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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심
요 20: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11-18 /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막16:9-11] 그런데 마리아는 다시 돌아와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 12) 무덤 안에 흰옷을 입은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를 모셨던 자리의 머리맡에,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앉아 있었다. 13) 천사들이 그 여자에게 물었다. `왜 울고 있느냐?'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누가 내 주님을 모셔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 자기 등뒤에 서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분은 예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5)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예수께서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만일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가셨다면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제게 알려 주세요. 제가 가서 그분을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를 향해 돌아서서 `선생님!' 하고 소리쳤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아직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을 찾아가서 내가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말하라.' 18)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만 확인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최초로 목격한 주인공이 됩니다.
무덤 안에 고정된 신앙(11-16)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마리아는 여전히 빈 무덤에 남아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향한 마리아의 사랑이 열두 제자들보다 오히려 더 깊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무덤 안을 들여 보았을 때,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누워 있던 곳에 앉아있고, 그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간 줄 알고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통 예수의 시신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과 슬픔 때문에 그 시선은 오직 빈 무덤에만 고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또 있습니다(14). 그 남자도 천사들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를 동산지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라면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 줄을 알 것 같아서 그 사람에게 간청을 합니다. “당신이 시신을 옮겼으면 내게 이르소서” 그러나 그분은 동산지기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예수였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반가워서 “랍오니(선생님)!”라고 소리치며 예수의 품에 안기려고 했습니다(16). 예수와 마리아가 대화를 나누는 곳은 무덤 밖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번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그 누구도 부활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대로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 밖으로 나와 마리아 등 뒤에서 함께 계셨지만 마리아의 관심은 오직 무덤 안에 주님의 시신에만 고정된 무덤 안의 신앙에 머물러 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의 증언(17-18) 마리아는 빈 무덤이 예수의 시신이 도둑맞은 증거가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증거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난 것이 너무 기쁜 마리아는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붙잡지 말라” 말씀하시며, 마리아에게 부활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주십니다(17).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되어 예수의 말씀을 전하려고 달려갔습니다(18).
적용: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양을 몰고 산에서 내려오면 양들에게 가벼운 상처가 늘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목동이 양들이 지나는 길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길가 한곳에 작은 가시나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동은 가시나무를 자르기 위해 그곳으로 갔지만 나무를 자를 수는 없었습니다. 가시나무에 걸려 있는 양털들을 새들이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에 걸린 양털들로 새들이 둥지를 만드는구나!" 우리의 작은 희생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고, 배고픔을 채워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아픈 곳을 치료해 주며, 학업을 이어가게 도와주고, 세상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을 선택하겠습니다.
< 설 교 >
여자여 왜 우느냐
이규현 목사(수영로 교회)
예수가 과연 하나님이신가’는 예수님 시대에 아주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이고, 동일한 육체를 입고 있는 예수가 하나님 되심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위대한 말씀들을 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정치적 목적으로 빌라도가 손을 들어준 것도 있지만, 사실은 종교적 이유가 더 컸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는 말은 죄이고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형제들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가 기적을 행할 때,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메시아의 흔적이 보이니 환호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기대를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걷고, 풍랑이 잠잠해지고, 소경을 눈뜨게 하는 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를 했는데 예수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십자가에서 죽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예수님의 최측근인 제자들마저도 예수를 부인하고 떠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 4복음서의 기자들은 성경을 기술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부활을 알리려고 합니다. 특히 요한복음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그가 살아나셨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진정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면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을만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사건은 성경의 약속대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말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우리의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 입니다. 믿음의 대상에 따라 믿음의 진정성이 결정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대상이 잘못되면 큰일 납니다. 믿음의 대상이 온전하지 못하면 인생이 망합니다. 지금 우리도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우리의 믿음의 대상, 예배를 받으시는 그분이 과연 신뢰할만한가, 진정 하나님이신가라고 하는 것에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만약 그가 살아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분이 과연 믿을만한 분인가 하는 것의 핵심은 구약에서 말씀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이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사건을 통해 온 천하에 하나님이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활사건은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많은 절기 중에 부활절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도 예수님이 탄생한 성탄절에는 시끌벅적 하지만 부활절에는 조용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부활절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 될 수 있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역사 속에 찾아오신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부활로 확신됨으로 역사의 판도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사건은 창조의 역사와 맞먹는 사건이라고 봅니다. 인류가 창조를 받고, 죄로 인해 축복과 은혜가 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사건으로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역사가 저주의 문을 깨고 새로운 생명의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창조와 맞먹는 능력입니다. 죽음의 저주를 영원한 생명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활 사건이 일어난 정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되고 난 후 무덤에서 사흘 동안 계시다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4복음서에는 여인들이 먼저 무덤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결정적인 순간에 여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만 언급됩니다. 11절에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라고 하는데 이 당시 유대의 무덤은 굴 안에 시신을 넣고 큰 돌로 입구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돌문이 옮겨져 있고 시신은 없고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곱게 개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천사가 예수님의 발과 머리가 있던 곳에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님이 죽은 사실에 절망한 데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고 망연자실한 것입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너무나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졌던 희망과 기대를 상실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죽음은 어떤 희망도 사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그런 기대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특히 죽음은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사랑하던 가족이 병에 걸렸거나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죽음은 참 무자비합니다.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류에게 가장 무섭고 잔인하고 강력한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문 11절에 마리아의 모습은 오늘날 죽음 앞에선 인간의 모습입니다. 죽음 앞에서 항거할 수 없고,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절망하며 울 수밖에 없는 모습은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울고 울어도 끝이 나지 않는 절망만 있는 것입니다. 이번 천안함 3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의 눈물을 보니 보는 사람도 눈물이 났습니다. 3년이 지났는데도 그 눈물이 다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울고 울어도 끝이 없고, 아무리 울어도 죽은 사람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죽기 전에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지만, 죽고 난 후에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절망 자체입니다. 그 고통 속에 우는 사람에게 “그만 울어. 됐어”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인생을 살아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우리 삶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죽음의 문제는 하나님 외에는 돌려놓을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무덤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셨는데도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있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을 조금도 생각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상식에 갇혀 죽음에 대한 확고한 결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말을 걸었을 때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도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망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시신이 있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지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를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도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무덤을 향해 눈을 고정하고 울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들이 말을 겁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내 주님을 누가 어디로 옮겨다 놓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예수가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무덤의 문을 열고 나왔지만, 마리아의 눈은 아직도 닫혀 있었습니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무덤만 바라보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예수를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애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 예수 없이 십자가만을 강조한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부활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실패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부활사건이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자랑은 빈 무덤이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 창시자의 무덤은 화려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 중에도 자비와 사랑의 인간 예수에 대해서는 존경하며 성자라고 말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해 기절설, 도둑설 등의 루머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무덤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야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열려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는 급반전이 일어납니다.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예수인지를 알아보지를 못했지만, 그때 예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리아에게 말을 거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 20:15)” 이 말은 “마리아야 내가 여기에 있는데 누구를 찾느냐, 이제 울지 말고 나를 보아라.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은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 20:16)” 예수께서 따뜻하게 부르시고,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정감이 넘치는 장면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를 부르시자 마리아의 눈이 열립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말인데, 큰 존경과 사랑을 담아 ‘아! 사랑의 주님 당신이시군요’라는 표현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마리아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이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서신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십자가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기셨던 그 그리스도가 부활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마 부활하신 몸은 원래 당신의 모습을 가지고 계시되 부활체로서 새롭게 변화가 된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충격을 받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반가움과 놀람, 충격, 경이로움이 뒤섞여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의 눈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야 왜 우니? 이제 울지 마. 이제 울지 않아도 돼”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은 오늘 죽음의 권세 앞에 눌려있는 우리를 향해 들려주시는 음성이라고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의 죽음 앞에 이별의 아픔은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죽음을 새롭게 정의하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의 출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승리가 됩니다. 이제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펼쳐질 시작입니다. 애곡으로 가득한 세상에 부활의 예수가 애곡을 멈추게 하시고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식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이대 총장인 김활란 박사는 자신이 죽을 때 장송곡 대신 헨델의 메시아를 부르고, 검은색 옷 대신 파티복을 입고 와서 천국으로 보내는 환송식을 해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죽음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축복이 부활의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절망과 탄식, 애곡소리가 가득했던 인류에게 주님은 마리아에게 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왜 우니? 이제 그만 울어도 돼. 내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장례식은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잠시 이별의 아픔이 있지만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고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영원히 주와 함께 있는 그날을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체의 장막을 벗으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장막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영광을 오늘 부활절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더 이상 애곡하지 않고 죽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신 사건 앞에서 기뻐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맞은 우리는 부활의 주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예배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금식도 하고, 조용하게 보내다가 부활절에만 반짝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영원히 부활의 주와 함께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정말 기뻐하고 기뻐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기뻐하느냐고 묻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하고 감격에 빠져야 합니다. 축제입니다. 부활은 모든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고 절대 절망을 절대 희망으로 바꿉니다. 이 부활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울하고 침통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삶의 중심에 놓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신나야 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주와 함께 기뻐하고 회복되는 역사가 주일마다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일상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은 하나의 교리나 주장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살아계신 주님과 생생하게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뿐 아니라 글로바와 그의 친구들도 예수님과 10킬로 정도나 동행을 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박제된 분이 아닙니다. 액자 안에 갇혀서 추모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한 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사건은 바로 죽음을 통과한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모든 것이 꽉 막혀 질식할 것 같고, 해답이 전혀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일으키신 주님과 함께 부활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디베랴 호숫가로 떠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워놓고 조반을 주시며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식탁에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절망적인 대화를 희망으로 바꿔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비로소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오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어도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죽고 난 후의 천국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지금, 부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은 부활의 능력에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면 비굴한 삶을 살지 않고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은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펄펄 살아나는 힘이 생깁니다.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1세기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 박해가 심했습니다. 원형 경기장 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몰아넣어 굶주린 사자에게 뜯기고 먹히는 장면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들이 경악합니다. 살려달라고 발악을 해야 즐길 수 있는데 죽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메시지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환란 가운데에서도 기뻐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힘은 부활에 있습니다.
