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버팀목
곧 종착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차권을 종점으로 끊었으니 히차 역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꼭 가야 할 장소도 만나야 할 사람도 정해져 있지 않다. 단지 이 철로의 끝이 포항일 뿐이다. 역무원이 알려준 대로 다시 삼척행 버스를 탔다. 철지난 바다는 비어버린 마음처럼 횅했다. "강원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도경계 표지판을 막 지났을 때 검문소 하나가 나왔다. 버스가 멈추고. 총을 든 근무자가 올라와 승객을 둘러보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근무자는 성큼성큼 내게로 왔다. 신분증을 요구하며 행선지를 물었다. 무심코 강원도라는 대답을 하고선 아차 싶었다. 이미 여기는 강원도가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하차를 요구했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 같았다.
S가 시간을 가지자고 했을 때, 이미 마음이 떠난 것을 느꼈다. 그래, 거역할 수 없는 명령 같은 통보였다. 시간의 여지는 그녀의 마지막 배려일 뿐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했던가. 갑자기 타버린 재처럼 번아웃이 왔다. 음식은 삼켜지지 않았고,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게 마음이 소진되자, 몸은 늦가을 마른 풀잎치럼 시들어 갔다. 몇 개월 만에 몸무게가 20kg이 줄었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우리 강원도는 말이야...' 고향 사랑이 유별난 강원도 삼척 출신 친구 말이 떠올라 무작경 삼척 땅을 밟아 보기로 했다. 하지만 진주역 노선도에 강원도의 어느 곳도 없었다. 역무원에게 기차를 타고 삼척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부산을 거처 포항까지 간 후 버스로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작은 바닷가 마을로 들어서니 검문소에서 알려준 대로 듬성듬성 민박집이 보였다. 가장 어둡고 구석진 집으로 갔다. 폐가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낡은 집이었다. 휴가를 왔다면 절대 머무르고 싶지 않은 집이었지만, 사람을 피해온 내겐 차라리 더 어울렸는지 모른다. 대문을 두드리니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아래위로 흝어보더니 마치 검문소의 누구처럼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꼬치 꼬치 물었다. 늦은 시간에 퀭한 모습으로 혼자 온 것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안내해 준 방은 베개와 이불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외투도 벗지 않은 채 한 시간쯤 엎어져 누워 있었을까, 주인여자가 문을 두드렸다.
"젊은이, 저녁을 아직 먹지 않은 것 같은데, 나와서 같이 먹어요. 몇 개월째 밥은 내게 모래알 같은 상태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 나와서 술이라도 한잔해요.' 술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원래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c체질이었지만. 그때는 술 외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손님이 그리웠던지 주인은 상대가 듣든 말든 혼자 열심히 떠들었다. 혼자 산다는 그녀는 마흔을 갓 넘겼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쉰은 넘어 보였다. 목적 없이 도착한 이곳이 고향인 시끄러운 친구나 말 많은 민박집 주인과는 달리 작고 조용한 곳이었다.
낮이 되니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오! 다행이네, 밤새 잘 잤어?' 다행이라니, 술 한 잔에 죽기라도 했을까. 젊디젊은 청년이 몸만 달랑 온 모습에 걱정이 되었던가 보다. "인근에 괜찮은 절이 있는데, 산책이나 다녀오지.". 술 한 잔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지 말끝이 짧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녀가 알려준 곳으로 길을 나섰다. 산길을 조금 올라 가니 목탁소리가 들렸다. 이런 어지러운 마음으론 부처님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법당은 들어가지 않고 입구 돌계단에 걸터 않았다. 얼마나 넋을 잃고 앉아 있었을까. 주인여자가 올라왔다. 5분 거리를 두 시간이 넘어도 내려오지 않자 찾으러 왔다고 했다. 터백 터벅 뒤따라 내려오는데, 그녀가 말했다. "얼마 전 건너편 집에 자네처럼 혼자 온 손님이 있었어. 젊은 여자였지. 이틀을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아 문을 열어보니 번개탄을 피우고 죽어 있었어. 자네의 행색을 보고 그 사람이 떠올랐어.
넋 나간 듯 헬쑥한 내 모습에서 불안한 마음을 읽었을까. 갑자기 서러운 마음이 북받처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인처럼 고개를 폭 숙이고 뒤따라 내려왔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는 거야. 사람은 배신해도 시간은 배신하지 않지. 그렇게 시간을 믿고 살아야 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직 젊잖아. 시간을 믿어. 힘들 때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리고 마음 잘 통하는 친구부터 하나 사귀라고."
"......."
세상의 모든 아픔은 시간의 문제일까. 민박집을 나서면서 그 답을 알게 될 때 다시 한 번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수십 년이 지난 시간, 그때의 외출이 거짓말처럼 내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살아가면서 부딧히는 상황이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지나고 나면 이 순간도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고, 추억의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김성진 2015년 <에세이문학) 수필. 2016년 <시와사상> 시 등단. 수필집 <그는 이매탈을 닮았다>. 시집 <억울한 봄>, <에스프레소>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