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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묵상글 ( 연중 30주간 수요일. - 올바른 구원의 태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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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신부님 10. 27(월). 강론글 말미에 한주간 강론글 올리지 못한다고 하셔서
아래 신부님의 그간 강론글들을 공유합니다.
- 김 루도비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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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0
연중 30주 수요일-올바른 구원의 태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길을 가다가 여러분도 가끔 경험하셨겠지만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질문하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예수 믿으세요.’라는 대답을 자기들이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왠지 불쾌합니다.
왜 불쾌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불쾌하겠습니까?
그들의 선교 방식이 불쾌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불쾌할 리 없고 선교 방식이 불쾌하고,
선교 방식보다는 선교 태도가 불쾌하며,
선교 태도보다는 구원 태도가 불쾌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의 태도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다가도
다시 보면 그들의 태도는 확신이 아니라 영적 교만이고 적어도 겸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주님을 믿고 있어도 구원에 있어서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있어도 잘 믿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이런 면에서 오늘 어떤 사람은 구원에 대해 겸손하고 조심스럽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냐고 묻지만 많지 않겠지요? 라는 태도이고,
자기의 구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묻는 그런 태도 같습니다.
이런 태도는 자기 구원에 무관심하지 않고 궁금해하니 좋은 태도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자기가 확보한 것인 양 교만하지 않으니 좋은 태도이며,
무엇보다도 어찌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배우려는 자세이기에 좋은 태도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란 어떤 문입니까?
많은 사람이 묵시록의 십사만사천 명을 잘못 이해하여
마치 숫자가 정해진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런 것입니까?
학교 입학 정원처럼 정해진 제한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런 것이 결코 아니지요.
하느님은 천국 입국 정원을 미리 정해놓지 않으셨습니다.
모두가 들어올 수 있기를 바라시고
모두가 들어오도록 사실은 문을 활짝 열고 계십니다.
그러니 좁은 문이란 하느님이 정원을 좁혀서 좁은 문이 아닙니다.
뒤에 보면 들어오지 못할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그러니 좁은 문이란, 정의의 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나쁜 짓 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좁은 문입니다.
저절로 사랑이 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좁은 문이 아니고,
모두가 사랑할 수 있고 모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그렇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
불의하지 않기도 힘들고 원수 사랑하는 것은 더 힘드니
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힘쓰라는 오늘 주님 말씀을 가볍게 듣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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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6
연중 30주 수요일-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어떤 사람이 주님께 구원받을 사람에 대해서 묻습니다.
많은지, 적은지.
이에 주님께서는 좁은 문 얘기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이 좁다는 말씀인데 왜 좁습니까?
주님께서 문을 좁게 만드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까?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이,
구원받는 것은 받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고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는 공평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우리 문제입니다.
줘도 받아들여야지 받는 것이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주셔도 받지 못하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데 왜 받지 않습니까?
그 이치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무엇이건 우리는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구원이라면 그 문이 좁지 않을 텐데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 문이 좁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세상 살 때 주님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였다고 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이 세상 끝 날에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내치십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먹기도 마시기도 한 사람이 우리가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영락없이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매주 또는 매일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의를 저지른다면 그것이 다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먹고 마신 것이 영적인 힘이 되고,
그 힘으로 주님께 들은 말씀 곧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오히려 불의를 저질렀다면 아무리 천주교 신자라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을 끝으로 주님께서 하십니다.
첫째 곧 주님을 알고 지내던 사람이 꼴찌 되고,
꼴찌 곧 주님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 첫째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주님을 알고 지내도 소용없고
주님 말씀대로 사랑해야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은,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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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7.
연중 30주 수요일-부르심이든 구원이든 받아야지 받는 것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받을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고,
독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누가 구원받고 부르심을 받는지 생각을 하니
즉시 받아야지 받는 것이고,
받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것은 제 나름의 깨달음이고 그래서 자주 얘기하는 바인데
하느님께서 구원하시지 않고 부르시지 않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누구나 구원하시고 부르시지만 그 구원과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편지를 보냈는데 수신 거부를 하면
아무리 보내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받는 자는 같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를
부르심받은 자와 동인격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반갑고 그래서 받아들이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의 부르심도 반갑게 받고,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도 간절히 원하고 받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과 함께 있자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하나도 반갑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도 아닙니다.
제가 영적 동반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요즘 성소가 흔들리고
그래서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 이유가 형제들과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그가 형제들과의 갈등 때문에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성소를 잃는 것이고, 성소를 잃는다는 것은 형제들과의 씨름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망각하고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수도원 들어올 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부르심 때문에 들어왔는데 언제부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형제들과 씨름을 하다가
씨름이 싸움이 되고 싸움이 형제들을 떠나게 하는 거였습니다.
들어올 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아서 들어왔는데
나갈 때는 형제들이 싫어서 형제들과 싸우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들을 싫어하고 형제들과 싸우고 떠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형제들과도 잘 지내고
서로 다르지만 형제들과 함께 좋은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그 유명한 합력선合力善 이론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고 그 부르심을 사는 사람은 결코 제 뜻대로 살지
않고 부르신 분의 뜻과 부르신 뜻에 따라 살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일을 형제들과 함께 이루려고 합니다.
이것이 부르심 받고 구원받는 사람의 삶이고,
이것이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제 좋을 대로 또는 제 뜻대로 사는 거라면 구원의 문이 좁지 않지만
제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부르심과 구원을 받는 우리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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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경배 순례자님께서 올리신 아래도 참고하세요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tFb/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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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24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올바른 구원의 태도)
http://www.ofmkorea.org/562958
22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http://www.ofmkorea.org/511528
21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부르심이든 구원이든 받아야지 받는 것)
http://www.ofmkorea.org/435461
19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공동선과 협력선)
http://www.ofmkorea.org/281164
18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모두에게 주시지만 아무나 받지 못하는 구원)
http://www.ofmkorea.org/161509
14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닫히기 전에 어서 좁은 문을)
13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나는 진정 구도자인가?)
12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주님과 먹고 마시기만 하였다.)
11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구원의 문, 좁은 문, 닫힌 문.)
10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술집 문은 넗고 하늘나라 문은 좁다)
08년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사람을 하느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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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좁은 문>의 선택
“구원이나 멸망이냐? 삶은 선택이다!”
“주 하느님,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시편13,4ㄱ)
오늘 복음의 주제인 “구원과 멸망”을 보는 순간 “아, 삶은 선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잘 살아 보라고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르고 좋은 선택을 하여 선물 인생을 살아갈 때 참 행복입니다.
그러니 삶은 물론이요 행복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 진리와 거짓,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믿음과 불신, 빛과 어둠, 좁은문과 넓은문, 기쁨과 슬픔, 평화와 전쟁등 모두가 선택임을 보여 줍니다. 이래서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살 줄 모르면 불행이란 말도 나옵니다.
