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요트 팀 드레이크 [TEAM DRAKE]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정화의 대항해
스키퍼 추천 0 조회 136 06.12.29 14: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IMAGE 1 =-

-= IMAGE 2 =-

-= IMAGE 3 =-

-= IMAGE 4 =-

<鄭和 제독의 초상화. 키 2.1m의 장신으로 힘이 장사였다.>



鄭和의 大항해 600주년

콜럼버스보다 100년 먼저 세계 최대의 함정과 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까지 원정했던 환관 鄭和의 거대한 성취와 참담한 좌절. 내년이 7차 원정 시작의 600주년이다

● 28년간 7차례 航海로 33개국 방문
● 동서양 文化교류ㆍ中國 영향력 확대
● 明나라의 세계 最强 해군ㆍ造船기술이 그 바탕

呂始東 朝鮮日報 北京特派員 (sdyeo@chosun.com)

中, 600주년인 내년에 대대적 行事계획

지난 세기 말 한 서방 여론조사는 과거 1000년간 인류 역사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동양인으로 鄭和(1371~1433)를 꼽았다. 大정복자 칭기즈칸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거론되는 그는 누구인가.

중국 明나라 인물이었던 鄭和 제독은 후대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다. 심지어 중국인들 사이에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의 업적에 비해 대내외 지명도가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후대의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조직적으로 공적이 묻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鄭和는 1405~1433년까지 28년간 일곱 차례 大항해를 한 환관 출신 장군이다. 그는 수백 척의 함선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도달한, 「기적 같은」 航海기록을 갖고 있다. 그의 위대한 점은 목숨을 건 항해를 통해 동양과 서양, 東아시아와 西아시아의 문화를 이전·전파하고 인류 해양과학 기술 발전의 씨앗을 뿌린 데 있다.

鄭和의 1차 大항해는 1405년에 시작됐으며 내년이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중국인들과 東南亞 화교들은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기념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화교들에겐 鄭和가 자신들의 東南亞 진출 계기를 만들어 주고 뿌리를 내리게 한 직계 祖上이다.

중국 정부는 6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여섯 가지 행사를 선정했다. ▲2005년 7월 北京에서 「大항해 600주년 기념대회」 개최 ▲2005년 7월 北京에서 기념 전람회 개최 ▲CC TV에서 鄭和 大항해 드라마로 제작 ▲2005년 6월 또는 7월에 上海에서 「鄭和 항해 및 국제 해양 박람회」 개최 ▲2003~2005년 매년 서로 다른 주제의 항해 및 해양 지식 경연대회와 강좌, 여름캠프 활동 개최 ▲2003~2005년 각각 上海市와 福建省, 江蘇省에서 「大항해 600주년 기념 학술교류」를 진행하는 것 등이다.

기념활동 주비 영도소조판공실의 姚明德(야오밍더) 주임은 『기념활동을 통해 鄭和의 위대한 업적과 인류 문명에 대한 중요한 공헌을 널리 알리고 불굴의 정신과 애국 헌신하는 정신을 인민들에게 홍보하겠다』고 말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邊方史地(변방사지)연구센터는 鄭和 기념활동의 학술고문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明나라 역사 전문가와 해상 비단길(실크로드) 연구 전문가를 파견해 릴레이 방식으로 탐험대와 공동 원정에 나선다. 연구센터의 聲(리성) 주임은 『이번 활동은 단지 중국인의 탐험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와 과학의 탐구 전통을 이어가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遠征활동을 통해 당대의 역사적 미스터리들을 밝혀 낼 예정이다.

鄭和가 항해를 준비했던 도시인 南京市는 지난해 말 이미 2005년 大항해 600주년을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한 기념활동사무기구를 설립했다. 市는 鄭和 관련 문화유물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鄭和의 역사문화 유적을 보호·개발함과 동시에, 앞으로 2년 내에 龍江 寶船(보선)공장의 유적 공원 등을 조성키로 했다.

