막 죽으시는 그 순간에 ‘다 이루었도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 구속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인데 두 가지로부터 구속을 가르칩니다. 첫 번째는 율법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율법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며 두 번째는 우리의 양심에 새겨진 율법입니다. 원래 인간은 두 율법이 완전하게 일치하였으나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마음의 율법이 희미해지기 시작해서 죄를 짓고 가책도 느끼지 않는 화인 맞은 인간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정죄하는 기능을 따라 인간들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몸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율법의 저주를 모두 성취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낼 모든 필요한 일들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를 모든 의식적인 율법으로부터 구속해 내는 일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일부 인간들에게 제사의 제도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의식을 따라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써 잠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의식적인 율법과 제사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었던 휘장을 갈라 놓으셨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그 휘장도 찢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인간의 의를 벗어버리고 보좌에 이르는 피 뿌린 새로운 산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행위의 율법을 따라서 구원받을 필요가 없도록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완전히 감당하고 죄 값을 모두 치러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구속하심으로 다시는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신분과 지위 면에서 죄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신분을 바꿔 주셨고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것을 유업으로 누릴 수 있는 상속자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죄인은 의롭게 살고자 하여도 마음 안에 강력하게 잡아끄는 죄의 얽매임 때문에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얽어맨 이 모든 죄와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필요한 일들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셨기 때문에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IV. 십자가 아래서 살자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외치는 그 순간에도 병든 자들은 그 땅에 많이 있었고, 눈멀고 고침을 받지 못한 문둥병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 설교해 주셔야 할 영혼들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십자가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받으시고 죽고 나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못하고 가신 그 일들의 뒤를 이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의미에 감격하는 성도들은 마지막 남은 소원이 예수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몸부림 치고 살아가는 쓰레기 같은 일들이 주님이 만약에 오늘 밤에 오신다면 내일도 계속해야 할 일들일까요? 십자가를 아는 것만큼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한번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 보십시오. 위선과 거짓의 껍질을 다 벗고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인지 한 번 마음으로 말해보십시오. 그리고 살아있다고 일컫는 이 날 동안에 놀지 말고 쉬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예수 그리스도 위해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넘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상 최고의 날
요 19:30 / 석원태 목사
역사 연호의 표기는 주전(B.C.)과 주후(A.D.)로 분리됩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 역사가 예외없이 적용하는 세계 공유의 표준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중심이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입증해주는 사실 중에 사실입니다. 사실상 길고 긴 인류 역사의 날들 가운데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예수께서 승천하신 날, 예수께서 마지막에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은 역사가 존재하는 시간들 가운데 최고의 날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 날들과 시간을 위해서 모든 다른 시간과 날들이 존재하였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날은 날들 중의 날들이요, 사상 최고의 날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경륜하신 역사존재의 그 궁극적 의미가 성취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경륜이 성취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Ⅰ. 이 날은 사상 최고로 긴 예수 고통의 날이었습니다.
웨스트 콧(West Cott)은 성경과 또한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오늘 예수님 수난일의 시간을 몇 가지 경우로 나누고 있습니다. 새벽 1시경, 겟세마네에서의 고민과 기도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와서 예수를 체포했다고 하였습니다(요 18:3, 12). 그는 잡히시던 그 시간에 베드로가 칼로 베어 떨어뜨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셨습니다(눅 22:51, 요 18:10).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였습니다. 새벽 2시경, 제일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요 18:13). 그는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일종의 예비심사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요 18:24). 그 다음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결국 가야바가 주재하는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십자가에 해당되는 사형죄수로 정죄하였습니다(마 26:66~68). 새벽 3시경에 시작된 가야바 뜰에서의 심문은 새벽 5시 경에 다시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김으로 끝이 났다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예심이 그 시간(5시경)에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예수의 죄목을 구체화시켰습니다.
① 백성을 미혹하고(선동의 죄)
② 세금 바침을 금하고(반정부주의자)
③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반 황제주의자)고 하였습니다(눅 23:1~2). 빌라도는 이것이 유대인들의 종교문제인 줄 알고, 관할 구역인 헤롯 왕에게로 보냈습니다. 새벽 5시 30분경에 헤롯은 예수를 심문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 군인들과 백성들은 예수에게 조롱과 매질과 온갖 모욕을 다했습니다(눅 23:7~12). 아침 6시 30분경, 빌라도는 다시 예수를 심문하고 판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롯은 재판권이 있는 빌라도에게 다시 떠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 사형에 해당되는 죄수로 정죄하고 판결하였습니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수많은 세기적 기독교인들의 입이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눅 23:13~25). 오전 7시경,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법정에서 갈보리 형장까지 예수를 맡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2시간 동안에 저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습니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고 외쳤습니다. 희롱을 다한 후 다시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갔습니다(마 27:26~31). 아침 9시(제3시 ; 막 15:25), 마침내 형장의 십자가 위에 예수는 벌거숭이 죄수로 높이 달렸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성경은 제6시(12시)부터 제9시(오후 3시)까지 온 천지에 어둠이 임하여 꽉 차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7:45). 그리고 예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실로 긴 고난의 하루였습니다.
