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노현화 할머님 70세
전 "종군위안부" 피해자 북한 남포시 용강군 애원리
나는 1922년 10월 25일 평안남도 용강군 지사리에서 태어났다.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4명의 딸 (나는 막내딸이었다.)이 있었다.
내가 5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외 독자이다보니 친척들도 없었다.
우리 모녀들은 얼마 안되는 밭을 가지고 일하였으나 도저히 가난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내가 18살 때인 1940년 10월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사리에 있던 지주(별명 털레)가 한
일본인(이름은 모르겠으나 검은옷을 입고 머리는 빤빤히 깎음)과 함께 집에 찾아와
밥벌이 좋은데가 있으니 일본사람과 함께 보내자고 꼬이었다.
어머니가 못 보내겠다고 하자 일본인은 발로 어머니의 얼굴을 걷어차고 나를 강제로
화물차에 태운 다음 평양역전으로 끌고 갔다.
이 때 일본인의 발길에 채여 어머니의 앞니 두대가 부러졌다. 역에서 3명의 조선처녀들과
함께 군마를 싣고다니는 어둑침침한 유개화차에 실리었다. 기관차에 이런 유개화차를
20여량이나 달았는데 차칸마다 모두 조선여성들이었다. 어떤 처녀들은 울며 불며 야단을
쳤고 또 어떤 처녀들은 울다가 지쳐버려 멍하게 앉아있기도 하였다. 화차의 문을 밖으로
잠그었기 때문에 어디로 실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끼니 때가 되면 뙤창문으로
줴기밥을 한덩이씩 던져주곤 하였다. 내가 탄 차량에는 15~16살 짜리 처녀들이 있었다.
3~4일이 지나 기차는 중국 목단강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10여리 떨어진
일본군 병영으로 끌려갔다. 나는 평양역에서부터 같이온 조선여성 3명 (그 중 2명은
남포에서 같이 왔는데 이름은 명옥 17살, 봉녀 17살, 1명은 평양에서 왔었는데 이름은
학실 16살)과 함께 2층으로 된 건물에 들어갔다. 1층에는 4개의 방이 있었는데 각기
한방에 1명씩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자 밖으로부터 자물쇠가 걸리었다.
매방의 크기는 너비 2~2.5미터, 길이는 3미터 정도였다. 바닥에는 나무판자가 깔려
있었다. 유리창문으로 내다보니 건너편에 집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조선여성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저녁녘이었는데 그날 밤 긴칼을 차고 누런 견장을
단 일본장교 1명이 내방에 들어왔다. 그는 "이제부터는 일본장교들에게 절대복종하라.
그것이 일본천황의 명령을 잘 받드는 것이다. 조선여자들은 우리말을 듣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라고 지껄이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놈의 손을 깨물며
항거하였는데 그놈도 나의 왼손 2지를 물어뜯어 손가락의 한마디를 못쓰게 만들었다.
내가 계속 항거하자 그는 나의 두팔을 비틀어 뒤로 묶은 다음 꿇어앉히고 사정없이
허벅다리를 걷어차고 때리는 것이었다. 그 놈은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음 수욕을
채웠는데 그날 밤 몇놈이 왔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새벽에 깨어나보니 팔이 그냥 묶여
있었다. 이렇게 매일 저녁 8시경부터 새벽까지 강요당하였다. 내옆방에 명옥이가 있었고
그 옆방에 봉녀가 있었는데 그들도 나처럼 당하였다. 봉녀가 음부가 찢어져 피가 났으며
저녁마다 사람살리라고 비명을 지르고 신음소리를 내었다. 우리 넷의 방에는 장교들만
들어왔는데 하루 저녁에 10~15명 때로는 20까지 쓸어들었다. 들어와서는 보통 30~40
분씩 있었는데 더 빨리 나가면 그만큼 더 많은 인원수를 상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식사때나 목욕때나 항상 무장보초와 감시가 뒤따랐으며 서로 마주 보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게 하였다. 식사는 보리밥 한덩이에 소금에 절인 무였다. 입고간 옷은
선자리에서 칼로 찢어버리고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으라고 강요하였으며
"봉사" 시간이 되면 그 옷마저 걷어갔다. 3년동안 한번도 옷을 갈아입지 못하였다.
방문에 작은 뙤창문을 내었는데 장교들은 그 창문으로 조선여성들이 능욕당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히히덕거리기도 하였다. 처녀들이 반항하거나 응하지 않으면 밖에
끌어내다가 숱한 장교들이 있는 앞에서 가죽채찍으로 후려쳤으며 칼등으로 갈비대를
꺾어놓기도 하였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군이 패주하게 되자 나는 주변에 살던 한 조선사람의 집에서
돈 2원을 여비로 얻어 가지고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과거의 치욕으로 인하여
10여년동안 독신으로 살아오다가 후처로 시집갔으나 아이도 낳지 못하였다. 또한 그 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허리와 다리, 손가락을 제대로 쓰지 못하여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다.
일제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의 청춘을 생각하면 원통하여 견딜 수 없다. 나의 청춘과
사랑과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빼앗아간 일본 놈들에 대한 원한을 풀기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다.
일본정부가 아무리 보상을 한다 한들 잃어버린 청춘과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오늘까지도 피해자들에게 정직한 사죄도 성의 있는 보상도 하려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종군위안부"으로 끌려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우리 조선 여성들의 쌓이고 맺힌 원한을 풀어야 한다. 일본정부는
철면피한 행동을 걷어치우고 구 일본 정부가 조선 인민 앞에 저지른 죄행에 대하여
똑똑히 사죄하여야 하며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
자료출처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우리 할머니들 불쌍... 마취도 안하고 배 갈라서 애기 떼고 자궁들어낸 할머니도 있어여.
더 많은 글들과 사진들이 있는데 보면 볼수록 숨이 막혀여
퍼온건데..요즘 일본에대한 말들이 많으시더군여~
전 누가뭐래두..일본 시러여..-_-
물론 일본두 장점이있구 그런건 인정해줘야겠져.....
그런 장점이..아주 극소수이지만..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