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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심
요 20:1-10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본문은 예수를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 20:1-10 / [부활하시다;마28:1-10,막16:1-8,눅24:1-12] 안식일 다음날 새벽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2) 마리아가 급히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말하였다. `누가 주님의 시체를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주님을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3-4)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갔다. 베드로보다 걸음이 빠른 다른 제자가 먼저 그곳에 닿았다. 5) 그는 몸을 굽히고 고운 베만 놓여 있는 것을 들여다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곧 뒤따라 달려온 시몬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가보니 고운 베가 놓여 있었고 7)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잘 개켜져 그 옆에 놓여 있었다. 8) 그제서야 다른 제자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보고 믿었다. 9) 그때까지도 그들은 그분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한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0) 두 제자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빈 무덤(1-7)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간 제자들은 몇 명이었습니까?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만 무덤에 찾아갔는데, 마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갑니다. 즉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아무도 믿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와 보니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지고,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1), 놀란 마리아는 베드로에게로 달려갑니다. 2절을 보면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은 ‘누가 무덤에서 시신을 훔쳐 갔구나?’라고 생각이었지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보여준 모습은 예수에 대한 확고한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고, 예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도 주님을 사랑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요한)가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요한)가 먼저 도착했습니다(4). 도착은 먼저 했지만 무덤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할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며 예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만 언뜻 보았습니다(5). 곧 이어 도착한 베드로는 바로 무덤에 들어가 세마포가 놓여있는 것과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다른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음을 확인했습니다(6).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한 제자들(8-10) 베드로가 예수의 무덤에 먼저 뛰어 들어갔고, 다른 제자도 따라 들어와 빈 무덤 안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제서야 다른 제자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8). 그리고 두 사람은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알지 못했기 때문에(9)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 모두가 부활에 대해서 생각조차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 입니다. 부활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만 믿기 힘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 조차 부활은 믿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왜 이렇게 부활은 믿기 어려운 주제일까요? 우리 모두는 죽음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기 때문입니다.
적용: 죽음의 힘은 강력해서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예수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에게는 죽음이 힘을 잃고, 무력합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에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으십니까?
평소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작은 도시에 있는 한 도자기 전시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탄하던 조지 왕은 두 개의 꽃병만 특별하게 전시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똑같은 꽃병이었지만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넘치는데 반해 다른 하나는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조지 왕이 관리인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같은 듯 같지 않은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둔 것이오?” 그러자 관리인이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다른 하나는 구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아서 고난과 시련은 우리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며 무엇보다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 설 교 >
왜 이런 영광을 얻었는가?
요 20:1-15 / 김철한 목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40일간 머무셨다. 행1:3을 보면 40일간 사도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고 또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주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여인이 되었을까? 왜 이런 영광을 얻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요한복음 20장을 읽을 때 답이 나온다.
1. 특별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20:1)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귀신에게서 풀려남을 받고 난 후 12제자와 함께 전도 여행을 했던 여인이다. 눅8:1~3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자들과 더불어 자기들의 소유로 제자 그룹을 섬기는 헌신의 여인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찍이 주님을 구원자로 모셨다. 주님의 권세로 인해 자유한 여인이 된 마리아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주님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하였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 삶의 주인은 주님이셨다. 그런데 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주님을 찾으려는 갈망이 있었다. 사람들이 시체라고 말하고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모욕하는 말을 하던 마리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사랑의 주님을 만나봐야 한다는 갈망만이 있었다. 누구든지 갈망해야 주님을 만난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간절’이란 말은 ‘새벽’이란 말이다. 새벽에 찾는 자가 만난다는 말이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의 갈망을 보라. 정말 간절하다.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왔다. 새벽이다. 동 트는 시간 전 어두움이 있는 3~6시에 무덤에 달려왔다. 새벽에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갈망의 표다. 갈망이 없는 사람은 늦잠을 잔다. 갈망이 없는 사람은 새벽을 깨울 수 없다. 영적으로 목표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다. 어두운 아침 시간에 움직이는 마리아의 갈망, 참으로 주님을 향한 열정 중의 열정이다.
2. 특별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20:2)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모신 무덤에 와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본다. 마리아는 12제자들과 교분이 있었다. 돌문이 열린 것을 보고 식구 같은 제자들을 부르러 간다. 요20:2을 보면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까지 왔다가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는가? 주님을 찾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그 주님의 시신을 찾는 일에 남자 제자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모른다. 다만 없어져 버린 주님의 거룩한 몸, 찢겨지고 상한 그 몸을 찾기 위해 어둔 새벽 아침에 달려간 것이다. 이는 참으로 특별한 헌신이다. 예부터 정승의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문상을 와도, 정승이 죽으면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시신을 위해 누가 헌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마리아에겐 주님은 시신이 아니었다. 주님이 그저 굳어버려 있는 피투성이 시체가 아니었다. 마리아에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었다. 주님이 죽으셨어도 외면하고 버려둘 수 없는 주님이셨다. 모든 사람들이 다 시체라고 할지라도 마리아에겐 삶을 변화시킨 해방자였다. 귀신을 쫓아내주신 권세자였다.
요20:13을 보라. 주님을 찾는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말하길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할 때 주님을 “내 주님”이라고 호칭하였다. “내 주님”이란 말은 주님이 내 삶의 전부요, 의미요, 목적이라는 가치와 목표가 묻어난다. 그러므로 그 주님을 찾아 달리는 발은 특별한 헌신이다. 헌신은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하는 것이다. 주어진 순간에, 주어진 매일 매일의 이해 관계를 뛰어넘어 희생하는 것이다. 여기 막달라 마리아가 시간을 드리고 있다. 마음을 드리고 있다. 몸을 드리고 있다. 내 주님을 찾아 뜀박질을 하며 헌신하고 있다. 헌신해도 좋은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내 주님에게 헌신하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주님 만나기 어렵다. 신앙이 성장하기 어렵다. 어느 부서에서든지 어떤 일이든지 내 주님을 향해 뛰어라. 달려라. 땀을 흘려라. 헌신하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다. 우리도 헌신할 때 신앙의 새로운 계기가 주어진다.
3. 특별한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요20:13)
요20:13에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묻는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때문에 울었다. 주님을 찾지 못하는 빈 마음 때문에 울었다. 요20:11上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요20:11中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요20:15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물으실 때도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하셨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하였다.
주님을 모셔가기 위해, 숨도 끊어지고 온기도 없고 굳어져 있는 몸둥아리 시신을 모셔가지 못해서 우는 눈물! 막달라 마리아는 연민의 눈물을 흘렸다. 아니 그녀의 눈물은 두려움에서 오는 눈물일 수도 있다. 아니 사랑의 표현마저도 드릴 수 없는 외로움의 눈물일 수도 있다. 아니 시신마저도 찾지 못하는 쓸쓸함의 눈물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녀의 눈물은 그의 절망을, 그의 마음에 조여오는 고통을, 내리누르는 슬픔을 그나마 이기게 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려진 주님을 향한 빈 마음 때문에 울지 못한다면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헌신이겠는가? 무슨 갈망이겠는가?
소통을 얘기하는 김창옥 교수, 그는 알지도 못하는 하영조 목사의 사명 기사를 읽고 울었다고 한다. 비행기 안에서 하 목사의 기사를 읽고 울었다고 한다. 하물며 내가 섬기는 교회 위해 눈물이 담겨지지 못한다면 사람인 척, 헌신인 척, 갈망인 척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을 사랑해서 울었는가? 주님을 찾는다고 울었는가? 주님을 찾지 못하는 외로움 때문에 울었는가? 다시 귀신에 사로잡힐까봐 두려워서 울었는가? 아니 주님의 일을 더 잘하지 못해서 울었는가? 눈물로 울지 못하는 기도, 눈물로 울지 못하는 전도, 눈물로 울지 못하는 나눔, 그것은 외식이기 쉽다. 주님은 눈물이 있는 곳에 나타나신다.
4. 특별한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20:10)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찾았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무덤에 두 제자를 모셔왔다. 분명 있어야 할 주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런데 그 모셔 온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무덤에 들어가 머리를 쌌던 수건과 세마포를 보고 집으로 가버렸다. 요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무덤은 다시 고요한 정적으로 돌아오고 그 빈 무덤 밖에 마리아가 혼자 남아 있게 되었다. 마리아는 울었다. 여하튼 울면서 무덤을 기웃거렸다. 여러 가지 울음의 이유를 추측해 보면서 두려워서 울었다 하더라도 여인이 무덤에 홀로 와서 있다는 것은 용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두려움의 장소 안에 갇혀 있더라도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 사랑이다. 아니 죽음보다도 더 큰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있으면 두려워도 그곳을 피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불과 물의 환란이 기다려도 피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주님을 만나고 찾는데 두려움의 장소, 두려움의 시간, 두려움의 사건 따위가 가로막을 수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용기,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용기로 새벽 공기를 갈랐다. 무덤으로 갔고 무덤 밖에 서 있었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천사를 만나고 주님을 만났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용기를 가질 때 동산지기로 알았던 예수님이 부활의 주님으로 만나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다. 게바도, 야고보도, 바울도 만났다. 500여 형제들도 만났다. 그런데 부활하신 그 첫 새벽에 부활의 주님을 첫 번째로 목격한 이는 막다랄 마리아였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부활의 증인으로 세워졌다. 여자가 사건의 증인으로 서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는 유대교 문화이지만 마리아는 부활을 전하는 첫 번째 증인으로 구별되었다.
말씀을 묵상해 보니 주님의 나타나심이 옳다. 뜨거운 가슴이 없는 사람, 땀 흘리는 헌신이 없는 사람, 마음을 드리는 눈물이 없는 사람, 용기가 없어 무력하게 요행수를 바라는 사람, 그가 과연 주님이 찾아오실 때 분간할 수 있을까? 갈망, 헌신, 눈물, 용기! 막달라 마리아의 아침 행보 속에서 찾는 이 4가지가 우리 가슴에도 흘러야 한다.
