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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 -下-
중위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하였다.'가이샤쿠[介錯, 할복시 옆에서 목을 쳐주는 사람, 또는 그 행위 : 譯者註]가 없기 때문에 깊숙이 밸 생각이야. 끔찍할지도 모르지만 겁을 내거나 해서는 안돼. 어차피 죽음이란 곁에서 보고 있노라면 두려운 것이지. 그걸 보며 약해져서는 안돼, 알겠지' '네' 레이코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희고 보드라운 정경을 보자 죽음을 앞에 둔 중위는 신기한 도취를 맛보았다. 지금부터 그가 착수하고자 하는 일은 여태껏 아내에게는 보인 일이 없는 군인으로서의 공적(公的) 행위였다. 전쟁터의 결전에서와 똑같은 각오가 필요한,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동등하고 동질인 죽음이었다. 그는 지금 전쟁터의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위는 짧은 순간의 신비로운 환상을 맛보았다. 전쟁터의 고독한 죽음과 눈앞의 아름다운 아내, 이 두 개의 차원에 동시에 다리를 걸쳐놓고, 있을 법하지도 않은 두 개의 공존을 구현하고서, 지금 자신이 죽어가려 하고 있다는 이 감각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미로운 그 무엇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고의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내의 아름다운 눈에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 목도되고 있다는 사실은, 향기로운 미풍을 맞으며 죽어 가는 것과 같았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용납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경지에서 다른 그 어느 누구에게도 용납되지 않는 경지가 용납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위의 눈앞에 있는 신부(新婦)와도 같은, 흰 예복을 차려 입은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신이 사랑하고 몸바쳐온 황실과 국가, 군기(軍旗), 그리고 그것들 모두의 화려하게 개인 환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그의 눈앞에 있는 아내와 동일하였고 그 어디, 아무리 먼 곳으로부터도 그침 없이 해맑은 눈을 밝히며 자신을 바라보아 주는 존재였다. 레이코 역시 죽음을 결행하려는 남편의 모습을 이 세상에 이만치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바라보았다. 군복이 잘 어울리는 중위는 그 늠름한 눈썹, 굳게 다문 입술과 함께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아마도 최고의 것일 남자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 그럼' 마침내 중위가 이렇게 말하였다. 레이코는 다타미에 깊이 몸을 조아려 예를 취하였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눈물로 화장을 망치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으나 눈물은 멎지 않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물 너머로 흔들리며 보이는 것은 이미 뽑아든 군도의 날 끝을 대여섯 치 드러내 놓고 칼을 흰 천으로 감싸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천으로 감싼 군도를 꿇어앉은 무릎 앞에 올려놓자, 중위는 자세를 바꾸어 양반다리로 앉고는 군복 옷깃의 호크를 끌렀다. 그 눈은 더 이상 아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넓적한 놋쇠로 만든 단추를 그는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끌렀다. 여섯척 짜리 순백색 훈도시(ふんどし, 일본 전통 남성 속옷, 譯者註)가 보였고,중위는 허리를 느슨하게 하고는 훈도시를 슬쩍 끌어내리고 오른손으로 군도를 흰 천으로 감싼 부분을 잡았다.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고 자신의 배를 바라보고는 왼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중위는 칼이 잘 드는지가 염려되었으므로 왼쪽 바지통을 걷어올려 넙적다리를 드러내고는 그곳으로 가볍게 칼날을 미끄러지게 하였다. 순식간에 칼로 벤 상처로부터 피가 스며들었고, 여러 개의 가는 핏줄기가 밝은 빛을 받으며 그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남편의 피를 본 레이코의 심장박동이 무서울 이만치 빨라졌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중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피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척 고식적인 안심이라 생각하며 레이코는 짧은 순간의 안도감을 맛보았다.