Ⅱ. 이날은 예수 최후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죽어가는 임종의 고통 앞에서 최후 승리의 말을 남긴 자가 예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수난을 겪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 나온 그의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어둠 전에(9~12시) 네 마디 말씀을 남겼습니다.
① 인류의 사죄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② 회개하는 한편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신 일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천국의 실존을 알려주고, 주님 자신과 그를 믿는 자들의 세계를 알려주었습니다. 끝까지 ‘구원역사’를 하셨습니다.
③ 효도를 다하는 계명을 준수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④ 절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신 수난의 처절한 장면입니다. 범죄자는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도입니다.
2. 그리고 어둠 속에서(12~3시) 세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⑤ 무죄하신 인성을 토로하였습니다. 곧 요한복음 19장 28절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구약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9:28, 시 69:21).
⑥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신 속죄성취의 개가입니다.
⑦ 제일 마지막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을 인류의 아버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실로 최후 승자의 날이었습니다.
Ⅲ. 이 날은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입증한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의 장교 백부장과 병졸들은 이 모든 현장의 목격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그날, 태양이 3시간(6시부터 9시까지)이나 빛을 잃고 온 천지가 캄캄해져버린 흑암 속에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마 27:45). 그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마 27:51). 그리고 자던 성도들의 많은 무덤들이 열려 죽었던 몸이 일어나고 마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마 27:52).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최후는 그의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군인들과 장교에 의해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Ⅳ. 이 날은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날이었습니다.
당시 죄수들의 시체는 전혀 매장되지 못하고, 들개나 독수리들의 밥이 되도록 들판에 방치해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의 시체는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경건한 사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하여 예수의 시체가 안장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오늘 우리들의 토요일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오후 6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말하자면 금요일 오후 6시가 되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오후 6시 이후의 모든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불법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 시체를 장사하는 일을 급히 서둘렀습니다. 저들은 당대의 고명한 위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산헤드린공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숨은 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담대히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 시체 매장 허락을 받고, 자기의 빈 새 무덤을 예수를 위하여 제공하였습니다(마 27:59~60, 요 19:38). 니고데모는 예수의 시체에 몰약과 침향 섞은 향유를 100근쯤 가져와 발랐습니다(요 19:39). 그리고 경건하게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였습니다(요 19:41~42). 성경은 오늘 예수의 시체를 장사한 일에 대하여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요 19:41~42)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 53장 9절에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정사(釘死) 일입니다. 존재하는 지상의 모든 교회는 이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교회가 생존하고 있다는 이 사실 때문입니다. 지상의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는 바로 예수 십자가 대속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문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보리를 필요로 한다.”라고 반스 하브너(Vance Haver)가 말하였습니다. 전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삶의 시작이 십자가이고, 진행이 십자가이고, 마침이 십자가입니다. 이유는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고(과거 사죄), 그 안에서 현재의 성화를 누리고, 그 안에서 완성의 영화를 맛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세계에서 천사들과 24장로들과 흰옷 입은 14만 4천인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의 주제가 어린양의 보혈이었습니다(계 7:9~17). 사상 최고의 날!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입니다. 이 날은 예수 수난의 최장의 날이었습니다. 죄를 범한 인류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던 최후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날은 예수 최후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십자가상의 그의 입에서 승리의 일곱 말씀(七言)이 쏟아진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날입니다. 그리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신 날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의 백성들에게 용서와 사죄와 구원의 축복이 성취된 날입니다. 그 누구도 이 날의 역사적 진실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참회와 감격과 소망과 축복의 날이 되고 만 것입니다. - 아 멘 -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와 물의 의미
요 19:31-37 / 박봉수 목사
금년이 2018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AD 2018년입니다. 여기서 AD란 ‘주님의 해’라는 라틴어 Anno Domini의 약자입니다. 그러니까 금년이 주님께서 탄생하신지 2018년이 되는 해라는 뜻입니다.
이 AD라는 역사의 기원을 제안한 사람은 6세기경 로마의 수도원장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나라마다 연호가 다르고, 같은 나라라도 통치하는 왕에 따라 연호가 다른 것을 문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일하여 연호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해를 기원으로 하여 연호를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분이 이렇게 제안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이후 완전히 새롭게 변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그 해를 AD 1년으로 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런 제안은 오랜 세월 동안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잊혀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11세기경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온 세계가 다함께 사용하는 보편적인 연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이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보다 먼저 역사의 기원에 대해 제안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학자 빅토리우스(Victorius)라는 사람입니다. 이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해를 역사의 기원으로 삼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분이 볼 때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새롭게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구원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역사의 기원에는 동의했지만 빅토리우스의 제안보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불길한 죽음보다는 복된 탄생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이분의 제안은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의미면에서 볼 때는 이분의 제안이 더 타당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사건보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실제로 개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변화시켜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빅토리우스의 제안처럼 십자가 이후 개인과 역사에 변화가 올 것을 암시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크게 볼 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우선 마, 막, 눅 이 세 복음서 즉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상징적인 암시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성전에서 일어난 징조입니다. 마 27:51, 막 15:38, 눅 23:45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과 하나님과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상징적인 암시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요 19:34 말씀입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로마 군인 한 사람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막 죽은 시신을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로 보이는 혈청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구지 이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을까요? 왜 공관복음에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은 이 이야기를 요한은 기록해 놓았을까요?