주님을 만난다. 살아계신 주님이 나타나신다. 주님을 만나서 사명을 알면 그때부터 증언하는 성도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세마포를 벗고 부활하심
임진남 목사
이번 주 30일에 부산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인 WCC총회가 열리는 것 때문에 우리 교단이나 보수주의 교단들에서는 그 집회를 반대하는 성명서와 대규모 항의시위를 계획중이라고 합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종교들에 대해서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3일 만에 육체의 부활을 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기독교에서만 만들어낸 허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종교가 거짓이고 허구인데 기독교의 교리들도 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사상이기에 단지 서로간의 평화와 질서가 종교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종교가 부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들의 종교가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시고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마지막 심판에 때가 임할 때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믿지 아니한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도 초대교회 안에서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너희들이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을 믿지 못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헛것 이라고까지 강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에 불과 할 것이며 이 세상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어도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다는 것은 분명 우리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이 은혜가 확실하다는 것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증거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장사 된지 사흘 되는 날, 다시 말해 안식 후 첫날인 주일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보게 되는 장면은 주님이 장사되어 있는 그 무덤의 입구가 열려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입구를 막고 있었던 큰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마리아는 베드로와 사도 요한으로 보이는 제자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이 가서 본 것은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체, 즉 몸은 보이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보았습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10절 이후부터 성경을 계속해서 읽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절까지 읽은 말씀의 내용에서는 과연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기에 거기에 따르는 징조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어떤 말 하나 하나가 의미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무심코 넘겨 지나갈 수 있지만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어떤 오류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성경의 말씀에서 기록된 단어들이 그만큼 의미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때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던 세마포와 수건을 남겨놓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좀 더 말씀을 대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예수님은 세마포를 벗으시고 무엇을 입고 있었는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실 때 자신의 상처 난 몸을 보여주시고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였다고 믿게 하시기 위해 알몸으로 계셨는가? 개인적인 호기심이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 하시면서 허물을 벗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마포가 주는 의미는 분명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세마포는 구약의 대제사장이 입었던 옷과 관련이 있습니다. 출28장과 39장 그리고 레위기8장에서 보면 제사장의 복장에 대하여 언급된 말씀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성소에서 제사직무를 감당할 때 입어야 할 옷이 세마포로 속옷을 지어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으면서 각종 화려한 보석들이 장식된 에봇을 갖추고 성소에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의 화려한 옷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영광을 하나
그러나 이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한번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겉옷과 에봇을 벗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이스라엘과 자신을 위한 대속죄일인 7월 10일이었습니다. 레위기 16장 4절을 보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날만큼은 대제사장은 세마포로 된 옷을 입고 세마포로 된 의복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복장으로 하나님 앞에서 온 이스라엘의 범죄를 대신하여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 혼자 들어가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렇게 겉옷과 에봇을 벗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세마포로 된 속옷을 입고 있는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는 천국의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를 보면 이것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아직도 시골이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베로 만든 상복을 입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죄인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부모를 죽이지 않았지만 부모를 죽인 죄인이기에 상복을 입고 화려한 몸치장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봐도 아 저 사람에게 슬픔이 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3년 동안이나 상복을 입고 무덤에서 죽은 부모를 섬기라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도 화려한 몸을 치장하기 위한 그 어떤 옷도 상복 외에는 입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는 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해야만 했습니다. 세마포 옷은 베로 만든 옷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종종 슬픔과 괴로움을 나타낼 때 베를 두른 것을 봅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입는 이 세마포 속옷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그 죄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용서 받기 위해 자신이 세마포로 지은 옷과 의복들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속죄의 직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다 버리고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벗어 버리고 죄로 인해 사망과 저주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마치 대제사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옷을 벗어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세마포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서야 했던 그 모습과 동일한 모습으로 자신의 영광의 옷을 벗어 버리시고 인간이라는 옷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 분이 입고 있었던 것은 하늘 영광과 권세가 아니라 어린 아기를 감싸고 있었던 강보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친히 자신은 천한 의복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은 그 천한 옷 마쳐도 걸치지도 못하시고 알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겉옷과 속옷은 병사들이 나누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완전히 벌거벗기심을 당하는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대 속죄일에 하나님께 드린 제물처럼 우리들을 위해 친히 자신의 피를 흘려 하나님 앞에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 속죄일의 이 속죄가 완전히 이루어 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7월10일 속죄일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두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신, 몸은 유대인의 장례관습대로 세마포와 수건으로 감쌌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지만 동시에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세마포로 감싸졌다는 것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 받게 하기 위해 입었던 옷입니다. 이 옷은 죄와 슬픔의 옷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날 이 옷을 벗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대제사장 직무를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십자가에서 용서받게 하심으로 더 이상 구약의 대제사장이 입어야 할 세마포를 입을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에 일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속죄사역을 위해 세마포를 입으실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으로 인해 모든 속죄사역이 다 이루어지고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두 제자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빈 무덤에 남겨진 세마포와 수건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몸과 머리를 싸던 것이고,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구약의 대제사장의 의복을 상징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주님께서 벗어놓으신 세마포를 먼저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게 하시지 않으시고 세마포라는 볼 폼 없는 이 옷을 먼저 보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마포를 벗어 버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마포를 벗어 놓으셨다는 것이 단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하나의 증거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물을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증거물이란 하나의 사실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법원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증거물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세마포는 바로 부활과 연관되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물이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사역을 위해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는 다는 것은 온 백성들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여주셨고 그들이 드리는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구약에서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들에게 내릴 형벌을 송아지와 염소에게 대신 내리심으로 이제 대제사장은 죄악의 고통과 사망의 괴로움을 상징하는 그 옷을 벗고 다시 아름답고 화려한 겉옷과 에봇을 입고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과 죽음의 고통의 세마포를 무덤속에 벗어두시고 부활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사역이 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사망과 고통의 그늘 가운데 계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사망과 슬픔의 세마포 옷 대신 하늘의 영광과 존귀로 가득한 새옷을 입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앞에서 개인적으로 생각했다고 한 부분에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마리아 앞에 알몸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과 존귀한 옷을 입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저를 감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속에 남겨진 세마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속죄사역이 하나님께 드려져 다 이루어짐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그 결과 예수님께서 영광과 존귀의 옷과 관을 쓰셨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던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세마포를 보게 하여 주신 그 세마포를 우리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통해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친히 구속의 사역을 다 이루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한지를 먼저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 전에는 결코 어느 누구도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이며 이 죄를 우리 주께서 용서하여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덧입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또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2:7-10),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또한 주님의 부활을 보기 위해 우리는 대제사장으로써 모든 구속의 사역을 예수님께서 직접 이루셨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부활 절기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를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이 주일 아침에 항상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날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세마포를 벗어 버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이 우리에게는 복된 날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날만 복된 날이 아닙니다. 이제는 모든 날이 복된 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매일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큰 대제상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부활을 누리고 기뻐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슬픔의 세마포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세마포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친히 대제사장으로 입고 있었던 옷입니다. 드디어 속죄 사역이 마쳐지자 그 옷을 벗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육신의 눈에는 고통과 슬픔만이 보일 것입니다. 마치 마리아와 제자들이 세마포를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세마포와 수건을 두신 그 뒤에 우리 영광의 주님이 계신 것을 본다면 우리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오직 기쁨과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해야 한다는 이 진리의 말씀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고 오늘도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부활이 없다고 할 지라도 빈 무덤속에 세마포옷을 벗으시고 무덤을 나오신 분이 실제로 계셨다는 것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필리는 부활의 신비
김흥규 목사
<序: '소생'과 '부활'의 차이>
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함에 따라 영생불멸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냉동 치료'(cryogenic treatment)라고 하는 방법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이것은 화씨 영하 350도까지 내려가는 극저온 냉장고 속에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얼리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체를 커다란 액체 질소 통 안에 집어넣어서 보관하다가 나중에 사람을 살릴 정도로 의학이 발달하게 될 때 다시 녹여서 살린다는 방법이지요.
이와 같은 냉동 치료가 세상 사람들의 입에 크게 오르내린 것은 작년 7월 5일에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1918-2002)가 죽었을 때였습니다. 윌리엄스는 '보스톤 레드 삭스'(Boston Red Sox)의 타자였는데 평생 평균 타율이 3할 4푼 4리가 넘는 명타자였습니다.
