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사도 2,42-47; 1베드 1,3-9; 요한 20,19-31
부활 제2주일; 2023.4.16.; 이기우 신부
1. 하느님의 자비인 부활과 그 창조적 국면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를 마감하는 부활 제2주일이며, 이 부활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한 이름으로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기도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 덕분에 우리는 사도들이 부활을 믿기에 이르른 경위가 매우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광신적(狂信的)인 태도로 부활을 믿게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했습니다. 오히려 발현 체험을 바탕으로 부활을 믿는 합리적 태도야말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부활 신앙에로 이끌어주는 안전한 길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신앙의 표본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사도들 덕분에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이 거룩한 변화야말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만 씻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까지도 씻어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은총까지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복음에 나온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선사하신 일을 떠올리며,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처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새로이 창조하시려는 분이심을 깨닫고 창조적인 부활 신앙을 신자들에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게 된 사도들이 여러 가지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며 거룩한 변화를 보이자, 이로 말미암아 신자들도 창조적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그 거룩한 변화의 기운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사회적 실체였습니다.
2. 사기지은 1: 상하지 못함의 은총
이렇게 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온전히 영적인 몸을 지니게 되셨으면서도 아직도 믿음이 온전치 못해 영적인 몸의 활동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일상적인 육신 활동들을 여러 가지로 보여 주셨습니다. 즉, 못과 창에 찔린 상처가 남아 있는 몸으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 구운 물고기를 잡수어 보이시는(루카 24,41) 등 부활과 생명에 관해 말씀하시던 바를 입증해 보이셨으니, 이를 두고 ‘상하지 못함’의 은총이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19-20). 십자가 죽음도 그분을 절대로 상하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3. 사기지은 2: 빛남의 은총
또한 생전에도 이미 하셨던 가르침을 다시 상기시키심으로써 깨우침을 새삼 주시기도 하심으로써 흔들리던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셨으니, 이를 두고 ‘빛남’의 은총이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십자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지니신 진리의 빛은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빛난다는 뜻입니다.
4. 사기지은 3: 사무침의 은총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다인들에게 잡혀갈까봐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서 문까지 잠그고 꽁꽁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벽을 뚫고 들어가셨습으니(요한 20,19), 이를 ‘사무침’의 은총이라 합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믿는 이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마음을 모아 구하는 자리에는 그 어디든지 또 언제든지 그분이 함께 하시겠다던 약속의 실현이었습니다.
5. 사기지은 4: 빠름의 은총
더구나 부활하시어 영적인 존재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공간을 이동하는 데 있어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셨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더니(요한 20,16), 낮에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낯선 나그네 차림으로 나타나셨고(루카 24,15), 그들이 예루살렘에 숨어 있던 동료 제자들에게 가서 스승의 부활 소식과 발현 체험을 전하려던 그 자리에도 나타나셨으며(루카 24,36), 이번에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제자들을 모이게 하신 자리에 낯선 어부의 모습으로 또 나타나셨으니(요한 21,4), 이를 ‘빠름’의 은총이라 합니다. 과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고 하시던 분이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신 바는 결코 빈 말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기지은과 토마스의 확인성 발현체험으로써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신앙을 역사 창조적이며 공동체적 희망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선교적 전망과 함께 이 전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체험 위주의 선교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6. 공동체, 창조적 부활의 실체
제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토로하고 있는 고백은 부활 신앙을 창조적 전망 아래에서 바라보게 해 주는 결정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1베드 1,4).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은 나자렛 예수라는 한 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위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적 전망 아래에서 드디어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제껏 어느 문명에서도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적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생활입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에는 먼저 이적(異蹟)과 표징(標徵)들을 보여준 사도들의 역할이 있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이 놀라운 역사 창조의 업적은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잊혀져 가던 중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요한 23세 교황의 호소에 따라 초대교회 시절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이룩했던 공동생활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7. 한국 초대교회의 공동체, 박해시대 교우촌
그런데 공의회가 열리기 2백여 년 전에 보편 초대교회가 성령을 받고 나서 실천한 이 공동체의 전통을 한국 초대교회에서도 무려 백 년 동안이나 실천한 사례가 박해시대 교우촌이었습니다. 억압을 받거나 차별받지 않고 오로지 믿음을 살고자 심산유곡으로 흩어진 신자들은 의지할 데가 말씀과 기도, 성사와 교우들뿐이었습니다. 함께 경작했고 나누었으며, 함께 기도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박해가 닥치면 치명자의 자녀들을 거두어 기르며 공동체로 함께 살았습니다. 모진 매를 맞다가 고문에 못이겨 입술로 배교한 신자들은 그 배교행위가 죄스러워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철저히 가르쳤기에 한국교회가 박해에도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치명행위로 세워진 것만이 아니라 이런 입술배교자들의 신앙전수 노력으로도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우촌이야말로 한민족의 문명을 백년 이상 앞당긴 부활의 삶이었습니다.