한번뿐인 유일무이한 선물인생, 누구나의 바램은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주어진 선물인생이요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이고 권리입니다. 그러니 불행한 것은 남탓이 아닌 내 책임이요 내 탓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상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배제가 아니라 주님을 절대적 부동의 중심에 두고 세상을 상대화하여 보자는, 일체의 우상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는 이들은 두말할 것 없이, 구원을, 행복을, 생명을, 진리를, 빛을, 온갖 긍정적인 요소를 선택하여 살 것입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이 아닌 긍정적 낙관적 인생을 살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만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참으로 무수한 좁은 문을 통과해온 인생들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입으로 하는 자랑거리가 아니다. 본보기가 되고 싶다면 거쳐 온 세월로 증명하라.”<다산>
좁은문들을 통과해온 내공의 삶보다 더 좋은 증명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스승 노릇을 좋아하는 병폐가 있다.”<맹자>
정말 좁은문들을 최선을 다해 통과해온 사람들이라면 무르익은 겸손으로 스승노릇을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랑은 바람직하지 못하여 팔불출이란 말이 있는데 저는 세가지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제자 자랑, 하나는 동창자랑, 하나는 신자자랑으로 공통점은 좁은문들을 잘 통과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무려 48년전, 지금은 환갑을 넘은 초등학교 13살, 6학년때 제자들 대표가 보내준 지난밤 메시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올해도 쌀을 보내드리는데요. 순창에서 가는 유기농쌀인데 그쪽 지역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추수시기를 못맞춰 늦어지고 있대요. 아직 논이 마르지 않아 벼도 못베고 있다고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ㅎㅎ 맛있는 쌀이 곧 갑니다. 추운날씨 건강 유의하세요. 저희는 모두 잘있어요.”
50대 넘어 거의 10년동안 매해 수도원에 쌀을 선물하는 제자들입니다.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고맙다! 제자 옥현아, 사랑한다! 제자들 모두 보고 싶고 사랑한다 전해주기 바란다. 이수철선생님은 여전히 수도원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단다”
2.1971년 20대 초반 교대 졸업후 70대 후반 동료교사 친구들이니, 무려 54년 지난후에도 계속되는 우정이 자랑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가을나들이 한 사진과 더불어 공동카페에올린 멋진 글을 본 자랑을 소개합니다.
“친구들과 하늘공원에서 가을날 하루를 보냈습니다. 풍경보다는 사람이고, 단풍보다는 친구들의 얼굴입니다.”
즉시 답신도 올렸습니다.
“안진홍 친구여! 아름다운 사진과 글, 감사합니다. 단풍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풍류를 아는 멋지고 행복한 꽃같은 삶을 살아가는 동창 친구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3.어제 수도원에서는 예수성심자매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두분의 남편도 참석했기에 “예수성심형제자매회"로 명칭을 바꿔야 하겠다며 웃었습니다. 모두가 좁은문들을 잘 통과해온 분들이기에 가을 단풍처럼 품위있는 아름다움에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느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네 대목을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1.“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좁은문들을 잘 통과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새삼 좁은문을 찾아갈 것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제자리가 통과해야 할 좁은문들입니다. 지금까지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며 의롭고 좋게 살아 가시며 하루하루 좁은문들을 잘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2.“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들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청천벽력의 충격적 주님의 반응입니다. 주님과 무관하게 주님뜻대로 말씀을 실천하며 산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 좋을대로 일방적 짝 사랑을 살아온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나는 모른다” 주님의 말씀을 늘 상기하면서 주님뜻대로 의롭고 좋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모두에 활짝 열려 있는 하느님 나라이며, 국적, 인종, 종교, 문화에 무관한, 일체의 기득권이 배제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에 살았던 참으로 진리를 실천하며 의롭고 좋은 삶을 살면서 좁은문들을 통과해온 싱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의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4.“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삶은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입니다. 아무리 좁은 문들 잘 통과했어도 앞으로 잘 통과하리란, 늘 첫째가 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첫째로 가다가 꼴찌가 되지 않도록, 도중하차 하지 않고 끝까지, 마지막 결승선의 테이프를 끊을 때 까지 참으로 겸손히 최선을 다해 좁은문들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성 바오로 사도와 성 베네딕도가 우리 모두 좁은 문들을 잘 통과하도록 참 좋은 위로와 힘을 북돋아 줍니다. 성령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들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된 이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좁은문들의 통과에 성령의 도움은 이처럼 절대적입니다. 결국은 잘 될 것이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좁은 문들을 잘 통과해온 의롭고 좋은 삶을 살아온 이들 성령께서 잘 보완하여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좁은 문들 통과에 참 좋은 힘이 됩니다.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님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 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킬 것이다.”
최선을 다해 좁은문들을 통과해 가며 자발적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갈 때 참 감미롭고 건강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죽음일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에 참 좋은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리이다.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 노래하리이다.”(시편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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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던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을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는 어찌 들으면, 참으로 모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문’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닌 “좁은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부르심은 받지만, 모두가 응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문”이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두 번째 충격>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문’이 열려있으니 당장 들어오라는 다급함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문’은 내일 들어가야 하는 문이 아니라, ‘오늘’ 당장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곧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충격>은 지금과 그때에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과 그분의 눈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 출신이나 가문 혹은 세상의 출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첫째와 꼴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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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매 미사 30분 전 고백성사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외국인들이 찾아와 고백성사를 청하곤 합니다. 그분들은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고백성사만 보고 돌아갑니다. 처음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영어로 고백성사를 듣는 것도 힘들었고, 우리 교우들이 아닌 분들이 길게 줄 서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마치 가족을 위해 차린 잔칫상에 외부인이 와서 음식을 먹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2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부족한 제 영어 실력을 다듬어 주시는 하느님의 배려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준비한 음식을 아무도 먹지 않으면 버릴 수밖에 없지만, 외부인이라도 와서 음식을 나눠 먹는다면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돌아보면 저도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주셨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저는 다른 것을 찾곤 했습니다.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문의 끝은 허무와 후회인데 그걸 알면서도 그 문에서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문제에 자주 나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바로 “Detour – 우회하시오”입니다. 원래는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는 표시입니다. 우회로는 시간이 더 걸리고 불편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야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무시하고 원래 길로 가려 하면 결국 돌아와야 하고, 때론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길목에서 이런 우회로를 경험했습니다. 30년 전,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젊고 자신만만했기에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시골 본당, 교구청, 청소년국, 그리고 안식년까지 다양한 우회로를 걷게 하셨습니다. 이때 떠오르는 말씀이 토마스 머튼의 고백입니다. “내가 걷는 길은 내가 정한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길이다.” 우리는 종종 곧장 가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아가게 하십니다. 돌아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Detour’ 표지판을 보고 불평했습니다. “이 길은 내 시간을 빼앗는 길이야.” 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평생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시골 풍경과 들꽃을 보았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우회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우회로도 그렇습니다. 힘들고 불편한 길 같지만, 그 안에만 담긴 은총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좁은 문”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 재물을 좇는 사람에게 그 문은 너무 답답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좁지 않습니다. 맹인가수 이용복 씨의 노래 어린 시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그리움 속에 살아 있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은 사실 하느님 나라와 닮아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경쟁과 계산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 순수한 마음으로 들어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는 특별한 능력이나 재력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와 사랑, 희생과 나눔, 믿음과 희망이 그 열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단순합니다.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희생과 나눔, 사랑과 믿음의 길입니다. 주님, 우리 인생의 우회로마다 숨겨진 은총을 깨닫게 하시고, 좁은 문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갈 용기를 주십시오. 십자가와 사랑으로 여신 하늘나라의 문에, 우리도 함께 들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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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수님의 조상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28일 화요일- 마흔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우리 조상들과 연결하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의 삶의 본보기가 되는 '신앙의 조상'이신가?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니카라과의 한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평범한 신자들이 예수님의 변모 사건, 특히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해방신학 운동 안에서 활동한 사제이자 시인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그들의 통찰을 다음의 글로 남깁니다:
토마스: "예수님 곁에 나타난 두 명의 죽은 사람들—그들이 아주 기뻐하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며, 단지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어요."