문제는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후처리를 놓고서 자식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큰딸은 1996년 윌리엄스가 남긴 유서를 근거로 해서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플로리다 해안에 뿌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막내아들과 또 다른 딸은 2000년 11월에 아버지와 맺은 계약(pact)을 들먹이면서 시신을 냉동처리해서 영구 보관해야만 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아들의 주장이 워낙 강해서 테드 윌리엄스의 시신은 곧바로 애리조나 주의 스카츠데일(Scottsdale)에 있는 냉동 보관실로 옮겨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윌리엄스의 시신은 오늘 이 시간까지도 다른 두 사람의 시체와 함께 영하 350도의 극저온 액체 질소 통 안에 거꾸로 매달린 채 들어가 있습니다. 언젠가 꽁꽁 얼어붙은 그의 시신을 녹여서 소생시켜 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신을 냉동실에 보관하는 가격이 결코 싸지 않습니다. 애리조나에 있는 냉동 치료 회사인 '앨코어 생명 연장 재단'(the 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은 계약금 조로 150불을, 그리고 매년 400불씩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망해서 냉동실로 시신을 운반할 때 다시 12만불을 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는 현재 약 1천 여명이 냉동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장차 의학이 놀랍게 발전해서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녹여서 다시 살려낼 수만 있다면, 이것은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곧 '부활'(RESURRECTION)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단지 '소생'(RESUSCITATION)이라고 부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호흡이 일시적으로 멈춘 사람들을 인공 호흡이나 전기 충격 등으로 회복시켜서 다시 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부활과 거리가 멉니다. 호흡이나 생기가 다시 돌아와 소생한 것일 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다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다시 노쇠해지고 결국 언젠가는 죽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다시 늙어지거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고전 15: 42-44에 따르면 부활은 네 가지 특성을 가진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곧, "썩어지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며, 신령한 몸"으로 변형(TRANSFORMATION)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더 이상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本①: 부활의 해석에 있어서의 세 가지 가능성>
현대인들의 문제는 육체의 소생까지는 받아들이지만 부활은 쉽사리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이성과 경험으로 확증할 수 있어야지 만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만져봐야 지만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부활의 역사성은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과 보고만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현대인들이 부활이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직접 증명될 수 없고 단지 간접적인 증언에만 의존해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과연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세 가지 가능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산 채로 사람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가능성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진짜로 죽으신 것이 아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 군병의 실수로 완전히 절명(絶命)하신 상태가 아닐 때, 즉 중상을 입은 정도에서 십자가에서 내려 와 누군가의 집에 거하면서 치료를 받고 회복되신 뒤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억측(臆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가상칠언을 살펴볼 때 충분히 드러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4복음서는 공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뒤 장사지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 요한 모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7: 57-60; 막 15: 43-46; 눅 23: 50-53; 요 19: 38-40). 또한 요한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 쯤을 가져 왔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뿐만 아닙니다. 타키투스(Tacitus)와 같이 저명한 역사가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지 않으시고 산 채로 내려 오셨다가 부활의 소문이 났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분명히 죽기는 죽으셨지만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환각(hallucination)이나 망상(mirage)에 빠져서 부활하신 것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시체를 감추어 두고 유언비어를 선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주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유대 당국자들이 제시했던 해석입니다. 먼저 환상을 보았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자기 신변에 피해가 올 것을 두려워해서 삼지 사방 도망을 쳤던 것이지요.
만일 이들이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믿었더라면 이렇게 배신하고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9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예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셨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후에 한 편으로 깊은 패배 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자들이 부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헛것을 보았을 리 만무한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고전 15: 5-6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12 사도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후 500 여명 이상이나 되는 많은 제자들 앞에 일시에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환각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환상을 보았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시신을 도굴한 후 부활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가능성입니다. 이것 역시 근거가 희박합니다. 예수님이 갇히신 무덤 입구 밑에는 홈(groove)이 파져 있었습니다. 이 홈에 원반 바퀴 모양의 큰 바위가 자리를 잡으면 무덤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게 됩니다. 이 바윗돌 문을 굴리려면 최소한 장정 몇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다가 마 27: 66은 빌라도 총독이 파숫군을 파견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파숫군들이 로마 군병인지 아니면 유대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로마 군병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군인들은 무덤을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문이 흉흉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시신을 도굴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즉각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24 시간 눈에 불을 켜고 철통같이 감시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시신을 도굴해서 부활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설 역시 믿기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 가지 가능성이 신빙성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세 번째 가능성으로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세 번째 해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진짜로 나타나셨을 가능성입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성경은 바로 이 세 번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해석이 가장 믿을만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해석은 전부 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 순교 당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세상에 거짓말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릴 사람이 있겠습니까? 혹시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무도 거짓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 겁쟁이처럼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부활 사건 이후에는 목숨을 걸 정도로 담대해졌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핍박이나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을 어떤 강력한 체험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부활 전과 부활 후에 제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이 180도 변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本②: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부활을 본다>
지금까지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절을 맞아서 부활의 역사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여러분들에게 아무 영향력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신비는 과학적인 증명이나 이성적인 논증으로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자세로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할까요?
이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으로 되돌아갑시다.
막 16: 9과 오늘 봉독한 요 20장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누굽니까? 눅 8: 2에 보면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으며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여제자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는 사실은 그녀가 이 그룹의 지도자였음을 알려줍니다.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해서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간 가운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마 27: 55-56; 막 15: 40-41; 눅 23: 49; 요 19: 25 참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 지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마 27: 61; 막 15: 47; 눅 23: 55-56 참조).
그 당시 십자가형은 가족이나 친지들조차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근처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는 사실은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제일 먼저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입니다(마 28: 1-11; 막 16: 9; 눅 24: 1-12; 요 20: 11-18 참조).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그 당시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여자는 사람 축에도 끼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어두운 과거까지 가지고 있었던 여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제일 먼저 만났을까요? 한 마디로 대답하면 마리아의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그녀의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안식일에 무덤에 가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시신을 장사지낸 후 삼일 동안 무덤을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흘 동안 무덤 주변을 배회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삼일이 지나면서 시신이 부패해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영혼이 무덤을 떠나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삼일이 지나야지만 무덤에 찾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본문 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아침, 즉 주일 새벽 아직 날이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학자들은 대충 새벽 3 시부터 6시 사이에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봅니다. 얼마나 무덤에 갇혀있는 예수님이 궁금했으면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신 새벽에 찾아갔을까요?
그런데 무덤에 가보았더니 무덤 앞에 있어야 할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와 요한(2절의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두 제자가 즉시 달음박질하여 무덤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베드로보다 요한이 나이가 더 젊었기 때문에 더 빨리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무덤에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기는 했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뒤따라 온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7절을 보세요.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돌아가신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다른 사람이 치운 흔적이 전혀 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수건을 벗겨준 흔적이 전혀 없이, 예수님의 시신이 증발되듯 저절로 빠져 나온 것임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0절에 보면 빈 무덤을 보고서도 두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명색이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이 끔찍하게 아끼셨던 요한도 빈 무덤을 보고서도 별 감동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무덤 밖에 계속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허리를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무덤에서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요일 4: 18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리아를 담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흰옷 입은 두 천사와 대화까지 나누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던 요한도 아닌 어두운 과거를 가졌던 연약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모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의 눈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무덤 앞에 바윗돌이 치워진 것을 보자마자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무덤 가에서 슬피 울었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모두 다 예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結: 과학과 이성을 넘어서>
그렇습니다. 부활의 진리는 아무리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경험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럴듯해도 내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그래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냉소를 지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활의 신비는 과학적인 증명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진리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풀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뒤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할 때에만 확실히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순종과 사랑으로 풀어질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바윗돌을 치우기 전에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교만의 돌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 이 시간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젊은 화가가 19세기의 유명한 화가인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에게 자기가 그린 예수님의 초상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림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평가를 해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림을 한 참이나 보던 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했습니다. "자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네. 만일 사랑하는 마음만 있었더라면 훨씬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습니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자
요 20:1-16 / 김남준 목사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뒤 3일째 되는 날 새벽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새벽에 대해서 긴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라고 시작합니다. 그냥 좀 이른 시각이 아니라 아직 어두움이 도망하지 못하고 깔려있는 그런 새벽이었습니다. 이런 새벽 시간에 인적이 끊어진 길을 지나 묘지들이 있는 동산을 오르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복음서 속에 나타난 그녀에 대한 기사를 볼 때 원래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으나 주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시고 그 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적인 여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초기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실 때 자기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던 자매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제자들조차 버리고 떠나간 처형의 현장에 끝까지 남아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님의 운명하시는 광경을 지켜본 여인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주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었고 큰 돌로 입구까지 닫히고 인봉이 되어있는 날이 저문 시각인데도 하염없이 무덤을 향해 울고 있던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안식일은 무덤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밤을 초조하게 보낸 이 여인은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도망가지 않은 어두움이 깔려 있는 길을 지나서 묘지들이 있는 음산한 동산까지 달려왔습니다.
