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아가씨
강 문 석
한겨울에 애기동백꽃이 만발한 꽃동산을 만난 건 행운이자 감동이었다. 어찌 이리도 어마어마한 꽃대궐을 꾸밀 생각을 했으며 동백꽃은 어찌 이리도 종류가 많을까. 우리말 동백언덕을 ‘카멜리아힐Camellia Hill’로 이름붙인 건 지구촌 곳곳에서 찾아드는 손님을 배려한 것일 터이다. 섬나라의 청정한 공기에다 뒤로는 한라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바다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이곳에 동백꽃동산이 들어선 지도 어언 30년 세월이 흘렀다는데 깜깜하게 몰랐다가 오늘 갑자기 찾게 되니 반가움은 오히려 더했다. 희귀동백 5백여 종에다 6천여 그루의 제주도 자생식물 250여 종까지 갖춘 동양최대의 동백나무정원이었다.
동백꽃은 초겨울부터 봄까지 거의 반년이나 연달아 꽃을 피운다. 이곳 동백나무 잎이 유독 반들거리면서 윤기가 나는 건 온난한 기후가 생육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한 때문이리라. 몸서리치는 세한의 설중동백에서 고통을 견디는 지혜를 배운다고 하지 않던가. 겨울 동백은 씨를 맺자고 그렇게 붉은 피를 흘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동백꽃이 동박새와 공생관계라는 것은 새가 꽃가루를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새가 없으면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동백꽃은 진한 향기를 갖지 못한 대신 달콤한 꿀을 가졌다. 그래서 동박새는 먹이가 귀한 겨울철에 동백꽃에서 꿀을 얻는다. 동백꽃이 여성을 위해서만 세상에 나오진 않았을 터인데 관람객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사랑’이란 꽃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동백꽃은 사랑 얘기만 담고 있는데 왜 꽃을 대하면 먼저 애잔함이 묻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꽃잎이 여느 꽃들처럼 한 잎 두 잎 바람에 흩날리면서 떨어지질 못하고 꽃송이가 쑥 빠지면서 낙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도 싱싱하던 꽃잎이 어느 순간 바람도 없는데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에 예로부터 동백을 불길함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곳 제주도에서는 이 나무를 불길하다고 아예 집 안에 심지 않았고 일본에서는 떨어지는 모양이 마치 사무라이의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하여 동백나무를 꺼렸다. 그래서 동백꽃이 떨어지는 것을 춘수락椿首落이라고까지 했다. 동백나무를 나타내는 참죽나무 춘椿자가 들어간 춘사椿事는 불의의 사고나 있을 수 없는 불행한 일을 의미했다.
이때까지 그렇게도 싱싱하던 동백꽃이 소리를 내면서 툭 떨어져 드디어 썩고 마는 것을 연상하면 그것이 춘사라는 말의 뿌리일 것 같다. 그러고 동백나무에는 나쁜 병을 일으키는 역신이 꽃송이에 숨어 있다가 꽃이 떨어지는 순간에 함께 떨어져서 죽거나 달아난다고 여겼다. 즉 동백꽃에 깃들고 있던 영혼은 꽃이 떨어지면서 영육이 분리되어 영혼은 떠나고 육신인 꽃잎은 썩게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같은 동양인 중국에서는 동백을 전혀 다른 식물로 보았다. 아득한 옛날 대춘大椿이란 나무는 8천 년 동안을 봄으로 살고 다시 8천 년 동안은 가을을 살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래서 춘수椿壽는 장수長壽를 뜻하고 상대를 대접하여 그의 아버지를 춘당椿堂 또는 춘부장椿府丈으로 정중하게 말했던 것이다.