펠리페 (토마스의 아들): "그건 또한 예수님께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 두 사람처럼 되실 예정이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사제인) 저에게 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나타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위대한 해방자였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다시금 사회 계층 속에서 억압받는 상태로 빠졌을 때,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을 옹호한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메시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메시아는 '제2의 모세'로 올 것이라 여겨졌고, 엘리야는 메시아의 도래에 앞서 이 땅에 다시 와서 불의를 고발할 것이라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요한 세례자 안에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 대해 함께 계속 묵상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고, 희망을 품고,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되새깁니다:
윌리엄: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들 또한 영광 안에 있었으며, 그분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있었어요. 제 생각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뜻(곧 자유를 위한 투쟁)을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이 그분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마치 그 두 예언자처럼요.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지 그분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그 같은 복된 결말을 누릴 모든 사람들을 함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믿어요."
올리비아: "제게는 부활이란, 이 생에서도 이미 시작될 수 있는 무엇이라고 느껴져요.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죽을 수 있는 육신을 지니고 계셨지만, 그분은 이미 찬란한 빛 속에 계셨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 빛은 그분이 죽음 이후에 부활하신 모습 그대로였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보았던 거예요—죽음을 앞둔 그분이 이미 삶 속에서 변화되신 모습으로요. 그리고 그들이 본 그 광경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어요. 그들도 그리스도처럼 변화된 존재들이에요. 우리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들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에요."
윌리엄: "제 생각에는 죽음을 이기는 참된 승리는,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선을 행함으로써 미래의 인류—곧 부활할 인류—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봐요. 자신의 죽음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조용하고 잊혀진다 해도, 그 사람은 인류의 의식 속에 살아남게 되죠. 그리고 제자들이 그 짧은 순간에 목격한 것은 바로 그 미래 인류의 영광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2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시간은 축복과 사랑으로 가득 찬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저녁, 우리 모두가 함께 있었어요—퍼즐을 맞추고, 책을 읽고, 저녁을 준비하며, 세상의 흐름을 바라보던 그 순간. 잠깐 동안 저는 우리 앞뒤 세대 모두의 현존을 느꼈습니다.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빚어낸 삶과 사랑, 이야기들이 느껴졌고, 앞으로 우리 삶 또한 후손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영광스러운 일치(oneing)의 일부입니다. 지금도 의심이 들 때면, 그 순간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하느님께서 참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합니다.
—Lucienne S.
References
Ernesto Cardenal, The Gospel in Solentiname, vol. 3, trans. Donald D. Walsh (Orbis Books, 1979), 2–3.
Image Credit: Ravi Sharma,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인류를 하나의 끊임없는 숨결로 인식하는 지혜가 있습니다—세상과 세상 사이의 장막은 얇고 살아 있으며, 우리 조상들의 기억은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를 통해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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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좁은문으로 들어가기
만유의 재판관께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자, 이들이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기리는 거룩한 잔치를 거행합니다. 교회에 자주 드나들며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힘겹게 몇 가지 덕행을 실천하기도 하지만 그 마음속에 영적 열매가 하나도 맺혀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하게 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테니까요. 그분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이제 나는 첫째 성서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야말로 복됩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말씀 이외에 아무것도 듣지 않으시며, 오로지 말씀만을 아시며,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로지 말씀만을 낳으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하늘 아버지는 자신의 말씀을 알아들으시고, 자신을 낳으시고, 자신의 본질 속에서 자신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그분은 말씀을 아시되, 각 사람 안에서 똑같은 본성을 띠는 것으로 아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본성의 풍성한 열매를 아실 뿐 아니라 영원한 말씀 속에서 그것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힘과 욕구를 따르거나 무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의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영원한 말씀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말씀을 아들로 낳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을 끊임없이 낳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본디부터 아버지와 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뿌리 안에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본성 안에도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무 목적 없이 말씀을 발설하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분은 말씀을 꾸밈없이 발설하시되, 말씀이 그분 자신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다는 듯이 발설하지는 않으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아버지는 나의 영, 여러분의 영, 그 말씀을 닮은 각 사람의 영에게 발설하십니다.(494)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마르틴은 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법률학자가 되기로 되어 있었다. 1505년 여름 다시 에르푸르트로 가던 도중 벼락이 그의 곁에 떨어지는 무서운 뇌우의 곤경에서, 즉 7월 2일에 수도원에 들어갈 맹세를 하였다. 너무 서둘러 마음의 준비가 안된 채 그는 7월 17일에 에르푸르트의 엄격한 아우구스티노 엄률 수도회에 입회 신고를 하였다. 거기서 수련을 끝내고, 1507년 4월 3일에 사제품을 받고, 에르푸르트에서 본격적인 신학공부룰 시작하였다! 거기서도 다시 빌의 엄격한 유명론적인 신학이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그는 수도원 시기 동안에 자신을 엄습한 무서운 내적인 싸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 하곤 하였다. 그의 수도회의 사부인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과 예정설에 대한 몰두,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죄의 체험과 오컴주의적 ·유명론적인 철두철미 주의주의적인 신관이, 그를 종교적 ·신학적인 파국의 막다른 곳으로 이끄는 데 함께 작용하였다. 예정에 대한 불안이 그를 엄습하였다. 그는 자신의 배신을 느끼고. 신으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받은 것으로 믿고 깊은 심적인 침울 상태에 빠졌다. 자주 되풀이된 고해성사도. 그밖의 교회의 성사적인 도움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성사에 대해서 본래 그의 유명론적인 기반으로 인하여 올바른 관계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다만 그의 수도회의 장상인 스타우피츠의 위로에서만 위안을 찾았다. 그는 마르틴에게, 과연 자신이 예정되었는가 아닌가를 늘 골똘히 생각하거나 숙고하지 말고, 단순히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속죄 수난을 성부에게 바친 그리스도의 상처를 관조하도록 지도하였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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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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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부님은 결혼했어도 잘 살았을 것 같아요.”
