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에 진시황(BC 259-BC 210)의 명령에 따라 30여만 대군이 동원돼 2년6개월만에 건설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 '진직도'는 중국 영토 내에 보존돼 내려온 극소수의 고대 교통요도 유적의 하나로서 그 길이는 700여㎞에 이른다.
현존하는 노면은 너비가 대체로 23-27m지만 가장 넓은 곳은 47m나 됐으며, 길의 경사도는 평탄해 오늘날의 2급도로 기준에 상당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길은 서한(西漢.전한)에서 동한(東韓.후한)으로 이어진 한(漢)나라 때(BC 202-AD 210)는 물론 위(魏)나라, 진(晉)나라 또는 진나라 멸망 조금 후까지 빈번하게 사용된 주요 교통로였던 것으로 추정됐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방궁과 이산 능원은 다른 한 가지 공정으로 인해 잠시 공사가 중단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함양과 장성 북부 구원을 직통하는 ‘진직도’이다.
진시황이 직접 주관하여 만들게 한, 전장 700km의 ‘진직도’는 인류 역사상 첫번째 고속도로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뒤,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대장군 몽염은 정벌전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도로가 이어지지 않아서 식량을 운송하지 못해 참담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몽염, 몽의 형제가 진시황에게 함양에서부터 장성 북부인 구원에 이르는 통로를 내자고 청원하자 백관이 쟁론이 벌어지는데, 중신인 이사와 조고는 도로 건설에 막대한 자원이 들어간다며 반대한다.
반대와 고난을 겪으며 여러 차례의 주청이 있은 후에, 진시황은 마침내 아방궁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전대미문의 ‘산을 끊고 계곡을 메워 곧은 통로’를 내는 거대한 공사인 ‘진직도’를 만들게 된다.
진시황은 마지막으로 남은 30만 명의 인력과 국고의 재화를 모두 몽염, 몽의에게 내어주고 진직도를 건설하도록 명한다.
이 도로는 국경의 평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황궁의 권력 암투를 불러 일으키고, 몽영과 이사는 조고의 모함을 받아 죽게 된다.
진시황이 순유 도중 붕어해 버리자, 조고가 유서를 위조하여 진짜 후계자인 장자 부소에게 죽음을 내리고, 나이가 어린 호해를 황제에 옹립했다가 진이세 3년, 조고의 정변으로 호해를 강제로 자결하게 만든 것이다.
진시황의 조카인 자영이 제위에 오른 뒤, 조고를 죽여 몽씨 형제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형제의 묘를 그들이 목숨을 바쳤던 진직도의 옆에 이장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