이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의 일상에도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부활은 알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 20:17)」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마리아가 붙잡으려고 하니 주님은 더 이상 나에게 매달려 부활을 기뻐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이 부활의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하십니다. 마침내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외칩니다. 부활을 목격한 순간부터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은 인류 역사 최대의 복음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고 그가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은 인류 최대의 굿 뉴스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을 마음껏 기뻐할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이 부활의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이제 울지 말고 즐거워하라”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절망하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주신 부활의 복음, 이 소망을 알려야 합니다. 무덤 앞에서 죽음을 애도하고만 있지 않고 돌아서서 세상을 향해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 찾아와 희망으로 바꿔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김태환 목사
유대 관습(慣習)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 수(數)를 셀 때 여자를 세지 않았습니다. 여자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세지 않았습니다. 출애굽한 사람의 수가 60만이었는데(출애굽기 12:37), 이 수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출애굽한 사람의 수는 180만이 넘는 대 인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배불리 먹은 사람이 5천명이라고 했는데(요한복음 6:10), 여자들이 얼마나 많이 먹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에도 여자들과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먹은 사람은 15,000명 가량 되었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나가서 설교했습니다. 그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다고 했는데 , 그렇다면 실제로 세례 받은 사람은 3천명이 훨씬 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당시의 문화와 관습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유명한 사마리아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요한복음 12장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때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로 닦아 드렸지요. 그리고 마가복음 7장에는 병든 딸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왔던 헬라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마가복음 14장에는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도 마리아이고, 마르다의 동생 이름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달려 온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는데, 이 때 같이 온 여자도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이 마리아입니다(마태복음 28:1).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막달라는 가버나움의 남쪽, 갈릴리 바다의 서해안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여자였습니다.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8:2). 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심한 정신 질환(疾患)을 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 들린 것과 정신질환이 흡사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귀신은 악한 영(靈)입니다. 영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귀신이 들린 병도 정신질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병에 걸리면 정신 병원에 수용되어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 관습에서는 모든 질병의 원인은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죄의 대가로 질병을 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구 중에 누가 정신 병이 들었다는 것은 그 집안의 수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형편은 "일곱 귀신(seven demons)" 이라는 말 속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당했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우리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리아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의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行跡)을 우리는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아는 여자였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가 가진 소유(means)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에 병을 고치기 위하여 재산을 다 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아직도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리아 외에도 이렇게 물질로 주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능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도 자기의 물질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오랜 목회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물질까지 주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認定)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아직 물질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요?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해야 하는데, 왜 물질의 영역에서만큼은 아직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해 드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확실히 압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물질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저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합니다. 마태, 마가, 요한은 일제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모든 광경을 지켜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의 광경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어떻게 무덤에 장사지내는지도 지켜 보았다고 했습니다(마가복음 15:47). 막달라 마리아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붓고 시신(屍身)을 싸는 것을 모두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넣고, 무덤 입구를 큰 돌을 굴려다가 막는 것도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는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27:61)." 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계속해서 무덤을 떠나지 않고 무덤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무덤에 경비병들을 세울 때까지 하루 동안을 그렇게 무덤을 떠나지 않고 무덤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7:62-66).
그 무엇이 마리아로 하여금 그렇게 무덤을 떠나지 않게 했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Woman is weak, but mother is strong.)." 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어머니가 강합니까?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누구에게나 무덤은 기분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묘일(省墓日)이 되면 사람들은 가족들의 무덤을 찾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사랑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强勸)한다(Christ's love compels us. 고린도후서 5:14)."고 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소아시아 지방을 누비면서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from Jerusalem to Illyricum, 로마서 15:19) 그리스도도의 충성된 사도로서 복음을 전했던 그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노래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불가능한 일을 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까지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416장 가사(歌詞)를 아시지요? "하나님은 외아들을 주시는데까지 세상 사람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우리, 원수같이 대적하나 사랑하여 주네.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우리가 이 사랑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사랑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도 복음에 미친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요한복음 20:1)" 다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갑니다. 향품(香品, spices) 준비해 가지고(누가복음 24:1, 마가복음 16:1) 예수님께 발라드리기 위하여 다시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는 없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부터 무덤의 입구를 막을 때까지 모든 광경을 지켜 보았기 때문에 무덤을 잘못 찾았을 리도 없고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대신 예수님의 시체를 뉘었던 곳에 두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가 묻습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느냐?" 하고요. 마리아는 아까부터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울음의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누가 내 주님을 모셔갔습니다.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슬픔이 복받쳐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요즘에 울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감정이 메말랐다는 말도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울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슬픔이 복받쳐서 울고 있을 때, 누가 옆에서 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을 쳐다 봅니까? 보지 않습니다. 보지 않고 "흑흑흑" 하면서 계속해서 웁니다. 지금 자기에게 묻고 있는 사람이 천사인데도 그것도 모르고 "몰라요. 몰라. 누가 주님을 가져갔어요." 하면서 또 "흑흑흑" 하면서 웁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에서 찾느냐?" 하고 물어도 "몰라요. 몰라. 누가 주님을 가져갔다니까요." 하면서 또 슬피 웁니다.
놀랍게도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 뒤에 서 계셨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우십니까? 누구를 찾습니까?" 마리아는 뒤를 돌아 보았지만 동산에서 일하는 사람(gardener)인 줄 알았습니다. "혹시 우리 주님을 어디로 모셔 두었으면 말해 주세요. 제가 우리 주님을 모셔 가겠습니다." 이 때 마리아 뒤에 서 계시던 분이 "마리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자기를 부르는 분을 향하여 "랍오니!" 하고 불렀습니다. 이 놀라운 짧은 순간을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굳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시(詩, poem)를 산문(散文, prose)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 때서야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때 그 순간이 모든 세기(世紀)를 걸쳐 가장 위대한 순간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 우리 주님이 죽지 않고 살아 계셨구나!" 하는 것만 알았습니다. 시체마저도 잃어 버린 줄 알았던 그분이 이렇게 자기 앞에 살아 계신다는 것만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고 마리아는 "랍오니!" 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웬 일인지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한복음 10:14-15, 27, 5)." 이 말씀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교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교제의 핵심은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가가다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양은 그 덕분에 생명을 얻는 관계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타인(他人, stranger)과 타인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을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의 음성과 타인의 음성을 구별할 줄 압니다. 타인의 음성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에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선한 목자이십니까? 그분과 여러분의 관계가 생명을 주고 받은 관계입니까? 그분이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그 분 안에 있는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여전히 그분이 여러분에게 타인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말씀하셔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막달라 마리아에게 더 이상 주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상심(傷心)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덤이 비어 있고, 그분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준비한 향품까지 아무 쓸모 없이 되어 버렸을 때, 그녀의 상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여러 각도(角度)에서 잘 보십시오. 이런 마리아의 상심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마리아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음성이 주님의 음성인 것을 대번에 알았습니다. "랍오니!" 하고 주님을 부르는 그 순간에 마리아의 슬픔, 마리아의 상심은 치유(治癒)되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나를 만지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만, 더 정확한 번역은 "나를 붙들지 말라(Do not hold on to me.)." 입니다. "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또 그렇게 어려운 말씀도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제 곧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전 같으면 네가 나를 그런 식으로 붙들 수 있겠지만 이젠 내가 부활함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장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사도행전 1:14). 거기 모인 "여자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 120명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그 약속대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막달라 마리아는 이 말씀을 듣고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하는 메시지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논쟁(論爭)하는 것(arguing about Jesus)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meeting Jesus)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께서 살아 계신다고, 그래서 그분이 온 세상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주님께 대한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을 봅니다. 한번 주님께 받은 그 은혜를 평생 동안 사랑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심령(心靈)을 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메시지가 선포된 것을 봅니다. 그러나 더 위대한 것은 우리 주님,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 아무 짝에도 쓸모 없었던 한 여자를 그렇게 하나님의 도구(道具)로 만드신 우리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 동일하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삶을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도구로 변화시키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미 받은 은혜가 있습니까? 예. 있고 말고요. 그 은혜로 우리는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큰 은혜를 인하여(로마서 5:8)"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사랑과 헌신으로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과 생명을 주고 받는 관계로 들어 가십시오.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분을 여러분의 인생의 선한 목자로 삼고 그분의 음성을 따르십시오. 마음이 상심될 때도, 슬픔이 우리 눈을 가리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할 때도, 절망 속에서 빛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마리아!"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여러분의 몸을 성전(聖殿)으로 삼아 여러분의 심령에 들어와 계시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오창우 목사
할렐루야! 예수님의 크신 부활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말씀 중 17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들려 하고, 예수님은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수일과 심순애가 생각나십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었다.’ 개혁성경에는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개혁개정판에는 붙들지 말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도마에게는 내 옆구리를 찔러보라고 하고,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원어상에서 보면 ‘메투하투- 나를 잡고 늘어지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름 특성상 붙들 수 밖에 없는가 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막 달라 마리야” ^^
한번 붙잡으면 놓지 않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배워야 합니다. 오늘 부활의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것도 이런 성격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도, 제일 처음 본 역사의 주인공의 영광의 자리에 앉은 것도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자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안 계신다 라고 이야기하자 제자들이 가서 봅니다. 오늘 본문 전의 말씀을 보면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무덤에 없으면 시체를 찾아야지, 찾을 생각을 안 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래도 마리아는 남아서 울고 있습니다. 천사가 왜 우느냐고 묻자,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는 순간,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느라 누군지도 알지 못하고,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찾을 생각을 안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제자들도 믿었다고 하지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 때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바로 처음 주님을 만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영광의 자리이던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립니다. 신앙은 똑똑함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붙들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시편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모해야 합니다. 주린 영혼을 안타깝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응답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한번 했다 안 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저절로 우연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죽으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 엄청난 고통도 감수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부활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후의 부활이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벡스터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골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친구가 도시로 왔습니다. 도시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1년이 넘도록 아는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 두 친구가 결단을 했습니다. 한 친구는 다음주일에 가서도 나를 아는 체 안 해주면 나는 그 교회 끝이다. 다음 주일 이 친구가 교회에 왔습니다. 1년이 넘었는데도 아는체 안 하다가 그 날이라고 아는체 했겠습니까? 그 친구는 교회를 그만 두었습니다.