다만 애기동백꽃은 여느 꽃들처럼 꽃잎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동백의 본고장은 동양이지만 ‘동백아가씨’는 서양에서 먼저 탄생했다. 프랑스의 뒤마가 1848년 쓴 ‘동백아가씨’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변형하여 오페라로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다. ‘동백아가씨’가 영화와 노래로 만들어져 한국에 얼굴을 내민 것은 이보다 무려 116년 뒤인 1964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영화를 크게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연유에선지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당시 몸담았던 도시 대전에서였고 영화에서 감동을 받은 기억은 없다.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신파적 미혼모를 그렸기에 진부함을 느꼈던 것 같다. 섬 처녀인 주인공은 서울서 약초를 캐러온 대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임신을 하게 되자 서울로 첫사랑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미 남자는 외국유학을 떠난 뒤였고 거리를 전전하던 주인공은 자살을 기도하다가 결국엔 ‘동백 바’의 호스티스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도 그리던 옛 첫사랑을 만나게 되지만 남자는 이미 다른 여인과 단란한 가정을 이룬 뒤였다. 주인공은 아이를 남자에게 넘겨준 뒤 다시 섬으로 돌아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동아방송 전파를 탔던 라디오 드라마 ‘동백아가씨’가 1년 뒤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주제가도 함께 탄생하게 된다. 당시엔 영화에 주제가가 붙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작곡가 백영호는 영화 ‘동백아가씨’의 줄거리가 녹아있는 노래가사를 넘겨받고는 몇 차례 기타를 퉁겨보면서 거침없이 악보를 써내려갔다. 작곡에 걸린 시간은 단 2시간.
작곡가가 취입할 가수를 찾다보니 이미자의 애조 띤 음색에 잘 맞을 것 같았다. 당시 이미자는 만삭의 몸이었고 녹음실은 냉방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데도 영화 개봉일자가 다급하여 녹음을 미룰 수 없는 형편이었다. 스카라극장 근처의 목욕탕 건물 2층을 빌려 빈 계란포장박스를 벽에다 붙여서 방음공사를 했다. 배가 남산만한 이미자를 불러들여 악보를 건네면서 발을 얼음물에 담그게 한 채 악단반주에 맞추어 녹음을 시작했던 것. 이미자는 비지땀을 흘려가며 숨차게 동백아가씨를 불렀고 작곡가는 오히려 그 가쁜 숨소리가 애절한 곡조에 감정을 더한다고 여기면서 그대로 오케이 사인을 했다. 그랬지만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를 하게 된다.
하지만 뜻밖에도 영화주제가가 뜨면서 을지극장이 재개봉에 들어갔고 영화는 매진행진을 이어갔다. 당시 이 노래를 보급한 레코드사 앞에서 이틀을 기다려야만 판을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주제가가 영화를 살렸던 것이다. 레코드사 대표는 당시의 음반 10만장 판매는 1990년대 수립한 역대최고의 음반판매량 2백만 장과 맞먹는 기록이라 분석했다. 열아홉 살에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가수 이미자를 엘레지의 여왕 자리에 올려놓은 노래가 바로 ‘동백아가씨’였다. 196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친숙한 ‘동백아가씨’가 아닐 수 없으리라. 당시의 트로트를 이끈 대표곡이 '동백아가씨'였기에 노래를 부른 가수 본인도 가장 애착이 가는 곡으로 지금도 꼽고 있다. 이미자는 이 노래로 가요계에 혜성처럼 나타날 수 있었으니 왜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그의 노래에선 가련함이 느껴지고 애절함이 있어 사람들은 열광했을 것이다. ‘동백아가씨’가 탄생한 해에 난 대전을 떠나 부산에 발을 디디니 항구도시에선 시도 때도 없이 ‘동백아가씨’가 울려 퍼졌다. 남포동 극장가나 술집골목은 말할 것도 없고 하숙집으로 오르는 골목어귀의 레코드점 스피커에서도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이 흘러나왔다. '동백아가씨'는 부산 사람들이 만든 노래였다. 노랫말을 지은 한산도는 부평동에서 나고 곡을 만든 백영호는 서대신동에서 났다. 그런데다 영화의 첫 장면을 다대포에서 촬영했으니 부산은 온 도시가 ‘동백아가씨’ 열풍에 휩싸일 만도 했다. 자신이 30년 넘게 살아온 부산의 정서를 ‘동백아가씨’의 노래 선율에 녹여냈다던 생전의 작곡가가 떠오른다. 무심한 세월 속 그리운 얼굴이 아닐 수 없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신 임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