龍江은 「鄭和 원정대」의 주력함인 寶船을 건조한 제조창이 있었던 곳이다. 이 밖에 大항해와 관련된 연구서적 출판과 영화ㆍTV 드라마 제작도 진행되고 있다. 南京市는 기념 항해를 통해 鄭和가 들렀던 각국 도시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일련의 기념사업 투자유치 활동을 통해 南京의 국제 지명도를 한 단계 높이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대만 山河(산하)탐험협회도 중국·대만·홍콩·마카오 지역에서 수십 명의 탐험대원을 선발, 내년 7월 鄭和의 大항해 航路를 따라 기념 항해에 나설 계획이다. 이들은 목조 범선 한 척을 건조해 鄭和 제독이 출항한 江蘇省 太倉(타이창)市 瀏河(류허)津에서 출발한다. 근 4000만 위안(약 60억원)이 투입될 이 항해 계획은 출항 후 3년 안에 3만3900해리(지구 적도 둘레의 한 바퀴 반) 이상을 항해하고 도중에 20여 개국 50여 개 항구를 방문한다는 거대한 계획이다. 협회 책임자인 徐海鵬(쉬하이펑)은 『기념 항해를 통해 동방 항해의 1인자인 鄭和의 「평화 호혜」 정신을 기리고 중화민족의 탐험정신과 평화 애호 정신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길이 400m, 폭 160m의 船舶은 세계 최대. 총 200여 척에 2만7800여 명의 거대 船團

鄭和의 大항해가 어떤 항해였기에 이처럼 중화권 전역에서 「鄭和 붐」이 불고 있을까. 鄭和의 원정대는 우선 규모 면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鄭和는 永樂帝 3년(1405) 6월15일 황제의 후원下에 江蘇省 瀏河津을 출발, 1차 항해에 나섰다. 이때 선원과 병사 등 2만7800여 명을 실어 나를 200여 척의 거대 船團이 조직됐다. 1차 항해에는 중고위직 환관 17명, 일반 내시 53명이 관리로서 승선했고 副使(부사) 2명, 官校(관교) 93명, 旗軍(기군) 104명, 주술사 5명, 통역관 2명, 의원 180명이 동승했다.

鄭和 원정대 중 「寶藏號(보장호)」로 불리는 최대 선박은 길이가 400m, 폭이 160m에 달했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남아 있다. 船團 속에는 금화를 실은 함과 순찰선, 20척의 담수 운송선이 포함되기도 했고, 승선자 중에는 기상과 별자리를 살피는 천문학자와 선박수리공, 각 지역 약초를 수집하는 의학자도 끼어 있었다. 심지어 외교 의전을 담당할 관리들로만 배 2척을 가득 채우기도 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舟山(저우산)의 선박 제조창 岑氏船業木船作坊(잠씨선업목선작방)의 岑國和(천궈허) 총경리는 『현재 우리가 만든 중국 최대의 綠眉毛(녹미모: 중국의 전통적인 목조 선박 유형)는 鄭和 원정대의 녹미모에 비해 규모가 3분의 1, 4분의 1밖에 안 된다. 지금도 그 규모의 木船을 만들려면 제작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 고대 범선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녹미모는 중국 동해 浙江省 일대의 전통 선박 형태다.

지난 1월엔 北京 인민대회당(국회의사당격)에 정화의 寶船 모형이 전시됐다. 이 모형에 따라 실제 제작될 보선은 길이 61.2m, 폭 13.8m, 배수량 1170여t 규모다. 이 정도 규모도 현재로서는 중국 최대의 목조 범선이다. 鄭和 원정 기념용으로 제작될 이 선박에는 역사 자료에 근거해 외국 사절 접견실, 무기창, 말과 소 등 가축을 사육하는 헛간 등이 설치되고 내부에 배치될 가구도 모두 明代풍으로 준비된다. 이 선박 한 척 제조를 위해 100여 명의 기술자가 꼬박 1년간 매달려야 한다니 鄭和 함대의 방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콜럼버스 항해 규모는 어린아이 수준

당시 선박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증거물이 1957년 南京의 明나라 보선 제조창인 龍江 선박 제조창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11.07m에 이르는 거대한 키 손잡이였다. 높이가 6.25m로 추산되는 키의 한쪽 손잡이였던 이 유물은 당시 보선의 거대한 규모를 실증하는 증거물로 인정받았다. 중국 전문가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저서 「환태평양의 군주들-보이지 않는 화교 제국」에서 『눈처럼 하얀 鄭和의 원정선 수백 척이 바다를 뒤덮으면 수평선이 안 보일 정도였다』고 함대 규모를 묘사했다.

