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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도시현대 문명과 세속화에 대한 신학적 전망
저자 하비 콕스
번역 이상률
출판 문예출판사
발행 2020.01.01.
출판사 서평
세계적인 종교학자 하비 콕스의 역작-현대 문명과 세속화, 그리고 인간의 삶
1965년부터 44년 동안 하버드대에서 강의를 해온 세계적인 석학으로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제창해온 하비콕스 박사의 《세속도시》는 그의 수많은 책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1965년 처음 출간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팔려온 가히 현대의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이 이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오늘날까지도 신학자와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출간 당시 저자의 관점이 다소 센세이셔널할 정도로 대담하고 선구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보아도 전혀 낡은 개념이 아니며, 기독교인들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첫 번째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전국기독교학생연맹(NSCF)이 5,000부를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맥밀란 출판사에서 10,000부를 발행했을 때만 해도 이 책의 고무적인 성공은 아무도 점치지 못했다. 출판 당시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도 책은 빠르게 팔려나가고 곧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으며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한국어, 심지어 카탈루냐어로도 번역되어 2, 3년 만에 백만 부가 판매되었다. 그것은 하비 콕스가 지적하듯이 종교에 대한 진지한 책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으며, 평범한 신도들도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세속도시’인가?
2015년 10년마다 통계청이 실시하는 종교 분포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3.9%가 종교를 갖고 있으며, 그중 개신교가 19.77%, 천주교가 7.9%였다. 즉 전체 종교인구 중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한국에서 교회 속 세속도시의 모습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통찰력 있게 분석, 탐구하며 저자의 명백한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는 이 책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며, 우리의 현실과 연관 지어 흥미롭게 읽힐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가 무리한 이슬람권 선교, 대형교회와 교권 세습 문제, 성장제일주의, 대형화 경쟁, 불투명한 재정 운영, 권력과의 유착 등으로 비판받는 현실에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의미와 실천,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 등을 이 책을 통해서 성찰할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또한 2009년 12월 9일 《국민일보》와의 대담에서 하비 콕스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11년 전 한국에 처음 갔을 때 기자회견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언급하고 싶다. 당시 한국인 크리스천들이여, 자신의 소리를 가지라! 한국인의 소리, 아시아인으로서의 소리를 갖고 좀 더 넓은 신학적 대화로 나오라고 했다. 지금까지 서구 중심의 신학적 대화는 암울한 소리였다. 이제는 희망과 활력이 넘치는 한국 기독교의 소리를 세계에 들려주어야 한다. 하버드대 교과목 중 한국 신학에 관한 것이 있는가? 지역 연구로 한국학 연구나 한국어 과목은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한국 신학이 아니라 한국 신학의 다양성을 보여줘야 한다. 세계적인 교회가 몰려 있는 한국교회는 한국 신학의 세계화에 앞장서야 한다.”
하비 콕스가 말하는 ‘세속화’, ‘도시화’
콕스에 따르면 세속화란 종교적·형이상학적 속박에서 인간이 해방되는 과정이며, 아울러 인간의 관심이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즉 내세에서 현세로 그리고 지금(이 현재의 시대)으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세속화는 또 다른 한편으로 도시화를 부추기는데, 도시화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대표되는 도시 문명의 발전을 뜻한다. 기독교 일각에서는 세속화와 도시화에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콕스는 그것들을 “성서 신앙의 진정한 귀결”, 성서 신앙의 역사화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보면서 오히려 환영한다. 세속화와 도시화는 반(反)종교적인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성숙 과정이자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세속화와 도시화는 인간화 작업을 위한 신의 역사적 개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과거의 종교 가치를 보호하는 수동적인 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이 세계 안에서 신이 하는 일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즉 사회 변화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도시》의 이러한 논지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사회 변화의 신학Theology of Social Change”을 제창하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남미의 해방신학의 발전에 큰 밑거름을 주게 된다.