어느 자매님의 말씀에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행복해 보이고, 실제로 잘 살고 계시잖아요. 사람 사는 것이 모두 똑같거든요. 신부님이 지금 잘 살고 있으니까, 결혼했어도 잘 살았을 거예요.”라고 답해주십니다. ‘정말로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 자체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선택 탓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남의 선택만을 부러워하면서 자기 불행의 이유만을 찾고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선택 자체를 바라보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언제든 최선을 다할 것이기에 늘 행복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어떨까요? 자기 선택에 커다란 만족을 갖게 될 것이며, 동시에 행복한 지금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잘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잘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루카 13,23).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오직 경건한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답변하시지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또 몇 명이 구원받는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상징하는 ‘좁은 문’임을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치열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힘써라.”라고 하십니다. 구원에 대한 안일한 태도를 버리라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불의를 일삼는’ 삶을 버리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뜻을 열심히 잘 따르면서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일한 마음으로 지금 삶 자체가 엉망이라면, 하느님 나라에서도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무엇이든 그 값어치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내놓으려고 하는 인생의 분량과 같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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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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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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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9. 05:07조회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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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수요일-지금 '내'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상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선택과 노력은 시작됩니다! by 호명환 posted Oct 29
[출처] 연중 제30주간 수요일-지금 '내'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상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선택과 노력은 시작됩니다! by 호명환 posted Oct 29|작성자 마리아도미니까
https://blog.naver.com/euni3621/224057263672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탐구심과 호기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지적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깊은 관심을 끄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물음입니다. "죽은 후에는 무엇이 일어날까?" "죽음 이후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가?" "하느님께서는 정말 심판하시는 분이신가, 아니면 모든 이에게 천국을 허락하시는 자비의 주님이신가?" 등등....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을 단순한 이론적·철학적 논의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책임과 실천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율법 교사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되물으십니다. 이는 단순히 이웃의 정의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되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구원의 수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선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모든 이가 구원받을까요?"나 "많은 이가 구원받을까요?" 혹은 "적은 이만이 구원받을까요?"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지혜롭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서기 354년부터 430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며 우리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통찰력을 제공해 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언급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최초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초대 교회가 거의 400년 동안 구원의 신비를 탐구하면서도 "몇 명이 구원받았을까?"와 같은 수적 호기심에는 얽매이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rsar)는 교회 전통과 성경적 근거를 깊이 있게 연구한 후 이 주제 혹은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지옥에 사람이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지옥에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지나친 확신이다."라고요. 즉, 구원과 단죄의 신비에 대해 우리는 궁극적인 답을 알 수 없으며, 이 문제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관한 질문에 대해, 우리가 구원을 원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문은 좁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지내라." 하고 말씀하셨다면, 아무도, 혹은 극히 소수만이 그 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값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흔히 가치 없게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진지한 선택과 끊임없는 회심의 삶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냉소주의자란 모든 것의 가격은 알지만, 그 어떤 것의 참된 가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격과 가치를 혼동하며, 값이 매겨지지 않은 것은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날의 거칠고 상업화된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의 대상이 됩니다. 심지어 사랑조차도, 아니 사랑의 모조품마저도....
그 결과, 우리 현실은 참된 사랑, 진리, 선함, 덕과 같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은 오히려 하찮게 여겨지는 현실로 전락하고 만 것은 아닌지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그러나 돈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태 19,24 참조). 그리고 '값이 없다'는 말은 '헐값'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세속적 기준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고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참된 가치는 언제나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한 장의 복사본처럼 손쉽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언어든, 특정 분야든, 그 지식을 그대로 옮겨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서로의 노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기를 꺼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달된 지식이나 경험, 언어는 진정으로 그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단지 기억 속의 낯선 정보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현존도 이와 같습니다. 그분의 은총은 아무도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지만, 그 은총이 "내" 삶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응답과 참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과의 친밀함은 노력과 사랑 안에서 자라나는 관계이며, 단순한 지식의 전달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은총은 공짜로 주어지지만, 그것을 살아내는 데에는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선택과 노력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지금 '내'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상기하는 일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선택이 시작되는 것이고, 이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사실을 의식하고 상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수필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는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붙잡는 순간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 줍니다.
"삶이 힘들 때마다 나는 그 한마디를 되뇌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 말은 나를 살게 했다!"
[출처] 연중 제30주간 수요일-지금 '내'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상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선택과 노력은 시작됩니다! by 호명환 posted Oct 29|작성자 마리아도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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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좁은 문 앞에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좁은 문 앞에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려움보다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은 배제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에 대한 슬픔이다. 구원은 거절당해서 닫히는 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종교적 행위를 수행한다. 예배와 미사, 봉사와 기도, 정의를 말하고 생명을 외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느님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기도는 평안의 도구로, 신앙은 정체성의 장식으로 변하고, 복음은 더 이상 나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내 확신을 덮는 향로의 연기가 되어버렸다.
예수님께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라고 하신 말씀은 세속의 악인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그분은 신앙을 입고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회심 없이 '옳음'의 언어로 타인을 심판하는 종교적 자아의 위선을 꿰뚫어 보신다.
나는 요즘 이 땅이 어두워 보인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조차 선택의 권리 아래 놓이고, 가장 연약한 생명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만삭의 태아까지 낙태할 수 있다는 법안이 논의되는 이 시대에, 나는 좁은 문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다.
좁은 문처럼, 생명은 좁다.
자궁은 우주보다 작지만 그 안에서 온 우주가 탄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는 '선택의 자유'라는 넓은 문을 열수록, 정작 생명이 통과해야 할 가장 좁고 신성한 문—어머니의 몸—은 닫히고 있다. 우리는 모든 문을 열면서 가장 중요한 문을 잠그고 있다.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지만, 세상은 점점 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언어가 '사랑'보다 '논리'로 가득 찰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욱 공허해진다. 아마도 우리는 좁은 문 앞에서 '주님,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분은 조용히 대답하실 것이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하느님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실 때,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태아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를 안다고 말하지만, 정작 생명 그 자체의 신비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법과 권리의 언어로 생명을 다루지만, 생명은 권리 이전에 선물이며, 법 이전에 신비다. 그분은 "나를 안다"라는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세상이 새로워지는가"를 묻고 계신다. 좁은 문은 그분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분의 뜻이 생명으로 태어나는 자리다.
나는 만삭 태아의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반대한다. 이 반대는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 앞에서 무릎 꿇는 신앙인의 본능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한 번이라도 낙태를 고려한 여성의 절망을 내 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내가 생명을 지킨다고 말할 때, 그것은 태어날 생명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이미 태어나 고통받는 어머니의 생명도 포함하는가?
좁은 문은 어쩌면, 이 둘을 함께 품으려는 불가능한 사랑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입장을 넘어서, 생명의 신비 앞에서 떨며 서 있는 자리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념이 아닌 삶의 실재가 될 때, 비로소 그 문은 열릴 것이다. 지금 세상은 넓은 문을 택하려 한다—편안한 합리와 안전한 중립의 문.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언제나 좁다. 그 좁은 문은 생명을 선택하는 양심의 문이며, 정의와 자비가 하나로 만나야 하는 고통의 문이다. 그 문은 작고 낮지만, 그곳을 통과할 때 우리의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예수님은 좁은 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동서남북에서 오는 사람들"을 환대하셨다. 그분의 심장에는 예언자의 불과 목자의 자비가 함께 뛰고 있었다. 그분은 생명을 지키는 일이 단순한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랑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좁은 문은 닫힌 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좁아진 하느님의 자궁이 아닐까. 그 좁아짐은 생명을 내어주는 고통이자, 창조의 진통이다.