성경의 문맥으로 미루어볼 때 이 여인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은 아직 이 여인이 새벽에 무덤에 달려간 것은 주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덤에 가보니 무덤의 입구를 가로막았던 돌은 누군가에 의해서 굴려졌고 옮겨져 버렸습니다. 누군가가 무덤을 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도움을 받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여인의 기별을 받은 두 제자는 급히 달음박질하여 시신을 모셔 두었던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달려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8절에서 말하기를 "그때에야 다른 제자들도 믿더라"
그들이 보고 믿은 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계절은 봄이었지만 해가 지면 모닥불을 지펴야되는 때였고 시간은 이른 새벽에 추위를 느끼는 때였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무덤 주위에는 대제사장의 지휘하에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보도도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그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지만 혹시 발각되면 상당한 문초를 당하거나 예수의 시체를 감추고 예수 그리스도가 평소에 가르친 대로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낸 이단자로 몰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체도 없는 무덤 앞에서 서성거려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즉각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이에 두 제자가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함으로써 무덤 앞에 달려왔던 제자들의 행동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왔지만...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와 교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는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무덤까지 단숨에 달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뵈옵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마땅히 만나야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할 주일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이 없습니다. 매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면서도 그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예배와 경배 가운데 나타나 주시지 않는다는 심각한 회의나 고통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왔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때에 그들은 조금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도 없고 다시 우리를 위해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당신을 보이십니다. 궁금해서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고 돌아간 제자들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빈 무덤만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 돌아가지 못하고 거기에 주저앉아서 슬피 울던 이 여인은 결국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뵈옵는 영광스런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와 갈망과 사랑이 있는 마음의 여인에게 처음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오늘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중대한 도전과 의미를 던져줍니다. 한번쯤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가 예배의 중심이 되고 있고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나 하늘에 오르신 후에나 주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세상을 살펴도 전심으로 자기를 찾고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어보십시오. 어디서든지 하나님과의 위대한 만남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을 뵙고 싶어하는 갈망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시편을 살펴보십시오. 3장,4장,5장,6장,13장,42장,43장... 어디를 펴든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주님을 뵈옵고 싶어하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 간절하고 절박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지자도 있었고 제왕도 있었고, 지도자도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던지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사도들이 아닌 여인에게
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비천한 여인에게 먼저 보여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평생 제자들의 가슴속에 지워버릴 수 없는 교훈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처음 영광을 보았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몇 일 전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어린 고난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목격한 그 여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처음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 사랑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찾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리스도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리고 그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이 여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도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있는 사랑을 종식시킬 수 없었습니다. 시체라도 찾고 싶어했던 것은 시체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라 그 시체를 매개체로 그리스도 예수의 그 관계를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그리움이 가져다주는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환경에 의해서 얼마나 자주 막힙니까? 사람에 의해서 얼마나 자주 끊어집니까?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연약한지 수시로 변하는 환경과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실낱같은 사랑은 끊어지고 한번 끊어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어질 줄 모르고 긴 세월을 지나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습니다. 그 시체조차 사라졌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은 죽지 않았습니다. 시체조차 사라졌는데도 오히려 사라진 시체를 보자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더 불꽃같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이 여인을 지배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는 자들에게 내려질지도 모르는 어떤 형벌도 이 여인 안에 있는 타오르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의 불꽃을 끌 수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두루 살펴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전심으로 발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려고 자기를 죽이며 몸부림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배교에 가까운 냉담함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도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순결한 애정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그분을 찾고 싶어하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
온 세상이 이렇게 당신 자신을 찾는 세상이 되어서 이 세상의 더러운 탕자와 같은 모든 부도덕과 영적인 무지와 모든 패역한 더러움들을 씻어버리고 그 위대한 부활의 광명이 온 땅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게 하고 싶으셔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더럽고 추한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씻음을 받았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씻고 용서함을 받은 것만으로는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고 이 백성들을 품에 안고 죽게 하신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 부끄러움과 고난의 때를 일체의 순종함으로 승리하시고 보좌우편에 계셔서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으로 온 땅을 통치하시고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거룩한 부활의 계절에 이 세상을 내려다 보시면서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그토록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모하고 그렇게 이 세상에 영광스런 변혁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들이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셨을 때에 그 백성들 가운데서 재현되기를 갈망하셨던 영광스런 부활이 우리들 안에 재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시 사신 위대한 부활을 모든 백성들이 송축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을 이기시고 깨뜨리고 부활하신 이런 권능과 영광이 그 부활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삶과 교회 속에 죽음을 이기고 교회를 뒤덮은 모든 사단과 죽음의 세력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변혁 속에서 살아 숨쉬는 수많은 생명을 얻은 무리들의 영적인 부활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로소 당신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보람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영광스런 주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가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 저주받아야 할 강도들과 동료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못 박혀 죽어 가는 흉악한 강도들에 의해서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때리면 맞으셨습니다. 침을 뱉으면 뱉음을 당했고 못 박으면 못 박힘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며 죽어 가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잠시 후 이렇게 찬란한 영광으로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시리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난과 낮아지심은 숙명적이 아니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이 고난을 이기실 수 있었던 것은 이 죽음 너머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넘쳤으니 잠시 후 이 고난이 끝나고 나면 고난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의 부활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느낌이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아버지의 전능하신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지금은 비록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 있어도 주께서 그 거룩한 손으로 우리를 향하여 명하실 때에 홀연히 그와 함께 변화되리라고 하는 자신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는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방법과 수많은 이 세상의 견해가 치유하도록 애를 썼지만 실패한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교회와 동행하시는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영적인 부활을 우리는 믿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이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잠시 후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그렇게 영광스럽게 살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권세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도록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으면서 고난주간에 흘렸던 수많은 눈물을 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절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매순간 자기를 죽이고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받들고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통해 성취하시고 싶어하시는 데에 자신의 신명을 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몸부림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몸부림이 이 무지하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시대 앞에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마음의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여있는 절망적인 처지나 교회가 처한 답답한 상황이나 이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깨뜨릴 수 없는 수많은 문제의 벽을 인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서 나를 살리신 그 주님, 처참하게 죽고 이슬처럼 분토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그렇게 놀라운 부활의 권능이 오늘 우리들이 놓여있는 삶의 자리에서 재현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에 다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활을 어떻게 찬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거룩한 부활에 다시 살아남을 믿지 못했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의 심령이 죽었던 곳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지 못했던 죄뿐만 아니라 넘어설 수 없는 환경의 벽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도무지 어떤 변화를 꿈꾸지 못했던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놓여진 모든 정황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갖는 대신에 더 많은 절망으로 괴로워했던 것도 모두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사단의 모든 무기들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모든 삶에 있어서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실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러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비천하였지만 그러나 사모하는 마음으로 처절한 사랑으로 죽음조차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으로, 시체조차 사라져 버린 빈 무덤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슬피 우는 이 여인에게 나타나셨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부활에 우리는 역사와 교회와 우리 개인과 모든 영역에 있어서 부활하신 위대한 권능이 우리를 뒤덮을 수 있도록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사건
요 21:1-18 / 조상호 목사
지난 주 주일에 시드니순복음교회의 2부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총회장목사님 사무실에서 쉬면서 3부 예배를 준비하고 하고 있는데 사무실 한 켠에 시드니에서 발행하는 기독교계통의 교민잡지인 크리스챤 리뷰가 눈에 뜨였습니다. 실로 오래 만에 보는 잡지여서 반가운 마음으로 한번 죽 훑어보는데, 거기에 브리스베인순복음교회의 홍요셉목사님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글을 통해 깊이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서 먼저 그것을 소개하고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그 글에 의하면 요즈음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다방면으로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찬송가처럼 그들도 찬불가를 만들어 부르고, 우리 기독교가 심방하는 것처럼 그들도 심방도 하고, 우리의 주일학교처럼 그들도 불교 어린이학교를 개설하고, 우리가 수련회를 가는 것처럼 그들도 수련회를 가고, 주일의 개념이 없던 그들이 우리처럼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를 모방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모방할 수 없을까요? 부활입니다.
모방할 수 없는 부활
기독교의 부활만은 그들이 모방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82살의 나이에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 화장된 후, 사리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사라림 숲 속의 큰 사라 나무 밑에 병들어 누워서 마지막 임종 설법을 했습니다. 그는 그 설법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석가 자신은 신이 아니므로 자기를 신으로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륜(人倫)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으나, 천륜(天倫)에 대하여는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석가는 그 설법을 통하여 자기가 신이 아닌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무연중생 제도불능(無緣衆生 濟度不能)이라.” 자기가 신이라면 죄 많은 중생들을 다스리는 신적 연분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해서, 중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삼세중생 제도불능(三世衆生 濟度不能)이라.” 자기가 신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신성을 가져야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하므로 중생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업보중생 제도불능(業報衆生 濟度不能)이라.” 자기가 신이라면 모든 중생들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여 중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석가는 나마다경을 통하여 구원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남겼습니다.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何時爺蘇來 五道無油之燈也)” (나마다경 38:8). ‘어느 때인가 야소, 즉 예수라는 분이 오실 것인데, 그 때는 내가 깨달은 것이 기름 없는 희미한 등불과 같이 될 것이다‘는 예언입니다. 석가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480년 전, 이사야 선지자나 스가랴 선지자나 말라기 선지자 등과 같은 다른 예언자들처럼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결국 그 예언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인류를 위한 공생애를 사신 후,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마치 불교의 석가모니나 이슬람의 마호메드나, 유교의 공자와 맹자가 죽은 것처럼 예수님도 똑같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는 타종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다른 어떠한 종교에서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함이 우리 기독교에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을 절기로 기념합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그저 자기 종교의 창시자가 태어난 탄생일을 기념할 뿐 부활절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탄생일을 기념할 뿐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도 기념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성도와 모든 인류에게 최대의 승리를 안겨 준 승리의 날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기독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의 진리도 진실입니다. 반대로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진리도 가짜입니다. 만약 부활의 사건이 거짓이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예배도 헛되고, 우리의 헌신도 헛되고 우리의 전도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게 되며,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을 잘 하려면 부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빈 무덤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을 남기신 예수님
예수님은 빈 무덤을 남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성도입니다. 안식일 전날, 오늘날로 말하면 금요일 오후 3시에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신 후에도,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 주위에 있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백부장으로부터 예수님이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아리마대 요셉의 요청에 따라 그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넘겨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잘 싸서 자신이 죽으면 사용하려고 했던 무덤,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바위로 만든 무덤에 안치시키고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5장 47절을 보면, 그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놓아 둔 곳을 보았습니다. 안식일, 오늘날로 말하면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총독 각하, 예수가 살아 있을 때 그 자신이 3일 만에 부활한다고 누누이 말을 했는데, 혹시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고 나서 부활했다고 할지 모르겠으니 군인들을 보내어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빌라도 총독은 그들의 말대로 로마 군인 1개 중대를 보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아무도 도적질하지 못하도록 교대로 24시간 지키게 했습니다. 또한 10여명이 옆으로 굴려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돌문에 로마 황제 이름으로 인봉을 붙여놓았습니다. 이제 아무도 그 인봉을 뗄 수 없습니다. 인봉을 떼는 사람은 로마 황제의 명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다시 하루가 지나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오늘 새벽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주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다음 날 무덤을 찾아가야 되지만, 유대인들은 토요일인 안식일에는 많이 걸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법에 따르면 특별한 경우, 성전이나 회당에 가기 위해서 2,000 규빗, 약 900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허용했지만, 그 이상은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오늘 새벽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손과 발은 못 박혀 찢어졌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고, 수많은 매를 맞음으로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피투성이인 예수님의 시신을 닦아내기 위해서 무덤에 갔습니다. 그녀는 무덤으로 가면서도 ‘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을 막아놓은 돌문을 굴려줄까?‘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한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육중한 돌문이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간 것으로 알고 즉시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한숨에 달려서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무덤 안에는 주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을 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말씀하신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빈 무덤을 남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죽은 후, 그들의 무덤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인도에서 석가모니(BC563~483)의 뼈를 발견했다고 해서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세계가 들썩거린 적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뼈를 가지고 시가행진을 하자, 그 뼈를 보기 위해 아예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뼈에 절을 올리고, 울며불며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뼈 한 조각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말라 비뚤어진 뼈다귀는 곰탕 한 그릇 끓이는데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끓여봐야 국물도 우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2,400년 전의 뼈다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뼈를 전시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뼈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예수님의 뼈를 발견한다면 기독교는 당장 끝장나고 맙니다. 기독교는 썩어문드러진 마른 뼈다귀를 가지고 난리 치는 시시컬렁한 세상의 종교와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생명의 기독교인 줄로 믿습니다. 구원의 기독교인 줄로 믿습니다. 영원히 사는 기독교인 줄로 믿습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면 1924년에 죽은 레닌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썩지 않게 처리되어 80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순례객들이나 관광객들이 그곳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레닌의 관 위에는 이러한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류의 주인이고, 그는 세계의 구원자였다.” 여러분! 레닌이 위대한 지도입니까? 세계적인 지도자입니까? 그가 세계의 구원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였고 그를 따르던 사람, 그를 따르던 나라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세계를 망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세계의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까? 될 수 없습니다. 북한의 평양에도 죽은 지 10년이 훨씬 지난 김일성의 시신이 섞지 않게 처리되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순례객들이나 관광객들이 그곳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수령님은 우리 곁에 항상 있다”고 써붙여 놓았다 할지라도, 김일성은 위대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민족의 태양도 아닙니다. 인민을 배고프게 하고, 세계를 불안하게 만든 독재자일 뿐입니다. 죽어서 시신을 남긴 보통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 질문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구원할 수 없습니다. 무덤을 남긴 세상의 어떠한 종교의 창시자도 산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남기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와 여러분들을, 우리들을,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만이 참 신인 줄로 믿습니다. 빈 무덤을 남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요, 우리가 따라야 할 진정한 모델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부활하신 지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하신 것과 같이 머지않아 다시 오실 줄로 믿습니다. 재림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인류를 심판하실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빈 무덤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했던 마리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녀가 골방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주야로 묵상했습니까?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마리아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을 목격하고 나서 골방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골방에 들어가서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즉 사도 요한에게 달려가서 주님의 빈 무덤에 대해서 전해 주었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가 전해 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주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와 수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과 32절의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목숨 걸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위대한 복음증거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변화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시작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으로부터 전해진 주님의 부활 소식으로부터 였습니다.