8. 나눔의 공동체
그런데 오늘날에서도 보편 초대교회와 한국 초대교회에서 이룩된 이 공동체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인천 화수동에서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은 식사하러 오는 손님을 VIP로 대접하는 무료밥집으로서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만 합니다.
정부가 주는 돈이나 부자들이 생색내러 주는 돈은 절대 받지 않아도, 익명의 기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보내주는 돈과 식품으로 지난 20년 동안 꾸려 왔습니다. 배고파본 사람이 먹을 것을 나누는 법이고, 가난해본 사람이 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법입니다. 그밖에도 광주의 ‘해뜨는 식당’은 단돈 천원으로 푸짐한 밥상을 어르신들께 차려드리는 곳이고, 또 서울 정릉의 ‘청년식당 문간’이나 은평구에 세워진 ‘밥집알로’는 배고픈 청년들에게 식사를 나눕니다. 서울 명동 한복판에도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밥을 주는 '명동밥집'이 있습니다.
9. 섬김의 공동체
이런 나눔의 공동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공동체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정의기억연대’를 들 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서 꽃다운 10대 소녀 시절에 일본군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할머니들을 ‘나눔의 집’에 모시고 살면서, 이분들의 빼앗긴 인권을 회복해 드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끔찍한 기억을 지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섣불리 입에 담기도 어려웠으며, 더욱이 가족들에게도 봉양받기가 꺼려졌던 이 할머니들을 지난 30년 동안 섬기며 살아온 이들입니다. 이 할머니들이 나이 들어 갈수록 외로움도 심해졌겠지만, 치매와 고집, 불신과 의심도 심해졌는데, 마치 친정어머니 대하듯이 그 수발을 다 들어주었던 봉사자들 덕분에 요즘에 와서야 성 착취를 당한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이 국제연합에까지 메아리칠 수 있었습니다.
믿는 이들이 섬겨야 할 사람들이 어디 이들뿐이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서 소리 소문 없이 돕고 있는 섬김의 공동체들은 본당에서나, 단체들에서나 혹은 개인적으로나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제가 다 알지 못해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뿐입니다.
10. 성령을 받읍시다
다만 저로서는 이 나눔과 섬김의 삶이 부활을 사는 공동체의 삶이요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부활의 행동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고, 그리고 이 공동체의 생활양식과 부활의 행동방식에는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기지은 즉 ‘상하지 못함’과 ‘빛남’과 ‘빠름’ 그리고 ‘사무침’의 은총이 신기하게도 함께 할 것임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믿는 이들이 마음을 모아 구하고 또 그 기도를 당신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게 된다면, ‘나보다 더 큰 일’(요한 14,12)도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듯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믿는 이들에게는 아주 든든한 뒷배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의 행동은 하느님의 자비를 나눔과 섬김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 공동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보게 하는 세상의 빛이요 또 하느님을 믿게 하는 징표입니다. 이렇듯 공동체라는 새로운 생활양식과 부활의 행동양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려는 예수님의 숨을 받은 새 인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숨, 성령을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