그 문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나는 생명의 신비 앞에 진정으로 서 있는가? 나의 신앙은 생명을 낳는 자궁인가, 아니면 생명을 거부하는 돌무덤인가? 좁은 문은 열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편의를 위한 문이 아니라, 우리의 회심을 기다리는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잔칫상은 선택받은 자의 식탁이 아니라, 회심한 자의 눈물로 차려진 식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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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느님과 친한 관계를 넘어서서
또다른 것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불의를 일삼는 사람은
구원과 거리가 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대조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안에는
신앙의 조상들과 모든 예언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조상들은 대표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로
그들은 말로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도 한 사람들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실천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결심을 하지만
그것은 작심삼일에 불과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꾸준히 무엇인가를 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결심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사흘일지라도
시도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흘이 모이고 모이면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좁은 문이라는 표현은
실천의 어려움보다는
계획을 다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시도하려할 때 느끼는 걱정과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또 시도해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
시도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또 시도한다고 계속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작은 시도들이 모이면
큰 결과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에도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다시 해 보는 용기를 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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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서 여러 고을과 마을을 다니시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그분의 가르침을 듣던 한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길이라며 가르쳐주시는 여러가지 것들이 들으면 들을수록 참으로 지키기 어렵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저렇게 어려워서야 대체 누가, 얼마나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보다 현실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먼저인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너무 좁게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챙겨야 할 것도, 신경써야 할 것도 많은데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니, 오히려 자기 자신까지 버리라고 하시니 그런 예수님 말씀이 세상 물정 모르는 참으로 답답한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많은 걸 요구하시는데 그분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라고 묻는 이에게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그 좁은 문을 통과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곳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과 희생을 하지 않아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이를 참된 행복의 길로 부르시지만, 모두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십니다. 우리가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그분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입구'가 되십니다.
그러나 그 입구가 언제까지나 열려있는 건 아닙니다. 종말의 때가 되어 집주인, 즉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시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며 제발 한 번만 문을 좀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아무 소용 없지요. 그러니 구원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할 기회가 생기면 여러 이유와 핑계를 대며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구원의 문을 제 때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즉 종말의 때를 생각하며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영원'을 사는 길,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 집주인에게 애걸복걸하는 이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성찬의 전례 때마다 주님 앞에서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아닌지요? 말씀의 전례 때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 말씀을 더 나아가 그 말씀을 풀이해주는 사제의 강론을 듣는 것도 바로 우리 아닌지요? 그런 큰 은총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무엇을 했는지요? 그런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무엇을 했는지요? 하느님의 백성이자 자녀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해야 할 것들은 하나도 하지 않았으면서, 뒤늦게서야 주님과 맺은 얄팍한 친분을 내세우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건 너무나 염치없는 모습 아닐까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겠습니다. 적당히 대충이 아니라 정말 죽기살기로 주님 말씀과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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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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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좁은 문
복음(루카13,22-30)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구원 받을 사람이 적다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좁은 문이 구원이다. 사람(아담)이 육신의 욕망을 위해 뱁(사탄)의 유혹으로 먹은 그 선악의 법을 깨고 벗어난 진리의 길이 좁은 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하늘의 용서, 생명, 평화,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께 들어가는 것이 좁은 문이다.
자신의 뜻을 부정, 부인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통과할 수 있는 좁은 문이다. 곧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대속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계약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요한10,7-8)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도둑, 강도, 새 계약보다 먼저 온 옛 계약인 율법이다. 인간의 소원, 욕망을 위해 율법을 열심히 지킨 인간들의 의(義)가 모두 도둑이며 강도라 하심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숨, 사랑으로 존재하며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으로 받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양(羊), 그리스도인(人)이라면 주님보다 먼저 온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말을 치워야한다.(히브10,9) *탐욕(예삐뚜미아), 율의 욕망을 위해 희생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것.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길을 좁은 문, 진리로 믿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려는 삶을, 신앙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루가18,8ㄴ)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 자비와 사랑의 주님이 아닌 것 같다. 정의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지만, 곧 말씀은 들었지만 좁은 길인 주님의 뜻, 말씀을 벗어난 넓은 길로 인간들의 뜻, 세상의 것을 위한 말로 먹고 마셨기에 그것이 불의를 일삼는 것으로 정의의 주님께서 모른다 하심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구약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든 예언자들, 그들도 진리를 말하고 살았다는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진리의 주님을 몰라, 실망하는 제자들에게~
(루가24,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구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 세상에서는 십자가의 길을 진리로 믿어 그리스도께 거저 얻는 의(義)가 허황되고 어리석은 꼴찌로 보인다.(1코린1,18참조) 그래서 유다 처럼 ‘내 죄는 내가 책임 진다’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세상 적으로 보면 멋지게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그 멋지게 보이는 죽음이 당신의 대속을 헛되게 하는 큰 죄라고 하신다.
그리고 진리를 깨달은 이들은 주님만을 의지하기에 행위의 열심을 부리지 않는다. 마리아처럼 깨달음을 위해 말씀에 머무르는 신앙을 산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마리아보다 마르타 처럼 열심 한 행위, 의로움이 첫째다(루가10,38-42)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 슈바이쳐 박사 등을 교회 안에서도 본받자’고 권하듯 말이다.
바벨, 카파르나움인 인간들의 공든 탑이 훌륭해 보이고 인간의 열심히 키운, 높고 푸른 나무가 하느님께서 열심히 세우신 십자가 나무보다 멋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리를 진리인 냥 가르치는 것, 멋져 보이지만 구원을 빼앗는 도둑이며 강도다. 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 사흗날에 부활하신 그 진리가, 복음이, 마음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서 사흗날의 대속, 그 진리를 말씀을 하신다.