오랜 세월 신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요한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의 상징적인 의미를 전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상징적인 의미를 공관복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이 성전휘장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주목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흐른 이야기를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공관복음은 성전의 징조에서 찾았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몸 자체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피와 물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전하려 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주실 놀라운 선물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뒤에 얻게 될 가장 귀한 영적인 선물이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피와 물이 그 선물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피의 의미
그러면 우선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레 17:1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한 마디로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해 전에 아르메니아라는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이 때 9층짜리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건물 잔해 속에 한 어머니와 딸이 묻히게 됐습니다. 시간이 여러 날 흘렀는데 구조의 손길은 더디기만 합니다.
이 때 네 살 된 딸이 엄마에게 목이 마르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순간 엄마는 캄캄한 주변을 더듬어 유리 조각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팔뚝을 유리조각으로 그어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딸의 입술에 떨어뜨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딸이 목이 마르다고 할 때마다 자신의 피를 딸의 목에 흘려 넣었습니다.
두 주일이 지났습니다. 두 사람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딸을 살려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엄마가 자기의 피를 딸에게 내어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엄마가 피로 자기의 딸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요 6:53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그 생명과 다른 생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생명을 구별하기 위해서 ‘영생’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새생명이요, 그것은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요 3: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한 마디로 영생은 거듭나면서 받게 되는 새생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새생명은 육으로 난 생명이 아니라 영으로 난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날 때 받은 생명 이 목숨이 육적인 생명이라면,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받은 생명 이 영생은 영적인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이 영적인 생명인 영생은 육적인 생명인 목숨과 비교해 볼 때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적인 면에서 다릅니다. 목숨은 우리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날 때 끝이 납니다. 그래서 죽을 때 목숨이 끊어진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영생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됩니다. 아니 이 세상을 떠난 후 더욱 활짝 피어납니다. 마치 누에꼬치를 벗어난 나방이 하늘을 훨훨 날 듯 저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은 본격적으로 풍성히 누려집니다.
다른 하나는 질적인 면에서 다릅니다. 요 17: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은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명이지만, 영생은 주님과 특별한 인격적 관계가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주 안에서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주 안에서 사는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걷는 생명을 말합니다. 늘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과 은사로 맡겨주신 일들을 기쁨으로 잘 감당하며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며 우리에게 이런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약속대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 피를 묵상하며 감사함으로 영생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물의 의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 7:37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갈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갈증을 해결해 주실 테니 주님께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그 속에서 흘러나와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인간의 갈증을 해결해 줄 물을 생수라고 말씀하셨고, 그 생수는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곧 성령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물을 흘리신 것은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 수가라는 동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그 여인이 청하면 예수님께서는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갈증이 나셔서 물을 달라하시면서, 오히려 여인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에게 육체적인 갈증 말고 또 다른 갈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영혼의 갈증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속 깊은 곳에 영혼의 갈증이 있음을 말씀하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이 옳다 하시면서 이 여인의 형편을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입니다. 성적인 문란함 때문에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남편 아닌 남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아무도 우물에 나오지 않는 시간에 와서 물을 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속 깊은 곳에는 죄로 인한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이 죄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영혼의 갈증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 4:14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제가 아는 한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 동기입니다. 군에서 큰 활약을 하시고 전역하신 뒤, 군사독재시절 정말 위세가 등등하게 살던 분입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한 때 쾌락을 쫓아 문란한 생활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혼한 뒤 젊은 아내를 맞아 재혼을 했습니다.
젊은 아내가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그 동안 자기가 헛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속 깊은 곳에 돈으로 채울 수 없고, 권력으로 채울 수 없고, 쾌락으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영적인 갈증을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선 뜨거운 회개를 하게 했습니다. 이분이 눈이 퉁퉁 붓도록 통곡하며 회개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살겠노라고 서원했습니다.
이후 이분에 교회 봉사에 헌신적으로 나섰습니다. 교회가 이분의 변화된 모습을 귀하게 여겨 장로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장로가 된 뒤 이분은 더욱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인생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너무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수를 마시게 해 주십니다. 바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속 깊은 곳에 충만하게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갈증을 해결하게 하시고, 늘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물을 흘리시며 우리에게 이런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약속대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물을 묵상하며 감사함으로 성령충만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력으로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정확하게 말해보면, 2월 14일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부활절 전날인 3월 31일까지, 주일 6번을 뺀 40일 기간이 금년의 사순절입니다.
교회는 오랜 세월 부활절을 준비하기 위한 영적인 준비기간으로 사순절을 지켜왔습니다. 특히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님을 본받아 살고자 다짐하며, 자기훈련을 하는 기간입니다.
