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永慶(유영경):(1550~1608)-權力에만 執着한 失敗한 政丞 領議政(영의정) 尹承勳(윤승훈)이 밀려나듯 자리를 떠난 뒤 그 자리에 오른 人物(인물)은 柳永慶(유영경)이었다. 柳永慶(유영경)의 本貫(본관)은 全州(전주), 高麗顯宗(고려현종)때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代(대)를 이어 平章事(평장사)에 올라 家門(가문)을 들어냈던 柳邦憲(유방헌)·柳光植(유광식)父子(부자)의 後裔(후예)였다. 柳永慶(유영경)의 할아버지 柳世麟(유세린)은 參判(참판)을 지냈고, 아버지 柳儀(유의)는 비록 參奉(참봉)에 그쳤으나, 柳永慶(유영경)이 領議政(영의정)에 오르고 柳永慶(유영경)의 兄(형) 柳永吉(유영길)도 禮曺參判(예조참판)에 이르니, 아버지 柳儀(유의)도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어 家門(가문)이 크게 빛이 났다. 柳永慶(유영경)은 宣祖(선조)5年 23歲 때 文科(문과)에 올라 正言(정언)等(등) 淸要職(청요직)을 歷任(역임)하였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이 터지자 宣祖(선조)가 避亂(피란)길에 그를 招諭御史(초유어사)에 特任(특임)하니, 그는 全國(전국)을 누비며 義兵(의병)을 募集(모집)하는 等(등)戰亂初期(전란초기)에 낮은 職位(직위)에서 國亂克服(국란극복)을 爲해 크게 活躍(활약)하여 이름을 냈다. 1597年 丁酉再亂(정유재란)때 柳永慶(유영경)은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로 있었는데, 公人(공인)으로 家族(가족)을 먼저 避亂(피란)시켰다는 大諫(대간)들의 非難(비난)을 받아 罷職(파직)되었다가, 이듬해 兵曺參判(병조참판)에 起用(기용)되고, 派黨(파당)이 茂盛(무성)할 때 柳成龍(유성룡)과 함께 東人(동인)에 屬(속)했다가 東人(동인)이 다시 南人(남인)·北人(북인)으로 갈라지게 되자 北人便(북인편)에 섰고, 宣祖(선조)32年 그가 大司憲(대사헌)이 되었을 때 北人(북인)이 大北(대북)·小北(소북)으로 갈라지니 小北(소북)의 우두머리가 되어, 吏曺判書(이조판서)를 거쳐 右議政(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世子問題(세자문제)로 大北(대북). 小北(소북)이 서로 다툴 때 光海君(광해군)을 支持(지지)하는 大北派(대북파) 鄭仁弘(정인홍)等(등)의 强力(강력)한 攻擊(공격치)에 서게 되었다. 1604年 倭亂克服(왜란극복)扈聖功臣(호성공신)等(등)에 뽑힌 柳永慶(유영경)은, 全陽府院君(전양부원군)에 封(봉)해져 左議政(좌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孫子(손자)柳廷亮(유정량)이 宣祖(선조)의 딸 貞徽翁主(정휘옹주)와 婚姻(혼인)을 맺으니, 王實(왕실)과 戚族(인척)이 된 柳永慶(유영경)은 든든한 背景(배경)을 構築(구축)한 셈이 되었다. 이어 宣祖(선조)의 尊號(존호)問題(문제)를 들고 나와 領議政(영의정) 尹承勳(윤승훈)을 밀어내고 宣祖(선조)37年 12月 領議政(영의정)에 오르니 나이 55歲(55세)였다. 이리하여 柳永慶(유영경)은 宣祖(선조)의 信任(신임)아래 權力(권력)을 貪(탐)하기 始作(시작)하니, 民心(민심)이 기울고 賂物(뇌물)이 橫行(횡행)하여 百姓(백성)들의 입에 險談(험담)이 오고갔다. 