그 때, 중위는 매의 그것과도 같은 시선으로 아내를 격렬히 응시하였다. 칼을 앞으로 들이대고는 허리를 치켜세우고 상반신이 칼끝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모습으로 몸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을 그 군복의 성난 어깨로부터 알 수 있었다. 중위는 단숨에 깊숙이 왼쪽 옆구리로부터 찌를 작정이었던 것이다. 기합을 넣는 날카로운 소리가 침묵으로 가득찬 방안을 관통하였다. 중위는, 스스로 힘을 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으로부터 두툼한 몽둥이로 옆구리를 통타 당한 듯하였다. 일순간 머리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여섯치를 드러낸 칼끝은 이미 중위의 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으며 손으로 꼭 쥐고 있던 흰 천이 그의 배에 직접 맞닿아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중위는 칼날이 확실하게 복막을 관통했다고 생각하였다. 호흡이 곤란하였고, 가슴은 심한 박동으로 고동쳤으며, 흡사 자신의 내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깊고 깊은 심연에서 땅이 갈라지고 뜨거운 용암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통증이 솟아 나옴을 알 수 있었다. 그 고통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순식간에 그에게로 다가왔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려 하였으나,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고 이를 억눌렀다. 이것이 할복이란 것인가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하늘이 머리위로 무너져 내리고 세계가 뒤흔들리는 것과도 같은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인 감각이었다. 칼날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견고한 것으로 비쳤던 자신의 의지와 용기가 지금은 가느다란 한 도막의 철사처럼 변하여 오로지 그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에 그는 휩싸였다. 손의 감촉이 미끈미끈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를 쳐다보자 손과 하얀 천이 모두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훈도시도 이미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극렬한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이는 것이 보이고, 있을 것들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레이코는 중위가 왼쪽 옆구리에 칼을 찌른 순간,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막을 내리기라도 한 듯이 핏기가 가신 것을 보고 달려가고픈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까닭을 막론하고 그 광경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였다.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남편이 레이코에게 지워준 책임이었다. 다타미 하나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견디고 있는 남편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 고통은 한치의 틈도 없는 정확함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레이코는 그것으로부터 남편을 구해 낼 도리가 없었다. 남편의 이마에서는 흘러나온 땀방울이 빛나고 있었다. 중위는 눈을 감고 다시 시험이라도 해 보려는 양, 다시 눈을 떴다. 그 눈은 평시의 광채를 잃고 작은 동물의 눈과 같이 천진하며 또한 흐리멍텅하게 보였다. 고통은 레이코의 눈앞에서, 그녀의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비탄에도 아랑곳없이 마치 한여름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고통의 키는 자꾸자꾸 커져갔다. 크기를 더해 가는 것. 남편이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 그의 모든 존재를 고통과 환원하고는 손을 뻗쳐도 닿을 수 없는 고통스런 영어(囹圄)의 수인(囚人)이 되어 있는 것을 레이코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코는 가슴아파하지 않았다. 그녀의 비탄은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레이코에게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 누군가가 무정한 유리로 만든 높은 벽을 세워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혼 이후 남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녀가 존재함이었고, 남편의 숨결 하나 하나까지가 그녀의 숨결이었음에도, 지금 남편은 고통의 한가운데에 가까스로 존재하고 있었고 레이코는 비탄에 빠진 채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증을 무엇하나 붙잡지 못하였다. 