1. 세속도시의 형태 - 도시사회 제도의 특징인 익명성과 이동성은 종종 비판받는다. 하지만 익명성과 이동성은 도시에서 인간 삶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도시인은 농촌공동체처럼 모든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사람만을 선택해서 친교를 맺는다. 콕스는 도시인에게 전통 사회의 친밀성과 공동체 정신을 회복시키려는 교회는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지적한다. 도시인은 익명성 속에서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 아니라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과 사귀면서도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교회는 종교, 인종, 이념,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는 세속도시에 걸맞은 기능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2. 세속도시의 양식 - 하비 콕스는 현대인에게서 실용주의와 불경성을 제거하려는 어떤 노력도 잘못된 것이며 실용주의와 불경성은 오히려 도시인으로 하여금 복음의 요소들을 깨닫게 해준다고 한다. 성서의 진리관과 창조관은 세속도시의 양식과 유사하다. 신학은 살아 있는 정신으로, 인간이 의존, 두려움, 종교성으로 후퇴하라고 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도시성과 세속성을 부르며, 이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문제를 창조자의 선물로 받아들일 것, 기술시대의 인간으로서 이 시대를 모든 이들이 살아갈 인간적 거처로 만들라고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콕스의 주장이다.
3. 세속도시와 교회 - 하비 콕스는 교회의 오류와 우상을 파괴하고 본래적인 복음의 회복을 주장하며, 교회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가난한 자의 권리를 찾는 데 힘쓸 것을 기대한다. 종교가 세속도시 안으로 들어와 바람직한 세속도시의 완성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3세계의 민중종교운동에 많은 기대를 한다.
도시 세속 생활에서 교회는 혁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널리 1) 선포(케리그마)하고, 도시의 균열을 치료하고 2) 봉사(디아코니아)하며, 눈에 보이는 희망, 즉 인간의 도시를 만드는 기능 3)사회내에서의 사회적 올바른 관계 즉 교제(코이노니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https://youtu.be/5AabSbAmGaM?si=buPOr6BoktWRVHuz
세속 사회란 무엇인가?
•도시 문명 발생 •전통 종교 붕괴
- 종교에 공격적 X (신무신론 운동 등은 사실 예외적 경우) -종교에 무관심 ㅇ
세속화의 세력은 종교를 박해하는데 진지한 관심이 없다 세속화는 단지 종교를 우회하고 약화시키며 다른 것으로 옮겨갈 뿐이다.. 이것이 세속도시의 시대다. 그 풍조가 초음속 여행과 순식간의 통신을 통해서 지구의 모든 구석에 퍼지고 있다 -
하비 콕스: 세속 도시-
성서는 세속화를 예견한다
세속화는 기독교인들이 반대해야 할 어떤 것이 결코 아니라 성서 신앙의 진정한 결과를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의 임무는 세속화를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지지하고 육성하는 데 있다"
.성서 신앙의 세 가지 특징
1) 자연의 탈주술화: 창조
2) 정치의 비신성화: 출애굽
3) 가치의 속화: 시내산 언약(우상승배 금지-인간적 가치의 상대화)
세속 사회 삶의 형태와 양식
• 형태(사회적 구성 요소): 익명, 이동, 변동
•양식(문화적 구성 요소): 실용주의, '불경성'(초현세적인 것들의 종말)
위의 것들을 '정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신학!
"우리는 기술도시인이 실용적이며 불경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실용주의와 불경 속에 사는 그를 진지하게 대하면서 우리는 도시화 이전의 문화 속에 살았던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선조들보다 기술도시인이 성서의 인간관에 더 가까운 바로 그 지점에 있음을 알았다.
- 사물에 대한 이해와 통합은 진리를 행함: 진정한 실용
- 특정 종교에 대한 '불경': 인생의 의미와 가치의 원천은 '인간'(창세기의 동물 이름을 짓는 아담)
세속 도시에서의 교회의 사명
.교회: 사회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교회의 그 어떤 신학의 출발점도 오늘날은 사회 변화 신학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고전적인 기독교 세계의 닮아빠진 시대에서 유래하는 교리에 의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울러 보존과 영속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었다.. 하느님이 지금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삶이 정의되고 형성되는 교회는 그처럼 밝은 규정에 간힐 수 없다. 교회는 자신을 스스로 부수고 하느님의 지속적인 활동에 힘입어 계속 재형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속화와 하나님 나라는 상호적이다!