리처드 벡스터는 ‘자신은 그렇게 생각 안한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 가서도 자신을 아는체 안 하면 자신이 먼저 해야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먼저 가서 이야기했습니다. “저 리처드 벡스터입니다. 교회 나온지 일년 되었습니다. 같이 신앙생활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잘 가르쳐 주십시요.” 신앙생활하다가 복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하다가 보면 불편한 것이 왜 없겠습니까? 원망불평하다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원망 불평 합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면서 이 나라가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하자,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왜 고생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며 가서 미디안 군대와 싸우라고 하십니다. 불평하던 기드온이 우리 지파는 열두지파 가운데도 제일 약한 므낫세 지파이고, 그 지파에서도 저희 집이 제일 약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가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삼백명의 용사를 데리고 나가서 싸울때에 그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내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때부터 기드온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교회신앙생활하면서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그것은 남이 나에게 주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기쁨이 있고, 교회생활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 간들 불평할 일이 없겠습니까? 반찬투정하는 사람은 어디 가던 투정합니다. 그런데, 꼭 그런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불평은 습관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늘 소극적으로 불평만 들추어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깨끗하다고 됩니까? 아무리 다른 사람이 허물이 많고 깨끗하다 해도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은혜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 불행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부친은 중풍병자고 모친은 폐병환자입니다. 아이가 구걸해 오면 그것으로 먹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구걸해 온 돈 중에 십일조를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고 왼쪽의 돈은 네가 다 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할 수록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상황이 변합니까? 이 소년이 더 어려워지자, 미국가야겠다고 생각하여 화물선을 탔습니다. 그러다가 발각이 되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이 소년을 어찌할 수 없어, 선장이 소년에게 바닥청소를 시킵니다. 가만히 보니 소년이 보통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 선장의 마음에 감동이 있어 이 소년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미국에 가서 선장이 나이가 많아진 후로 배를 탈 수가 없어서 치약공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양아들을 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사업이 잘 되기 시작하는데, 금덩어리 네 자루씩을 거두어 들일 정도입니다. 이 소년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내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받는 길이다 해서 십일조 생활을 계속 했습니다. 이 사람이 콜게이트입니다. 콜게이트 치약을 아시지 않습니까? 콜게이트 대학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은혜는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데, 사모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 갈급한 사람,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 은혜 받을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른 것 없습니다.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은혜받아야겠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역사를 확신했을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풍선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것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처럼 살아 갑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안 됩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누군가 밀어주지 아니하면 움직이지 않는 수레처럼, 누군가 붙잡아주지 않으면 날아 가버리는 연처럼 안 됩니다. 우리는 시계처럼 우리의 자리를 지키면서 ‘째각째각’ 시계는 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만을 붙들고 사는 우리의 신앙 속에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가 붙들고 늘어집니다. 혹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요? 장금이가 제주도로 귀향가서 내가 다시 궁중으로 돌아가서 최상궁을 만나면 복수해야지 생각하던 마음은 아닐까요?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솥을 빌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안 빌려 줍니다. 세상은 공평한게 이 집에서 소쿠리를 빌리러 왔습니다. 빌려줘야 할까요? 말까요? “너는 안 빌려주었니까, 나도 안 빌려준다” 라고 하면 그것은 복수입니다. “너는 안 빌려줬으나 나는 빌려준다” 라고 하면 그것은 증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이렇게 붙잡았느냐고 묻자, 16절에 랍오니(선생님) 하니,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너희는 죽였지만 예수님이 살았다’, 이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 옛날처럼 우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언제나 배우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마리아의 신앙이었습니다. 부활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뀌어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신앙에서,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신앙인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부활의 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붙잡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다.
붙잡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싫다는 것도 아니고, 책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네가 나를 붙잡는 마음은 내가 아나, 나의 할 일이 남았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살고 싶지만 내 목적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가 나 있는 곳에 오리라’, 주님은 우리의 하늘 집을 준비하러 가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은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천년만년 살 집이 아닙니다. 천년 만년 사는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집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하늘시민 되게 하시려고 영생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려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러 하늘로 가시고 그러기 위해 부활하신 줄 믿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 이후 제자들은 하늘나라 소망을 갖고 사는데, 로마식민지의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한시적입니다. 모든 것을 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생스럽습니다. 이 세상의 나그네는 크게 세가지 나그네가 있습니다.
① 내가 나그네임을 모르고 사는 나그네입니다. - 여전히 집착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악착같이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도저히 질 수가 없습니다. 더 잘 먹고 더 잘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있습니까? 어떨때 보면 알뜰살뜰 사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되면서도 어떻게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저러다가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데려 가시면 억울해서 어떻게 죽지? 이 다음에 너무나 많으면 억울해서 못 죽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어떤 재벌이 하루라도 더 살게 해 주면 하루에 몇천만원씩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다고, 죽을 사람이 삽니까? 나그네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 남보다 이겨야 하고 많이 가져야 하는 사람은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② 염세적인 나그네가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잘 먹고 잘 마시고 허랑방탕하게 사는 것이 좋다라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최고가 아닙니다.