중위는 그대로 오른손으로 칼날을 이동시키려 하였으나, 칼끝은 그의 장(腸)에 걸렸고 부드러운 탄력 때문에 칼이 쉽사리 밀려나왔으므로 두손으로 칼날을 배 안쪽 깊숙이 눌러가며 칼날을 옮겨야만 함을 알았다.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생각한 만큼 베어지지 않았다. 중위는 오른손에 온몸의 힘을 집중시켜 칼날을 그었다. 서너치 정도가 베어졌다. 고통은 배 깊숙한 곳으로부터 서서히 번져갔고 그의 배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 하였다. 그것은 흡사 난타 당하는 종(鐘) 같았으며, 자신의 호흡 한번마다, 그리고 맥박이 한번씩 뛸 때마다 고통이 천 개의 종을 한꺼번에 울려대기라도 하듯이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중위는 더 이상 신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자 칼날은 이미 그의 배꼽 아래까지 전진해 있었고 그것을 보자 만족감과 용기를 얻었다. 피는 점점 기세등등하였으며 상체 부위로부터 맥박치듯이 흘러나왔다. 중위가 앉아 있는 부위의 방바닥은 피로 붉게 젖어 있었으며 카키색 바지의 주름잡힌 부위에 고인 피가 그리로 흘러 내렸다. 그리고 드디어 레이코가 입고 있는 하얀 예복의 무릎으로 한 방울의 피가 작은 새와 같이 멀리서 날아와서 앉았다. 중위가 겨우 오른쪽 옆구리까지 베었을 때 이미 칼날은 꽂혀 있던 깊이가 얕아지며 기름과 피로 미끈거리는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돌연히 구토를 느낀 중위는 목쉰 비명을 내질렀다. 구토가 극렬한 고통을 더욱 심하게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단히 아물어 있던 그의 복부는 급격히 물결쳤으며 상처 부위가 크게 벌어지며 마치 칼로 베인 자국이 하나가득 토사물을 토해 놓기라도 하듯이, 그의 장이 와락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장은 주인의 고통은 알지 못하다는 듯, 건강하고 징그러울 이만치 생생한 모습으로 미끄러져 나와 중위의 넓적다리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중위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로 숨을 쉬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입으로부터는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로는 견장의 금이 빛나고 있었다. 피는 여기저기로 아무렇게나 흩어졌고 중위는 자신의 피 웅덩이에 무릎까지 잠겨 그곳으로 한쪽 손을 짚고는 널브러졌다. 피비린내가 방안 하나가득 진동하였고 고개를 숙인 채 구토를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을 어깨로부터 알 수 있었다. 쏟아져 나온 장에 밀려나오기라도 한 듯이 칼은 이미 칼끝마저 드러내 놓은 채 중위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 때 중위가 있는 힘을 다하여 몸을 제껴올리던 모습은 비할 바 없을 만큼 장렬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너무나 급하고 격렬하게 제껴올린 탓에 뒤통수가 도코노마의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을 정도였다. 레이코는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오로지 자신의 무릎까지 퍼져오는 피의 흐름만을 좇고 있었으나, 이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중위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피부는 바싹 말라 있었으며 그토록 아름다웠던 뺨과 입술은 건조한 흙빛깔로 변해 있었다. 오로지, 무척 무거운 듯이 칼을 쥐고 있는 오른손만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자신의 목덜미로 칼끝을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레이코는 남편 최후의 가장 고통스럽고 공허한 노력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피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칼끝이 몇 번이고 목덜미를 노렸다. 칼끝은 이내 빗나가고 말았다. 이젠 기운이 다 빠진 것이었다. 빗나간 칼날은 옷깃에 닿았고 견장에 부딪혔다. 호크를 끌러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복의 딱딱한 깃은 저절로 다물어지며 이내 그의 목덜미를 칼날로부터 보호하고 말았다. 레이코는 더 이상 그런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 다가가고자 했으나 일어 설 수가 없었다. 피로 흥건해진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했으므로 그녀가 입고 있던 흰옷의 무릎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남편의 등뒤로 돌아가 옷깃을 벌려주는 도움만을 주었다. 떨리는 칼끝이 가까스로 벌거벗은 목덜미에 닿았다.
레이코는 그 순간 자신이 남편을 밀어 넘어뜨린 듯한 착각을 하였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은 중위가 스스로 의도한 마지막 힘이었다. 그는 갑자기 칼날을 향하여 자신의 몸을 내던졌고, 칼날은 그의 목덜미를 관통하였다. 엄청난 피의 분류와 함께 전등빛 아래로 냉정하며 시퍼런 칼날을 세워 놓고 모든 것은 고요해졌다.
