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깨달았다 라는 고백은 상대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오래전의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명상중에 있었던 도약의 경험을 어리둥절한 상태로 친구에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오쇼가 말한 깨달음이란 것과 같은 경험을 한 것 같다고 말이지요. 오래전부터 친구였던 그 친구는 처음 제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나봅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오쇼의 책을 권했지요. 그리고 나날이 달라지는 제 경험도 또한 얘기했습니다. 그 친구는 붓다의 깨달음은 알고 있어도 오쇼의 깨달음은 처음이었겠지요. 친구는 오쇼가 가르친 붓다의 얘기에 흡족하고 좋아했습니다. 마치 오래전 제가 붓다 경전과 오쇼책을 열렬히 탐독했던 것처럼 즐겨 읽었지요. 그 친구는 사회생활에서의 스트레스로부터 위안과 즐거움이 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와 친구의 만남은 즐거운 대화가 되었습니다. 공감이라고 말하지요. 오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틈틈히 전 저의 얘기를 했지요. 그렇게 꿈같은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그때쯔음 오쇼리조트로 여행을 가겠다는 저의 얘기에 그 친구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하여 한달을 계획하여 인도로 떠났습니다. 전 아무 계획없이 단지 오쇼리조트라는 곳이 궁금하다고 했지요. 그곳에서 좋다면 저의 경험을 나눌 친구를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즉흥적인 여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친구와의 갈등은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갈등이 후엔 엄청난 갈등으로 갈라져버렸지요. 그 친구는 첫날부터 계획을 준비하였습니다. 보통의 해외여행이라면 할수 있는 것들이지요. 오늘은 공항근처의 관광지를 가자고 말이지요. 저는 반대했습니다. 그건 즐거움이 없다고 했지요. 그렇게 논쟁은 시작되고 여행의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그 친구는 자신이 맞는 것임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저의 무지를 자신의 계획이 맞는 것임으로 증명하려했지요. 그덕에 그 친구의 여행정보, 책, 등으로 오쇼리조트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지요. 저도 무사히 고비를 넘긴것 같았습니다. 오쇼리조트의 생활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 친구도 그곳을 좋아했지요.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즐거우면서 설레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쇼리조트 외의 생활에선 친구와의 해결되지 않은 논쟁은 점점 커졌습니다. 식사에 관한 것, 앞으로의 여행에 관한 것들을 얘기할 때마다 그것은 논쟁이 되었지요. 매일 저녁 식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는 마치 전투같았습니다. 그 얘기의 정점은 깨달음에 관한 것이었지요. 친구는 깨달음에 대해서 저와 매일밤 대화를 하였습니다. 처음엔 인도를 떠나오기전의 한국처럼 대화였지만 인도에서의 시작된 갈등에선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그는 깨달음을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을 의심하고 저에게 그 의심으로부터의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없었던 의문을 인도에서 비로서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인도의 여행을 즉흥적으로 계획없이 하려고 굽히지 않은 결과 그 친구를 굉장히 난처하게 만든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도여행에 큰 의미를 두고 오게 된 것이었죠. 그가 사랑하는 붓다의 옛유적지와 그곳을 여행하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전 계획을 얘기하는 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저와 함께 하려는 여행의 계획이 무너진 것이지요. 결국 그 갈등은 저에게 깨달음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그 친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깨달음에 관한 것들이지요. 깨달음을 알고 있는 것을 확인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호기심을 넘어 감정이 섞인 광기의 질문과 같은 힘을 지녔습니다. 술도 마셨고, 여행계획, 의견차이에 대한 논쟁은 그를 더욱 더 의문에 차게 만들었지요. 그것은 제가 처음 고백했던 그 때부터 있을 수 있었던 것들의 표현이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비추고 즉흥적으로 대답했지요. 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이 알고 배운 깨달음을 계속 투사하기 시작했지요. 붓다, 오쇼에 대한 깨달음을 해석하고 아는 것에서 저에게 그것을 비교했지요. 저는 계속 그 비교가 어리석음을 제 즉흥적으로 답했습니다. 비교는 과거에서 오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 친구의 비교는 마음이 축적하는 지식의 한분야 깨달음의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오쇼와 붓다를 해석하여 총집약 시킨 것이었지요. 