주님이 빈 무덤을 목격한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서 “여자여, 왜 우느냐?”하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아직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하고 “당신이 주님의 시체를 가져갔습니까? 주님의 시체를 돌려주세요.”하고 부탁을 합니다. 다시 “마리아야”라는 음성이 들려오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3년 동안 들었던 주님의 음성인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서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려고 하자 주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연인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마태복음과 서로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국말 번역을 보면 오해가 될 수도 있지만, NIV 영어 성경에 보면 ‘만진다’라는 단어를 'Hold'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은 '붙잡지 말라'는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계속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주님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마리아야, 나를 붙잡지 말라. 나는 아버지께 가야 한다. 지금은 육신을 가진 모습으로 함께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야한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처럼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까지 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합니까?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녀는 부활의 주님을 계속해서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빈 무덤을 알렸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 때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자, 못된 부하에게 자신의 집과 재산을 다 빼앗긴 로잘린드 부인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추위와 빈곤에 지친 로잘린드 부인은 여기저기 떠돌다가 당도한 한 마을의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따듯하게 대해 주어, 그 마을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닭이 매우 희귀한 새로서, 그 마을에는 닭이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부활절이 되었을 때 로잘린드 부인은 친절한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항상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로잘린드 부인은 그 동네에 닭이 없었으므로 아이들에게 달걀을 하나씩 선물하기로 마음을 먹고 어렵게 달걀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숲 속에 들어가 각자 새집을 하나씩 지어놓고 그 자리를 잘 봐 두고 오세요.” 아이들이 숲 속에 새집을 만들어 놓고 돌아오자 정성을 들여 준비한 맛있는 요리를 아이들에게 먹게 하고, 로잘린드 부인은 숲 속에 들어가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새집마다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하나씩 놓아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 여러분! 이제는 자기가 만든 새집에 다시 가서 무엇이 있나 보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숲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만든 새집에 달걀이 들어있는 것을 본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아이들은 달걀을 하나씩 집어 들었는데, 그 달걀에는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다.”는 로잘린드 집안의 가훈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중 하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병사 하나를 발견하고 극진히 간호하며 자기가 들고 있는 달걀을 건네주었습니다. 달걀을 건네받은 병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달걀에는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는 자기 집안의 가훈이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후, 아내를 찾아 헤매던 이 병사는 부활절에 이웃들에게 선물한 달걀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를 찾게 되었고, 결국 로잘린드 부인은 남편과 함께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활절이 되면 이 부인은 달걀에 색칠을 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이 아름다운 풍습이 여러 나라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면 다른 사람들을 살릴 뿐 아니라, 나도 살게 됩니다. 로잘린드 부인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부활절기념 달걀이 오히려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부활절 사랑의 실천이, 잃었던 가정을 회복하게 만든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몸 팔고 살던 창녀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던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녀는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생명의 증인,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와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빈 무덤을 남기셨습니다.”라고 부활 소식을 전한 마리아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은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다른 곳으로 넘쳐 흘러가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2,000년 세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양지바른 언덕에 위치한 무덤은 명당이라 해서 기를 쓰고 찾아다닙니다. 더 가관인 것은 무덤에 입고 들어가는 수의에 대해서도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까 남녘에서 생산된 남녘포 삼베 수의 가격이 1,500만원이고, 안동포는 2,000만원이며, 강원산은 2,500만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안동포에 황금가루를 뿌린 1억원짜리 수의까지 등장했습니다. 황금색 수의를 시신에 입히면 세월이 흘러, 유골이 황금색으로 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두 제 정신들이 아닙니다. 모두 부활신앙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코메디 같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무덤은 잠시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영원히 있어야 한다면 인간처럼 불행한 존재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시대나, 부활이 없는 사람은 죽어서 묻힐 무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믿는 우리들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갈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신천신지에 주님과 함께 거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달리, 주님은 빈 무덤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영광의 자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참 소망을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이 주님을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 이상규 목사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면 레닌의 무덤이 있습니다. 레닌을 썩지 않게 방부 처리하여 두었습니다. 아직도 죽을 때에 그 모습으로 누워있는 레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베이징에 가서 천안문 광장에는 모택동의 무덤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생전의 모습 그대로 누워 있습니다. 북한의 금수산 기념궁전에 에는 김일성의 무덤이 있습니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썩지 않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러 옵니다. 시신을 방부처리 하기 위해서는 항상 온도를 섭씨 16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자체만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북한 사람들은 여기에 한번 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썩지 않게 한다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썩어야 하고, 흙으로 돌아가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아는 사람들은 죽음이 사람을 완전케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사람을 비로소 완전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찬 것보다는 빈 것이 희망이 있습니다. 비어 있는 것은 찰 희망이 있지만 차 있는 것은 빌 절망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자신의 무덤을 비어두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신대로 무덤이 비어 있으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는 쉬운 승리를 좋아한다. 위기 없는 성장, 통증 없는 치료, 십자가 없는 부활을 좋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위기가 있어야 성장도 의미가 있습니다. 통증이 있어야 치료도 잘 됩니다.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도 의미가 있습니다. 고통이 커야 기쁨도 큽니다. 십자가 후의 부활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부활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고통이 있기에 하늘나라가 복이 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확인한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그들에게 놀람이었고, 설렘이었고, 부활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동영상을 먼저 봅시다.
1. 부활의 증인들
1)막달라 마리아
요 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 곧 주일 아침이 밝으려하자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생존 시에 참으로 지극 정성을 다하여 사역하시는 것을 도왔습니다. 다른 제자들 보다 훨씬 나은 헌신을 하였던 여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그 고난의 행렬을 끝까지 따라가며 눈물을 흘렸던 여인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도 이 여인은 모친 마리아와 함께 끝까지 십자가 행렬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가장 마음 아파했던 여인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충격 받은 여인도 이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정식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선도하며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여인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냅니다.
