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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 (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소리[제 16권 1호](통권 261호)(2014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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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眞僞)와 선악의 싸움터에서: 지난 날을 뒤돌아보며*
장 기 홍
오늘 이 자리에 서니, 여기가 벌써 여러 번째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전 학장께서는 여러분들이 대개 6순 또는 7순이라고 귀띔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2,30년간 대중을 위한 글이나 말을 삼가던 중 나이 그만 80이 되었습니다. 나이 생각은 않고 이 강연을 너무 쉽게 수락하고 나니 조금은 겁이 납니다. 저는 은퇴하고도 외국의 학술회의에 자주 참석했는데, 학술발표가 끝나면 야외답사를 꼭 합니다. 그때 안내인은 내 나이를 의식하고, 넘어지지 않게 낭떠러지를 조심하라고 자주 당부하던 것을 회상합니다. 이 강단 끝이 낭떠러지 같아서 그 때 주의를 듣던 일이 생각납니다.
요즘 뉘우치는 것은 내가 너무 감사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그 점입니다. 감사는 삶에 대한 긍정이며, 삶이 최고의 가치임을 알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凡事)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얼마 전 다리에 부상을 당해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보았는데, 여하간 걸음이란 신기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사지동물의 오랜 유전을 이어받아, 걸음을 걸으면 저절로 걸음이 걸어지는 그 자유는 놀랍습니다. 벌레나 새나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된 것이야말로 감사할 일입니다. 생각은 우주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아이가 커서 어머니를 알아보는 순간입니다. 존재가 무엇인가? 이것이 다 무언가? 이 무엇고? 이 무엇고? 하는 공부는 그 공부를 하는 사도(使徒)들을 통해서 우주 자신이 스스로를 알아보는 우주적 인식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우주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주가 스스로를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인식·평가하는 반성적 사고가 인간을 통해 있게 되었습니다.
6·25사변 때 저는 중등 학생이었는데, 동급생 중 소년병이 된 사람 중에는 전사자도 많았습니다. 살아남은 자로서 그들의 몫을 해야 하는데 싶습니다. 내가 입대를 하던 1950년대에는 병역 기피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기회에 응시하지 못했지만 병역을 마친 사람은 외국유학이나 기타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초청국에서 온 비행기표를 가지고 외유를 다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미성(美聲)이나 미남이 아닌 덕분에, 그리고 일찍 대학 교단에 섰던 덕분에 비교적 자유롭게 흥미에 이끌리어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그런 다행에 대한 보답을 말이나 글로 내놓아야 할 때이겠습니다.
* 2013년말 강연원고(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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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아침 우리 집사람은 강연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은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하라”고 당부했습니다만, 오늘 나 역시 별로 준비가 없어 예수님 말씀에 핑계를 대봅니다. 어려서 기독교에 익숙하게 자랐으므로 편리하게 이렇게 아전인수 격으로도 성경을 인용해봅니다. 또 요즘은 공자님을 많이 생각하고 논어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이 대학 사무실에 들르니 낯익은 벗들이 많아, 논어 첫머리에 “벗이 멀리서 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하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공자는 스스로 도덕군자는 못 되어도, 공부하는 일에는 자신 있게 내로라고 말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 역시 공부하는 일만은 내가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거짓이 많아, 그 때문에 사람은 진리추구를 목표로 살게 압력을 받습니다. 진위(眞僞)의 싸움터에서 진리 편에 서자면 바로 알기 위해 늘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남의 암시(暗示)에 지배받게 되고 사이비 성직자에게 중독되어 정신적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요즘 남한에는 종북(從北)의 무리가 많고 학생들에게 그 영향력이 대단한데 그들은 너무나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북한은 세습왕조가 되어 온 땅이 인권부재의 집단수용소가 되었는데 그들을 옹호하는 종북(從北)이 왠 말입니까? 인권부재의 북한에는 동포들이 거대한 수용소에 갇히어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악한 정권이 이 지구상에서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종북에 기우는 비(非)이성(理性)이 횡행함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자본주의의 개선을 위해 진정한 진보사상이 필요한 이때에 진보의 이름을 빌려 종북하는 무리가 있음은 큰 낭패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으로 일제 때를 살아온 우리는 실로 나라의 귀중함을 잘 압니다. 6·25 사변 때를 회상해보면 그때는 지금처럼 대한민국의 의미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인민군이 부산마저 넘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종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직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만 약은 사람들은 피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역사는 되고 난 후에야 의미가 확실해집니다. 