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독자의 아름다운 인연
김 성월
94년 7월 25일. 대구에 사는 그녀는 인물이 훤하게 잘 생긴 사내 아기를 안은 채 서점으로 갔다.
많은 책 중에서 핑크빛 책표지 <행복한 가정 만들기>란 제목이 눈길 끌었다.
그녀의 결혼 생활 7년!
토란잎 위로 물방울이 또르르굴러가듯한 신혼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둔탁해지고
가끔 티격태격거릴 시점에 다다른 때였던 것이다.
그녀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알콩달콩 살고 싶은 마음에
책을 집어 들고 두어 줄 읽으려는데 아기가 칭얼거렸다.
그녀가 83년도 경북 영주에 있을때 은행다니던 사촌 오빠가 읽던 책, <더하기가 안되면 빼기를 하라>였다.
그 당시 미혼이던 그녀는 책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
‘사랑은 끝날때 먼저 차버려라’ 라는 것만 가슴에 담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저자 이상헌님은 그녀에게 그리 낯선 저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구면인 지은이가 반갑고 또 아기도 보채자 책 제목만 보고 얼른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녀는 줄을 그어가면서 그 책을 정독했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란 어린아이가 송편만들기만큼 어려웠다.
잘 빚어도 송편의 고물이 터져 나오듯 아이 셋과 종일 뒹굴다보니 잔소리와 불평 불만이 입으로 새어 나왔다.
엄마가 송편을 맛있게 잘 만들듯이 지은이는 행복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점으로 갔다. 이번에는 ‘사는 얘기’를 샀다. 얼마 후 또 한권의 책 ‘톡쏘는 여자’를 구입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더 읽고 싶어지는데 이제 대구시내 몇 군데 서점을 돌아다녀봐도 이상헌님의 책은 없었다.
그녀는 책표지의 주소를 보고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404번지 풍림빌딩 1815호’ 로 연락을 했다.
가로등에 걸린 달빛마저 차갑던 12월 어느 날
<여자가 거울 앞에 앉을때> <자랑스런 한국인> 두 권의 책이 ‘대구시 북구 읍내동 한서 아파트 101동 706호’로 배달 되었다.
그녀는 가끔 떠 올려 본다.
그 때 이상헌님과 어떤 방법으로 연락이 되었는지 전화인지 편지인지 답장이 없는 걸로 봐서 편지는 아닌 것 같다.
그녀는 그랬다. 이상헌님 책속의 글은 기억을 해도 인연이 시작된 기억은 봄날 아지랭이처럼 가물가물하기만하다.
그러나 기억력의 창고를 강하게 자극해 보니 확실한 것은 그때 책을 받아 저자의 사인이 든 책을 선물 받았다며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을 해 부러움을 산 것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산이 아름답고 고드름이 녹더니 개나리가 피고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수요일 오후였다.
아들과 아파트 주변으로 나들이 갔다. 아들의 자전거가 삐뚤삐뚤 거리다가 길가에 핀 민들레 위로 지나갔다.
민들레는 목이 부러지고 하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솜방망이가 되어버린 민들레 한 송이를 꺽었다.
그 때 솔바람이 불어오자 민들레 홀씨들은 공수부대 낙하산처럼 공중으로 멀리 날아갔다.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를 보면서 그녀는 자신도 저렇게 멀리 날아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무런 계획을 잡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불어닥친 솔바람에 떠밀려
민들레 홀씨처럼 먼 타국 인도네시아로 날아 갔다.
그녀는 다른 짐들은 남겨 뒀어도 책들만은 다 가지고 갔었다.
누군가 말했다. 타국에서 운적이 없는 사람은 가슴을 어디엔가 팔았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모형제 친구들없이 낯선 곳에서 살아 간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아무리 똑바로 보고, 잘 들어도 모르겠고 말도 할 수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밥상머리에 앉으면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났고 그럴 때 그녀는 주로 양파를 깠다.
우기철이라 비내리는 오후면 대지보다 그녀의 마음이 더 먼저 눅눅해져 갔다.
그녀가 인도네시아에 산지가 벌써 십년이다.
처음에는 인터넷도 안되던 그 시절.
그녀는 외로워서 책읽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글들이기에 외우기도하고 생활에 인용도 했다.
살아보니 실감나도록 좋은 말들이었다.
저자와 독자의 인연치고는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일까?
얼마 전 인터넷을 이리저리 다니다가 그녀는 우연히 이상헌선생님의 블로그를 만났다.
그 때 그 기분은 초등학교 봄소풍 가서 보물찾은 것만큼이나 신났다.
그래서 연락이 되었고 이상헌선생님은 당신의 책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녀에게 또 몇 권의 책을 보내 주셨다.
그녀는 이상헌선생님을 생각하면 ‘사막에서 여행자들을 안내하는 밤하늘의 별’ 같단다.
한 권의 책이 이렇게 강한 인연으로 힘들고 외로운 타국 생활을 견디게 해 준다는 것,
그건 단순한 책 한 권이 아니라 정신적인 안내자이자 무언의 동반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