마리아는 금요일 밤, 토요일 하루 종일 주님이 무덤에 있는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주일 아침 일찍 날이 새기도 전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이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라고 했습니다. 가서 보니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세마포만 놓여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그 길로 제자들에게 뛰어갑니다. 그렇게 뛰어갈 때 마리아의 발걸음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성경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무겁게 무덤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 부활사실을 전하려 달려가는 이 여인의 발걸음은 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언자가 됩니다. 이 여인은 이런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여인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두 여인들 덕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삶에서는 여인들이 언제나 앞서 갑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믿음뿐 아니고 매사가 그렇습니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에 남자들은 몇 분이나 나오셨습니까? 장로님들 아니면 남자들은 거의 전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으로 목격한 사람이 여성이었습니다. 평소 제자들은 큰소리나 치더니 정작 예수님의 부활은 여인들이 전해주어서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첫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이렇게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는 이 간절함과 사모함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모함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초지일관하는 신앙인의 열정과 중심 있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2)베드로와 다른 제자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죽으실 때도 둔감하게 대처했는데 부활하셨을 때도 참 둔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에 제자들은 허둥댔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는 잠을 잤습니다. 가장 위급한 때는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니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부활 때도 날이 밝았는데도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도 마리아가 전해주어서 알았습니다. 2절을 보면 “마리아가 사건을 알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그때서야 “제자들이 비로소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민첩성에나 의지력이나 이해력에서 한결같이 둔감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각이 없으면 낙오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민첩성과 예민함과 의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깨달음이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민첩성이 떨어지면 이렇게 불행해집니다. 예수님 재림 때도 이 민첩성이 떨어지면 이렇게 낙오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다, 매를 갈다, 길쌈을 하다 하나는 들림 받고 하나는 낙오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 민첩성이 둔감해서 뒤쳐지는 것입니다. 이다음 주님의 재림 때에도 이 같은 현상은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나타날 현상을 성경에서 미리 지적하고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유대인은 결혼을 밤에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들러리들은 반드시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은 밤늦게 옵니다. 그런데 민첩한 여인들은 밤새울 각오를 하고 기름을 미리 준비합니다. 그런데 민첩하지 못한 여인들은 준비도 없지만 그 밤을 인내하지도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허둥댑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불은 이미 꺼져가고 있습니다. 기름은 바닥나 있습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기름을 꾸어 달라고 하니 누가 꾸어 줍니까. 그때서야 기름을 준비하러 다니게 되니 무슨 들러리 입니까. 이것이 민첩성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여기 제자들을 보면 바로 이 민첩성이나 의지성 그리고 감각이 한참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낙오되고 순서에 밀리고 뒤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제자들이 더 한심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시몬 베드로가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여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예수님은 이미 부활했고 시체를 샀던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곳을 나가신 후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왜 만나야 하는가 하면 예수의 부활을 만방에 알려야 하기 때문에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했습니까. 엊그제 그 환란당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당했고 그래서 아픔을 당했고 기가 죽었습니까.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확인하고 나아가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 수모 당하신 예수는 죽지 않고 살아나 부활하셨다고 알려야 합니다. 또 그래야 실패한 제자들은 그 실수와 부끄러움을 만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제자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10절을 보면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도 조금 찾아보다가 없으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마디로 이 제자들은 자질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민감성이나 감각의 문제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질 자체가 떨어집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만 골라 제자로 삼으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제자들을 무지하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을 탓할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을 보면서 곧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제자들의 무지한 행동이 곧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을 읽음으로서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제자들의 무지한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보십시오. 11절을 보면 제자들이 돌아갔는데도 혼자 남아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다시 예수님 무덤 속을 또 들여다봅니다.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상이 있고 보상이 주어집니다. 찾는 자는 찾아지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돌아갔어도 혼자 남아 또 기다립니다. 그랬더니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 번째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보상이고 복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와서 찾다가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찾아지겠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달려가서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해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마리아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또 만났다는 보고를 받은 제자들은 무슨 심정이었겠습니까. 주님도 너무 야속하다는 생각 안 들었겠습니까. 우리는 명색이 제자인데 나타나시려면 제자들부터 만나주셔야 하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부터 만나주시는 예수님이 야속하고 또 서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알아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직분이 높다고 반드시 더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입고 영적성장을 이루는 데는 직분의 고하나 신앙연륜의 길고 짧음이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영적 생활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여기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매사를 그냥 봅니다. 자세하게 보질 않습니다. 물건을 사도 그냥 보고 삽니다. 값도 달라면 조금 깎아 보다가 안 되면 그냥 사 버립니다. 그래서 속기 쉽습니다. 가짜를 사들고 오기도 합니다. 여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건 하나 사는데 참 구경할 만합니다. 고르고 또 고르고 만져보고 뒤집어 보고 세심하게 살펴봅니다. 그래서 사려는가 보다 싶었는데 그냥 놓고 또 다른 곳으로 갑니다. 가서 또 살펴보다가 다시 와서 또 만지고 깎고 또 깎고 그러다 기어이 반값으로 깎아 사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그냥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는 복을 누린 것이 아닙니다. 그 만남이 있기까지는 그런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래도 명색이 제자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사건의 전후에서 역할이 막달라 마리아 보다 뒤로 밀린 것은 그런 민첩성이나 의지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 행동이 참 우둔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이 민첩성과 의지력이 참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응답받는 신앙의 요소입니다. 이것이 찾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이것이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만남의 복입니다. 또 이것이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응답의 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이렇게 소망을 주신 사건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죽음에는 새로운 질서와 혁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복된 승리인 것입니다.
2. 부활의 축복
1)승리의 축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졸도하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은 기절하신 것도 아니고, 제자들이 정신이 흐려져서 도적 당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노라 로마 병정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확인하였고, 군의관에 의해서 죽음이 확인되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죽음에서의 승리입니다. 어둠과 죄와 마귀에 대한 승리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하면서 사망 권세를 꾸짖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망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달려 와도! 사단 마귀가 아무리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도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승리하셨으니 우리도 반드시 승리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으니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롬4:25에 말씀하시기를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무덤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을 믿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은 과거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음을 선포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을 당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을 당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그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자의 죄를 갚아 주셨으니 사함 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막10:45)
만일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었을 것이요, 그리고 잔치 날 잡아먹으려고 온갖 좋은 것을 먹여 키우는 돼지같이 세상에 있으면서 온갖 좋은 것을 얻을 수 는 있으나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리하셨으니 그를 믿는 모든 성도는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은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소망의 축복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논바닥에 가을이 되어 한 곳에서 벼이삭 하나가 쑥 올라 올 때에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일제히 다른 이삭들이 올라오는 것처럼! 우리 주님 한 분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주님이 부르시고, 재림 주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부활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너희가 믿느냐!"하셨습니다. 배추벌레도 때가 되면 예쁜 나비가 되고! 굼벵이도 때가 되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매미가 되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이 어찌 짐승이나 돼지나 미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런 초등 학문적인 미신과 미혹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치 주님은 반드시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요, 그 때에 우리 주를 믿는 자들도 부활의 몸으로 주님의 나라에서 거하게 될 줄 믿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 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귀한 축복인 것입니다.
요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요5:28,29에서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3. 부활을 믿는 성도의 바른 자세
1)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습니다. 감사할 것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무엇보다 이 놀라운 감사를 찬양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5-56절은 사실은 노래입니다. 죽음을 이긴 승리의 노래요 찬미인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 사망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6절) 죽음을 가져온 독침은 우리의 죄였고 우리는 율법에 의해 정죄되고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나 이제 부활의 희망으로 우리는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과거 순교자들이 죽어가며 찬미한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믿고 다른 것 몰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고 살게 된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영원히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자인 것입니다.
2)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밀 까부르듯 합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흔들립니다. 시험의 바람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풍파가 몰아쳐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 나갑니다. 여러분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마리아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3)주의 일에 항상 더욱 힘써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우리가 무엇을 안 하려고 하는 것만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대치나 승화라고 일컫습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우리가 힘써야 하는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널리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안으로는 전도하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고 우리가 힘써야 할 최대의 사명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나가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가장 힘써야 하는 주의 일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셨습니까? “내가 주를 보았다 또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 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증언자들
요 21:1-18 / 이필재 목사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말고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건이 여러 나타납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지로 가는 장지의 행렬 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살아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죽어서 온 동네 사람이 그 집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가셔서 다시 살려내셨고, 또 제일 유명한 이야기는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이야기로 죽어서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어 썩어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도 예수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부활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다가 부활했다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사람이 부활을 하면 다시 죽지 않고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청년은 다시 살기는 했어도 또 다시 죽었습니다. 편의상 부활이라는 말을 쓰기는 해도 진정한 부활은 한번 부활한 후에 다시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이며 이 다음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 잠자던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게 되는데 그때 부활은 예수님과 같이 다시 죽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많은 기적 가운데 가장 큰 대목이 부활입니다. 과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부활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진리가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사실은 부활의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부활을 열심히 증거해야 될 가장 귀한 자리에 있는 예수님의 열한 명 제자마저도 헛수고했다고 다 도망을 가서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가 온 세상에 전하여지게 되었는가?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삶의 과정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내 눈으로 보고 의식으로 확인해서 경험한 것은 믿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전해준 기록의 말씀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록도 없었습니다. 다만 전해지는 구전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주는 구전의 전달자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니까 이제 얼마 있으면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되고 그렇게 되면 누가 예수의 부활을 힘있게 증거 해줄 것인가 하는 자연스런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기록해야 되는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성령의 역사로 특별한 자에게 복음서를 기록하게 했는데, 제자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사도 요한이 자신이 목격한 모든 내용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해 주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전해줌으로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부활의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의 목격자 증언을 중심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자 합니다. 증언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예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 부활이 더 확실해집니다.