금년에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흘려주신 주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흘리신 피가 상징하는 영생 주심에 감사하며, 주신 영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흘리신 물이 상징하는 성령 주심에 감사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 기간 여러분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네 가지 보혈
요 19:31-37 / 정언용 목사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아라. 그러면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을 짜보십시오. 그러면 짐승의 피가 나올 것입니다. 또 신약성경을 짜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줄줄 흘러나올 것입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피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 장님일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 한 복판에는 피의 역사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죄를 씻기시며, 인간을 구원케 하시며, 인간을 해방시키는 피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통해서 인간은 죄로부터 씻음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았습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죄가 씻겨지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1:29)]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통해서 죄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 시대부터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의 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가 이제 인간을 구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의 피흘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성경말씀 중에서 우리를 구원시키는 예수님의 피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허물 많고 죄 많은 나를 위해서 네 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첫째는 겟세마네 동산 위에서 기도하던 중에 흘렸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처절한 기도를 드린 곳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중요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을 남기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시험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정말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곧 자신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고난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고통을 뿌리치고 싶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서는 [이 십자가의 고난은 인류의 죄를 씻으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기 때문인데]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마음이 갈등합니다. 마음의 고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마음에 시험이 생겼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의 마음은 소용돌이를 쳤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찾았습니다. 33세의 청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고통 앞에 지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의 잔을 받고 싶은 자가 누구입니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한계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이 육신의 한계를 노립니다. 사단은 언제나 육신의 한계를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육체의 명령에 굴복하도록 유혹합니다.
[기도해봐야 뭐해!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아!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고 쉬운 길을 택해!] 사단은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평소에 기도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때 신앙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기도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기도하면 응답 받을 수 있는 문제인데! 기도하면 육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있을 터인데!] 평소에 기도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갈림길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시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어려운 시험이 올 것을 대비하여서 몸에 습관이 벨 정도로 기도하셨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기도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 고난과 죽음의 잔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평소에 기도로서 훈련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 없이, 고통 없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맛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갈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의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평소에 훈련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힘은 무서운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는 인간적인 기도를 했지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승리의 기도입니다. 육신을 이기는 기도입니다.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는 기도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고 있는 사단이 쫓겨가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핏방울과 같은 땀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수 있습니까? (침묵) 사람이 한가지 일에 아주 몰두하면서 애를 태우게 되면 우리 몸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그 피가 땀방울에 섞여서 흐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기도는 애간장을 태우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온 몸에 진이 빠지도록 힘들게 기도하시고, 너무나 애간장을 태우는 기도를 드리셨다는 말입니다. 언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했습니까? 천사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예수님의 기도를 돕기 시작하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주 깊은 기도의 세계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할 때 깊이 있게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기도를 드리는데 이제 인간적인 육신적인 정욕적인 기도를 극복하시고 승리하는 기도를 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서 흘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핏방울은 우리의 기도를 돕는 핏방울입니다.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핏방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이 피를 의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시험이 올 때에는 이 피를 의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핏방울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하늘의 천사가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은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대략 세 시간 가량 채찍에 맞으시고 9시간 가량 피를 흘리신 것 같습니다. 로마인들이 쓰던 채찍은 보통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길이가 약 5M 정도가 되었는데 그 채찍의 끝에는 납덩어리나 짐승의 뼈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때리면 이 긴 채찍이 온 몸을 휘감으면서 고통을 주며 나중에는 채찍의 끝에 달려있는 납덩이가 살을 파고 들어갑니다. 짐승의 날카로운 뼈가 살을 파고 들어갑니다. 그때 다시 채찍을 당기면 살 속에 들어가 있던 납덩이가 살점을 파헤치면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짐승의 뼈에 살점이 묻어서 온 몸이 파헤쳐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채찍에 맞고 납덩이에 살점이 찢겨 나와 등허리가 밭고랑처럼 패여서 피가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린 피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질병을 치유해 주는 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육체의 고통을 대신하셨습니다. 나의 질병의 아픔도 대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채찍을 맞고 흘리신 피로 인해서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나 대신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유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 미국에서 신유의 바람을 일으키는 [래리 리]라는 목사님은 39살에 귀가 들리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2시가 되었을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목사님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리야! 나가서 전하라. 고쳐줄께!]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때 리 목사님은 [하나님! 저는 지금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합니까? 고쳐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가서 전하라. 고쳐줄께] 리목사님께서 말씀드립니다. [먼저 고쳐 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 밤새도록 이 문제로 병원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출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의사가 리 목사님이 있는 병실을 들어오는 순간 리 목사님의 귀에는 이사야의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리 목사님은 확신을 가지고 의사에게 말합니다. [저를 퇴원시켜 주십시오] 의사가 말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수술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원으로부터 퇴원하면 당신은 귀가 먹을 것입니다]하고 종이에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도 리 목사님은 [나는 당신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하고는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공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마침 산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리 목사님은 큰소리를 지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순간 귀가 뻥! 뚫어졌습니다. 