③ 정착지가 있는 나그네입니다. 바로 우리가 정착지가 있는 나그네입니다. 우리 나그네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 모릅니다. 구름이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그런 나그네가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늘나라 본향 집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날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에 쌓아두면 못 갖고 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쌓아두면 영원히 살터인데, 거기서 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잘 살아야 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아브라함도 나그네, 이삭도 나그네, 야곱도 나그네, 요셉도 나그네, 다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베드로는 많은 고난 중에 우리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무엇이라 합니까? 우리의 생명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합니다. 안개는 밖의 안개가 아니고, 밥솥에서 끓어오르는 수증기를 이야기합니다. 그정도로 짧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잘 먹으면 얼마나 잘 먹고, 못 먹으면 얼마나 못 먹겠습니까?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히브리서에도 보면 나그네로 잘 살아야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해 두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입니다. 너무 이기려고 아등바등 사는 것,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떻겠습니까?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며 도와주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서 칠판에 금을 쫙 그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여기 금에 손 대지 말고 이것을 길게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한 학생이 나왔습니다. 이 학생이 선생님의 금 밑에 조그맣게 그었습니다. “선생님의 금이 길어졌습니다.” 어떻게 길어졌습니까? “제 금이 작으면 선생님의 금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보다 낮아지고, 이 사람보다 겸손해 지면, 이 사람보다 작아질 때에 이 사람은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낮추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그 엄청난 기준을 갖고 상대하셨더라면 우리 가운데 구원 받을 사람이 한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만족스럽지 못합니까? 남편의 문제,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섬기러 왔다고 하셨고, 우리에게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왜 섬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불평과 원망,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마틴루터킹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위대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것은 섬김에 있습니다. 섬기는 것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백인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것은 낮아지면서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는 하늘의 시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섬기는 자가 되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도 있지’, 너그럽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소송걸지 말고, 따지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사님의 장례식을 하느라 벽제에 갔습니다. 다들 엄숙합니다. 목사가 성경을 들고 가는데, 벽제화장터에 있던 사람이 “비켜요.” 하면서 확 미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 열이 받는데, 마음 속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주위에 교인들과 유가족이 있고 경건하게 가는데, 미는 통에 문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기분이 안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그럴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밀치고는 무엇을 하나 했더니, 관에 명찰 붙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을 갖고 싸웠더라면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손해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집에 심방을 갔답니다. 그런데, 주인은 없고 아이만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좀 있다 온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바둑판을 들고 와서 바둑을 두자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바둑을 두는데 이길까요? 질까요? 당연히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한번 더 두자고 합니다. 그래서 또 두었더니, 목사님이 이겼습니다. 아이의 안색이 조금 변합니다. 그리고 또 두었는데, 목사님이 또 이겼습니다. 아이의 얼굴이 확 변하더니, 한 번 더 두자고 합니다. 또 이겼다가는 이 아이가 상처받을 것 같아 이번에는 져 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일부러 져 주는 것을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일부러 져 주었지요? 다시 두어요.” 그리고 또 두는데, 또 져 주었습니다. 그러길 수차례 아이가 바둑판을 뒤집으며 울고 맙니다. 심방을 왜 갔습니까? 아이와 왜 바둑을 두었습니까? 아이가 좋자고 한 일이었는데, 결과가 무엇입니까? 아이를 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렇습니다. 이긴다고 다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윈윈 합니다. 어떻게 서로 이길 수 있습니까? 내가 지면 됩니다. 이길수도 없고, 이겨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나를 좇으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남편에게 지시기 바랍니다. 아내에게 지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결혼하겠다고 오면 처음부터 져 주십시오. 그러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고, 그런 십자가 위에 부활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붙들고 늘어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섬기면서 내가 죽고, 십자가 지면서 살아갈 때에 부활의 기쁨이 우리에게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주 안에서 부활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 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부활의 아침
이정익 목사
부활의 아침입니다. 참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오늘은 아침 날씨부터가 새롭고 밝고 아름답습니다. 마음은 물론이고 생각도 뜻도 하늘까지 맑고 깨끗합니다. 지난 주일은 참 우울했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서 웃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편히 잠도 잘 수 없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그냥 고난이 아니고 참 처절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어떻게 웃고 놀고먹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passion of Christ "예수의 수난“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보니까 2천년 전에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받으셨것다 싶었습니다. 너무나 처절한 고난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젊은 청년은 사귀던 애인을 감쪽같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 애인이 누구도 의심 없이 자살한 것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고 감동받아서 몇 일전 경찰서에 찾아가서 자수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이런 결과도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은 고난을 생각하며 보내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세상이 확 달라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찬송도 달라지고 오늘 예배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오늘은 잔치 집에 온 기분입니다. 아주 밝고 환하고 소망적인 아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 세상에 부활의 선물이 주어졌고 이 땅에 부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소망도 주어졌습니다. 은혜도 주어졌습니다.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은혜와 힘도 주어졌습니다.
어느 영화를 보니까 할아버지에게 어린 손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손자가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나는 너보다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가 먼저 가는구나, 나도 곧 너를 따라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주안에서 부활해서 천국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자“. 이것이 부활이 준 복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귀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부드럽게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 부활이 준 은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과정이 아주 신비롭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금요일 낮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 밤에 무덤에 묻히십니다. 또 토요일 하루 종일 무덤에서 지내십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 일찍 부활하십니다. 그 아침이 바로 오늘 아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시는 방법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민첩한 마리아
주일 아침이 밝으려하자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생존시에 참으로 지극 정성을 다하여 사역하시는 것을 도왔습니다. 제자 보다 훨씬 나은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그 고난의 행렬을 끝까지 따라가며 눈물을 흘렸던 여인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도 이 여인은 모친 마리아와 함께 끝까지 십자가 행렬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가장 마음 아파했던 여인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충격 받은 여인도 이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정식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선도하며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여인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냅니다.
마리아는 금요일 밤, 토요일 하루 종일 주님이 무덤에 있는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주일 아침 일찍 날이 새기도 전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주일날 날이 밝자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가서 보니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세마포만 놓여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그 길로 제자들에게 뛰어갑니다. 그렇게 뛰어갈 때 마리아의 발걸음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성경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무겁게 무덤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 부활사실을 전하려 달려가는 이 여인의 발걸음은 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언자가 됩니다. 이 여인은 이런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여인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두 여인들 덕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삶에서는 여인들이 언제나 앞서 갑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믿음뿐 아니고 매사가 그렇습니다. 오늘 정치도 보면 남자들 시대는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여야 모두 여인들이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다 망쳐놓은 것을 여인들이 나서서 수습하고 있습니다. 또 사순절 기간동안 성경통독을 했는데 모두 12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남자는 20여명뿐이고 모두 여성이 나섰습니다. 성경을 읽는데도 보니까 남자들이 못 당합니다. 모두 여성들이 딱 부러지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도 보니까 남성들은 2-30% 정도이고 모두 여성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으로 목격한 사람이 여성이었습니다. 평소 제자들은 큰소리나 치더니 정작 예수님의 부활은 여인들이 전해주어서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첫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이렇게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는 이 간절함과 사모함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모함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초지일관하는 신앙인의 열정과 중심 있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제자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죽으실 때도 둔감하게 대처했는데 부활하셨을 때도 참 둔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에 제자들은 허둥댔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는 잠을 잤습니다. 가장 위급한 때는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니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부활 때도 날이 밝았는데도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도 마리아가 전해주어서 알았습니다. 2절을 보면 “마리아가 사건을 알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그때서야 “제자들이 비로소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민첩성에나 의지력이나 이해력에서 한결같이 둔감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각이 없으면 낙오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민첩성과 예민함과 의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깨달음이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민첩성이 떨어지면 이렇게 불행해집니다. 예수님 재림 때도 이 민첩성이 떨어지면 이렇게 낙오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다, 매를 갈다, 길쌈을 하다 하나는 들림 받고 하나는 낙오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 민첩성이 둔감해서 뒤쳐지는 것입니다. 이 다음 주님의 재림 때에도 이 같은 현상은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나타날 현상을 성경에서 미리 지적하고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유대인은 결혼을 밤에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들러리들은 반드시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은 밤늦게 옵니다. 그런데 민첩한 여인들은 밤새울 각오를 하고 기름을 미리 준비합니다. 그런데 민첩하지 못한 여인들은 준비도 없지만 그 밤을 인내하지도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허둥댑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불은 이미 꺼져가고 있습니다. 기름은 바닥나 있습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기름을 꾸어 달라고 하니 누가 꾸어 줍니까. 그때서야 기름을 준비하러 다니게 되니 무슨 들러리 입니까. 이것이 민첩성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여기 제자들을 보면 바로 이 민첩성이나 의지성 그리고 감각이 한참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낙오되고 순서에 밀리고 뒤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제자들이 더 한심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시몬 베드로가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여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예수님은 이미 부활했고 시체를 샀던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곳을 나가신 후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왜 만나야 하는가 하면 예수의 부활을 만방에 알려야 하기 때문에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했습니까. 엊그제 그 환란당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당했고 그래서 아픔을 당했고 기가 죽었습니까.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확인하고 나아가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 수모 당하신 예수는 죽지 않고 살아나 부활하셨다고 알려야 합니다. 또 그래야 실패한 제자들은 그 실수와 부끄러움을 만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제자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10절을 보면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도 조금 찾아보다가 없으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마디로 이 제자들은 자질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민감성이나 감각의 문제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질 자체가 떨어집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만 골라 제자로 삼으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제자들을 무지하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을 탓할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을 보면서 곧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제자들의 무지한 행동이 곧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을 읽음으로서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제자들의 무지한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보십시오. 11절을 보면 제자들이 돌아갔는데도 혼자 남아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다시 예수님 무덤 속을 또 들여다봅니다.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상이 있고 보상이 주어집니다. 찾는 자는 찾아지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돌아갔어도 혼자 남아 또 기다립니다. 그랬더니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 번째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보상이고 복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와서 찾다가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찾아지겠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달려가서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해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마리아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또 만났다는 보고를 받은 제자들은 무슨 심정이었겠습니까. 주님도 너무 야속하다는 생각 안 들었겠습니까. 우리는 명색이 제자인데 나타나시려면 제자들부터 만나주셔야 하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부터 만나주시는 예수님이 야속하고 또 서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알아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직분이 높다고 반드시 더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입고 영적성장을 이루는 데는 직분의 고하나 신앙연륜의 길고 짧음이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영적 생활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여기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매사를 그냥 봅니다. 자세하게 보질 않습니다. 물건을 사도 그냥 보고 삽니다. 값도 달라면 조금 깎아 보다가 안 되면 그냥 사 버립니다. 그래서 속기 쉽습니다. 가짜를 사들고 오기도 합니다. 퇴근길에 보니까 과일 한 상자가 5천 원씩 팔고 있습니다. 나도 빨리 집에 가려고 싸게 판다고 합니다. 지금 사지 않으면 금방 다 팔릴 것이라고 합니다. 퇴근하다가 생각하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찌 나한테 까지 오느냐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심 없이 사들고 당당하게 집에 와서 풀어보니까 속이 다 썩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아내로부터 안하던 한다고 핀잔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들 같으면 어림도 없습니다. 백화점에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물건 하나 사는데 참 구경할 만 합니다. 고르고 또 고르고 만져보고 뒤집어 보고 세심하게 살펴봅니다. 그래서 사려는가 보다 싶었는데 그냥 놓고 또 다른 곳으로 갑니다. 가서 또 살펴보다가 다시 와서 또 만지고 깎고 또 깎고 그러다 기어이 반값으로 깎아 사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그냥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는 복을 누린 것이 아닙니다. 그 만남이 있기까지는 그런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래도 명색이 제자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사건의 전후에서 역할이 막달라 마리아 보다 뒤로 밀린 것은 그런 민첩성이나 의지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 행동이 참 우둔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이 민첩성과 의지력이 참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응답받는 신앙의 요소입니다. 이것이 찾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이것이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만남의 복입니다. 또 이것이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응답의 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이렇게 소망을 주신 사건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죽음에는 새로운 질서와 혁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복된 승리인 것입니다.