그는 오쇼를 한 인간으로 상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오쇼와 똑같이 되는 것이 깨달음의 조건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과 같이 비교를 했지요. 그 질문들은 인도여행 내내 이어졌습니다. 오쇼리조트에서 춤추고 저녁미팅을 마치고 온 뒤에도 밤새도록 질문과 답은 이어졌지요. 그것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점점 더 난폭해졌습니다. 결국 그 친구를 비추던 저에게 폭발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저를 죽이고, 협박까지 하려는 폭발의 표현까지 했으니까요. 그래서 전 인도를 간지 열흘도 안되어 걔획했던 한달을 채우지 않고 곧바로 그 날 오후 친구가 리조트를 간 사이 짐을 싸고 한국으로 급히 왔습니다. 그 친구와 마지막 밤은 싸움의 절정과도 같이 엄청난 분위기에 휩싸였지요. 그렇지만 그것에 동요되지 않고 후회없이 그때 불난 집을 나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의 질문은 너무나 당연히 깨달은 자에 대한 질문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답하면서 계속 듣고 싶은 답이 아닌 머리를 때리는 답이니 그 친구는 점점 더 화가 났습니다. 너는 왜 오쇼와 같이 눈을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있지 못하냐? 그건 너가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너는 얼굴에서 화가 나는 것 같은데, 깨달은 자가 왜 화를 내느냐? 너는 성욕이 있는 것 같은데 깨달은자가 왜 성욕이 있느냐? 너는 주변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다 했는데, 만약 너희 부모님이 눈 앞에서 죽으면 가만히 있을 거냐? 등등의 끝없는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오쇼라는 한 사람을 깨달음의 조건으로 만들어놓고 깨달음을 완벽함으로 알고 있는 지식들을 저는 계속 깨부셔야 했지요. 그는 깨달음에 대해 너무나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깨달은 자라면 꼭 그래야 하는 기준일까요? 깨달음의 기준이 있는 걸까요? 그는 오쇼로 인해서 깨달음의 종교, 신을 만든 것과 같았습니다. 오쇼라는 한 인물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그는 그 손가락이 깨달음으로 알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사람이 아닙니다. 깨달은자가 오쇼의 복제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은 종교를 만들고 우상으로 만들고 조직으로 만듭니다. 우숩게도 마음은 그렇게 하는 엄청난 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쇼를 좋아하면서 오쇼 아닌 자에게는 열등감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 열등감을 오쇼를 숭배하는 믿음으로 견고히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독특합니다. 그 독특함은 깨달음의 의식을 갖출때 더욱 더 아름다워집니다. 오쇼도 그 만의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깨달음, 의식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오쇼가 깨달았다고 깨닫지 않고서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깨달음을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마음은 저의 경험과 같이 질투와 분노, 열등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오직 자신이 깨닫지 않는 이상 깨달음은 모릅니다. 왜 오쇼가 깨달았다고 이미 알고 있지? 라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 의문을 계속하면 더이상 자신이 깨닫지 않고 계속 미루는 것은 쓸모없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더이상 미루지 않고 오쇼를 오해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깨닫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쇼를 사랑하는 일은 오쇼를 한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아는 것보다 오쇼를 의식으로서 자신도 그것이 되어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쇼를 사람으로 보는 일은 곧 그를 오해하는 일이고 그를 처형하게 하는 일입니다. 오쇼를 사람으로 자신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죄의식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저처럼 누군가가 있을때 그에게 투사시키게 되고 그를 처형하게 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오래된 습관입니다. 오쇼의 사람으로서 보여지는 모습을 순수히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음과 연결짓지 않는 것 이지요. 그리고 자신과 비교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볼때 그때 이해가 시작됩니다. 명상은 명상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식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명상가는 되 돌아보게 주위를 끄는 이정표까지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돌아보고 길을 가야합니다. 오쇼가 대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가는 길입니다. 오쇼가 되는 것인데 왜 자신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오쇼와 같이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남긴 발자취를 똑같이 가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발자취를 남기지 않습니다. ?