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코 .7,31-37
내가 받은 은총을 언제까지 함구해야 할까?
백종원의 골목식당 ‘초심 잃은 거제도 도시락집’의 내용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백 대표는 거제도에서 작은 식당을 하며 거의 망해가는 세 집을 살려놓습니다.
특별히 가장 믿은 집은 거제도 도시락집입니다.
손님이 없는 열악한 상권에서 몇 명 안 되는 낚시꾼들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며 고생하는 도움이 절실한 사장님 부부를 위해 백 대표는 자신의 특별 비법이 들어간 톳김밥과 거미새라면을 만드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가게는 대박을 냅니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재방문한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김밥에 톳의 양이 줄었고 맛도 배지 않은 톳을 썼습니다.
거미새 라면에는 통새우가 아닌 새우를 갈아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홀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1인 1라면을 반드시 먹어야만 합니다.
또 김밥 하나는 카드 결제가 불가합니다.
카드 수수료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식탁의 회전율 때문에 등으로 핑계를 대지만 백 대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처음엔 절실했는데, 지금은 욕심이 들어온 거죠.”
주인은 욕심 때문이었다는 말에 반박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변할까요?
하지만 그 초심을 잃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백 대표는 말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했는데…. 초심을 잃은 가게가 맛이 유지될 리가 없습니다.
초심에 드리워진 욕심을 걷어내야만 멀리 볼 수 있고 오래오래 많은 손님에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세요. 왜 이 좋은 기회를 발로 차요?
갈게요. 10개월 전의 절실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갈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던 차라
그도 이방지역에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을은 세상은 상징하는데 이 세상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지배합니다.
고쳐진 그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이방 민족과 섞여 살던 그는 자기 마을을 지배하던 어둠의 세력의 강력함을 무시하였습니다.
저절로 자신에게 그것이 스며들어 은총을 받고도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마치 백종원 대표가 자신들을 찾아와 비법을 알려주었음을 선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백 대표를 위함이 아닌 그것을 위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처음엔 사마리아 지방이나 이방 민족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악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당신 제자들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 은총을 받고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 지방으로 가서 3년을 수련하고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은총을 받고 3년 정도는 함구하며 그 은총의 씨앗을 열매 맺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은 뒤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봅시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5-18)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아랍 땅에 머물렀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는 그 시간 동안 수련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로 돌아왔을까요?
예루살렘의 교회의 수장을 찾아갔습니다.
수련의 결과는 결국 교회의 수장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만나 다시 교회에서 파견받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여러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 온전한 순명이 가능할 수준이 되었을 때면 복음의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신앙 체험을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바오로는 신앙 체험 3년 뒤 교회로부터 파견받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 13,1-3)
성령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견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면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교회가 그들을 파견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첫 신앙 체험을 사도행전에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체험을 전하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에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해지지 않게 잡아줍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교회에 순종할 줄 안다면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주님께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수도회 사제까지 되었고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 순종하기까지 그 은총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주님의 교회를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종파만 수천, 수만에 이릅니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를 봅시다.
같은 개혁자였지만,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할 수준까지 오른 분은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도회를 어렵게 교회의 인가를 받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순종할 수 있기 전까지는 함구합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해가 됩니다.
가장 큰 해를 입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은혜를 교회를 통해 주시고 교회에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그 초심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0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코 .7,31-37
나와 Touch하시는 하느님!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나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나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쑤시지? 왜 ‘드럽게’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냐구?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꽤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십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형편없고 허물 많은 우리 인간들의 구차한 일상사에
기꺼이 끼어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와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복음: 마르 7,31-37: 열려라-에파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즉 그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몸을 설계하시고 육신을 지으신 분께서 몸소 그에게 다가가시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닫힌 귀를 아무런 고통 없이 열어 주셨다. 한마디 말도 내뱉을 수 없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이 말을 하게 해 주신 분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아담이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그분은(참조: 창세 1,27-28; 2,20), 힘들게 배워야만 하는 말을 귀먹은 이가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 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 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나,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비록 한 가지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하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단번에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