마리아야 가서 이르라
김명혁 목사
부활하신 주님께서 누구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서 말씀을 하셨습니까? 수 제자인 베드로도 아니었고 주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인 요한도 아니었고 자신을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서 말씀하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고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던 폐인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부도덕한 길거리의 여자였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은혜로 일곱 가지 귀신들로부터 건짐을 받았고 일곱 가지 죄악들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그의 사회적인 배경과 지위는 여전히 낮고 천했습니다. 그런 비천한 사람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첫째, “마리아야” 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에 쌓여 있는 나에게 누군가다 다가와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될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죄인이었고 폐인이었던 나에게 나타나서 “마리아야” 라고 나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영광의 주님께서 한국 땅에 오셔서 한경직 목사님이나 조용기 목사님에게 먼저 나타나서 말씀하시지 않고 신체 장애인인 송명희 시인에게 나타나서 “명희야” 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면 송명희 시인은 너무나 놀라서 그 자리에 쓸어졌을 것입니다. 뿡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올려 다 보시면서 “삭개오야!” 라고 자기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너무 놀라고 기뻐서 정신이 나갔을 것입니다.
슬픔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서 "마리아야!" 라고 자기의 이름을 불렀을 때 마리아는 가슴이 뛰다가 멎는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마리아의 몸과 마음에는 천지에도 채울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환희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항상 쓰던 히브리 방언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왈칵 예수님의 몸을 붙잡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빼앗길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이제는 혼자서 살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였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서 말씀했을 것일까요? 추측컨대 주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뜨겁고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과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후 자기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항상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해석을 따른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즉시 예수님에게로 달려와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또한 몇몇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에서부터 온 많은 여인들과 함께 울면서 십자가 행렬을 따라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열 제자들이 다 도망을 쳤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십자가 아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집으로 간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 남아 있다가 예수님의 시체를 넣은 무덤에까지 따라갔습니다. 화가 루벤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옮길 때 막달라 마리아가 함께 도운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59-61).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지극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즉 주일날 이른 새벽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뜨겁고 간절하게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뜨겁고 간절한 사랑이 부활의 주님을 잡아 당겼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불러 일으킵니다. 마리아에게 두 번째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둘째,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마리아게 나타나서 가리켜 보여 주신 것은 땅이 아닌 하늘이었고 땅의 사람들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이 땅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복지 사회를 이루는 것도 아니었고 질병이 없는 건강 사회를 이루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늘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마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지금은 비록 사회적인 배경과 지위가 낮고 천할지라도 하늘 아버지 집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 몸이 지금은 이 땅에서는 질병을 지니고 살지라도 하늘 아버지 집에서는 그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 막달라 마리아에게 육신의 세계가 아닌 영의 세계를 보여주셨고 땅의 세계가 아닌 하늘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초 시간적 초 공간적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만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곧 하늘로 아버지께로 올라가지만 언제나 마리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보여주시고 심어주셨습니다. 주님을 그 무엇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는 송명희 시인에게도 주님은 자신을 보여주시고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나의 집”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밤이라면 하나님은 어둡지 않은 대낮, 세상이 잠시 있는 안개라면 하나님은 항상 계시는 피난처, 세상이 잠깐 거할 장막이라면 하나님은 영원히 거할 나의 집.” 막달라 마리아에게 세 번째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셋째, “너는 가서 이르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소명과 사명이 없는 삶은 동물보다도 못한 삶입니다. 나중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소명과 사명을 받았던 것처럼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소명과 사명을 받았습니다. 무슨 사명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전파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라.”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과 승천의 주님과 하늘의 주님을 전파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부활의 메시지를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전파한 사람은 수제자 베드로도 사랑의 제자 요한도 아니었습니다. 버림 받았던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성은 전도도 설교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인종 차별주의와 유교의 계층주의가 만들어 낸 비 성경적인 주장이고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주장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세상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성도들의 영광을 위해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뛰어가서 이 사실을 열 한 제자에게 전했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마리아는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도 달려갔고 부도덕한 사람들에게도 달려갔고 일곱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달려갔을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송명희 시인에게도 소명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가서 나를 전하라. 네가 말을 하기가 힘들면 네 몸을 보여주기만 해라. 네 몸으로 네 영혼으로 나를 전하라.”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한 평생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온 세상에 달려 가서 주님을 전했습니다. 지금도 한 손 가락으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전도의 편지를 쓰면서 주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고 송명희 시인도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관점에서 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2년 전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뜨겁게 전하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1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막달라 마리아의 1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증거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10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막달라 마리아의 10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자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너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주님을 너무도 증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우리들의 삶에서 날마다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과 저의 이름을 날마다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전하라는 소명과 사명을 날마다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 주님을 만났고 새벽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새벽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새벽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00야 너는 가서 이르라. 00야 너는 가서 이르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고 주님을 뜨겁게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영광에 주인공이 됩시다
최종원 목사
예수님의 부활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생명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한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너무나 다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이 행동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산 자의 행위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 부활을 믿는 자는 죽은 자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산 자로 살게 됩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약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된 부활입니다. 이것은 이 땅위의 어떤 원리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부활 자체는 완전한 죽음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된 것입니다.
② 죽음의 승리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승리의 고백입니다. 이긴 자처럼 기뻐해야 합니다. 이긴 자가 찡그리고 있다는 것은 이긴 자의 행동이 아닙니다. 승리는 우리를 가만있지 못하게 못합니다. 부활은 생명이요 승리입니다.
③ 구원의 확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부활로서 확증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는 자가 예수님이 부활할 것처럼 영원한 부활을 보장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라는 것은 진리의 확증이요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끝났으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 전파, 수고도 다 가치가 있다고 논증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믿는 진리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만 지고 끝나는 소망이라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고 고난을 이기고 주님을 위해 땀을 흘리고 수고합니까? 부활의 영광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확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부활에 대하여 생명이요, 승리요, 진리의 완성이라는 것을 그의 서신에서 자신 있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의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기록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처음으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여인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 역사적 사건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요,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뵙는 영광이 보잘 것 없이 천한 여인에 불과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돌아갔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수제자인 베드로를 비롯하여 열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70명의 전도대원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영광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영광에 처음으로 참여한 마리아의 신앙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서쪽에 있는 동네 이름인데, 유대인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붙여서 사용했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8장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던 여자였습니다. 그냥 보통으로 귀신이 들려도 고통스러웠을 텐데, 일곱 귀신이 들렸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폐인처럼 살던 그녀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3절에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55-56절에서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의 상황을 기록하기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쫓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섬기고 복음전파를 돕는 데 있어서 항상 맨 앞자리에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털어 그것으로 주님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 너무 귀한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소유를 아까워하지 않고 드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조금 봉사하다가 제 풀에 지쳐 그만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인 갈릴리지역 선교 때부터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그의 헌신적인 봉사는 계속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막달라 마리아는 헌신적인 봉사로 보답한 것입니다. 이렇게 헌신적인 숨은 봉사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하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또한 은혜 받고 일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많지만, 마리아와 같이 시종일관 변함없는 모습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헌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만,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소유를 털어 가며 주님의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구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평생을 말없이 봉사하며 헌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영광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2. 주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른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아래 서 있었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이미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동안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쫓았습니다. 한 때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은 어느 새 예수님을 향해 배신의 손을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떡을 얻어먹을 때는 좋아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고난을 받을 때는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고난받는 주님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양태는 오늘날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어 내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믿는 자 인양 하다가,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고 수치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문제가 있고 소원이 있을 때는 주님을 따르다가 소원성취하고 나면 '나 몰라라' 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속성에 관해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예수님의 천국을 탐하는 자는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위로를 소망하는 자는 많으나,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려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만찬 식탁에 나가려는 자는 많으나, 그분과 더불어 금식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그분과 더불어 기쁨을 누리고자 하나, 그분을 위하여 또는 그분과 함께 고통을 참으려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떡을 나누어주는 그분을 따르려는 자는 많으나, 그분의 고난의 잔을 마시려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분의 기적을 숭배하는 자는 많지만, 그분이 당하신 십자가의 치욕을 따르려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도 환난이 일어나지 않을 때뿐입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축복을 비는 사람은 많지만, 그분에게서 위로를 받을 때뿐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에게 어떠한 해가 오는지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되 자신의 이익을 좇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예수님은 부활 후 처음으로 나타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벌어지더라도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는 사람을 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3. 예수님께 대하여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 11).
요한복음 20장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부활주일 아침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찾아간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몸에 향유라도 발라 드리려고 찾아간 것입니다. 아무도 감히 무장한 로마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을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요한도,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막달라마리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을 찾았다(막16:1)고 했고, 마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마28:1)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무덤에 장사지내던 모습을 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온 것으로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 무덤을 찾은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전해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제자는 달려와 무덤을 보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는 확신하지 못한 채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슬픔이 북받쳐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되 깊이 사랑하며 섬겼던 사람이 바로 마리아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빈 무덤에서도 무덤을 떠나지 아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쉽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십자가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죽어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행함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만, 어떤 환경 하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은 더 빛이 나고 값이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한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적이고 깊이 있는 사랑이 있었기에, 주님은 제일 먼저 마리아를 찾아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15-17).