오쇼를 이해하면 그 오쇼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눈빛너머의 분위기, 그 넘어의 의식을 마주보게 됩니다. 그때 오쇼 라는 그 독특함의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과 같이 평범하게. 깨달음의 편견없이 평범한 사람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되지 않는 다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건 독특함이니까요. 그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깨달음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보통의 상식, 마음은 깨달음에 대해 너무나 많은 사람의 상을 만들어놉니다. 그것을 깨는 역할이 스승입니다. 오쇼의 상을 만든 것을 깨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오쇼, 그리고 현존하는 저와 같이 비교대상이 있는 상황은 큰 오해를 불러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고 지나가야할 관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의식이 눈을 뜬 것입니다. 오쇼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 전처럼 마음과 몸은 오쇼와 같이 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욱 더 예민하게 느껴집니다. 깨달음 이후 그것은 차츰 변화되어집니다. 깨달음 이후가 또다른 여행의 시작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보는 눈이 있으므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보는 눈을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오쇼와 같이 똑같이 할수 없습니다, 사람은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만의 깨달음의 여행이 시작합니다. 그 사람만의 아름다움이 서서히 풍기기 시작합니다. 오쇼와 아름다움이 같지 않습니다. 의식은 같지만 아름다움은 다릅니다. 의식은 같습니다. 이해는 같아 오쇼와 다른 몸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은 각각 다른몸, 마음을 거쳐 나옵니다. 각각이 다르다는 것은 다채롭고 아름답습니다. 깨달음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깨달은 자의 눈이 그 자체로 기준입니다. 그 눈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눈을 알수 없습니다.? 그렇게 인도에서 친구를 피해 도망온 저는 지금 일년반이 지났지만 지금도 저를 찾아오는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아직도 저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 친구를 무조건으로 바라봅니다. 아무 기대없이, 그 친구를 그대로 비춥니다.? 그 친구에게 감사합니다. 그 친구가 없었다면 제가 겪은 그친구와의 논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백 후 걸어가는 길의 경험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전 이제 그것이 당연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혼자 지내고자 하는 길과 가리키고자 하는 길에서 저는 ?그때 가리키는 길을 걷고자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제 책임으로 시작됨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적을 만드는 길. 그 길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제 일의 마땅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음을.. 정면으로 들어가 노력한 만큼 일어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겪는 경험은 저 자신만 봐도 지복이 배로 되어 돌아오는 것을 압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오쇼와 같이 깨달았습니다. 이제 전 시작합니다. 끝이 없는 여행을. 실패하지 않는 성공의 길을 따라...
이 무슨 쓰레기통을 뒤쥐던 개같은 소리인가? 사람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조차도 자랑한다. 깨달음이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900년전에 화두법을 고안해 낸 중국 송나라의 대혜종고 스님은 이런 [깨달음 병]에 대해서 이미 100여가지의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한바 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종고 스님의[서장]을 읽어보면 등에 식은 땀이 날 것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철저한 자기 부정만이 있을 뿐이다. 오쇼 조차도 방망이 수십방을 맞을 것이다. 나는 오쇼의 벽암록 강의를 읽고 오쇼에게 실망하고 방황했던 경험이 있다...오쇼조차도 깨달음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때가 오리라....
저도 부정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마음을 부정하지요. 하지만 부정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가능성이 최대로 실현되고 눈을 떳을뜨는 그 자유로움, 날아갈것 같은 시원함, 축복, 등은 긍정적인 것도 사용합니다. 부정과 긍정을 즉흥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요.