제일 첫째가 로마 군인들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식민지 백성이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권의 권한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고 사형의 집행도 로마의 현역 군인들이 감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증언자입니다. 아울러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절대 안 되는 사람이요 부활을 보았다 해도 보안상 그 말을 흘리면 안 되는 신분의 사람입니다. 왜? 자기들의 손으로 죽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가 부활했다고 한다면 로마 행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큰 피해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제일 먼저 말한 사람들은 로마 군인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그 자리에서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목격한 내용을 가지고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사실대로 말합니다. 그랬더니 대제사장들이 찾아온 파수꾼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밤에 잠을 잘 때 제자들이 와서 도둑질해 갔다고 거짓말하라”고 시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군인들은 무엇 때문에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렸는가 말입니다. 군인도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죽을 일이 생겼기 때문에 살길을 찾은 것입니다. 일이 잘못되면 자기들의 상관을 찾아가 보고를 하면 될 터인데 무엇 때문에 대제사장을 찾아갔겠는가? 이 사건은 로마와 유대 나라의 국제적 규모의 사건입니다. 이 군인들은 보초병으로 잘못하면 근무 태만의 큰 죄를 짓고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사건이기 때문에 상관에게는 감히 가지도 못하고 대제사장들에게 중재의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러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대제사장들이 그들에게 돈을 주면서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이 마태복음 28장 14절에 나타납니다.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있는데 총독하고 거래하는 것 정도의 능력은 우리들에게 있으니까 너희를 구원해 주는 것은 우리가 넉넉하다. 거짓말만 잘해 달라.”라고 돈을 주면서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자기들의 살 길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군인들은 나가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경험으로 확인된 사실에는 절대 힘이 있습니다. 절대 거짓말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의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문화에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무덤문화는 우리나라와 같은 무덤의 구조가 아닙니다. 납골당이라고 해서 굴을 파서 시체를 들여놓는 무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향해 가는 몇 명의 여인들의 걱정이 나타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돌을 굴려 주리오?” 큰 바윗돌로 납골당 입구 문을 막아놨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면서 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인봉을 했다”고 했습니다. 누구라도 손을 대는 자는 큰일 납니다. 로마 정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헝겊의 사방 봉인을 한 인장이 찍힌 상태입니다. 누구도 손을 못 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또, 군인들이 지켰다고 했는데 성경에는 “파수꾼이 무덤을 굳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인의 보초 규례는 4명씩 6시간마다 교대를 합니다. 그 철통같은 현장을 어떤 목적으로 누가 가서 그 무덤을 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시간 죽을까봐서 몸 사리느라고 다 도망간 상태였고,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사라진지 며칠이 지난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아리마대 요셉이 니고데모와 같이 치렀지 제자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운명은 금요일 오후 3시에 되어진 사건으로 그로부터 3시간 후부터는 안식일에 들어갑니다. 토요일은 하루 종일 누구도 무덤에 오지 않는 날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무덤에 갔다가는 안식일을 범한 자로서 율법재판에 회부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을 보려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철통같은 수비, 그것이 오히려 예수의 부활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만약 로마 군인들이 지키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무덤에서 밤을 새웠다면 거짓말이 나올 만 합니다. 부활을 증거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의 입으로 예수의 부활을 처음 말한 것이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언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빈 무덤이 부활의 증언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당시의 예수님의 무덤 상황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소문 중의 하나가 예수의 시체 도난설인데 도둑들이 와서 예수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로마 군인의 얼굴을 피해 그 무거운 바윗돌을 옮겨야 하는 순서가 필요한데 “무덤을 들여다보니 세마포가 놓여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다른 곳에 개켜있더라.”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도둑질한 사람이 시체를 훔쳐갔다면 무슨 목적으로 그 시체를 가져가겠습니까? 또 시체를 들고 가는 사람들이 옷까지 함께 들고 갈 것이지 그 복잡하게 싸놓은 수건과 세마포는 다 풀어서 현장에 놓고 알몸을 들고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여기 개켜있다는 말이 아무렇게나 널려진 상태가 아니고 마치 빨래를 해서 옷장에 넣어놓은 것과 같이 잘 정리가 된 상태를 말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큰 위험 부담을 앉고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단 말입니까? 2년 전에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롯데 호텔의 아버지 무덤을 파서 뼈다귀를 훔쳐갔다고 신문에 난걸 봤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재벌이라서 그 무덤 속에 보물이 많이 들어있을 것 같아 그 소문 때문에 팠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 화가 나서 뼈다귀를 인질로 돈을 뜯으려다가 잡힌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도둑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부자 집안의 돈을 노린 것입니다. 지키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산에 혼자 올라가서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입었던 옷까지 로마 군인들이 제비 뽑아 가져갔다고 그랬습니다.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냈을 때 땅속에서 40~50년 지나면 뼈다귀도 없을 정도로 삭아버린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안식일 다음날 새벽이니까 시간을 따지면 36시간 정도밖에 안된 시간입니다. 그러면 그 시체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빈 무덤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 지낼 무덤을 미리 마련해 놓는 빈 무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지금 골고다에 가보면 누구도 그것이 확실하다고 증거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무덤이었다고 하는 장소가 원형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네가지 설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나는 지금 말씀드린 도난설로 제자들이 훔쳐다 다른 데 묻고 살았다고 거짓말하는 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너무나 예수님을 그리워하다가 환상 중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고 살아났다고 말했다는 환상설, 십자가에서 아직 죽지 아니했는데 그냥 내려놨기 때문에 나중에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가사설, 그 다음에는 예수라는 실제 인물도 없었고 십자가에 매달은 일도 없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신화적 이야기를 만들어서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는 신화설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들로 예수님의 부활을 반박해 왔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랬던 사람도 아닙니다. 창녀였던 여인으로 가장 힘들고 수치감 있는 직업에 종사하다가 몸에 질병으로 일곱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두 가지 큰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는 건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인간다운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너무나도 고마워서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예수님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도와드리면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체라도 돌보는 것이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옥합을 열어 향유를 쏟아서 눈물 흘리며 머리카락으로 입 맞추며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그랬습니다. 그 여인을 정의하는 말이 죄인이라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 죄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시신이 없어진 빈 무덤을 보면서 슬피 울고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부활의 주님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언변이 좋거나 글을 잘 쓰는 유식한 여자가 아닙니다. 천한 취급을 받고 살아온 천박스러운 사람에 속합니다. 대체적으로 그런 사람은 직선적으로 말을 하지 말을 조리 있게 꾸미거나 상대방 기분에 맞춰가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있는 대로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수식어 없이 그냥 말할 뿐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믿던지 안 믿던지 그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입니다. 말한 것도 예수님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역사를 내다볼 줄 아는 그런 힘이 있어서 ‘앞으로 예수님의 복음은 기독교라고 하는 공동체가 되어서 온 세계에 퍼지게 될 터인데 기독교의 부활이 기초가 될 것인 예수의 부활을 좀더 현실감 있게, 조리 있게 말해야 되겠다.’라는 계산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시체라도 돌봐드리는 것이 나의 최대의 예의라고 생각을 해 향품을 준비하고 보통 그 문화권에서 시신에게 발라드리는 향유를 준비해서 갔다가 단순히 이런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것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을 한 명 만났습니다. 나면서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공격적으로 말합니다. “네가 어떻게 해서 눈이 떠졌느냐? 너는 그러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느냐?” 그는 대답합니다. “나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노라. 그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고 전에는 내가 보지 못하다가 그 사람을 만난 후에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 이상은 내게 묻지 마시오.”라고 말했기 때문에 진리인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증언은 가장 힘이 있는 증언이 됩니다. “내가 본 것은 오직 그가 죽었는데 살아난 예수를 보았노라. 그것을 당신들이 믿던지 안 믿던지 그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내가 본 것을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럴 뿐입니다.
그 다음은 도마의 증언입니다. 도마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에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그랬습니다. 나중에 나타나서 제자들의 부활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사실의 확인을 시각적, 감각적으로 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노라.” 아마 이것은 실존주의 또는 사실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똑똑한 발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대로 응하시어 시각과 감각의 만족을 주었습니다. 그때 도마의 고백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도마 같은 의심 많은 제자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부활 증거에 큰 도움을 주게 된 것입니다. 감정이 빠른 베드로의 증언보다는 냉철한 이성주의자로서 사실적 확인 보도를 하는 도마의 증거가 더 신빙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도마는 그 이후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힘있는 증언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이 하지 못했던 감각적 확인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고 영적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 부활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여기 먹을 것이 없느냐?” 구운 생선 한 도막을 드리니 현장에서 잡수심으로 자신의 부활이 영적 존재만이 아니요 육체가 부활하심을 제자들에게 확인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본 것을 그대로 나가서 전한 것입니다.
저는 전에 미국에 있을 때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데 이발소 아저씨가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머리를 깎으면서 저한테 별 이야기 다 하는데, 아마 따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시간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머리를 깎으면서 누구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필재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합니다.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듣기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토렌스 장로교회가 있는데 이필재 목사님이 설교는 어떻게 하고…. 나중에는 그 사람은 걸어 다니는 예수님과 같이 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이필재 목사님을 잘 아십니까?” 그랬더니 “아, 그럼요! 이 동네에서 그 분 모르면 어떡합니까?”하면서 계속 수다를 떠는 겁니다. 그러다 머리를 다 깎고 나서 돈을 주면서 “제가 이필재 목사인데요.”라고 했더니 “예?” 뭐, 깜짝 놀라는 겁니다. “오늘 저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발소에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오늘 나에게 하신 말을 해주십시오. 그런데 그냥 하지 마시고 나는 이필재 목사를 만난 사람이요. 그분의 머리는 항상 내가 깎았소. 그렇게 하면서 말하면 더 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말도 많이 해서 팁도 많이 주고 나왔습니다.