종북(從北) 인사들 중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한민국’이라고 보는 축도 있다 하는데 상당히 빗나간 사람들입니다. 북한의 세습왕조 아래 들어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 해 전, 종북 군상(群像)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헐려고 했을 때 그것을 나무라는 글을 썼다가 항의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공부를 하여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되도록 끊임 없이 거짓이 섞여들고 타락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습니다(엔트로피의 법칙). 나는 철이 들면서 왜 일본은 이웃나라인데 그렇게 지독하게 싸우게 되었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한일고대사의 책을 모운 것이 지금은 백 권이 넘습니다. 일인들은 우리가 한일(韓日)동조(同祖)이니 합방(合邦)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은 고약한 논리지만 한일(韓日)동조는 타당합니다. 일본인의 유전자를 연구해보면 한반도의 주민과 약 90%가 공통이라고 하니 그들 조상이 압도적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일본 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 712년)와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는 백제가 망한 서기 660년보다 5,60년 후에 백제유민에 의해 쓰여졌다 하는데 ‘백제기’(百濟記)라는 백제의 역사서를 많이 참고했으나 ‘백제기’ 자체는 그 후 망실되어 없어졌다고 합니다. 일본역사책을 편집한 백제 유민들은 일본 역사를 쓰면서 백제 역사를 예사로 섞어서 썼던 것 같습니다. 일본미술 사가(史家)들은 자기네 ‘일본인선조들’이 아스가(飛鳥)와 나라(奈良)에 있는 고미술품을 창작했다고 감탄하고 감격하지만 그것들은 백제와 고구려 혹은 신라인이 만든 것입니다. 그들의 자칭(自稱) 위대한 선조는 한반도 사람들이었으니, 무엇이나 사실을 그대로 알자면 허심탄회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할 필요가 여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카인이 아벨을 살해했다는 신화는 사람은 처음부터 형제간에 살인자였음을 뜻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는 자식이 저도 몰래 아비(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왕의 자리에 올라서는 저도 몰래 자기 생모(生母)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살부취모(殺父取母)의 이 비극은 인간을 포함하는 생물계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원리입니다. 하나의 패턴(pattern)입니다.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조상은 한반도 출신이었을 터이지만 일본민족은 한민족을 통째로 먹고 땅을 뺏겠다고 획책했으니 바로 오이디푸스왕의 살부취모(殺父取母)의 실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한동안 가톨릭교회는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라 해서 교인으로 인정치 않았으나 지금은 면죄(免罪)되어 교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살인은 악(惡)이지만 정의를 위했으므로 그 면죄가 정당함은 물론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자식은 아비를 뜯어먹고 살다가 다시 자식에게 뜯어 먹히는 그런 순환이니 오이디푸스신화의 내용은 생의 실상을 잘 일러주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현상은 생명 전개의 중요한 원리의 하나라고 나는 봅니다. 그렇게 보면 정신분석학의 프로이드가 생각해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신화를 오해한 하나의 빗나간 학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어려서 한 번도 아버지를 라이벌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희랍신화의 해설서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프로이드박사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을 따르면 헛되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이 끝까지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소견이 들어서 입대해서인지 훈련소 철조망이 뼈저리게 부자유로웠습니다. 어찌하여 ‘나라’라는 게 있어서 나를 이토록 구속하는가? 왜 전쟁이 있고 사람은 서로 싸와야 하나? 왜 너와 내가 원수 되고, 나냐 ‘국가’냐의 기로(岐路)에 서게 되나? 왜 경쟁이 있고 싸움이 있게 되었나? 싸우지 않고는 안 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살생은 분명 악(惡)인데 그 악을 거부하는 나 자신과 총을 들고 살생의 기술을 배우고 있는 나 자신의 모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때나 요즘이나 모순에 두 다리를 걸치고 살아야 하는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어찌하여 ‘나’와 ‘나라’라는 두 자아(自我)가 있게 되었나? 하는 문제에서 실마리를 얻어서 지금은 우주 안의 대립자(對立者)들을 생각합니다. 주역(周易)은 정적(靜的)인 음양(陰陽)을 논했으나, 서양은 서로 다투는 동적(動的) 음양에 관하여 논했습니다. 동양은 조화하는 음양을 강조하고 서양은 싸우는 음양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여하간 다 음양이론이라 볼 수 있는데, 나와 너, 남과 여(男女), 자웅(雌雄)이 있고, 전기에도 음양이 있으며, 원심력·구심력의 짝이 있고, 전후(前後) 좌우 등 짝이 있고 쌍이 있습니다. 여당이 있으면 야당이 있는 사실도 대립자의 좋은 예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가 특히 대립을 강조했습니다.