싱카르님께서 말씀하신 스님들에 대해선 모르지만 부정의 방법을 잘하는 자는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무묘앙 에오 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쇼의 벽암록을 읽어봤지만 그저 다시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 뿐입니다. 오쇼가 깨달음이란 병이 걸렸다고 한다면 저또한 걸렸습니다. 오쇼가 취했다면 저도 취했죠
병에 걸렸다고 취했다고 하는 자는 오쇼가 실패로 보여지지만 저에겐 성공으로 보여집니다. 오쇼라는 사람으로 인해 실패와 성공을 이렇게 얘기하지만 저의 내면의 무에선 어떠한 선택도 없습니다. 그저 순간 순간 일어난 황금같은 순간이었지요. 그것이 실패하지 않는 성공입니다. 지금 여기의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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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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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바보인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 둘은 다 붓다고
난 중생입니다
스크랩을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선과 색님. ^^
다음부턴 글을 보기좋게 쓰겠습니다. 모바일로 쓰니 이렇게 됬네요.
그 이후 꿈이 어찌 변하던가요?(수면중에)
수면중에 꿈이요?
이 무슨 쓰레기통을 뒤쥐던 개같은 소리인가? 사람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조차도 자랑한다. 깨달음이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900년전에 화두법을 고안해 낸 중국 송나라의 대혜종고 스님은 이런 [깨달음 병]에 대해서 이미 100여가지의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한바 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종고 스님의[서장]을 읽어보면 등에 식은 땀이 날 것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철저한 자기 부정만이 있을 뿐이다. 오쇼 조차도 방망이 수십방을 맞을 것이다. 나는 오쇼의 벽암록 강의를 읽고 오쇼에게 실망하고 방황했던 경험이 있다...오쇼조차도 깨달음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때가 오리라....
[실패하지 않는 성공의 길을 따라...] 어찌 깨달았다는 사람이 실패를 버리고 성공을 선택하는지 모르겠다. 승찬 스님의 신심명에서도 깨달음은 오직 선택하지 않는 것[至道無難 唯렴揀擇]이라는 간절한 설법은 귓등으로 들었는가?
상카르님 저에겐 깨달음이 병이 아닙니다. 마음이 병입니다. 그 마음이 본래 있던 눈을 감추고 있기에 병이었습니다. 깨달음으로 건강을 되찾을땐, 건강 자체가 되지요. 깨달음은 곧 한 인간이 꽃피우는 것과 같은 축복된 경험입니다. 병이 아닙니다.
저도 부정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마음을 부정하지요. 하지만 부정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가능성이 최대로 실현되고 눈을 떳을뜨는 그 자유로움, 날아갈것 같은 시원함, 축복, 등은 긍정적인 것도 사용합니다. 부정과 긍정을 즉흥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요.
싱카르님께서 말씀하신 스님들에 대해선 모르지만 부정의 방법을 잘하는 자는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무묘앙 에오 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쇼의 벽암록을 읽어봤지만 그저 다시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 뿐입니다. 오쇼가 깨달음이란 병이 걸렸다고 한다면 저또한 걸렸습니다. 오쇼가 취했다면 저도 취했죠
병에 걸렸다고 취했다고 하는 자는 오쇼가 실패로 보여지지만 저에겐 성공으로 보여집니다. 오쇼라는 사람으로 인해 실패와 성공을 이렇게 얘기하지만 저의 내면의 무에선 어떠한 선택도 없습니다. 그저 순간 순간 일어난 황금같은 순간이었지요. 그것이 실패하지 않는 성공입니다. 지금 여기의 일어남.
성공만이 있지만 사실은 길은 없습니다. 그저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 걸어갑니다. 상카르님께서 말씀하신 분들의 좋은 책이 있다면 추천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