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창립한 조용기 목사가 지난달 14일 세상을 떠났다. 교회 규모나 교인 숫자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조용기 목사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경이적인 교세 확장을 이뤄냈다. '93 기네스북 한국판 출판'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약 70만의 신도를 보유한 교회로 기네스북 인정서를 받게 된 일을 보도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에는 순전히 종교적 측면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한국 현대사에 비춰볼 때만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이병철·정주영 같은 인물을 오로지 기업 측면으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용기 목사는 1936년 경남 울주군에서 출생했다. 부산 동래중학교를 다니다 부친의 민의원 선거 낙선으로 가세가 기울어 기술자가 되기 위해 부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가 2학년 되던 해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그는 병중에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는 선교사를 도와 통역도 하고 사역을 도우며 기독교 서적을 읽고 기독교를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20세 때인 1956년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 연도인 1958년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를 세운 곳은 7년 뒤 장모가 될 최자실 전도사의 집이었다. 이곳 거실에서 가정 교회를 차렸다가, 신도가 50명을 넘자 그 집 마당에 천막교회를 세웠다. 44세의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5개월 뒤인 1961년 10월 15일, 25세의 조용기 전도사는 서대문 사거리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세웠다. 그런 뒤 1973년 8월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로 이용되었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로 교회를 옮겼다.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유신체제의 실질적 제1년이 된 1973년의 9월 23일, 37세의 조용기 목사는 여의도에서 헌당 예배를 거행했다. 그런 다음부터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1973년에 1만 8000명이었던 신도는 1981년 20만, 1986년 50만 3000명, 1990년 59만 3천에 이르렀다. '신도 70만'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1993년에는 67만 1000명을 기록했고 1997년에는 70만 9000명, 1999년에는 72만을 기록했다.
교인 숫자는 과장되기 마련이고 한두 번 밖에 안 나온 사람들이 신도 수로 계산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은 세계적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한세대, 순복음영산신학원, 미국 베데스다대학, 국민일보, 신앙계, FGTV, Good TV, 기독교복음방송 등이 이 교회에서 파생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성장세를 실감할 수 있다.
교회의 성장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적 섭리의 측면에서 파악돼야 하지만, 일반적 경험법칙을 초월하는 순복음교회의 성장과 관련해서는 여타 요인들까지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용기라는 인물의 역량이 출중했음은 물론이고 이 교회의 성장을 도운 제3의 요인들이 있었다는 점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용기 목사가 오늘날의 은평구에서 서대문구로, 서대문구에서 영등포구 여의도로 남하한 두 시점은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5·16 쿠데타 및 10월 유신과 맞아떨어진다. 나이 차가 19세인 두 인물의 인연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조용기의 교세 확장이 박정희 정권의 제반 정책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조용기 목사는 영적 체험을 특히 중시했다. 이것이 지나치게 중시되면 샤머니즘의 요소를 띨 수도 있다. 홍영기의 책 <조용기 목사의 교회 성장 리더십>을 보면 "조용기는 샤머니즘적인 것을 기독교적으로 상황화(狀況化)한 문화 변혁자"라고 기술되어있다. 체험을 중시하는 목회 방식은 기복 신앙과도 연결될 수 있다. 홍영기 책은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서 영적 구원뿐 아니라 물질적 구원까지 받는 방향을 지향했다는 점을 조용기 목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제시한다.
대중의 물질적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조용기의 목회 방식이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용기의 설교는 대중의 물질적 욕구를 긍정해주는 한편, 경쟁에서 탈락한 대중에게 위안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박정희 개발독재를 종교적·심리적으로 뒷받침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한국교회 통사' 시리즈의 일환으로 펴낸 류대영 한동대 교수의 '한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개발독재는 급격한 경제개발을 통해 전체적인 소득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불공평한 사회경제적 구조 때문에 경제개발의 열매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또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부와 사회적 지위로 삶을 가늠하게 하여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에 대한 강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도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교회는 물질적·현세적 축복을 약속하여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욕구를 긍정하고 축복해주었다. 이런 축복의 효과는, 예수를 믿으면 영혼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재물과 지위를 얻고 무병장수한다는 삼박자 축복을 표방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급성장에서 잘 드러났다. 부자 되는 게 소원이었던 보릿고개 시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다는 점과 함께 박정희 산업화를 합리화해준 측면이 있다.
조용기와 박정희의 인연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조용기의 목회는 박정희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측면도 있었다. 그는 성경 교리뿐 아니라 '반공 교리'로도 대중에게 다가갔다. 이것이 반공 국가를 합리화 했다. 그가 반공 이념만 지지한 게 아니라 박정희 정권 자체도 지지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지지하는 대열에서도 앞장섰다. 3선 개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심했던 1969년 9월 4일 그는 목사들과 함께 발표한 성명에서 "기독교인은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날마다 대통령과 영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용기 목사는 장기집권을 추구하는 박정희 정권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줄 것을 국민들에게 촉구했다. 조용기 목사는 박정희의 산업화 정책에 편승해 교세를 확장했을 뿐 아니라 박 정권의 반공정책과 장기집권까지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재벌 대기업들이 독재 정권을 지원하고 이윤을 확대했듯이, 그의 성공과 박정희 독재의 상관성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의 성공은 기독교적 섭리나 목사 개인의 역량뿐 아니라 1960년대 및 70년대의 정치 상황과도 맞물려서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