은총,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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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9. 연중 30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좁지만 통과해야 하는 문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향해, 곧 성부의 뜻에 따라 구원사업을 완성하실 곳을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당신을 죽음에 부칠 예루살렘, 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도읍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호소는 그 강도를 더해 긴박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늦지 않도록 남은 시간만이라도 잘 활용하도록 이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에서는 구원을 주제로 한 논쟁이 자주 펼쳐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리라 강변합니다. 예수님의 화두는 대부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성부의 뜻에 의구심을 피력하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원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일깨우시는 것으로 만족하십니다. ‘좁은 문’이 주는 의미입니다. 교만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 제멋대로 살거나 육체적인 욕구에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영적으로 풍요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 등에게 그 문은 정말 좁을 뿐만 아니라 통과하기 어려운 문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살면서 육체적이며 물질적인 욕구를 자제하거나 멀리하는 사람에게 그 문은 좁기는 하지만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미래에는 별 관심이 없이, 이 세상의 재물을 축적하고 소비하는 데 급급하여 거기에서 안전과 행복을 찾도록 부추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비대해져만 갑니다. 탐욕이나 갈망을 충족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결국 마음 둘레에 또 하나의 지방층을 쌓아놓는 결과를 초래하기 일쑤입니다. 영육간의 건강에 해로운 이 지방층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뚫고 들어설 가능성과 자리가 엷어 보입니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문이 닫혀 더는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하느님 말씀에 친숙한 사람들이기에, 잔칫상에 초대되었음이 분명하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이들은 진심을 다해 살지 않으면서도 율법에 대한 지식이나 준수로 만족하고 있던 사람들이었기에,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는 답변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분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좁은 문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몸집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먼저 초대받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쫓겨나고, 뒤늦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현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하느님은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아드님의 십자가상 희생제물을 통하여 세상과 인류 구원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육적 또는 영적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내려놓는 가운데, 몸을 가볍게 만들어나가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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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92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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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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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김현석 야곱(성체 순례 성지 전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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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아무래도 좁은 문은 육에 끌리는 문이 아니라, 영에 인도되는 문이 아닐까요?
좁은 문은 우리 인간의 의지나 욕심에 이끌리는 문이 아니라, 성령과 주님의 뜻에 따르는 문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는 수많은 문들이 오라고 손짓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멸망에 이르는 죽음의 문들이 보이는 특징은 화려함이요, 휘황찬란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그럴듯 해보이고, 있어보입니다. 요란스럽고 재미있어 보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다보면, 이미 깊은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 되돌아 나올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늘 깨어 기도하면서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어떤 문이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인가? 어떤 문이 우리를 심연을 알수 없는 깊은 죽음의 수렁 속으로 빠트리는 문인가?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을 목격한 이후 느베르 애덕 수녀회에 입회하셨으며, 평생토록 침묵과 기도, 희생과 봉사 속에 살아가신 성녀 벨라뎃다 수녀님의 감사기도를 묵상하면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제가 성모님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있다고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서원식 후 애덕회 수녀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저를 귀여운 딸로서 안아주신 대신, 마리 벨라뎃다 수녀님이라고 불렀을 때, 마음이 아팠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셉피나 원장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물론 우리 역시 감사 노트도 마련하고, 감사꺼리들을 찾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기도는 아직도 갈길이 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나 축복에 감사합니다. 건강과 성공에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할수 있는 감사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벨라뎃다 수녀님의 감사기도는 감사기도의 모델이요, 최종적인 지향점입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내동냉이 쳐졌을 때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에 대해, 이제 남은 것은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것뿐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이런저런 원치 않는 병고나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렸다할지라도, 이제 조만간 주님 나라로 건너가, 그분의 얼굴을 뵙게될 희망을 지녔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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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행하는 한 가지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많은 처녀들이 옥수수 밭에 한 고랑씩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씩을 따는 일인데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를 딴 처녀가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한번 지나친 것은 다시 돌아 볼 수도 없고 다시 돌아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 하나만을 따와야 합니다.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딸 수도 없습니다. 기이한 일은 제일 좋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뒤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옷 하나를 고를 때도 백화점 내의 대부분의 옷가게를 한 번은 훑어보고 보아두었던 것을 다시 찾아갑니다. 이런 능력이 있어야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다 훑어보신 다음에 괜찮게 보신 사람들을 뽑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주장이 칼뱅의 예정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천당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을 뽑아놓고 지옥 갈 사람들은 잘 자라도 죽이고 천당 갈 사람들은 못 자라도 결국엔 살린다는 주장입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앞뒤 안 가리시고 시간 속에 한정되어 미리 인간의 운명을 정하셔야 하는
약한 존재이실까요?
오늘 독서에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예정설은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그 은총을 내려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미리 뽑으셨다는 말을 ‘칭의’라 하고, 그래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화’,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을 ‘성화’라 말합니다.
이는 가톨릭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가톨릭교리는 의화가 칭의보다 앞선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며 위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예정설은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한 분으로 만드는 잘못된 가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짓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뽑아 지옥에 보내셨으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악해도 천국으로 보내시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지옥에 가게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의 본성을 예정설로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주신다는 순서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심이란 하느님께서 시간과 상관없이 한 번 훑어볼 능력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세상 시작 전부터 아셨습니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구원될 이들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사제로 살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미리 결정하시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것을 아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구원을 위해 미리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리 뽑힌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어떤 면을 보고 미리 뽑으시고 은총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말합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이웃사랑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 성욕이나 식욕에 대한 욕구, 높아짐이나 명예에 대한 욕구를 거스르는 삶이 좁은 문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마치 강 위에 떠 있는 배처럼 그 물살을 거스르지 않으면 저절로 흘러서 지옥의 폭포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거스를 줄 아는 사람을 미리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미리 뽑으신 이들을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리 결정하셔서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젓고 싶어 하는 사람을 미리 아셔서 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지가 먼저냐, 인간의 의지가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예정설은 하느님의 의지대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이고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시고 주님께서 결정해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은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뽑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뽑히지 않아서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뽑히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자신을 거스르려는 의지, 그 의지로 하루하루 자신의 욕망과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이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반면 자아와 타협하라든지, 자아를 찾고 실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미리 뽑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도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 자와의 욕구에 거슬러 좁은 문인 십자가의 영광으로 향할 때 주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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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매 미사 30분 전 고백성사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외국인들이 찾아와 고백성사를 청하곤 합니다. 그분들은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고백성사만 보고 돌아갑니다. 처음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영어로 고백성사를 듣는 것도 힘들었고, 우리 교우들이 아닌 분들이 길게 줄 서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마치 가족을 위해 차린 잔칫상에 외부인이 와서 음식을 먹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2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부족한 제 영어 실력을 다듬어 주시는 하느님의 배려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준비한 음식을 아무도 먹지 않으면 버릴 수밖에 없지만, 외부인이라도 와서 음식을 나눠 먹는다면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돌아보면 저도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주셨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저는 다른 것을 찾곤 했습니다.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문의 끝은 허무와 후회인데 그걸 알면서도 그 문에서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문제에 자주 나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바로 “Detour – 우회하시오”입니다. 원래는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는 표시입니다. 우회로는 시간이 더 걸리고 불편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야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무시하고 원래 길로 가려 하면 결국 돌아와야 하고, 때론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길목에서 이런 우회로를 경험했습니다. 30년 전,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젊고 자신만만했기에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시골 본당, 교구청, 청소년국, 그리고 안식년까지 다양한 우회로를 걷게 하셨습니다. 이때 떠오르는 말씀이 토마스 머튼의 고백입니다. “내가 걷는 길은 내가 정한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길이다.” 우리는 종종 곧장 가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아가게 하십니다. 돌아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Detour’ 표지판을 보고 불평했습니다. “이 길은 내 시간을 빼앗는 길이야.” 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평생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시골 풍경과 들꽃을 보았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우회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우회로도 그렇습니다. 힘들고 불편한 길 같지만, 그 안에만 담긴 은총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좁은 문”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 재물을 좇는 사람에게 그 문은 너무 답답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좁지 않습니다. 맹인가수 이용복 씨의 노래 어린 시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그리움 속에 살아 있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은 사실 하느님 나라와 닮아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경쟁과 계산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 순수한 마음으로 들어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는 특별한 능력이나 재력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와 사랑, 희생과 나눔, 믿음과 희망이 그 열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단순합니다.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희생과 나눔, 사랑과 믿음의 길입니다. 주님, 우리 인생의 우회로마다 숨겨진 은총을 깨닫게 하시고, 좁은 문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갈 용기를 주십시오. 십자가와 사랑으로 여신 하늘나라의 문에, 우리도 함께 들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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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구원의 문은 왜 좁을까요? 널찍하게 만들면 될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구원의 길을 좁게 만드셨을까요? 정말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좁게 만드신 것일까요?