그 길로 리 목사님은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리 목사님을 통해서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을 맞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흘리신 피의 공로로 우리는 치유 받고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채찍에 맞아서 흘리신 보혈은 우리에게 신유의 은혜를 주시는 피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주님 앞에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깨끗하게 나음 받는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의 보혈은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들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강도들은 가시관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왜 예수님만 가시관을 쓰셨습니까? 가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뱀과 아담과 하와를 나란히 저주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하나님께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는 천지창조 때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 가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바로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심으로 인류를 가시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흘리신 피는 바로 인간의 저주를 씻어주는 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 만든 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새는 온통 몸이 잿빛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불평했습니다. 왜 나는 공작새처럼 예쁜 색이 들어있지 않을까? 다른 새들은 모두 아름다운 색깔로 옷을 입혀서 만드셨는데 나에게도 아름다운 색깔이 있으면 좋을 것을! 하고 생각하면서 새끼를 낳아보며 그 새끼도 여전히 잿빛뿐이었습니다. 이 잿빛 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은 이 새가 갈보리 산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산 위를 날고 있는 이 잿빛 새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세 명의 죄수들을 못 박아서 십자가 형틀에 묶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잿빛 새는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가!] 이 말은 들은 잿빛 새는 그 예수님이란 이름에 왠지 마음이 끌렸습니다. [죄도 없으신 데 왜 십자가에서 죽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측은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가시 면류관을 타고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가시가 온통 머리에 박혀 있었습니다. 잿빛 새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데! 어떻게 내가 좋은 일을 좀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잿빛 새는 예수님의 머리 쪽으로 가까이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부리로 머리에 박힌 가시 하나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뒤로 날갯짓을 하면서 힘껏 뽑아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머리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나오면서 한줄기의 핏방울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핏방울은 잿빛 새의 가슴에 빨간 색으로 묻어버렸습니다. 그 잿빛 새는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새는 자신의 가슴에 묻은 빨간 피를 씻기 위해서 냇가로 내려갔습니다. 물가에 앉아서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 안으로 들어가서 날갯짓을 하면서 자신의 가슴에 묻힌 피를 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새의 몸에 묻혀진 빨간 피는 씻겨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씻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잿빛 새는 자신의 모습을 물위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름다운 색깔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게 변해 있었습니다. 이 잿빛 새는 나중에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들의 가슴에도 빨간 색을 지니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잿빛 새는 오랫동안의 바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던 삶이 축복의 삶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니까 예수님께서 이 새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공중을 보십시오. 지금 저 공중 위에 잿빛 새가 날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가시 면류관에서 흘러내리는 보혈은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혈통에 흐르는 죄를 차단하십니다. 우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이 피는 가장 귀중한 피입니다.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발과 양손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손과 발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손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손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쁜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남에게 해를 끼칩니다. 남에게 줄 이익을 탐합니다. 부당한 이득을 이 손으로 취합니다. 남을 때리고 구타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시종들은 이 손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손이 많은 죄를 짓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발은 또한 어떻습니까? 나쁜 장소를 찾아갑니다. 술집을 찾아다닙니다. 육체의 정욕을 즐기는 일을 쫓아다닙니다. 범죄를 하는 장소를 찾아다닙니다. 점을 치러 다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곳에 관심을 가집니다. 심지어는 남을 발로 차는 범죄도 서슴지 않습니다.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대신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서 흘린 보혈은 우리의 손과 발이 지은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그 창을 받으신 곳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에 창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은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로마의 군병은 예수님께서 죽은 것을 확인하고도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까?
후일에 예수님께서 덮었던 세마포를 조사해 보니까 예수님께서 창을 받으신 곳은 왼쪽 가슴 셋째 갈비뼈와 넷째 갈비뼈 사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군병은 바로 이 부분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늘고 긴 창으로 찔렀습니다. 로마인들의 창은 가늘고 길었는데 이 창으로 갈비뼈 사이를 찌르면 그 곳이 바로 심장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것을 확인하고도 바로 이 심장을 찔러버린 것입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사람은 신체에 있는 모든 피를 다 쏟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심장에 약간의 피가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바로 예수님의 심장에 마지막 조금 남아 있는 그 피까지 다 쫓아내도록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서 쏟아 내셨습니다.
노래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겼네]
주님께서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나를 위해서 다 흘리셨습니다.
또 오늘 본문 34절에는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피를 쏟아 내셨고 동시에 물이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고통이 극에 달하면 우리 몸에 있는 물과 피가 분리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고통이 마지막 극에 달하면 우리 몸 속에 있는 피가 물과 피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고통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만 쏟으신 것이 아니라 고통이 극에 달하자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을 쏟아 내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물은 그냥 생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에서 고통의 끝에서 흘리신 물로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 강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흘리신 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쏱아낸 물로 우리는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죄씻음을 받은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피로 우리가 용서받은 것입니다. 이 피로 우리가 의로다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 피로 우리가 원죄로부터 구원된 것입니다. 이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네 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죄 없으신 분의 피흘림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피를 쫓아내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찬양)
우리 모두 사순절을 맞아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십시다. 나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가 모두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받은 하늘의 백성인 것을 다시 한번 눈물과 감사와 감격 속에서 받아드리십시다. 네 번씩이나 붉은 피를 쏟으셔서 그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으신 주님의 고난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사순절의 넘치는 은혜가 여러분의 생활에 눈물과 감사로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세 사람
요 19:31-37 / 장경동 목사
지금 십자가에 세 사람이 매달려 있습니다. 두 사람은 흉악한 강도이고 한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십니다. 한 강도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한 강도는 죽는 순간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자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에 같이 메어달려 있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모두 차이가 나듯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이후로의 삶은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깝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는 자세로 주님과 동질성, 연합으로 지내시기를 바라고 둘째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세상 적 쾌락을 절제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지내시는 주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갖가지 수난을 겪으신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7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마26:67-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주먹으로 치며 최고의 모욕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짓밟힘을 당하셨습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주님께서 는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자신이 가르치신 대로 사셨습니다. 대항하거나 욕하거나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당하셨습니다. 대 속적 모욕이요 본을 보이시는 모욕입니다.
