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모비딕 ●지은이_윤남석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6. 7. 1
●전체페이지_224쪽 ●ISBN 979-11-24212-11-0 03810/ ●신국판(152×223)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20,000원
다양한 문화적 소스를 낯선 접근법으로 소설화하다
윤남석 작가의 소설 『모비딕』이 ‘시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사실조차도 감추고 진실을 좇고자 하는 다양한 텍스트를 토대 삼아 사회적 문제를 자근자근 짚어 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고질적 학교 폭력 폐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실태, 세월호 사건, 코비드19, MZ세대의 내면 심리, 콜래트럴 데미지, 그리고 향가의 재구성 등. 다양한 문화적 소스를 낯선 접근법으로 이미지화하면서 이야기와 감정의 전달 방식을 그만의 스타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소설 『모비 딕』 은 다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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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키호테 편·07
샬롯의 아가씨·35
혼자 가는 먼 집·63
제망매가·91
자코메티 이발관·141
그 흰 고래·169
책을 묶고 나서·215
■ 책을 묶고 나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쓴 『소설의 이론』) 서문을 들춰 보다가 캔 맥주 풀탭을 젖혔다. 무려 백여 년 전이라면 별빛과 지도, 그 낭만적 감수성에 기대어도 충분한 시절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 당시에도 형이상학적 지향은 그닥 기대할 수 없었던 형편으로 읽히고 있다. 백여 년 전에 쓴 책에서도 그러했다는데, 하물며.
애당초 쓰는 사람이 아니고 읽는 사람이라고, 요즘도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게 여전히 좋다고, 그렇고 그런 얘기를 이어가다 보면, 으레 시시콜콜한 질문이 따라붙곤 한다. 대개 쓰는 것에 대한 질문인데, 가령 착상을 어떤 식으로 얻는지, 트릿(Treatment) 작업은 어떻게, 라고 캐어묻곤 하는데, 뭐 별거 있냐고, 그냥 쓸 뿐이라고, 쓰는 사람이라면 응당 하는 노트테이킹(Note-taking)도 꼼꼼히 챙기고 있고, 라며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
새벽쯤 비 소식이 있다는 뉴스도 접했지만, 적막을 깨는 어떠한 잡음도 의식되지 않는 시각이다. 에밀루 해리스가 부른 포크송 「Wayfaring Stranger」를 찾아 듣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가졌다는 애밀루 해리스,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젖다 보면 어느덧 파란 많은 지난날이 플래시백 되기도 한다. 별빛과 지도, 백여 년 전에도 힘들었다던 그 감성적 접근은 기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애절한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완행버스 맨 뒷좌석에 지친 몸을 기댄 것 같은 고독감에 젖어 든다. 창밖엔 어스름이 급격히 몸을 불리고 있고, 고르지 못한 노면에 덜컹거릴 때마다 천정에 달린 등도 덩달아 꺼졌다 켜지곤 하는 그런 버스. 가 봐야 마을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목적지조차 불명확하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고 있는 그런 버스. 옆에 놔둔 낡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펼치자마자 창밖 물컹거리는 어둠에 흠뻑 적셔질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 버스 기사는 어디까지 갈 건지 다행히 묻지 않고 있고, 간간이 하품을 늘어지도록 뱉어 내는 상황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만. 천정에 달린 스피커에서 여전히 리플레이되고 있는 애밀루 해리스의 노래.
앞갈망 따위가 어찌 돌아가든 그렇게 제때 이미지화해 두는 작업에 익숙한 편이다.
예컨대 이런 건 있었다. 마음먹고 쓴다는 행위를 시작했을 때부터 자기만의 색깔은 지니고 싶어 했다. 그림만 보고도, 음악만 들어도, 건물 모양만 봐도…, 심지어 음식에도 스스로의 스타일을 구축하듯, 고집이라면 고집일 수도 있는데 모름지기 작가라면 자기만의 문학적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고로 글만 봐도 대뜸 그 작가를 추정할 수 있다면, 그런 시답잖은.
작가는 십분 그렇게 만들어 간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 글을 읽는 독자가 그런 생각이 들게끔 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하튼 독자가 그 작가만의 뚜렷한 색깔을 짐작하게끔 문체를 구축한다는 것은 여간 녹록지 않은 일이다.
잡문을 쓸 때는 기존의 방식을 몽땅 뒤엎는 창조적 파괴도 얼마든지 가능해 보였기에 전혀 구애되지 않고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한 표현법이 나름의 색깔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이랍시고 쓰고부터는, 특히 단편은 백 매 내외에서 결정지어야 하기에 잡문을 쓸 때 시도했던 실험적 방식이 자칫 장르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요즘은 탈장르적 경향의 예술이 신선한 주목을 받고 있고 어느 분야든 간에 실험적 방식의 접목이 예사롭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여하튼 자기만의 창의적 문체, 그런 고심만 거듭하고 있다.
