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집 / 김해자
반백년 만에 찾아간 옛집엔 흙 묻은 맨발바닥이 엄마 치마폭 잡고
우물가를 돌고 있었네 한배에서 난 강아지들처럼 언니 오빠들이
오물조물 모여 젖을 빨고 있었네 몇십년 전 뒤뚱뒤뚱 걸음마
지켜보던 돌담이 무너져가며 서 있었네
누군가의 첫 울음소리로 간신히 지탱되는
생가(生家)란 살아 있다는 뜻일까
죽은 것은 죽은 대로
무너진 것은 무너진 대로
옛집이 수런거렸네 파인 황토벽 사이 뼈대가 드러난 사랑채엔
옆집 포리똥나무가 기웃거리고 포도나무는 늙지도 않고
맑은 새끼들을 주렁주렁 내보내고 있었네 반나마 사라진 천장,
골 깊은 목수국 이파리들도 잘만 자라 하늘과 푸릇하게
내통하고 있었네 하얀 등불 수백 개가 한꺼번에 켜지는
것 같았네
돌과 흙으로 반죽한 변소간
우북하게 솟은 재 속에 꽂혀 있던 삽자루 같은
술 취한 아버지가 키 큰 접시꽃에 오줌을 갈기고 있었네
시조 흥얼거리며 침 퉤 뱉으며
기억이란 믿을 게 못 되는 바람둥이 애인, 라포리에서 물웅덩이
몇 건너야 도착하던 머나먼 용동, 큰아부지 집이 지척이었네
고사리손 몇 이으면 단숨에 작은아부지네 마당, 주렁주렁 달린 감도
딸 수 있을 것만 같았네 훈김 나는 닭죽 냄비 들고 심부름 가던
모퉁이 집 왕고모 할머니네도 몇걸음, 요에 오줌 싸고
잘방잘방 소금 얻으러 가고 있었네 콩깍지 날리던 키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엄마의 머릿수건이 희끗 보이던 목화밭이 덤불숲 되었어도
살아가고 있었네 그 자리에서
닭은 횃대에 올라가 자랑스레 울고
돼지는 여전히 짚풀 위에서 꿀꿀거리고
윗목 수수깡 울타리 속 고구마들처럼 함께 자고 있었네
팔다리로 노 저으며
잠꼬대도 하며
- 김해자 시집 <니들의 시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