2. 마27: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채찍 자국 자국마다 피를 흘리시는데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속하는 피 입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짊어지셨던 것처럼 나도 억울하게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가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3. 마27:28 “그의 못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근원적 수치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수치를 가리기 위한 대속적 수치입니다. 계3: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주님께서 속량해 주시기 위해서 대신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기 위해서 대신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4. 마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 찌어다 하며” 가난을 속량하시기 위한 대속의 수난입니다.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습니다. 아담이 잘못을 했는데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므로 인간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가시관을 쓰신 가난을 속량하시기 위한 대속의 수난입니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 속에 축복의 근거가 있으므로 예수를 믿으면 축복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근면, 정직, 성실 - 예수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5. 마27: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19:18“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쌔” 큰 대못으로 손과 발을 못 박을 때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 허물 때문에 받으시는 수난입니다. 이사야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 도다”
6. 마27:39-40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예수님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습니다. 일어나는 자존심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망하는 자존심은 버려야 합니다.
7. 요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심장에 고여 있던 피를 다 쏟아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물이요 피 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보혈, 그리스도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진 채 등은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지고 손과 발에는 대못이 박히셨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면서도 억울하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용서 하시던 주님, 갖가지 모욕과 수치를 당 하시면서도 짊어지시고 본을 보여 주셨던 그 주님의 사랑이 오늘 여러분에게 느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의 수난이 아니고 나의 수난이었다는 사실을……. 주님이 본을 보이셨던 것처럼 이제 내가 본을 보이고 주님이 그 사랑으로 나를 구원한 것처럼 나의 그 사랑으로 또 다른 사람도 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기에 그 사랑 체험케 하여 주시라고 기도하겠습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사십시다
요 19:31-37 / 마경훈 목사
멕스웰 화이트 목사님의 [보혈의 능력]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화이트 목사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살았는데, 독일 폭격기의 공습으로 인하여 영국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예수님의 보혈로 그가 살던 집과 그 가족을 덮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언제 우리에게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매일 밤 한번도 깨지 않고 편안히 누워서 잘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를 보호해주셨던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폭탄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방공호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중심으로 반경 1.2Km 이내에 13개의 폭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건물의 일부가 사소한 피해를 입었을 뿐 가족 모두가 무사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보혈의 능력으로 보호받은 사실을 간증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지켰던 유월절 사건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전국의 장자들을 죽였습니다. 이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어린양의 피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역할을 보여주는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히 10:1에서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참형상이고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① 속죄 ② 화목 ③ 보호 ④ 공격무기입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과정을 살펴보며 그 의미를 증거 하겠습니다.
1.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는지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에 피가 섞여 나와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하신 나머지 땀샘에서 땀과 피가 섞여 나옵니다. 의학적 용어로 "혈한증"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땀샘에 있는 모세혈관을 파괴하는 화학성분이 나옵니다. 그래서 소량의 피가 땀샘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심리와 육체는 극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기록을 보면 예수님에게도 갈등이 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 26:37에 보면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님의 감정과 갈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38절에서도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9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인데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나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육신이었습니다. 보통 인간과 동일한 육신이었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갈등하셨으나 39절 하반절에서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가 되었던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전 인류의 타락과 저주가 찾아온 것입니다. 롬 5:19을 보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타락하게 되므로 그의 허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죄인 된 것이며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결국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몇 가지 심각한 결과가 나타났는데 정신적인 문제(수치심과 두려움), 신앙적인 문제, 대인관계의 문제, 가정의 문제, 질병의 문제, 환경의 문제, 죽음의 문제, 낙원상실의 문제 등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인류가 멸망 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불순종의 결과를 해결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롬 5:19에서는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피는 아담 안에 있는 전 인류의 불순종에 대한 구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만들었습니다. 왕관 대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갈대 몽둥이로 머리를 때리며 조롱했습니다. 눈을 가리고 뺨을 치면서 선지자라면 "너를 친자가 누군지 맞춰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 지역의 가시는 우리 나라의 탱자나무의 가시보다 더 길고 강합니다. 예수님의 머리를 때릴 때마다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를 찔렀으며 머리에서는 피가 솟아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보혈을 흘리신 것은 환경적인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땅은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가시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환경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사 58:11-12을 보면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환경을 변화시킬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또 사61:4절에서는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받아드리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책에 보면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미국과 유럽 등에 선교할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처음에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끼니 걱정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재정적으로 튼튼해 진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대략 세 시간 가량 채찍에 맞으시고 9시간 가량 피를 흘리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라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거의 죽음 직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때린 채찍은 39개의 가닥으로 되어있습니다. 