증언이 힘이 있으려면 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격자도 자기 관점이나 생각을 너무 많이 개입시켜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해야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당신이 믿고 안 믿는 것은 나한테 상관이 없소. 그분은 살아나셨소.” 로마 군인들도 “어떻게 된 거냐?” 물었을 때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거기 뭐 설명을 붙이고 수식어를 붙여 논리적으로 만들어 무슨 삼단 논법을 적용시키고 이런 것들은 다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에서 눈 고침을 받은 시각장애인처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니고 나는 상관이 없어요. 다만 나는 보지 못했다가 그분을 만나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확한 진리입니다. 부활의 증언자들은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성경구절 18절에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내가 봤어요. 주님이 나한테 이렇게 말하라고 했어요. 그것만 말했어요.”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 부활의 증언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되어 마침내 온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구원하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로마 군인들 모두가 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지 않았지만 증언자가 된 것처럼 저희들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에 증언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부활하신 예수님은
요 20:01-21 / 조상호 목사
몇 년 전(90년대 말 4월경)에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의 내부가 누전으로 인해 완전히 불에 타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화재 장면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사람들이 TV 앞에서, 뉴스 시간에 열광하며 감동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소방대원들이 목숨 걸고 화재현장에 뛰어들어간 영웅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화재가 발생한 성당의 문화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것은 조그마한 한 상자 때문이었습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불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 걸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중으로 된 방탄 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뜨린 뒤, 조그맣게 생긴 한 상자를 안고 나왔습니다. 소방대원들은 토라노 대성당 안에는 수많은 명화와 조각품과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보물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이 상자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상자에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한 물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폭 1미터 5센티미터에, 길이 4미터 20센티의 삼베로 만들어진 한 천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2,000여년 전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것으로 알려진 세마포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달려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라는 관원이 향품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 드렸던 수의였습니다. 이 수의를 담은 상자가 불에 타지 않고 안전한 장소에 이르렀다는 뉴스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하찮은 천이, 왜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 조그마한 수의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지 사흘 째 되는, 즉 오늘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들어있는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물론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절 이하를 보면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인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를 급하게 서두름으로 인해 혹시라도 시신에 향품이 덜 발라졌을까 생각되어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이른 새벽부터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을 육중하게 막고 있어야 할 돌문이 옮겨져 무덤이 열려 있어 무덤 안으로 들어갔지만,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단숨에 달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와보니, 과연 여인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4절부터 7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신을 쌓던 수의 즉, 세마포만 가지런히 개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6절과 7절에 나오는 '놓였다'라는 단어와 '개켜 있더라'는 단어입니다. 시신을 쌓던 세마포는 머리를 쌓던 수건과 함께 아무렇게나 여지 저기에 나둥그러져 있지 않고, 잘 정리정돈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예언한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돌무덤에 장사 지낸 후에 모여서 모사를 꾸미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죽은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한 것을 기억하며, 혹시나 제자들이 죽은 시신을 도적질해 놓고서 부활했다고 말할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육중한 돌문으로 무덤을 막아 놓게 했습니다. 그리고 24시간 동안 파수꾼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가 내팽개쳐 있지 않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결코 도난 당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둑 맞은 집을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도둑맞은 집을 많이 가 보았습니다. 일관된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도둑이 들었던 집은 대부분 난장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옷장, 책상 서랍, 싱크대, 하다 못해 냉장고, 냉동고까지 뒤집어 놓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둑은 짧은 시간 안에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둑은 값비싼 물건을 찾기 위해 뒤집어 놓은 것을 다시 정리 정돈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하러 무덤에 갔다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무덤밖에는 서슬 퍼런 로마 병사들이 24시간 동안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는데, 무슨 여유가 있다고 시신을 싸고 있던 세마포를 시신으로부터 벗겨내서, 그것을 가지런히 정리 정돈해놓겠습니까? 시간이 없는 만큼 세마포를 벗겨 내지 않고 시신을 그대로 들고 갈 것입니다. 혹시 시신이 예수님의 시신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수건과 세마포를 풀어다 할지라도, 잘 정리 정돈 해놓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줄행랑을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이 잘 정리 정돈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인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아니면 천사들이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을 정성스럽게 개켜 놓아두었던 것입니다. 이 수의가 2,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위에서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은 시신이 없는 빈 무덤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1884~1973)라는 미국 선교사가 인도에서 선교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노방 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설교 중간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가지지 않은 것 한가지를 가졌소." 그러자 그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우리는 메디나(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유적지)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그러자 스탠리 선교사는 "고맙소. 당신의 말이 그대로 사실인데, 그것이 기독교의 다른 점이오. 우리의 주님은 부활하셨소.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 없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무덤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동기, 우리가 예배 드리는 동기, 우리가 찬양 드리는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나 이슬람의 마호메트나 유교의 맹자나 공자, 등의 세상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다 죽었습니다. 위대하다고 불리 우던 알렉산더 대왕도, 나폴레옹 황제도, 징지스칸도, 새종대왕도, 세상의 모든 군왕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무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무덤을 보존하고 무덤을 크게 하고 무덤에 비석을 세워서 그 사람의 업적을 기리며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1) 인봉과 장벽을 깨뜨렸다
그리고 무덤의 인봉을 깨뜨렸습니다.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원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의 부활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가장 먼저, 최소 수백 Kg에서 최대 1톤 이상 되는 큰돌로 무덤 입구를 막았습니다. 돌로 막아 놓으면 예수님이 못 빠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예언한대로 부활하더라도 무덤 안에서 죽으라고 큰돌로 막아놓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인봉을 하였습니다. 인봉을 떼어내는 것은 로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어느 누구도 로마 황제의 싸인이 들어있는 인봉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병사들을 배치하여 24시간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앞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무덤을 막아놓은 큰돌도 조그마한 돌맹이처럼 옆으로 굴러가 버렸습니다. 로마 황제의 인봉도 다 깨어져 버렸습니다. 로마 병사의 철통같은 경비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은 여러 가지 장벽과 세상의 인봉을 뚫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부활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장벽들을 깨뜨리는 부활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부활의 능력을 믿는 성도는 가로막혀 있는 여러 가지 인봉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죄의 장벽, 죽음의 장벽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5절로부터 57절까지의 말씀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사망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너, 죽음이니?"하며 코웃음 치며 당당하게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멸망치 않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종국에는 승리의 삶을 살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부활의 능력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문제도 다 굴려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 된다고 인봉해 놓았어도 부활을 믿는 성도는 불가능의 인봉을 깨뜨려 버릴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반대세력이 가로 막혀 있어도 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아직도 절망의 터널 속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컴컴한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시체처럼,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큰돌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인봉 때문에 해보나마나 예요, 군인들 때문에 전진할 수 없어요."라고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온갖 장벽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육중한 돌문을 열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문제의 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로마 병사들의 철통같은 경비 속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원래 제자들은 예수님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믿었던 예수님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곧바로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본문 19절 상반절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지금 제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있습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든 문들을 꼭꼭 닫고 바퀴벌레들처럼 숨어 있습니다.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자, 제자들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두려워하던 제자들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20절). 그런데 여기 20절에서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주를 보고'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를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과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 신앙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바퀴벌레처럼 방안에 처박혀 고민하고 있습니까? 왜 문 걸어 잠그고 떨고 있는 제자들처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예수님이 사망 권세 깨뜨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중한 돌문을 굴렸다, 인봉을 깨뜨렸다, 모든 장애물을 극복했다"라고 배운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찬양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고, 기도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예배나 기도회에 참석하면 육신적으로는 피곤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야될 시간인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피곤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5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나서 맞이한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에 교회에 나와서 자정이 가깝게 되도록 찬양하고 기도하는데 피곤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남들은 산으로 들로 바다로 나가 즐기는 시간인 이 시간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데 피곤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배 시간에 조는 분들이 이해가 됩니다.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 육신이 피곤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회 때문에 삽니다. 비록 육신은 피곤하지만, 새벽기도회에 나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붙들고 기도하고 나서 교회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 날아갈 것 같습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천국에서 사는 기분입니다. 이 기분으로 하루를 삽니다." 이러한 유익 때문에 날마다 눈 비비며 새벽같이 교회로 달려오는 것입니다. 또 금요예배에 참석하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금요예배에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금요일에 나와 기도하고 그 힘으로 1주일을 살아갑니다." 주일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업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주일예배만 드리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예배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예배를 통해 위로 받고 예배를 통해 힘을 얻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배 가운데 주님을 만나면 피곤한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하루를, 일주일을, 평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주님을 만나면 기쁨이 넘칩니다. 찬양 가운데 주님을 만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나면 걱정과 염려가 사라지고 평강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배 때마다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므로 이러한 감격과 기쁨과 평강이 항상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 변함없이 사랑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문들을 걸어 잠든 채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반했던 배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위대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더 위대한 점을 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무슨 말입니까? 배신자였던 제자들을 다시 한번 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신 한번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부족하지만, 비록 그들이 배신했지만, 여전히 허물 투성이 같은 자들이지만, 계속 사랑하며 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과 다른 주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아마 저 같으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내 제자니? 그래 3년 반 동안이나 나를 따라다니며,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 도망치는 놈들이 어디 있니? 그래 베드로, 너는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이 여종 앞에서 나를 부인하고 나중에는 나를 저주까지 하니? 나는 도저히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없다. 내가 다시 제자들을 뽑겠다. 너희들과는 오늘 날짜로 끝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말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형편없는 자들도 다시 재생하여 쓰시는 명수이십니다. 주님은 실패하여 넘어진 자를 걷어차지 않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작년에 제가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팀의 김병현 선수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김병현 선수는 승승장구하다가 최종 월드시리즈 양키즈와의 4차전에 이어 5차전에서, 그것도 9회말 2사후에 동점과 2점 홈런을 계속 맞았습니다. 22세의 젊은이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올해 오뚝기처럼 다시 재기했습니다. 아직까지 정규 게임이 시작되지 않고 시범경기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상태로 볼 때 '그가 재기했다'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는 작년의 양키스 스타디움에서의 악몽을 딛고 연일 계속되는 경기에서 대단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한가지는 봅 브렌리 애리조나감독의 신임 때문입니다. 감독의 입장에서 볼 때, 두 번씩이나 크게 실수한 선수를 다시 쓴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김병현 선수를 포기해도 아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브렌리 감독은 달랐습니다. 비록 김병현 선수가 월드시리즈에서 홈런을 연속해서 맞음으로, 참피온 반지가 날아갈 뻔했지만, 계속해서 어린 김병현 선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줌으로 그를 재기하게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저와 여러분들이 실수하여 넘어졌다 할지라도,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재기시키는데 천재이십니다. 우리를 재생시키는데 천재이십니다. 저를 보십시오. 과거 형편없던 저를, 실패와 좌절 속에서 방황하던 저를, 인생의 목표도 없이 살아가던 저를, 주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재기시켜 주셨습니다. 당신의 도구로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앞으로도 부족한 저를 날마다 가르치시며 고치시며 만드시며 이끌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세우시고 인도하시듯이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인도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부족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허물 투성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변함없이 기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봉과 장애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기쁨을 주셨고, 배신한 제자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대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시며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사이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부흥>, <파송의 노래>, <세상 모든 민족이> 등의 찬양이 있습니다. 이 모든 찬양을 만든 젊은이가 고형원이라는 이름의 형제입니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예수 전도단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고형원 형제가 대학생으로서 열심히 활동했던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교회에서 밤을 세우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형제의 아버지가 이 고형원 형제를 붙들고 나무랐습니다. "야, 이 놈아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그랬더니 이 젊은이가 빙그레 웃으며 아버지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아버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예수가 우리 밥이에요. 아버지는 그걸 아직 모르실 텐데. 조금 있으면 아버지도 아실 것예요. 예수가 우리 밥이에요"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밥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원동력입니다. 우리를 승리케 하는 힘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잃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세상적으로 출세했다고 할지라도, 그 출세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예수 잃어버리고 재물을 얻으면, 그 재물 때문에 망하는 인생이 되게 마련입니다. 성공하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승리를 하더라도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높은 지위를 얻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없이 올라가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보다 앞장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없이 달려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가로막힌 모든 장벽을 깨뜨리고 주님의 주시는 기쁨을 누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