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멸의 여름(외 3편)
최형심
나의 노래는 은색 휘양을 두른 유월의 바다 위에서 왔다. 모래무치를 묻은 발아래는 적란운…… 외가지에 드리운 실잠자리 주검에 뒷머리를 앓는 아이가 물 위를 떠갔다.
해루질에 지친 몽상가의 아이들과 등롱을 걸고 할미울에서 물그림자를 길어 올렸다. 도르래를 타고 곡식들이 키를 늘이면 주화 속 첨탑으로 걸어 들어가 저녁종을 칠 거야.
고래와 구름 사이로 신들이 내려와 늘 푸른 생선이 소녀들처럼 나이를 먹었다. 뭍사람들은 폐허가 벗어놓은 햇살 쪽으로 가서 눈이 멀었다.
가벼운 신을 신은 전령사들이 수림(樹林)에 청무를 심을 때면 쉬이 해거름 오고 일곱 국경 너머 숨비소리 들려왔다.
농막에 어린잎들이 엎드려 잠들었다고 평발의 물고기좌에선 외뿔을 가진 점자들이 점점이 섬을 이루었다.
푸른 촉에 물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천정(天井)에서 밤마다 별빛 이삭을 주웠다. 별을 남의 식솔들처럼 헤아리며 나그네새는 꽃밥을 비웠다.
몽고지를 저어 닿지 못하는 나라…… 그리운 어족들과 바다풀 집을 짓고 싶었으나 부레를 잃은 애벌레로 청보리밭에서 눈을 떴다.
심해어들과 나란히 누워 부조리극에 초대된 시인처럼 함부로 살았다. 여름이 가자 나의 빈 껍질 속으로 크고 작은 문장들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물 위의 잠
수몰지대의 별빛을 무릎까지 끌어 올리고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좋은 꿈을 모으면
좋은 꿈을 모으면 먼저 식은땀을 배려하겠습니다. 나머지로 샛바람에 호박별 뒷물하는 소리를 흘림체로 받아 적고, 그러고도 남는다면 댓돌을 달래겠습니다. 앙숙인 디딤돌이지만 밖으로 내다버릴 무게는 아닙니다.
좋은 꿈을 모으면 도라지꽃을 섬긴 보랏빛이 흙의 잠 속으로 걸어가게 두겠습니다. 모래밭의 후회는 맹렬하겠지만 솔 그늘 다녀간 디딤돌 위로 잡설(雜說) 한 편이 분발하고 있겠지요.
좋은 꿈을 모으면 찡그린 눈썹 아래 동그란 현기증을 그려 넣고 길고양이의 신혼을 닮으라 하겠습니다. 실구름 끊어다 여우비 꼬리를 달아주고 누각으로 착지하던 낮달이 흘깃, 달맞이꽃의 늦잠을 물결 위에 눕혀주겠지요.
좋은 꿈을 모으면 흘레바람에 몸이 무거워진 수박에게 별들의 투명을 선물하겠습니다. 먼 산을 우려내던 연못이 잠시 햇살 살비듬을 털어내겠지만 거미줄에 걸린 침묵을 올려다보며 봉숭아 꽃잎이 원숭이경첩을 흉내 내고 있을 것입니다.
숫눈이 떼먹고 간 발자국 하나, 좋은 꿈을 모으면 하얀 고무신 밑에 괴어주겠습니다. 외꽃이 독신을 고집하겠지만 감나무 망루에 앉은 나비는 불란서 단어 하나쯤 잊듯 깜빡할 것입니다.
술래가 된 소년
있다,
한쪽에는 엎드린 사람이, 다른 한쪽에는 별을 쏟은 자국이 있다.
바람을 찾아 술래가 된 소년이 있었다. 긴 방죽을 따라 루마니아로 가고 싶던 아이와, 나비를 가둔 몸과, 발자국 대신 별자국을 찍으며 가는 아이가 있었다. 말라서 바스러진 아이가 있었다. 월경 대신 월식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허공 속에는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 양철통 속에는 버려진 이름, 방바닥에는 길게 그린 핏자국, 핏자국 위에는 다시 허공.
첫눈이 오고 방죽 위에 희게 엎드린 소년이 있었다는데…… 루마니아, 루마니아, 활석가루를 눈처럼 뿌리던 소년은 다른 소년을 사랑했다는데…… 루마니아, 루마니아, 피에 젖은 루마니아, 신에게 용서받지 못한 작은 입술을 목에 댔다는데…….
있다, 지붕 없는 집이, 파랗게 질린 손목이, 숨죽인 검은 여행가방이, 물거품처럼 희어지고 있는 목덜미가,
반나절을 타고도 다 타지 못한 벙어리장갑을 꼭 껴안고 달리는 소년이 있었다. 나비를 가리키던 손가락이 얼어붙은 길 위에 일그러진 얼굴을 그리며 가고 있었다. 깨진 술병 위로 쓰러진 피투성이 소년이 있었다. 소녀가 되지 못한 소년이 있었다.
목가구에 묻은 나비의 기억을 지우던 아이가, 고요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고요가 된 소녀 아니, 소년이,
점점 투명해지다 암전이 된 사람이 엎드려 있다.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2020년 06월)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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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 2019년 심훈문학상 수상, 수상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