병사의 기분에 따라 가닥수가 많을 수도 있었습니다.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쇠 구슬과 뼛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쇠 구슬은 살을 멍들게 했고, 찢어진 근육조직을 더욱 크게 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뼛조각은 살을 찢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영화처럼 한 가닥의 채찍으로 맞으신 것이 아닙니다. 칼보다도 더 무서운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한 번 제대로 맞으면 사망할 수 있는 그러한 채찍으로 맞으셨던 것입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기둥에 묶어놓고 어깨부터 등 그리고 엉덩이 정강이를 때렸습니다. 근육이 찢어지고 피범벅이 되었으며 살점은 리본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잔인한 태장을 받으셨습니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53:5에 보면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예언하고 있으며 벧전 2:24에서도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질병에서 보호하시고 건강을 보장하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얻습니다. 제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주면 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고침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흘리신 보혈에 병고침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건강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4. 대못에 박혀 흘리신 보혈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때 양손에 못을 박았고 두 다리는 겹쳐서 발등에 못을 박았습니다. 못 박힌 채로 십자가에 달리시자 양손과 발에서 더 많은 피가 흘러 십자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벧전 1:18, 19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짐승을 잡았습니다. 레 17:11을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구약의 제사 제도와 율법은 비유며 그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 1:7에서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은 인류의 모든 문제가 십자가 안에서 해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인데 죄가 해결되니 죄로 인한 모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한 사람이 친구들의 헌신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침상 채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으나 너무나 많은 인파로 인하여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병자의 친구들은 사람들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내서 지붕에 올라갔고 담대하게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그리고 지붕에서 친구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 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자에게 "네 병이 고쳐졌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 사람의 병이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말이며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5. 창에 찔려 흘리신 보혈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본래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로마의 군병들이 다른 사람들의 다리를 부러뜨릴 수는 있었으나 예수님의 다리를 부러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 34:20에서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하신 예언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병들은 뼈를 꺽지 않는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피만 흘리는데 죽은 자에게서는 피와 함께 물이 나옵니다.
주님은 살아서도 보혈을 흘리셨고 죽어서도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죽음 후에도 보혈을 흘리신 이유는 죽음의 문제와 죽음 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죽음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의사는 병을 고치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활하셔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으며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음의 문제만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심판의 문제도 해결하신 것입니다. 죽음 후에 심판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를 믿으면 영벌이 아닌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님
요 19:31-37 / 송원영 목사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때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르고 또 주님께서 고난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 키케로라고 하는 학자는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 소름을 끼치게 하는 사형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본래 십자가 사형방법은 페르시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땅은 신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나 악한사람들의 시체로 땅 을 더럽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는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서 극한 고통 가운데 죽게 하고,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날아들어 나머지 시체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이 십자가 사형제도는 노예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은 죄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가야 합니다. 그 앞에서는 빨리 따라오라고 군인들이 채찍으로 때립니다. 뒤에서는 몽둥이로 몹니다, 이렇게 하면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여기 저기 돌아서 형장에까지 가도록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죄인이며, 그리고 노예와 같이 여긴바 되었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형사 사건이나 민사사건이 있어서 목격자의 증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직 목격자의 증언만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가족 네 명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증언자는 아파트의 CCTV 였습니다. 한 건장한 남자가 커다란 가방에 몇 번인가를 묵직한 물체를 실어 나르는 것이 찍혔기 때문입니다. 화면에 찍힌 건장한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지가 않아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경찰은 추적 끝에 범인이 전 야구선수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범인이 전남 화순에 머무른 흔적이 휴대폰 추적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범인 이호성이 네 모녀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심증만 가졌을 뿐 물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노동자가 경찰서에 와서 증언을 했습니다. 자신이 네 모녀의 암매장한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호성은 화순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옆에 비석을 세운다며 노무자 3명을 동원해 150Cm 깊이의 구덩이를 파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는 노무자들이 아무 의심 없이 땅 파는 일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호성의 얼굴을 알아본 한 노무자가 그곳이 암매장 하기위하여 땅을 팠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 경찰에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현장에 가서 땅을 파 보니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호성이 끔직한 살인범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들어났습니다. 만일 노무자가 암매장한 곳을 증언해 주지 않았다면 사건이 장기화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증언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문 요한복음19: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이 증언이 참이라고 말합니다.