결국 슬픔에 잠겨 있던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과 평강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울고 앉아있는 마리아가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부활의 증인이 되는 영광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한낱 갈릴리 지방 막달라 출신의 평범한 시골 여인에 지나지 않던 그녀였었습니다. 한 때는 일곱 귀신이 들려 시달림을 받아야 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그녀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 받은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주님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에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복음서 기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인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바로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부활의 첫 목격자라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여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후 변함없이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았던 마리아,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뿐만 아니라 고난과 수치의 자리에도 함께 가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던 마리아, 그리고 남달리 깊은 사랑으로 주님을 섬겼던 마리아에게 주님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첫째 가는 사람이 되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새겨둘 중요한 부활의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해야 하는 부담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가진 자는 빨리 가서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절 아침에 가장 의미 깊은 다짐입니다. 행사로 끝나는 부활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배와 찬양이 있지만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 아침에 여자들과 제자들이 받았던 메시지는 이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심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큰 영광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부활의 새 아침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절망과 낙심으로 가득했던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부활의 새 아침이 되셨듯이 좌절과 낙심으로 쓰러진 무리들에게 희망의 아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새 아침이 펼쳐지게 하옵소서!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남길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
김명혁 목사
제가 3년 전에 “폐인을 증인으로” 라는 제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부활 주일 새벽 “사랑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라는 제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행복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는 사회와 가정과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폐인이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성경 학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부도덕한 여자였다고 해석했습니다. 스코트랜드의 유명한 설교자 매클라렌은 일곱 귀신이 일곱 가지 죄악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교만과 시기와 분노와 호색과 탐욕과 무절제와 영적인 나태함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던 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정신과 인격이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자기와 같은 폐인에게 나타난 것을 생각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천지가 개벽하는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 라는 뮤지칼이 있습니다. 그 뮤지칼에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 뮤지칼이 예수님을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한 것은 잘못이고 마리아를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한 것도 잘못이지만, 참고로 잠깐 마리아의 노래를 소개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이런 가사와 곡조로 노래가 시작됩니다. “나는 모르네 내가 그를 어떻게 사랑할지를. 무엇을 할지를, 어떻게 그를 움직일지를. 나는 참으로 변했는데, 나를 바라보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나는 모르네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를. 나는 모르네 그가 왜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그는 사람인데, 그저 평범한 사람인데. 내가 지난날 그렇게도 많은 남자들을 만났건만. 그런데 지금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고, 사랑을 말하고 싶고, 내 마음을 들어내고 싶으니. 나는 몰랐네 내가 이렇게 될 줄을.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그만 미칠 것 같아. 나는 그를 갖고 싶어, 나는 그를 사랑해.” 마리아의 인간적인 사랑의 한 면을 묘사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 깊이 체험한 후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을 더욱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상호 교환적이고 지속적이고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세 가지 사랑의 장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으며 눈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경 학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시합니다. 우리 개신교도 무의식 중에 그런 성경 해석을 받아 드리면서 이렇게 찬송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찬346). 저는 오늘 새벽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시하거나 또는 막달라 마리아와 비교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일곱 가지 귀신과 일곱 가지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다음 예수님에게로 달려와서 옥합을 깨뜨려 눈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눅7장에 나오는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닙니다. 누구든지 가정과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폐인이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와 사랑으로 죄악에서 건짐을 받아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가 하나님 앞으로 달려와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으며 눈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특별하게 다루신 것 같습니다.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저 여자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 털로 씼었느니라.” 사랑을 받은 죄인들이 사랑과 눈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받은 죄인들이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으며 사랑과 눈물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너무도 마땅한데, 눈물 한 방을 흘리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붓고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을 쏟아 부으면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의 소유로 주님을 섬기는 봉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눅7장에 눈물의 제사에 이어 눅8장에 봉사의 제사가 나옵니다. 눅8장에 나오는 봉사의 제사의 주인공은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니라.” 폐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을 섬기는 봉사 그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눅8장에 기록된 봉사의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랑은 봉사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제사를 드린 여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은 드려도 또 드려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을 섬기고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막15:41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한두 번 봉사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도 계속해서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을 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막15:41). 진정한 봉사에는 물질의 봉사가 따르고 시간의 봉사와 몸의 봉사가 따릅니다. 사랑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고, 사랑은 눈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사랑은 봉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는 물질이 아깝지도 않고 시간이 아깝지도 않고 자기의 몸이 아깝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봉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있는 동행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예수님을 좇아 다시면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함께 있고 가까이 있는 것이 제사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실 때에도 무덤 곁에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도 일요일 새벽에도 무덤 곁에 있었습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59-61). 이것은 금요일 저녁때의 일입니다.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28:1). 이것은 주일 새벽의 일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고 곁에 있는 것입니다. 제사도 예배도 시 공간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고 곁에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난 이후 항상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제이고 동행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함께 있지 않습니다. 멀리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따르는 막달라 마리아를 보시고 너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누구를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실 가를 생각하시다가 결국 막달라 마리아를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뜨겁고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이란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어야 하는데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건 현장에 항상 있었던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야!” 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버림 받았던 폐인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새벽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에 흠뻑 빠졌던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폐인, 일곱 가지 죄악에 사로잡혔던 죄인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를 귀신과 죄악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과 눈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기를 피로 사신 주님께 자기의 재물로 사랑과 봉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과 항상 함께 있다가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주님의 증인까지 되었습니다. 사랑은 상호 교환적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고, 받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상호 교환적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삶의 스타일을 바꿉니다. 삶의 직업을 바꿉니다. 물질 사용과 시간 사용을 바꿉니다. 사랑은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만듭니다. 사랑은 또한 나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 반대는 저주요 불행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 그 사랑에 흠뻑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눈물과 재물과 시간을 다 드려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김광일 목사
독실한 기독교인이 거리를 지나가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림을 보게되었습니다. 억제할 수 없는 감격 속에서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 소년이 옆에 와서 “아저씨,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예수님이시고요, 십자가 밑에서 슬픈 얼굴로 바라보는 분은 예수님의 어머니예요. 저쪽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거구요.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저 건너편에 있는 것은 예수님을 묻은 무덤이에요” 라고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기독교인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년의 신앙을 감탄하며 가던 길을 다시 가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갑자기 옷자락을 잡아당기었습니다. 돌아보니 아까 그 소년입니다. 소년은 헐떡거리면서, “아저씨,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부활사건을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절망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십니다. 답답하고 괴로울 때 위로해주시고 해결해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과 다시 삶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울면서 태어나 울리고 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울음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할까하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너무 슬퍼도 눈물이 나지만 너무 기뻐도 눈물이 나는 인생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는 향유를 발라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무덤을 바라보며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어찌하여 우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음의 뜻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어찌하여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고 있느냐의 뜻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포구에서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림처럼 떠있는 작은 섬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어 있는 그림 같은 아름다운 섬이지만 일찍이 이 섬은 중형을 받은 죄수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육지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지만, 배를 타고 가도 4-50분은 족히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섬입니다. 그리 멀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죄수들이 감사의 눈을 피해 교도소를 탈출하려고 바다로 뛰어 들어 헤엄쳐 도망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굽이도는 급류 때문에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해변가와 교도소 문에 그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오직 한길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당신 자신이 변화되는 길뿐이다."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 말씀은 마리아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부활신앙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요구였습니다. 힘들고 험한 세상 속에 살아 계셔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 주님을 깊이 사랑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주님 무덤에 올만큼 열심 있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무덤이었고, 죽음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모두가 불신앙적인 요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불신앙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부활신앙을 가졌을 때 절망과 슬픔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고독하고 외로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는 길 외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불신앙적인 상황에서 변화되면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 뵙고 철저하게 부활신앙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육체적인 죽음이 와도 다시 살 것이라는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앞에서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면서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는 모습에서 신앙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 “주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다시 살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때 삶은 긍정적인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적인 불신앙의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부활신앙을 언제나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찌하여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느냐의 뜻입니다