대립자의 둘은 서로 보충하고 지지하는 ‘관계(關係)적’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이원(二元)적 일원(一元)입니다. 피타고라스는 10개의 대립자(對立者) 곧 홀수와 짝수, 제한된 것과 무제한(無制限)한 것, 일자(一者)와 다자(多者), 우와 좌(左), 남과 여, 정지와 운동, 곧음과 굽음(曲), 밝음(明)과 어둠(暗), 선과 악,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거론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대립자 사상에서 나아가 헤라클레이토스에 이르면 둘 상호의 투쟁이 더 강조됩니다. 동양의 음양사상은 주로 조화를 강조했지만 서양에서는 갈등과 투쟁을 중시했습니다. 헤겔은 대립·모순하는 동적(動的)인 정(正)과 반(反)을 생각하고, ‘正’ ‘反’이 지양·종합되어 합(合)이 된다는 변증법을 폈습니다. 그런 식으로 역사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주나 세계는 그러한 자동(自動)장치 혹은 자연(自然)장치라 보는 것이 나의 우주관입니다. 그렇게 운행·운영되도록 본래 그렇게 생겨나 있다고 봅니다.
피타고라스는 또 재미있는 말도 했습니다. 그는 세계를 경기(競技)장에 비하면서, 선수들이 있고 조직·관리자들이 있고 장사꾼들이 있고 관객이 있지만 그 중 최고는 관객이라 했답니다. 구경꾼이 최고라고 하면서 은근히 철학자가 사람의 으뜸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 자신 그런 구경꾼으로 자처합니다.
석가여래는 매우 철학적인 분이어서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물이 각각 상호의존(interdependence)적으로 존재함을 밝혔습니다. 주역의 음양(陰陽)도 음 속에 양의 씨가 들어 있고 양에 음의 씨가 들어 있어 서로 교대함을 논했는데, 석가는 ‘이것 없이는 저것 없고 저것 없이는 이것 없다’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을 중요시합니다. 노자도 유무(有無)상생(相生)이라 하여 유(有)와 무(無)가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임을 설했습니다.
기독교신학에서는 우주를 창조한 신과 피조물(被造物)로서의 우주를 엄격히 구별합니다. 나 역시 오래 동안 그렇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연기(緣起)의 개념을 철저히 적용하면 창조행위와 피조물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창조와 우주가 서로 의존적임은 우주가 곧 창조임을 의미합니다. 모든 부분에는 인과율이 적용되나 전체우주 그 자체는 인과율을 초월합니다. 우주는 끊임없는 창조이므로 창조라는 과정(過程)과 결과물은 별개가 아니고 하나입니다. 사람의 일상 경험에서 얻은 습관을 벗어나 상상해보면 창조과정 자체가 신이요 동시에 피조물이라는 직관을 얻습니다.
자연은 인과적 연기(緣起)사슬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질은 물체를 이루고 물체는 중력을 발휘하여 중력과 물체가 상호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전자(電子)는 물질이지만 파동(波動)이기도 합니다. 물질이 에너지와 같음은 연소(燃燒)를 보면 알 수 있고, 상대성원리에 따르면 물질과 에너지 간에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높낮이(고저, 高低)가 있고 남녀가 있고 전기에도 음양이 있고 육체와 정신이 있는 등 모두가 둘의 원리로 되어갑니다.
영어에는 built-in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장(內藏)이라는 뜻입니다. 자연계는 둘이라는 원리로 되어가는 창조가 내장되어 있다고 보겠습니다. 창조주가 그렇게 내장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본래 저절로 스스로 그러한 것 곧 자연(自然)입니다.
쌍 혹은 대립자(對立者) 중에서 ‘나’와 ‘너’의 대립과 선악(善惡)의 대립이 인간세계를 크게 지배합니다. 악과 선이라는 음양 이원(二元)의 쌍이 대립·지양·종합되어 역사라는 생명과정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관계는 상호 의존적, 연기(緣起)적이지만 내 연구 결과로는 악이 먼저 있어서 선을 요청하고 일으킵니다. 조물주는 이 세상에 악이 많도록 만들어놓고 악에 비추어 선이 빛나도록 장치해 두었습니다.