우리는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어려움과 고통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느끼다 보면 모든 것에서 떠나고 싶어집니다.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 때로는 하느님께 불평만 합니다.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지,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슬픔이 온몸을 짓누르고, 어려움만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면서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낼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어려움이 지금 당장은 슬픔과 한탄으로 다가오지만, 결국에는 희망과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을 점점 더 작고 들어가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곧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면서, 좋아하기보다는 싫어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보다는 모른 체하면서, 구원의 문에서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그 문을 좁아지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구원의 문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더 좁히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넓히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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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22-30: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이 질문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과연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에 대한 인간적인 염려를 담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수를 세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가?’에 초점을 맞추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말씀하신다. 구원은 넓은 길을 편하게 걸어가듯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좁고 힘든 길을 끝까지 걸어야 얻는 은총임을 강조하신다.
많은 이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항변하지만, 주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25.27절) 단호히 말씀하신다. 단순히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의 열매,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불의를 일삼았다.”(13, 27)라는 말은 단순히 큰 죄를 지은 경우만을 뜻하지 않는다. 신앙인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작은 불의와 안일함에 안주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잔칫상에서 쫓겨나고, 오히려 온 세상 사방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모여들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입술로만 고백하고 삶으로 증언하지 않는 자들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는 두려운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설교집 147,2)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덧붙인다: “좁은 문은 고통스럽고 험난하지만, 그 길 끝에는 영광이 있다. 넓은 길은 달콤하고 쉬워 보이나, 결국 파멸로 이끈다.”(마태오 복음 강해 23,1) 교부들의 가르침처럼, 구원은 단순히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 변화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결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을 선택하며, 하느님의 뜻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 길만이 주님께서 “나는 너를 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길이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초대된 우리는 단순히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삶이 필요하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각자는 다시금 좁은 문을 향한 걸음을 결심해야 하겠다.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때,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기억하시며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불러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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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정의와 불의>
루카 13,22-30 (구원과 멸망)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정의와 불의>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당신을 먹고 마셨으니
당신처럼 먹힘이
정의요
당신을 먹고 마셨으나
당신처럼 먹히지 않음이
불의겠지요
당신이 믿으셨으니
당신처럼 믿음이
정의요
당신은 믿으셨으나
당신처럼 믿지 않음이
불의겠지요
당신이 희망하셨으니
당신처럼 희망함이
정의요
당신은 희망하셨으나
당신처럼 희망하지 않음이
불의겠지요
당신이 사랑하셨으니
당신처럼 사랑함이
정의요
당신은 사랑하셨으나
당신처럼 사랑하지 않음이
불의겠지요
당신이 살리셨으니
당신처럼 살림이
정의요
당신은 살리셨으나
당신처럼 살리지 않음이
불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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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좁은 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에서 '좁은 문'은 사람들 쪽에서 좁다고 생각하는 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가기 싫어하는 문입니다. 하느님 쪽에서 볼 때에는 활짝 열려 있는 넓은 문입니다.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선, 사랑, 극기, 절제, 희생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실천은 항상 사람들의 인간적인(세속적인) 욕망과 반대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좁은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좁은 문이 아닌데, 사람들이 '힘들다', '어렵다', '싫다' 라고 생각하면서 좁은 문이라고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것을 기뻐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에게는 그 나라의 문은 쉽고 편하고 좋아하는 문, 즉 '넓은 문'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또 육체적으로는 쉽고 편한 문이 아닌데, 영혼과 마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몸이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불편한 것이고, 몸이 불편해도 마음이 편안하면 편안한 것입니다. 성덕을 쌓는 영적 생활과 욕망대로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 가운데 어떤 쪽을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가? 지금 이 말은 각자 마음대로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몸의 쾌락이 아니라 영혼의 평화를 따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너희는 어렵고 힘들고 좁은 문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쉽고 편하고 넓은 문만 찾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또는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넓은 문이든지 좁은 문이든지 간에 너희는 올바른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그 나라의 문이 아닌 다른 문만 찾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는 말씀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라는 우리나라의 옛 격언과 비슷합니다. 문이 넓든지 좁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데, 어떻든 좁고 힘들다고 해도 들어가야 하는 문이라면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재미있고, 즐겁고, 쉽고, 편안해도 들어가면 안 되는 문이라면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좁은 문'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재미' 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으로는 재미없는 생활입니다. 그래도 구원으로 가는 문입니다. 욕망대로, 쾌락대로 사는 생활은 재미있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멸망으로 가는 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성당에 다니면서도 '재미'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미사도 재미없고, 강론도 재미없고, 성가도 재미없고, 기도도 재미없고, 사람들도 재미없다고 불평합니다.
영적인 '기쁨'은 안 찾고 속된 '재미'만 찾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신앙생활은 재미없는 고역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 나라는 '더 바랄 것이 없는' 나라, 누구든지 기뻐하게 되는 나라, 무한히 황홀하고 행복한 나라라고 막연하게 상상할 뿐입니다.
하여간에 그 나라는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재미와 쾌락(향락) 같은 것은 없는 나라,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 모든 점에서 하느님 나라와 반대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곳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재미와 쾌락(향락)만 추구하는 사람들만 있는 곳, 그러나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곳,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싸우기만 하는 곳, 그래서 참 기쁨도 행복도 평화도 없는 곳.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사람의 팔 길이보다 훨씬 더 긴 젓가락으로 서로 먹여주면서 모두가 함께 배불리 먹는 곳은 천국, 전부 다 자기 혼자서만 먹으려고 애를 쓰다가 아무도 못 먹고 모두가 다 굶주리게 되는 곳은 지옥."