항해는 매번 약 3만 명의 인원이 200~300척의 배에 분승해 출항했고 항해 기간은 1년 반~2년 정도 소요되는 대장정이었다. 鄭和는 이런 선박들에 비단과 자기, 금·은·동·철 등 화물을 가득 싣고 福建과 廣東省을 지나 베트남, 자카르타(인도네시아), 자바,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수마트라, 실론(스리랑카), 캘커타(인도)를 거쳐 소말리아의 모가디슈까지 西進하면서 모두 33개국을 방문해 중국 문화와 과학기술을 전파했다고 한다. 비단·사향·도자기 등 중국 상품의 시장을 넓히고, 기린과 코끼리·얼룩말·타조·사자 등 동물들과, 안경·후추·진주·용연향 등을 처음으로 중국에 들여오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1492년 新대륙을 발견했을 때 선박 3척에 90여 명의 선원을 이끌고 갔고 가장 큰 선박인 산타마리아號는 길이가 85m에 불과했다. 나머지 2척은 길이가 15m 이하였다. 이에 비해 鄭和의 함대는 규모가 훨씬 방대할 뿐 아니라 설비도 훨씬 선진적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중국의 造船기술은 가히 세계 최고라는 말도 듣는다. 이런 선진 선박 설비는 350년이나 더 지나서야 西方으로 전파됐다.

西洋보다 먼저 大洋으로 나갔으나

鄭和 함대가 이처럼 세계 최고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明나라의 국력이 세계 최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로마제국 시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중국이 줄곧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명 수준이 가장 높았다.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도 많았다. 예컨대 12세기 南宋의 수도 杭州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廣州는 7세기에 이미 20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한 국제도시였다. 외국인 중에는 아랍人, 페르시아人, 말레이시아人, 인도人, 아프리카人, 터키人 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이와 비교할 때 13세기 유럽 최대 도시로 꼽힌 파리는 인구가 10만여 명에 불과했다. 鄭和 시대에는 중국과 인도의 국민총생산이 全세계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1820년 淸代까지만 해도 중국의 국민총생산은 全세계의 29%를 차지했다. 이런 국력에 힘입어 鄭和의 함대는 콜럼버스에 비해 반세기나 일찍 東아프리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鄭和의 함대가 희망봉까지 진출, 바르톨로뮤 디아스보다 60여 년 앞서 희망봉을 발견했고 마젤란보다 한 세기 앞서 세계일주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인도양 항해는 바스코 다가마보다 80년 이상 앞섰다는 기록도 남겼다.

鄭和의 7차례 大항해는 거리로 따지면 7만여 해리로 지구 세 바퀴를 도는 거리다. 鄭和는 이 항해를 통해 西아시아와 東아프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중국의 對外 경제문화교류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각국에 도착할 때마다 鄭和는 중국 황제의 使者 신분으로 현지 통치자들에게 비단과 자기, 금·은 등을 예물로 건네고 복속을 약속받았다.

방콕 해안에 도착했을 때는 수많은 현지인들이 나와 환영했고, 승려들은 부복하며 최고의 예를 표했다고 한다. 스리랑카 콜롬보에 도착했을 때 鄭和는 현지 불교 사원에 보시를 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도 스리랑카 박물관에 남아 있는 이 기념비에는 『금·은과 직물, 비단, 향로, 꽃병, 등불과 촛불을 공양했다』고 기록돼 있다.

6차 항해 때인 永樂帝 19년(1421)에는 16개국 관리들이 南京에 도착하는 등 大항해를 계기로 중국은 국제사회와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이 때문에 일부 아시아와 아프리카 연안 국가들에는 아직도 鄭和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는 鄭和의 아명인 「三寶」라는 이름을 딴 三寶公廟(삼보공묘)가 남아 있으며, 태국에는 三寶廟와 三寶塔이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매년 鄭和가 처음 기항했던 날을 기념해 三寶公廟를 방문하고, 태국의 三寶寺에는 아직도 鄭和를 기리는 향이 타오르고 있다.