천적(天敵)의 악이 없으면 생물은 힘을 내지 않습니다. 그처럼 선악은 서로 협동하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선악이 별로 차별이 없어 보이기 쉽습니다. 격투기(格鬪技)를 한 동안 K-1이라 하더니 요즘은 UFC라 합디다. 그 격렬한 주먹질 발길질의 경기를 보면서 저것이 인생이라는 싸움터의 상징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두 팔을 가지고 얼싸안고 춤추는 수가 있겠지만 싸움의 관계에 들면 그만 피투성이가 됩니다. 어제도 격투를 구경했는데 대전료가 270억원이라 했습니다. 보기를 원하는 관중이 내는 돈에서 나온 액수이겠지요. 격투나 권투를 하다가 죽는 예가 많으나 별로 뉴스에 나지 않습니다. 스포츠라는 미명 하에 살인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므로 나는 격투폐지를 주장하고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아마도 선수들 자신이 내게 항의할 것입니다.
나는 경기를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싸움이요, 나 자신 진리탐구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세계평화는 싸울 에너지를 배움과 예술 등 고상한 싸움에 쓰도록 전환하는 일이라고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전쟁은 주로 청동기시대에 시작되었고 그 때 본격적인 국가가 처음 생겨났습니다. 자아(自我)는 싸움의 과정에서 단련(鍛鍊)되고 국가는 전쟁을 통해 성숙되어 왔습니다. 삶에 천적이 필요함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선악을 초월하여’ 독일민족이 최고의 힘을 발휘하자고 독려하면서 권력의지를 고취했습니다. 헤겔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 하면서 자기 조국 프러시아가 가장 이상적 현실이라는 뜻으로 국가·민족주의를 고취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의 영향으로 히틀러의 나치스가 생겨났고 힘을 얻어 악행을 하는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총통 히틀러를 찬양했고,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혈통을 순화하자 하여 그런 선(善)을 구실로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하는 악(惡)을 저질렀습니다.
하루는 나의 손자가 “할아버지, 선과 악이 따로 없다 하던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 교사가 그런 말을 했던가봅니다. 나는 즉각 미국에서 자주 있는 총기난사 사건을 들어, 무고한 아이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 악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교사들은 선과 악에 관해 먼저 분별심(分別心)을 일깨워준 다음 더 고차원의 생각으로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무고한 아이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저 문명한 나라 미국은 총기소지를 금하려 들지 않습니다.
14 년 전 대구 어느 골목길에서는 걸어가던 아동의 얼굴에 화학약품을 쏟아 부었던 살인사건이 있었고, 범인이 아직도 잡히지 않아서, 14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아이가 고통으로 발버둥치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악의 전형이 아닙니까? 매일 뉴스에 오르는 것은 대개 악의 장면입니다. 악(惡)이 너무나 창궐하는 세상입니다.
일찍이 배화교(拜火敎) 교조가 세상은 선신과 악신의 싸움터라 갈파했던 것은 정곡을 찌른 탁견입니다. 사람은 선의 편에 서야한다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위대합니다.
저는 자연과학을 전공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와 철학도 공부하여 저절로 마음에서 통일이 되었습니다. 공부에는 두 층이 있는데 일상(日常)생활에 유리(有利)한 공부가 있고 그 이상(以上)의 공부가 있습니다. 15 년 전 은퇴한 후로는 대체로 형이상(形而上)의 공부를 해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대하거나, 그것이 “우주에 있어서 무엇인가?” 하고 뜬 구름 위에서 생각합니다. 2천년, 2천5백년전 인류(人類)의 큰 교사들이 하던 그런 사상(思想)의 차원에서 서성대고 있다고나 할까요. 어찌 보면 조물주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물주라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겠나? 세상을 창조하자면 어떤 고충이 있겠나? 등등. 독일의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이 신의 최선(最善)”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비웃으며 프랑스의 볼테르는 ‘깡디드’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 깡디드가 ‘신의 최선(最善)인’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갖가지 비참한 고초를 다 겪는 장면들을 작가는 보여줍니다.
회고하면 나의 일생은 “하느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스피노자처럼 “대우주가 바로 그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진화를 공부해온 학도로서 우주 자체가 진화(進化)이며 신(神)이 있다면 바로 우주가 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통일의 경지를 목표로 삼습니다.