남극 탐험대가 추위와 피로로 극한적인 절망에 빠졌을 때 그들은 대원 숫자보다 늘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힘들 때면 언제나 나타나셔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그 분 때문에 그들은 그 어려운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탐험대로부터 직접 들었던 엘리옷 시인이 ‘제 3자’ 라는 시를 썼습니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 3자는 누구요? 세어보면 언제나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네.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서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은 누구요?"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뒤에 서 계셨는데 무덤만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고 물으셨을 때도 무덤지기인줄 알고 “내 주를 어디에 갔다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한다” 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바로 뒤에 서 계시면서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찾아오셨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여전히 빈 무덤만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지고 산다 하면서 때때로 좌절과 실패를 이유로 무덤만을 쳐다보는 삶을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찌하여 우느냐” 의 질문은 너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자세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등지고 서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대하였는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심한 슬픔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옳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세상만 바라보게 되면 절망과 눈물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서서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완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해결이 있습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향할 때 마리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무덤을 찾던 신앙이 이제 무덤을 내려가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염려하며, 슬퍼하며 올라가던 모습이 변하여 찬송하며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리아는 비로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하기까지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섬김은 섬김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는 아무런 기쁨도 희열도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답답함과 근심과 걱정으로 뒤덮여 있을 뿐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확신할 수 있을 때 바른 믿음 생활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서야 예배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세상의 방향인 무덤을 바라봄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향하는 영적시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찌하여 부활의 주님을 전하지 않느냐의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만 되면 즐거운 낯으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인사의 내용은 "예수 다시 사셨네" 의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그리스 정교회 사람들도 서로 만나 인사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면 "진실로 부활 하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를 공산당이 혁명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한 공산주의자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수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허구의 인물이고 사기꾼인가를 열심히 입증하면서, "이 중에 누구든지 내 이론을 반대해서 이야기할 사람은 나오시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안나올 줄 알았는데 한 젊은이가 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공산주의자는 당황해서 “5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시간제한을 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가 "나는 5분도 필요 없고 5초면 됩니다." 라고 하더니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공산주의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파됨을 막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른 새벽에 찢어질 듯한 아픔으로 고통과 한숨과 눈물 가운데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 고 하셨습니다.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지금 놀라운 소식이 처음으로 공포되는 소중한 시간에 서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울고만 있는 것이냐?" 하시면서 이제 일어나 부활 소식을 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한 사람은 울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첫 번째 부활의 증인이 되어 달려가고 있습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제자들 속에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확인시켜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대로 가서 부활의 소식만 전하면 됩니다. 믿고 전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가시어 확증해 주셨습니다. 확증의 뜻은 우리가 하는 예배, 우리가 드리는 헌신,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들은 불완전하나, 주님께 순종하며 감당하면 완전한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더 가까이 계시고, 힘들어할 때 친히 업고 가시면서 부활 증인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며 부활의 소식을 전할 때 우리의 불완전한 부분을 완전한 것으로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삶이 힘들고 지쳐서 울고 싶을 때, 여러분 앞에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내 앞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향할 때 모든 슬픔과 고통이 끝이 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눈물의 근원이 없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인생의 비극이 끝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는 데 왜 울고 있느냐?”고. 이제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김필곤 목사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부활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 아침이 되면 즐거운 낯빛으로 인사를 나누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예수 다시 사셨네" 이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그리스 정교회 사람들도 서로 만나 인사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면 "진실로 부활 하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 정교인이 많은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이 혁명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한 공산당 이론가가 사람을 모아 놓고 예수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허구의 인물이고 사기꾼인가를 열심히 입증하면서 "이 중에 누구든지 내 이론을 반대해서 이야기할 사람 나오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안나올 줄 알았는데 한 젊은이가 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공산주의자는 당황해서 "5분 밖에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제한을 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가 "나는 5분도 필요 없고 5초면 됩니다."라고 하더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전회중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공산당이 장악하여 아무리 세뇌를 시켜도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였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지금도 수십억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실로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역사상에 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고 최초로 전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는 무엇을 마구 달라고 해서 막달라가 아니고 지역이름입니다. 막달라라는 지역의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패인이 된 사람이엇습니다. 귀신들려서 사람취급 받지 못하고 산 사람입니다(눅8:2).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인 질병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후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제자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내어 열두 제자들 섬겼습니다(눅8:3). 행복한 인생 새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도 다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절이 고통을 당하여 돌아가셨고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리 뜨거웠습니다.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는데도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10).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며 머물러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의 경험 차이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범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극적인 사랑을 맡본 사람입니다. 귀신들려 황폐화 된 인생이 예수님을 통해 새사람된 사람입니다. 제자들처럼 무관심과 무력감 속에서 집으로 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쉽게 주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심각한 사태를 만나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는 그 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신앙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큰 사건을 만나니까 어떻게 합니까? 도망갑니다. 믿지 못합니다. 도마를 보십시오. "내가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손의 못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믿겠노라"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보십시오. 왜 그들을 그렇게 슬픈 빛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들은 "그 분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으로 우리가 믿었었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도 끝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경험은 이것들 보다 더 강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것을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경험, 예수님을 사랑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믿음도 무너지고 소망도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고백이 있으면 그 사랑은 다시 믿음도 일으키고 소망도 견고히 세워주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하는 모습도 보십시오. 이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 십자가를 보고 도망갔습니다. 배신했습니다. 저주했습니다.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 고백을 받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이나 사랑 고백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랑의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배신한 자신을 용서하시면 사랑을 물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사랑이 있었습니다. 부활절 아침 우리에게 이런 사랑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언제나 사랑합니다." "예수 사랑해요, 나 주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 왕께 드리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 50장" "주님 한 분 밖에는 사랑할이 없어요 905장" 이 찬양이 항상 마음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특별한 체험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통해 귀신에서 자유함을 받은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갈보리 산에서(눅23:49) 떠나지 못하고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고통과 임종을 지켜봅니다(요19:25). 무덤에 장사된 것을 지켜봅니다(막15:47; 눅23:55). 그리고 주일날 안식후 첫날 아침 일찍 향유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땅에 묻는 것이 동굴에 안치된 시신이기 때문에 볼 수가 있는데 동굴 문은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도적 맞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1. 울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울음은 소리 죽여 조용히 우는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크라이우사"라는 말은 대성통곡하는 울음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슬퍼하며 대성통곡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도 슬픈 일인데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얼마나 통곡할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입니다. 귀신들려 모든 사람이 조롱하고 사람취급해 주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받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생이 회복된 은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랑받은 사람들, 은혜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탄생을 예고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우는 그를 향하여 물어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울음의 이유를 물어봅니다. 이 질문은 마리아를 깨우치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는데 죽음으로 끝난 줄 알고 죽은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그를 깨우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9절 보십시오. 아직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한 때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가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이니이다."
죽검을 찾고 있는 마리아, 열심도 있고, 사랑도 있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도 있고, 책임감도 있는 마리아, 슬퍼 울고 있는 마리아, 이 마리아를 예수님을 찾아 오십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 고통받고 있는 마리아, 상실감에 상처난 마리아 그 마리아를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 곁에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는 보고 있었으나 알지를 못했을 따름입니다. 우리 주님은 늘 우리의 슬픔의 현장, 절망의 현장에 찾아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기 전에 먼저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무덤에 갇혀 침묵하고 모르시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살아계서서 고통의 현장에 눈물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낙담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게 하십니다.
"주 예수를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98장 1절)"
우리 주님은 고통받는 사람 외면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도마를 찾아 가십니다. 도망가 자신의 옛날 직업 어부가 되어 버린 베드로를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보여 주며 회복시켜 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절망과 울음의 현장에서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찾아 오셔서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님이 아브라함을 찾으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2. 알지 못하는 자에게 알게 하시어 믿음 주시는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였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통곡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2절을 보십시오. 왜 울었다고 합니까?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부활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까마득하게 잊고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프면 미래는 죽음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하는 환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내가 보지 못했으면 예수님의 시체는 도둑맞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를 전혀 뛰어 넘지 못하고 이성과 경험의 종이 된 상태입니다. 울고 있는 여인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15절 보십시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래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는데 여자라고 말하니까? 막연히 말하니까 알지를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동산지기인줄 압니다. 무덤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압니다. 인간의 한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눈을 열어 주기 전까지는, 주님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되기 전까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십자가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말합니다. 당신이 옮겨갔으면 알려달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고백이지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에게 시체를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어떻게합니까? 다정하게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아마 주님도 감동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여인이 와서 시체를 찾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새벽 미명에 이 무덤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름도 주님이 아시고 부르십니다. 모태로부터 날때부터 우리를 아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우리를 선택하였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고난당하고 있을 때, 실망하고 있을 때, 가슴 아파하며 상처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기도를 잊었는가 어둠 속에 기도는 하늘 보좌 흔든다오 네모든 사정을 주님게 고백을 하여 위로받고 구원받아 참 평화를 영원 영원 영원 토록 1129장)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랍오니여 나의 선생님이여하며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붙들려 끝나는 무능력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환란, 질병, 풍파, 사망 권세를 이기신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5-26)" 다른 성경에 보면 천사 무엇을 마리아에게 말씀합니까? ( 마 28:5-6)"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그럴 때 절망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도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하고 내려간 것입니다.(눅 24:25)" 세상의 소리를 듣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은 "사람의 생애에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면서 평생을 두려워하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했습니다. 걱정할 일이 없으면 결혼도 안 시킨 아들의 손자까지 걱정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말씀을 확신했다면 주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통하여 사실을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공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불안에서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앞길이 환해질 수 있고 내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죄악을 회개할 수 있고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우리를 사랑하는 음성입니다. 사람에게서 만족을 구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십니다. 세상의 음성을 듣지 말고 부활하셔셔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활절 예배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 기도 가운데, 성도의 교제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위로의 말씀, 책망의 말씀, 교훈의 말씀, 소명의 말씀을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여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집중할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어둠을 물리쳤습니다. 