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19세기 초부터, 생산을 유급으로 지불받는 추상적인 인간노동 (프롤레타리아)이 나타났다 (맑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상품생산을 위한 유급 노동인 동시에, 사회적인 性인 젠다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오로지 상품 생산을 위한 한 단위로만 존해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탄생과 더불어, 전통사회에서의 사회적 생산적 성 역할을 해왔던 젠더의 개념이 실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맑스가 놓치고 간 것이 있었다. 그 시기 가정으로 돌아간 여성들의 집안 일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이다. 여성들의 가정 노동은 상품 생산을 위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고 여겨졌으며, 그로인해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들에 비해 현격하게 낮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맑스는 오로지, 상품 생산을 위한 노동만이 산업 사회를 지탱하게 된 원동력이라 생각하였고, 그들의 지위향상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근대 산업사회는, 사회적인 남성들의 성 역활과 여성들의 성 역활을 오로지 상품생산을 위한 도구로만으로 인식하여 젠더를 상실하였고, 상실된 젠더의 역할을 뒤로 하고,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노동과 임금만으로 그들의 지위를 향상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과 같은 양의 일을 하더라도 차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오로지 그 임금의 차이 해소만이 남녀평등을 이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섹시스트들의 여성 해방론, 즉 가짜 평등, 사이비 평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통사회에서의 젠더로서의 남녀의 역할은 경쟁관계가 아닌 상호보완관계였다. 산업사회가 등장하면서 젠더가 사라진 프롤레타리아가 나타나면서 남녀사이에 불합리한 불평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앙드레 고르는 그의 저서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에서 산업사회에서의 여성들의 노동에 해당하는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의 역할이, 현대사회에 와서는 점점 증가할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기술혁명과 정보통신으로 상품생산을 위한 추상적인 노동은 기계나 기술이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실업이나 구조조정 비정규직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현재로서의 노동운동의 가장 큰 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프롤레타리아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맑스가 놓치고 간 그림자 노동으로 불려지는 여성들의 가정일도 자본집약적인 기계가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희망버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이 현상은 막을 수 없다.
이제, 새로운 페러다임의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상품생산을 위한 종속된 노동을 위한 노동조건 개선은 그 상품생산을 위한 시스템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지겨워하는 이 거대한 음모에 동참하는 길일 뿐이다.
당명이 화끈하게 [노동당]으로 정해졌다. 누구는 북한과 구분짓는 성명서를 내자고 서두르기도 한다. 그렇게 조급할 필요는 없다. 무식한 일부 극우파들의 눈치나 보면서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젠더를 잃어버린 불쌍한 프롤레타리아 아닌, 우리들의 미래를 위한 노동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상품 생산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그것에 대한 사용료를 챙기는 의미로서의 노동자가 아닌, 우리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노동자가 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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