Ⅴ
레이코는 피로 미끈거리는 다비를 신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이층은 조용하였다. 아래층의 불을 켜고 가스의 밸브를 잠그고는, 화로 위에 물을 끼얹어 잿속에 남은 불씨를 껐다. 전신거울 앞으로 가서 거울 앞에 쳐 두었던 발을 걷어 올렸다. 피는 그녀가 입고 있던 순백의 옷을 화려하고 대담한 무늬가 있는 옷처럼 보이게 하였다. 전신거울 앞에 주저앉자 넓적다리 언저리가 남편의 피에 젖어 무척 차가웠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긴 시간을 들여 화장을 하였다. 뺨에는 짙은 연지를 발랐으며 입술도 짙게 칠하였다. 그것은 남편을 위한 화장이 아니었다. 남겨진 세상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솔에는 장대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일어서자 전신거울 앞의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레이코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갔고 마지막으로 현관 앞에 섰다. 어제 남편이 이곳의 열쇠를 잠근 것은 죽음의 준비였다. 그녀는 한참동안 단순한 생각에 잠겼다. 열쇠를 열어놓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일 잠가 놓는다면 이웃사람들은 며칠이 지나도 두 사람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자신들의 주검이 부패한 채로 발견되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역시 열어두는 것이 좋았다. .... 그녀는 잠긴 문의 열쇠를 풀고 간유리 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 .. 갑자기 찬바람이 들어왔다. 심야의 길거리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으며 건너편 집 마당 나무들 사이에서 얼어붙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코는 현관문을 그대로 둔 채 계단을 올라갔다. 여기저기 걸어다닌 탓에 다비는 더 이상 미끄럽지 않았다. 계단 중간쯤부터 이미 이취(異臭)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중위는 피바다의 한복판에 엎드려 있었다. 목덜미 위로 서있는 칼날이 아까보다도 더욱 빼어나 보였다. 레이코는 피웅덩이 한가운데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갔다. 그리고는 중위의 시체 옆에 앉아서 방바닥에 있는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중위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머리를 소매로 감싸 안아 올려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는 이별의 입맞춤을 하였다.
일어서서 오시이레에서 흰 천과 새 허리띠를 꺼냈다. 옷섶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허리에 두툼한 천을 감고 그것을 허리띠로 단단히 졸라맸다. 레이코는 중위의 시체로부터 한척정도 떨어진 곳에 앉았다. 단도를 허리띠로부터 뽑아 명징한 칼날을 가만히 응시하고는 혀를 갖다대었다. 잘 갈아진 무쇠는 약간 단맛이었다. 레이코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까 그토록 죽어 가는 남편과 자신을 갈라놓았던 고통이 이번에는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자 남편이 이미 영유하고 있는 세계에 동참한다는 기쁨이 있을 따름이었다. 괴로워하는 남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보는 무엇인가 불가해한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믿었던 대의(大義)의 진짜 단맛과 쓴맛을 지금이야말로 자신도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남편을 통해서만 겨우 맛보아왔던 것을 이번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혀로 맛보는 것이었다.
레이코는 목덜미에 칼날을 갖다 대었다. 한번 찔렀다. 칼은 깊숙이 찔리지 않았다. 머리가 무척 뜨거워졌고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칼날을 옆으로 움직였다. 입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 넘쳤고 눈앞의 시야는 뿜어져 나오는 피의 환상으로 새빨개졌다. 그녀는 힘을 얻어 칼날을 강하게 목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었다.
-끝-

첫댓글 저리도 섬세하게 묘사한 죽음.
극단적 형식...
미시마 그가 저토록 집착한 생사관의 정체는 과연 무어란 말가.
내게는 북조선이 보이고, JMS가 보이고, 샤먼이 보이고, 인민사원이 보이고....
왕선생도 그냥 한번 느껴보시라고 올리는 것.. ㅎ
댓글은 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