죄를 이기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주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죽음에 관심갖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마리아는 열심은 있었지만 죽음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예수님을 마리아가 모른 것은 너무 울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를 부탁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여인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을 중지하라는 말입니다(마28:9).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같이 있을 것을 바랬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였지만 아직 승천하지 않았지만 예언한 대로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께 올라갈 것이라는 전하라고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을 부활시킨 우리 주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 주님을 부활시킨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약속 대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 때 마리아는 어떻게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전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본 것을 전했습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간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부활절을 맞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침묵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신문사에 알리고 일가 친척에게 알리고 친구에게 알리지 않겠습니까? 보통 평범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는데 어찌 그냥 침묵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삶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입술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랜 동안 목회를 하며 많은 대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 총재 김 준곤 목사님께서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 점에서'라는 음반을 만들어 그것을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음반에는 29세의 나이로 암에 걸린 딸의 투병 1백 67일을 지켜보는 아버지, 엄마 잃은 두 손녀를 5년 간 키우며 가슴을 저미는 할아버지, 딸의 죽음으로 신앙을 다지는 목회자의 모습이 꾸밈없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말합니다. " 둘째 딸 신희가 위암으로 처절한 고통 속에 죽었을 때, 저는 존재의 제로 점에 서있었습니다. 제 생애 가장 애절한 기도가 무참히 거절당한 직후였지요.". "체중이 26㎏까지 내려간 신희는 온몸에 바늘을 꽂은 채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몸을 뒤틀며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딸애의 고통을 보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비 된 자로서 12번 딸의 죽음을 대신하고 싶었습니다." 딸만 넷인 김 목사님에게 둘째 딸은 유독 연약하고 착했던 '아이'였다고 합니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경제학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에 유학간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 와 미국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신경성이라면서 신경 안정제만 한 움큼씩 복용하게 했다고 합니다.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정밀진단을 받으니 이미 늦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슬픔이었죠.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죽음, 사위에게는 아내의 죽음, 나와 내게는 딸의 죽음. 아무리 나누어도 가벼워 질 수 없었죠. 손녀들이 감싸주며 슬픔을 삭이는 모습이 너무나 가여워서…". 가냘픈 아이의 가혹한 고통을 보면 김 목사님은 나중에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처음으로 섭섭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병실 창문 너머로 개나리꽃이 만발한 4월 어느날 여동생 윤희씨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즐거웠던 옛날 생각이 났는지 일어나 앉아 김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는 "아빠, 나 살고 싶어요. 살 길이 없을까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러나 딸은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며 빛나는 얼굴로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님, 만약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제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잔을 주시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제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주십시오 " 세상 떠나기 전날 딸은 모처럼 만에 편안한 잠을 잤고, 깨어나서는 맑고 평화로운 눈동자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며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하도 편안하게 보여 김 목사님은 내심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작은 기대를 가졌지만 이튿날 세상을 떠났답니다. "눈 감고 주님의 품에 안긴 신희의 종잇장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습니다.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 데 그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요? 그 얼굴은 분명 티없이 해맑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자주 꿈에 둘째딸 신희를 보았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신희는 밝은 목소리로 "아빠 이젠 걱정 마, 다 나았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어찌나 허전하고 슬픈지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못 들고 베갯잇을 적신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날 내게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깊고 깊은 존재의 저 밑바닥, 주님이 들으신 지하에서 생명수가 솟듯이 내 안에서 아주 가늘고 작은 목소리로 찬송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것은 분명 내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나를 대신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내 위에 살아계셨던 것이지요." 그 날 이후 김 목사는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가난해졌다고 합니다. 가난해짐으로써 풍요로워졌고, 한없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딸을 땅 위의 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사랑해서, 더 필요로 해서 더 좋은 곳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데려가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찬송 이 터져나왔다고 합니다.
" 주님은 나의 가장 소중하고 보배로운 것을 끝내 빼앗아가 버리셨지만 나는 이제 주님의 그 빼앗은 손보다 주님이 다른 손에 준비하신 선물을 더 기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영원한 소망, 영원한 생명, 지금 신희는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고 황홀한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뭇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며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후일 내가 생명이 끝나 주님 품에서 깨어나면 그 애가 제일 먼저 꽃다발을 들고 아빠를 마중 나와주겠지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며 죽음은 허무요 단절이며 고통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의 삶의 지평은 넓어지고 세계관은 달라집니다. 죽음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죽음을 맛본 후 12시간 이후에 소생한 600여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죽음 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죽음 후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0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아마 요사이 우리 나라에서 볼 때는 히딩크 감독이나 홍명보나 안정환 같은 축구 선수들이 별과 같이 뜨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송종국 선수나 브라질 선수들처럼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한 세 여인을 들라면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의 마리아일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분명하게 증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해롤드 옥켄가 박사는 성경에 나타난 여인들 중 가장 높은 자리는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차지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브라질 선수들이 셔츠에 이런 글들을 인쇄해서 입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속했다." "나는 100% 예수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 글귀를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려고 자기들이 받아 목에 건 우승 금 메달을 등 뒤로 젖히기까지 했습니다. 아마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 표정과 말과 행동에도 이런 글귀가 나타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속했다." "나는 100% 예수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전파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세상에 전파하라고 제일 먼저 부탁한 사람이 열 한 제자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신임과 사랑을 가장 깊이 받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가장 먼저 증거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막달라 마리아 때문에 열 한 제자들도 의심의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돌아왔고 그 후 수 많은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전도를 통해서 옳은 데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를 살려 준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해서 한 평생을 삽니다. 눅7:2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었고 일곱 귀신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문자적으로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던 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남편의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친구나 사회의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음식도 잠도 일도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슬피 울기도 하고 무덤가를 거닐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파괴된 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폐인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도 제대로 하고 말도 제대로 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고 잠도 제대로 자고 일도 제대로 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둘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도덕한 길거리의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와 동일시 합니다. 죄인인 한 여자에 대한 기사 바로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눅8장 초두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눅7장에 나오는 시몬에게 멸시를 당하던 길거리의 부도덕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도 그 여자를 가리켜 "그 동네에 살던 죄인인 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고레기오라는 화가가 그린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욕망의 색갈로 가득한 길거리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윤락의 늪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몸과 영혼을 저주하고 멸시하던 죽음의 자리에서 자기의 몸과 영혼을 귀중하게 여기는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말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셋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에 사로 잡혔던 전형적인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스코트랜드의 유명한 설교자 매클라렌이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일곱 귀신은 일곱 가지 죄악을 상징하는 것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 죄악은 단테가 기술했던 일곱 가지 죄악인데 모든 죄악을 요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 죄악은 첫째 교만 둘째 시기 셋째 분노 넷째 음란 다섯째 탐욕 여섯째 무절제 일곱째 영적 게으름이라고 했습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가지 죄악에 덫에 걸려있던 전형적인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조만간 죄의 저주를 받아 사망에 들어갈 운명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죄악의 덫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죽음에서 간짐을 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그렇게도 생생하고 그렇게도 진지하게 증거했던 이유는 바로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항상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후부터는 항상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지극했기 때문에 Jesus Christ Superstar 란 Musical을 지은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의 애인으로 묘사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잘못된 묘사입니다. 하여튼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부터는 항상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을 섬기고 봉사하고 받들며 사랑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섬겼던 사건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로마 캐톨릭 교회의 해석을 따른다면 그리고 346장 찬송가의 가사를 그대로 따른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즉시 예수님에게로 달려가서 사람들의 멸시를 개의치 않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지극한 사랑의 행동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둘째 눅8:2,3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즉시 몇몇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그 몇몇 여인들 중 막달라 마리아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의 이름이 항상 먼저 나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지극한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갈리리에서 부터 온 많은 여인들과 함께 울면서 십자가 행렬을 따라 갔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눅23:27). "예수를 섬기며 갈리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27:55,56). 슬피 우는 여인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째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열 제자들이 다 도망을 쳤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키며 십자가 아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집으로 간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계속해서 십자가 아래 남아 있다가 예수님의 시체를 넣은 무덤에까지 따라갔습니다. 화가 루벤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옮길 때 막달라 마리아가 함께 도운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59-61).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다섯째 안식 후 첫날 즉 주일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예수님의 몸에 향품이라도 붓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부활을 믿으면서도 그 시체를 소중하게 다룹니다. 시체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울기도 합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세상의 어느 누구 보다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너무 사모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입을 열어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이 마리아 뒤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위로와 동정의 말씀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인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며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의 시체라도 자기가 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슴이 뛰다가 멎는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마리아의 몸과 마음에는 천지에도 채울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환희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항상 쓰던 히브리 방언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는 왈칵 예수님의 몸을 붙잡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빼앗길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이제는 혼자서 살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였습니다. 그 때 주님은 육신의 세계가 아닌 영의 세계를 보여주셨고 땅의 세계가 아닌 하늘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초시간적 초공간적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만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곧 하늘로 아버지께로 올라가지만 언제나 마리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가서 이 사실을 전파하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과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분부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세상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영광을 위해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뛰어가서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열 한 제자에게 전했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마리아는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도 달려갔고 부도덕한 사람들에게도 달려갔고 일곱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달려갔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글귀가 인쇄된 셔츠를 입고 다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얼굴 표정과 말과 행동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속했다." "나는 100% 예수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나는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보았고 만졌고 체험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증거하는 충성된 증인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항상 예수님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우리가 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뜨겁게 증거하는 증인이 되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10분의 일만 주님을 사랑하고 마리아의 10분의 일만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 주님을 만났고 새벽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새벽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새벽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고 주님을 뜨겁게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