세속 도시와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개념은 세속화와 더불어 발전 -회개와 행동은 하나님 나라에도, 세속 도시에도 필요한 요청 -세속 사회는 점점 더 인간의 자율과 책임을 강조
"누구도 청지기의 정원의 모든 문제에 대처할 절차를 알려주는 지침서를 주지 않는다 그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그 누구도 세속 인간에게 쉼 없는 역사적 과정이 던지는 항상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틀림없는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는 해결책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세속 도시에서의 교회의 삼중 사역
. 케리그마: 선포 - 인간의 자유를 왜곡시키고 문화를 부패시키는 것에 맞서는 것
디아코니아: 화해와 치료 등의 봉사 (세속의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물을 것' I "특별히 기독교적인 대답은 없다")
•코이노니아: 사회의 새로운 성격, 교제
"케리그마 자체가 분명해지는 때는 인간이 자신은 실제로 운명의 의존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그의 인생은 이제 자기 손에 놓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뿐이다 케리그마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사회 불의나 가족 불화의 원인을 경제적인 세력이나 심리적 압박 탓으로 돌리는 것을 멈추고 비애의 원인들과 싸우기 시작할 때다. 권세를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이 우주 전체를 사람이 살만한 장소로 만드는 일에 초대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연과 정치에서 악령을 내쫓는 탈주술화와 탈신성화를 추진하도록 요구받는다
세속 도시에서의 신학
세속 도시에도 존재하는 '주술적,' '미신적' 세계관(예: 돈과 성적 욕망의 숭배)
•세속화의 가속으로 인한 참된 기쁨과 의미의 상실
'세속화'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잘못된 진단) - 세속화에 '적응하지 못한' 신학의 문제!
몇몇 기독교인들은 이 세속화 과정에 대해 전면적 전쟁을 벌이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세속화가 하나의 해방이며 성서 신앙 자체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교회의 또는 그 밖의 프로그램으로 되돌릴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이제 그의 세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더는 어떤 종교적인 힘에 그 책임을 떠넘겨버릴 수 없다... 교회 전통은 그 대학들이 보통 존재하는 목적과 점점 더 무관해 보인다
세속 도시에서의 '신'
새롭게 던져진 세속 사회의 핵심적 질문: "인간은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고대인의 성서의 신이나 중세 전통의 기독교의 신 또는 더는 인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나 정치적으로 환원할 것인가?(현대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태도)
믿음과 자유 안에서의 희망과 '만남' (마르틴 부버의 '나와 녀' 참고)
"신은 자유롭고 숨어있다.. 신은 오로지 자유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제한된 들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인간의 자유는 그보다 앞선 신의 자유에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대로 대처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하는 삼의 장소에서, 즉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막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도록 요구 받는 역경에서 신을 만난다. 신은 우리 자신을 확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의 측면에서 초월자가 되어 우리와 만난다. 그는 완전히 타자가 되어 우리와 만난다."
그래서 어떤 신인가?
"아마도 우리는 한동안 신에 대한 이름 없이 지내야만 할 것이다. 출애굽은 유대인들에게 이전 경험에서 나온 명칭들을 대체할 새로운 신의 이름이 필요했을 정도로 대단히 강력한 전환점이 되었다.오늘날 기독교 세계의 시대에서 새로운 도시 세속성 시대로 이행하는 사건도 그에 못지 않은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낡은 명칭들에 완고하게 집착하거나 아니면 불안스레 새로운 명칭들을 종합하기보다는 아마도 우리는 모세처럼 단순하게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착수하면서 미래의 사건들이 새로운 이름을 가져다 주리라는 신념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