사람이 상대(相對) 세계에서 얻은 경험적 원리를 대우주에 적용하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자들은 빅뱅(Big Bang)으로 태어난 우주를 논하지만 그것은 대우주의 일부일 것이라고, 다시 말하면 무수한 빅뱅을 생각합니다. 상대 세계의 경험에서 착상(着想)한 물리법칙을 적용하여 파악한 그 우주는 부분적인 우주이지 대우주일 수 없다고 봅니다. 무수한 우주를 포함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영원·완전한 대우주를 상상합니다. ‘빅뱅’을 주장하는 물리학은 창세 때 시간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 이론은 기독교의 창세기의 의식구조와 같습니다. 중세 말에 화형을 당한 죠단노 브루노는 영원한 우주를 말했다 하는데 나는 그러한 견해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창조와 피조(被造)의 연기성(緣起性)은 창조주와 대우주가 하나임을 계시합니다. 소우주 곧 부분은 각각 목적이 있으나 전체인 대우주는 ‘거저 있어서 있는 자’요 계속 되어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창조주가 자기 즐거움으로 창조를 했고, “창조하고 나니 보기가 좋았더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주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으며, 밖이 없기 때문에 조물주가 우주 밖에서 어디다 발을 디디고 서서 우주를 창조할 그런 자리가 없습니다. 우주 자체가 창조이며, 창조의 과정입니다. 그런 우주는 우리의 궁극적 어머니입니다.
생물계의 삶의 원리 중 대표적인 것은 경쟁과 투쟁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5억년 내지 6억년 전의 해저에는 에디아카라(Ediacara)동물군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동물이면서 마치 식물처럼 영양분을 퇴적물로부터 흡수하면서 살았습니다. 당시는 아직 포식의 습성이 개발되지 않아 적대관계가 없었으므로 ‘에디아카라 낙원’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5.43억년 전에 시작된 캄브리아기(紀) 초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합세하여 동물들이 급속하게 다양화되고 다수가 된 고속(高速)진화가 이루어졌으므로 그 현상에 대해 캄브리아기 폭발(爆發, Cambrian explosion)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때의 대표적 양상은 눈(眼)과 포식(捕食)의 발달입니다. 시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잘 겨냥하고서는 공격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잡아먹는’ 포식이라는 먹이방법이 출현하자 비약적 진화를 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포식의 습성은 사람의 세계에 와서는 약탈과 전쟁으로 나타났습니다, 동물은 필요한 한 마리를 잡아먹지만 전쟁은 터무니없이 지나친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것입니다. 동물은 비교적 약한 개체를 잡아먹기 때문에 종족개량에 이바지하는 면이 있으므로 이 경우 악 속에는 약간의 선(善)이 들어 있습니다.
사는 데는 영역·영토가 필요한데 그 배분은 공평치 않게 점지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원인행위’를 하늘이 한 셈입니다. 이제는 사람이 나서서 그 불공평을 편탄케 하고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창조하기 위해 궁리해야 합니다. 하늘은 그런 필요성과 요청을 우리에게 부과했습니다. 정복자들이 남미의 인디오들을 섬멸하던 때에 인디오들은 전염병에 의해 더 많이 죽었다 합니다. 자연은 인정(人情)사정(私情)이 없습니다. 인디오의 신전 위에 가톨릭교회가 서서 감사 기도를 드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면 그 비(非)윤리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인정(人情)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합니다. 그런 요청이 있습니다. 인디오들에게 맡겨두었더라면 미개(未開)한 그대로였을 것 아니냐 하고 정복을 정당화하지만, 백인에 의해 남미가 개발되자 지구환경은 위태로워졌습니다. 개발이 되어 좋을 것이 없습니다.
미국남부는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사냥해 와서 대대로 노예로 부려먹다가 링컨 대통령 때에 와서야 해방되었습니다. 정의를 위해 신이 직접 간섭할 수 없음이 명백해진 오늘날 우리는 링컨 같은 이가 신의 대행자임을 명백히 압니다. 이 우주에서 신의 얼굴을 닮은 자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신에게 빌기만 할 것이 아니고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은 참과 거짓이 그리고 선과 악이 대립하여 싸우며 공존하도록 그렇게 지어져 있으므로 사람은 계속 탐구하여 참이라는 제 길을 찾아가야 하고 선을 실천하여 악의 관영(貫盈)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사명입니다. 세상에는 추악함이 관영(貫盈)하여 진선미가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도록 하늘은 세상을 그렇게 운용하며 그렇게 가르칩니다. 세계를 조금씩 낙원으로 개조하자면 사람은 폭력적 소질을 진리탐구와 문화창조의 싸움에 전환함으로써 겨우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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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모임
3목(木) : 1월 16일(목) 저녁 7시
장소 : 경북대학교 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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