이 증언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 십자가 곁에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 육신의 모친 마리아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의 눈물을 흘리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며 사도요한을 가리켰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마리아를 모실 수 없으니 그의 사랑하는 제자가 대신해서 마리아를 평생 모시도록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 하셨으며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말씀하신 다음에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얼마 후에 로마 병정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에 창을 찔렀는데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 것을 요한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1:1에서도 비슷한 증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 진 바라" 사도 요한이 이렇게 강조해서 증언한 중대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 군병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리고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을 칼이나 창으로 찌르면 몸에서 피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피와 함께 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증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요일 5:6에서 또 다시 증언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 과 피로 임하셨고." 사도 요한은 그 사실을 눈으로 목격했을 때 주님의 죽음이 특별한 죽음 이라는 사실과 구약의 예언들의 성취라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특별한 죽음이요, 놀라운 죽음이다! 내가 이 죽음의 사건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신 사실 즉 물과 피를 흘리신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보통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믿기 힘든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칼이나 창으로 찌르면 몸에서 피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피와 함께 물이 나왔습니다. 이는 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자기가 그것을 직접 보았다고 증언하면서 그 사실을 믿어 달라고 했습니다.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영국의 의학협회 회장이 하나의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심장이 극심한 충격을 받아 파열되면 피가 심장 옆 한 주머니에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피가 그 주머니에 모이면 혈청은 가라 안고 말간 물이 된다는 학설이었습니다. 그 후 프랑스 학자와 이태리 학자가 그 학설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합니다. 그 후 성경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은 심장이 극심한 충격을 받아 파열되어 죽었다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27:50에 보면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라고 했는데 그 큰 소리는 심장 파열의 고통이 극심해서 지른 큰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군 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바로 그 피물 주머니를 찔러서 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받은 극심한 충격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묘사합니 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말씀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은 것은 극심한 충격을 나타내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그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시고 끊어짐을 당하실 때, 즉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사약을 대신 받으시고 저주의 죽음을 죽으실 때 예수님은 극심한 충격을 받으시면서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이같은 고통이 임한 이유가 무엇일가요? 예수님 곁에는 두 명의 죄수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습니다. 저들도 예수님과 함께 처참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죄수들보다도 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죄를 짊어지심으로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도 아니요 수많은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은 절규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후 4세기의 성자 제롬이 베들레헴에서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이 저 유명한 라틴 벌 게이트입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제롬은 기뻐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께 무슨 선물을 드리오리까?" 예수께서 말씀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무슨 선물을 내게 주겠느냐?" 제롬이 말했습니다. "이 성경을 다 번역하여 그것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에게 선물을 주겠느냐? 그러면 한 가지만 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죄와 고통을 다 나에게 다오.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 고통의 무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 용서와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와 물은 생명과 죄 용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피와 물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하고 죄 사함을 상징합니다. 물은 죄 씻음을 상징하고 영생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첫째 예수의 피
먼저 피에 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레17: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 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는 생명을 상징하고 죄 사함을 상징합니다.
마26:28에서 예수님께서 보다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 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요6:53,4에서는 피를 마시므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모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몸 안에 있는 모든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둘째 죄를 씻는 물
이제 물에 대한 성경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겔36:25은 물이 죄와 허물을 씻는다고 했습니 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사35:6은 물이 구원의 축복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 이라."
예수님이 한 소경을 고치실 때에 실로암 물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물에 가서 씻는 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에 가서 씻을 때에 소경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흘리신 그 물로 씻을 때에 모든 죄를 씻게 되며 모든 저주를 씻어내게 되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3:5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죄 씻음 받고 거듭나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히10:22에서 물로 죄 씻음을 받는다고 다시 해석했습니다. " 우리가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사도 요한은 계21:6에서 물은 곧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씻어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모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물을 다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이 믿어야 할 죽음이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특별한 죽음을 목격하였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지나가면서 바라보기만 할 죽음도 아니었고 의학적으로 연구대상이 되는 죽음도 아니며 우리 죄인들이 믿어야만 할 죽음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요20:31에서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인류는 두 가지 무리로 갈라집니다. 물과 피를 믿음으로 죄씻음 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무리들과 물과 피를 믿지 않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무리들로 구분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던 백부장 한 사람은 예수님의 피와 물을 믿었으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 빌라도는 피와 물을 믿지 않고 평생 죄책 가운데서 살다가 자살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은 찬송가에 나와 있는 대로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피와 물을 받아 드리는 사람들은 죄 사함과 영생의 축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위하여 높은 장대에 놋뱀을 달아 놓았는데 “누구든지 불뱀에 물려 죽어갈지라도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것이다.”말했습니다. 놋뱀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살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뱀의 독이 온 몸에 퍼져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물과 피를 믿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물과 피를 믿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대한 신비로운 전설이 있습니다. 주후 3세기경,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헬레나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 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형틀을 찾고 싶었습니다. 많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를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찾기로 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애쓴 나머지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헬레나가 찾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계였습니다. 이 셋 중에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헬레나는 지혜로운 방법을 쓰게 됩니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병들어 다 죽어 가는 여인 하나를 데려와서 세 개의 십자가에 몸을 대어 보도록 했습니다. 그 여인은 한 십자가에 몸을 대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에 몸을 대 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병든 여인이 마지막 십자가에 몸을 댔습니다. 그 순간 여인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의 병을 다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는 효력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효력은 질병을 이기게 합니다. 질병은 궁극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신 주님이시기에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중병을 앓게 됩니다. 바울도 중병에 걸렸었습니다. 이 병이 낫게 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교만하지 않기 위하여 네게 육체의 가지 즉 병을 얻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병을 다 짊어지셨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더 전적으로 의지하여 믿음의 견고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일마다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물 탄 포도주를 받아 마셨습니다. 저는 초대교회가 포도주에 물을 탄 이유를 독한 포도주를 좀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독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독주나 소주는 바로 알콜 도수가 많은 포도주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보다 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피와 함께 물을 흘리셨기 때문이 그것을 기억하면서 물 탄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매주일 마다 성만찬을 행했습니다.
매 주일 마다 성찬식을 거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사죄의 은혜와 생명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마치 영양주사를 맞는 사람의 몸속에 영양분이 들어오는 것처럼,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몸과 영혼 속에 사죄의 은총과 영생의 축복이 부어집니다. 예수님이 쏟으신 물과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는 속죄의 샘물이 되고 우리의 갈한 심령을 채워 주는 사막의 시내가 됩니다. 천국 문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날마다 피와 물을 마시면서 갈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