처음에는 천국에서 사는 것 같았던 부부의 모습이 한순간에 지옥에서 사는 것 같은 모습으로 바뀌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든 간에 '나'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지옥이 되고, '너'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너'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좁은 문'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선택하는 곳이고, 우리가 만드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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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힘써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는 유명한 매장 패션밸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찬가지인데 규모는 훨씬 큽니다. 한국은 땅이 귀한 까닭에 위로 치솟지만, 미국은 땅이 넓은 탓인지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안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층빌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매장이 넓습니다. 동행한 분이 명품코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는데 아주 비싸다고 하시며 한번 구경하시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석인데 어디서 보석을 찾습니까?” 했더니 “신부님은 왕자 병”이랍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사력을 다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애써 노력하듯이 우리도 구원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루카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루카 8,21참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요한사도는“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24,13)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영적인 갈망으로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문은 좁지만 들어가면 있을 곳이 많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2)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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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은지에 관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우리말 ‘힘쓰다’로 번역되는 이 낱말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투쟁하다’라는 뜻으로, 훨씬 강한 어감을 지닙니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며 적당히 노력하는 태도는 우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닫힌 문을 보게 하리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닫힌 문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은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주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자기 진술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 머문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에 간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자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눈과 귀가 조금씩 주님께 향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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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은 결혼했어도 잘 살았을 것 같아요.”
어느 자매님의 말씀에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행복해 보이고, 실제로 잘 살고 계시잖아요. 사람 사는 것이 모두 똑같거든요. 신부님이 지금 잘 살고 있으니까, 결혼했어도 잘 살았을 거예요.”라고 답해주십니다. ‘정말로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 자체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선택 탓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남의 선택만을 부러워하면서 자기 불행의 이유만을 찾고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선택 자체를 바라보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언제든 최선을 다할 것이기에 늘 행복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어떨까요? 자기 선택에 커다란 만족을 갖게 될 것이며, 동시에 행복한 지금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잘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잘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루카 13,23).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오직 경건한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답변하시지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또 몇 명이 구원받는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상징하는 ‘좁은 문’임을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치열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힘써라.”라고 하십니다. 구원에 대한 안일한 태도를 버리라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불의를 일삼는’ 삶을 버리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뜻을 열심히 잘 따르면서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일한 마음으로 지금 삶 자체가 엉망이라면, 하느님 나라에서도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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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던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을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는 어찌 들으면 참으로 모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문’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닌 '좁은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부르심은 받지만, 모두가 응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문'이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두 번째 충격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문’이 열려 있으니 당장 들어오라는 다급함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문’은 내일 들어가야 하는 문이 아니라, ‘오늘’ 당장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곧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충격은 지금과 그때에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과 그분의 눈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 출신이나 가문 혹은 세상의 출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첫째와 꼴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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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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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30)
넓은 문은 권력이 있거나 명예가 있거나 부자들이 다니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다니는 문입니다. 소수의 권력자들을 위해서 넓은 문은 만들어졌고, 다수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좁은 문이 만들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넓은 문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좁은 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힘보다는 연약함을, 소유보다는 비움, 그리고 명예보다는 보잘것없음을 선택합니다.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찾아 물처럼 흐르는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제된 오감과 오욕의 좁은 문을 지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오감과 오욕을 남용하는 삶은 넓은 문이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좁은 문입니다.
또한 좁은 문은 우리가 거부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불완전한 인간성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성이 가지는 가난함과 연약함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성을 수용하여 가난함과 연약함에 숨어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넓은 문은 불완전한 인간성을 거부하고 완전하게 되고자 하는 유혹이요 가난함보다는 부유함을, 연약함보다는 강한 힘을, 겸손보다는 명예를 찾는 마음입니다. 넓은 문은 거칠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어리석음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오감과 오욕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문에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좁은 문을 들어가는 현실의 고통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편리함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의 유혹은 좁은 문의 초대보다 늘 더 크게 울립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그리스도인은 오감의 즐거움을 수용하되 탐닉하지 않으며, 즐거움 너머에 있는 진리의 빛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수도생활을 통하여 순명과 가난과 독신의 복음 3 덕이라는 좁은 문으로 가는 여정에서 나약한 우리를 바오로 사도는 1 독서에서 이렇게 격려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서 8,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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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르심이든 구원이든 받아야지 받는 것>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받을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고, 독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누가 구원받고 부르심을 받는지 생각을 하니 즉시 받아야지 받는 것이고, 받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것은 제 나름의 깨달음이고 그래서 자주 얘기하는 바인데 하느님께서 구원하시지 않고 부르시지 않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누구나 구원하시고 부르시지만 그 구원과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편지를 보냈는데 수신 거부를 하면 아무리 보내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받는 자는 같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를 부르심받은 자와 동인격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반갑고 그래서 받아들이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의 부르심도 반갑게 받고,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도 간절히 원하고 받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과 함께 있자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하나도 반갑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도 아닙니다.
제가 영적 동반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요즘 성소가 흔들리고 그래서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 이유가 형제들과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그는 형제들과의 갈등 때문에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성소를 잃는 것이고, 성소를 잃는다는 것은 형제들과의 씨름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망각하고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수도원 들어올 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부르심 때문에 들어왔는데 언제부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형제들과 씨름을 하다가 씨름이 싸움이 되고 싸움이 형제들을 떠나게 하는 거였습니다.
들어올 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아서 들어왔는데 나갈 때는 형제들이 싫어서 형제들과 싸우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들을 싫어하고 형제들과 싸우고 떠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형제들과도 잘 지내고 서로 다르지만 형제들과 함께 좋은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그 유명한 합력선合力善 이론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고 그 부르심을 사는 사람은 결코 제 뜻대로 살지 않고 부르신 분의 뜻과 부르신 뜻에 따라 살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일을 형제들과 함께 이루려고 합니다.
이것이 부르심 받고 구원받는 사람의 삶이고, 이것이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제 좋을 대로 또는 제 뜻대로 사는 거라면 구원의 문이 좁지 않지만 제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부르심과 구원을 받는 우리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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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13,29)
<나와 너의 구원을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루카13,22-30)은 '구원과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13,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13,24)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 오늘 복음이 매우 슬픈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 사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니, 믿는 이들에게 참으로 무겁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이 먼저, '세례성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가 아니고, 성직자와 수도자 등 교회의 신분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가 아니다.' 라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 라는 예수님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 곧 '언제나 지금(오늘) 첫째가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두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고,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주님, 이태원참사로 희생된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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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내려놓음과
사랑 속에
존재하는
좁은 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서는
좁은 문을 결코
통과할 수 없습니다.
좁은 문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상징합니다.
내려놓아야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은
사랑으로
넓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문입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새로운 삶의
전환입니다.
겸손과 사랑으로
열리는 문입니다.
넓은 문은
편안하지만
참된 자기를
잃게 합니다.
우리를 욕심과
두려움과
교만에 묶어놓는
넓은 문입니다.
작은 길과
좁은 문을
선택할 때
우리는
참된 복음의
기쁨을 만납니다.
내려놓음을 통해
열리는 은총의
새로운 문입니다.
내려놓음과
믿음으로
좁은 문을
통과할 때,
우리는
참된 자유와
생명을 만납니다.
세상의 넓은 길에
흔들리거나
빠지지 말고
사랑과 겸손으로
좁은 문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좁은 문은
우리를
겸손과 사랑으로
새롭게 빚어 주는
은총의
새로운 문입니다.
그 문으로
기쁘게
들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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