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박목월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어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回)하는 뒷길 어느 산에서 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조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默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시집 『청담(晴曇)』, 1964)
[작품해설]
이 시는 여행자마다 달리 나타나는 독특한 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인생에 대한 다양한 상념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로 되어 있는 이 시는 화자의 공간 이동에 따라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화자는 ‘유성→조치원→공주→온양→서울’이라는 공간적 이동을 하고 있다. 화자의 존재 의미는 이 공간의 변화에 따른 ‘나무’의 이미지로 변주되어 드러난다. 화자는 공간을 바꿔가며 여러 대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나무’라는 하나의 존재만을 지향한다. 이는 결국 이동을 통한 ‘존재’에의 접근 양식이 되며, 이 접근 양식에 따라 ‘나무’라는 존재의 전이 양식이 결저욈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공간의 이도에 따라 존재 의미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단락 | 공간 | 장소 | 이미지 | 인상 |
1단락 | 유성→조치원 | 들판 | 수도승 | 묵중함 |
2단락 | 조치원→공주 | 마을 어귀 | 과객 | 추워보임 |
3단락 | 공주→온양 | 산마루 | 파수병 | 워로워 보임 |
4단락 | 온양→서울 | 내 안 | 그들 | 묵중·침울·고독 |
1단락의 ‘유성→조치원’의 이동에 화자가 발견한 ‘나무’는 ‘들판’에 있는 ‘늙은 나무’로 ‘우두커니’라는 모습느오 나타난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지향없이 수용하는 자연에 대한 사실적 인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아무런 걸림이 없는 ‘들판’과 대응한다. 이 같은 들판에 ‘우두커니 성 있는 늙은 나무’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자연적 존재의 모습으로, 그것은 화자의 의식에 따라 ‘수도승’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존재인 ‘늙은 나무’에서 인격적 존재인 ‘수도승’으로의 의미 전이를 통해 ‘우두커니’도 ‘묵중한’으로 바뀌게 된다.
2단락에서는 ‘조치원→공주’로 공간이 이동되고 시간은 ‘다음날’이 된다. 이 때 나무는 ‘그들’이란 생명적 존재로 바뀌어 있으며, 장소는 ‘가난한 마을 어귀’가 된다. 마을이란 사람이 모여 사는 장소로 ‘그들’과 ‘마을’은 상등되며, ‘멍청하게’의 상대인 ‘그들’이 시간의 흐름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그들도 ‘과객들’이라는 시간을 상실한 인격적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화자의 의식과 결부됨에 따라 ‘추워 보이’는 실존적 존재의 표상이 된다.
3단락은 ‘공주→온양’의 이동 공간 중 ‘우회로 뒷길 산마루’에서 만나는 ‘나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산마루’는 공간을 초월하려는 지향성을 보여 주며, 이러한 지향성은 ‘하늘문’이라는 공간성으로 나타난다. 하늘 / 지평의 대응에서 그 지향성은 ‘하늘문’에서 ‘문’에 차단됨으로써 그들은 고독한 실존적 존재가 된다. 나무들이 ‘파수병’으로서 전이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화자의 이 같은 의식 때문이며, ‘외로움’은 그들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4단락은 이동 공간이 ‘온양→서울’이지만, 이것은 결국 화자의 공간으로의 회귀이다. 그러므로 나무라는 자연적 존재는 앞의 1·2·3 단락들의 요소를 통합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즉 나무라는 존재는 ‘묵중’ · ‘침울’ · ‘고독’이라는 존재성을 드러내며 화자와 동일화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시인이 여행하면서 목격하게 된 나무들의 세 가지 모습을 ‘묵중’과 ‘침울’, 그리고 ‘고독’의 세 가지 양상으로 변전(變轉)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소개]
박목월(朴木月)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중 동시 「퉁딱딱 퉁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이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73년 『심상』 발행
197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산도화』(1955), 『란(蘭)·기타(其他)』(1959), 『산새알 물새알』(1962),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시선』(1975), 『백일편의 시』
(1975), 『구름에 달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크고 부드러운 손』(1978),
『박목월-한국현대시문학대계 18』(1983), 『박목월전집』(1984), 『청노루 맑은 눈』(1984),
『나그네』(1987), 『소금이 빛하는 아침에』(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