빈 캔을 들고 나가, 주물난로 옆 나무 양동이에 힘 있게 던져 넣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창 쪽으로 내뱉다가 새벽쯤 온다던 비가 제멋대로 계획을 앞당겼다는 걸 이내 알아챘다. 칠흑 속에서 서서히 비가 돋고 있었다. 캔 두어 개를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번엔 안줏거리로 어떤 곡을 고를까 생각하다가, 두어 달 전 비 오던 날 마지막으로 들었던, 캐스 블룸의 「Come Here」,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선율이 괜찮을 성싶었다. 이 노래를 알게 된 건 삼십 년 전에 나온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난 후였다. 서둘러 낡은 가방을 둘러매고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하려는 기차에 옮겨 탄다. 역시나 비엔나로 가는 제시와 파리로 가는 셀린도 건너편 좌석에서 잡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고 있다. 드디어 기차가 비엔나에 도착하고 건너편 좌석의 그들도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다행히도. 헐레벌떡거리며 자리로 되돌아와 셀린을 꼬드길 만한 대사를 하게 될 제시의 이미지화된 소스를 뭉텅 삭제하기로 한다. Nice on. 기차는 다시 출발하고, 플랫폼을 걸어가는 제시의 뒷모습만 멀거니 바라보는 셀린의 입가에 샐쭉거림이 짙게 묻어나고 있다.
뭐든지 쉬운 건 없으나, 너무 뻔한 대로 이미지화시키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제대로 뒤틀리게 만들 때만이 작가가 개입할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름 멋쩍은 웃음을 띠며 맥주를 천천히 들이켠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엉킨 실타래의 끄트머리 가닥을 겨우 잡고 미지의 여정을 떠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소한 질문 하나라도 허투루 여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답 또한 고리타분한 형식에 따를 필요는 더욱 없다. 때론 오지로 들어가는 완행버스를 타기도 하고 파리행 기차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쓰기란 여정이 끝날 때면 허탈하다는 생각만 잔뜩 든다. 산다는 건 그렇게 매번 허탈을 갱신하는 일이라는 생각이지만.
뭐, 책을 파는데 매장이 없다고? 1994년 7월 6일, 최초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이 등장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회의와 냉소가 동반된 놀라움이었다. 그 획기적 생각은 제대로 적중했다. 앞서간다는 건 그에 맞는 앎과 차이를 초월할 생각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흘렀다. 책은 여전히 쏟아져도 매장이든 뭐든 찾지 않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여섯 번째 책을 내놓지만 슬픈 현실이다. 쓴다는 걸 업으로 삼고 있는 얄궂은 팔자이긴 하나, 참…….
그래도 미지의 여정은 또 다른 진실을 마주치게 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 표4
씻김굿 공연은 재비라고 일컫는 악사들의 시나위로부터 시작되었고, 흰 고깔에 장삼을 걸친 주무(主巫)와 여섯 명의 조무(助巫)가 등장하여 만수받이를 구송하는 형식으로 굿판이 어우러졌다. 소의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뒤쪽에 정좌한 채, 지전과 넋당석을 든 주무가 선소리를 메기면 뒷소리로 받는 조무 역할이었다. 초가망석, 손굿 쳐올리기, 제석굿, 넋올리기, 희설, 고풀이, 길닦음, 액막음의 순서로 이어졌는데, 조무는 메김소리에 맞춰 화음을 넣기도 하고 가락을 쫓아 응답 창으로 받기도 했다. 그리고 북과 징 연주를 맡은 바라지는 추임새를 간간이 넣으며 시식(施食)을 거들었다. 제석굿을 할 때는 조무들도 제석모라고 부르는 고깔을 쓰고 지전을 양손에 든 채 지전춤을 췄다.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양손에 쥔 수십 장의 지전을 사방으로 휘젓는 이 지전춤을 그녀는 세령무(洗靈舞)라고 일컬었는데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황천길을 닦아주는 의식이라고 했다. 주무와 조무들의 춤 동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전은 슬픔을 한층 우아하게 풀어내려는 듯 무게 있게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지전이 허공에서 그려 내는 촘촘한 너름새 속에서 슬픔의 미학은 그렇게 적절히 열렸다가 맺히면서 정교하게 승화되고 있었다._「제망매가」 중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엉킨 실타래의 끄트머리 가닥을 겨우 잡고 미지의 여정을 떠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소한 질문 하나라도 허투루 여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답 또한 고리타분한 형식에 따를 필요는 더욱 없다. 때론 오지로 들어가는 완행버스를 타기도 하고 파리행 기차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쓰기란 여정이 끝날 때면 허탈하다는 생각만 잔뜩 든다. 산다는 건 그렇게 매번 허탈을 갱신하는 일이라는 생각이지만. _「책을 묶고 나서」 중에서
■ 윤남석
때로는 귀가 눈보다 사물을 더 잘 봐, 영화 〈해피 투게더〉에 나오는 대사를 간간이 떠올리며 불합리적인 시간을 보내는 데 애써 익숙한 척하지만, 뭘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보는 건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연작 산문 『설니홍조』, 장편소설 『바람의 자리』 등을 펴낸 바 있고, 여전히 화소헌(華笑軒)에서 잡문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나무의 결도 매만지면서 관조적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첫댓글 윤남석 작가의 소설 『모비딕』이 ‘시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큰 관심과 사랑(지금 교보문고, 알라딘 등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