鄭和는 귀환 도중 사망

하지만 鄭和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역사 기록은 그의 업적에 비해 간략하기 그지 없다. 雲南省의 昆陽(쿤양: 현재 昆明市 晉寧縣)에서 출생한 鄭和는 韓族이 아닌 廻族(회족: 한족에 동화한 이슬람교도)이었다. 원래 이름은 馬和였으나 大항해의 강력한 후원자인 永樂帝로부터 鄭씨 성을 하사받고 鄭和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그의 37代 조상이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라는 說이 있고 조상이 서역에서 雲南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던 祖父는 元나라에서 전陽侯(전양후)에 봉해졌던 중신이었다. 이슬람 명문 집안에서 출생한 鄭和는 昆明(쿤밍)의 큰 호수인 전池(전지) 주변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수영을 잘했다. 그는 이슬람교와 불교를 함께 신봉했다.

그는 열한 살 때 昆明을 침입한 明나라 군대에 의해 宮刑(궁형: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을 당했다. 이후 포로로 南京에 압송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총명함과 강한 의지로 신체적 결함을 딛고 일어선 그는 永樂帝의 총애를 받아 내시의 총수인 太監 자리에 오른다. 일설에 키가 210cm에 달했다는 그는 힘이 장사였으며 永樂帝를 도와 많은 전공을 세웠다. 「明史」에는 「어릴 때부터 재능과 의지가 있고, 체구와 용모가 크고 언변이 좋고 기민했으며, 공손하고 진중한 성격에 특이한 전공을 많이 세웠다」고 돼 있다.

鄭和는 할아버지(永樂帝)의 일을 높이 평가한 宣德帝의 후원으로 1430년 제7차 항해에 나선다. 62세가 되던 1433년 2만7000여 명의 대원과 함께 7차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인도 캘커타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 후에 시신은 南京 牛首(우서우)山 남쪽 기슭에 매장됐다.

鄭和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永樂帝가 그를 적극 후원하지 않았다면 大원정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永樂帝가 전례 없는 대규모 원정을 지원한 것은 조카 建文帝(明나라 2代 황제)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뒤 종적이 사라진 조카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해석도 있다. 세계를 무대로 한 수색 작업이었다. 「바다를 건너 세상 끝까지 나아가 모든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도록 하라」는 永樂帝의 명령도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鄭和의 大항해는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해상 무역로를 확보하고 실론의 국왕을 볼모로 하는 등 주변국을 복속시키는 등 황제의 권위를 세계에 과시하는 역사적인 업적을 이룬 셈이다. 鄭和의 大원정은 후에 東南亞 지역에 중국인들이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도 받고 있다.

明나라 海軍 해산은 東洋의 쇠락 原因

鄭和는 역사를 만들었지만 역사를 바꾸지는 못했다는 후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1424년 永樂帝의 사망 후 정쟁이 발생, 유교 사상에 젖은 관리들은 1477년 鄭和의 항해기록을 불태우고 환관이 무역업자들의 후견인으로 많은 돈을 만지게 되자 무역금지령까지 내린다. 이어 새로운 황제의 지지下에 한때 3500척의 함정을 보유했던 세계 최강의 중국 해군도 해산의 命을 받게 된다. 1500년에는 민간에서 배를 건조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해 사사로이 배를 건조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으며, 1525년에는 모든 원양 선박을 없애 버렸다. 美 예일大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興亡」이란 저서에서 이것이 中國 문명을 核으로 하는 동양의 쇠락을 가져온 큰 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

鄭和가 大항해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중화제국 때문이었지만 후대에 조명받지 못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개척정신을 잃어버린 오만한 中華사상 때문이었다. 어쨌든 급속히 망각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鄭和의 원정대는 이제 600년이라는 긴 세월의 물살을 헤치고 중국으로 서서히 귀환하고 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