宣祖末葉(선조말엽)柳永慶(유영경)은 宣祖(선조)가 慇懃(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는 永昌大君(영창대군)을 世子(세자)로 擁立(옹립)하려는 마음을 먹고 일을 꾸며, 16年間(16년간)이나 世子(세자)자리를 지켜온 光海君(광해군)을 밀쳐내고 襁褓(강보)에 쌓인 두 살배기 永昌大君(영창대군)을 王(왕)으로 삼고 永昌大君(영창대군)의 生母(생모) 仁穆大妃(인목대비)의 攝政(섭정)을 試圖(시도)하였는데, 仁穆大妃(인목대비)가 이를 反對(반대), 宣祖(선조)가 숨을 모우자 光海君(광해군)을 卽位(즉위)시킨다는 한글敎旨(교지)를 내려 버리니, 그의 꿈은 散散(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다. 1608年 2月, 曲折(곡절)끝에 王座(왕좌)를 차지한 光海君(광해군)이 柳永慶(유영경)을 그냥 두질 않았다. 3月 들어 柳永慶(유영경)을 咸鏡道(함경도) 鏡興(경흥)에 流配(유배)시키고, 9月에 自決(자결)하라는 命(명)을 내리니 그만 流配地(유배지)에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나이 59歲(59세), 柳永慶(유영경)은 悅(열)·悌(제)·善(선)·業(업)·昕(흔)다섯 아들이 모두 官職(관직)에 나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허물을 쓰고 한창 나이에 모두 몰죽음을 當(당)하고 말았다. 柳永慶(유영경)은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官爵(관작)이 되돌려 지기는 하였으나, 儒生(유생_들의 名簿(명부)인 靑衿錄(청금록)에는 그 이름이 削除(삭제)되고 諡號(시호)도 받지 못했다.柳永慶(유영경)의 失敗(실패)를 두고 <國譯燃黎室記述(국역연려실기술)>에는 이렇게 記錄(기록)되어있다. 『柳永慶(유영경)이 7年동안이나 國政(국정)을 擔當(담당)하면서 權力(권력)을 마음대로 하고,黨派(당파)를 甚(심)어 言論(언론)에서 非難(비난)을 받았음은 참으로 마땅하다. 그러나 그때 紀綱(기강)이 大綱(대강)섰고, 朝野(조야)가 조금 安定(안정)되었으며 또 사람에게 禍(화)를 끼친 罪(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끝판에 狼狽(낭패)하여 酷毒(혹독)한 禍(화)에 걸렸음을 사람들이 함께 불쌍하게 여겼던 까닭에 反正直後(반정직후)에 特別(특별)히 그 罪(죄)를 씻어주고, 그 官爵(관작)을 回復(회복)시켰던 것이다.官爵(관작)을 回復(회복)시킨 것은 너무 厚(후)하다고 더러 말하나, 오직 그 禍(화)를 받음이 너무 酷毒(혹독)하였음으로, 갚는 道理(도리)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柳永慶(유영경)의 孫子(손자)로 宣祖(선조)의 사위였던 柳廷亮(유정량)도 禍(화)를 避(피)할 수 없어 流配當(유배당)해, 오랜 土窟生活(토굴생활)을 하는 가운데 눈이 失明(실명)될 危機(위기)에 處(처)하기도 했다. 이때 柳廷亮(유정량)의 妻(처) 貞徽翁主(정휘옹주)는 媤(시)할머니와 媤(시)어머니를 極盡(극진)히 모시며 집안을 붙들려고 모진 苦生(고생)을 겪었다. 仁祖反正(인조반정)뒤에 풀려나온 柳廷亮(유정량)은 全昌君(전창군)에 封(봉)해지고, 崇祿大夫(숭록대부)에 올랐다. 丙子胡亂(병자호란)때 義兵將(의병장)으로 活躍(활약)하는 等(등)나라에 忠誠(충성)을 다했고,胡亂(호란)뒤에 淸(청)나라에 들어가 淸國(청국)에 잡혀간 百姓(백성)들을 歸鄕(귀향)시키는데 큰 功(공)을 세웠다. 뒤에 都摠官(도총관)에 올라 北伐(북벌)을 圖謀(도모)하기도 하였고,글씨에 매우 能(능)했다. 죽은 뒤 孝貞公(효정공)으로 諡號(시호)가 내려진 柳廷亮(유정량)은 아홉 아들을 두어 모두 官職(관직)에 나가 家門(가문)을 다시 이르켰다. 柳永慶(유영경)의 墓所(묘소)는 오늘날의 京畿道(경기도)南陽州市(남양주시) 別內面(별내면)德松里(덕송리) 全州柳氏(전주유씨)5 大封君(5대봉군)墓域(묘역)에 貞敬夫人(정경부인) 昌原黃氏(창원황씨)와 함께 마련되었다. 1892年에 墓域(묘역)入口(입구)에 세워진 神道碑(신도비)의 碑文(비문)은. 江原道觀察使(강원도관찰사)兼(겸) 水軍節都使(수군절도사)였던 柳永慶(유영경)의 조카 柳恒(유항)이 지어 두었던 것을. 그의 12代孫(12대손)柳大秀(유대수)가 써서 세웠다 . [출처] 歷史와 人物-9 柳永慶(유영경):(權力에만 執着한 失敗한 政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