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지자체 못믿어”… 경보 혼란 시민들 ‘생존가방’ 꾸린다
비상식량-라디오 등 구입 급증
대피소 직접 가보고 동선 점검도
SNS선 생존배낭 만드는 법 공유
“당국 재난대책 신뢰 회복해야”
“정부가 제대로 안 알려주니 스스로라도 생존법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생 김연지 씨(23)는 1일 비상식량과 상비약 등을 구입해 직접 ‘생존 가방’을 만들었다. 지난달 31일 북한의 우주발사체 발사에 따른 ‘경계경보 대혼란’을 경험하고 나서 실제 상황이 발생한 경우를 대비하기로 한 것이다. 김 씨는 “서울시와 행정안전부의 대응을 보면서 위기 상황에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란 사실을 절감했다”며 “앞으로 연구해 생존가방 품목을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 ‘생존 가방’ 만들며 각자도생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경계경보가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김 씨처럼 ‘생존 가방’을 직접 꾸리거나 온라인 쇼핑몰 등에서 구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1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생존 가방 제작법을 소개하는 글이 종일 이어졌다. 통조림 등 비상 식량과 비상약, 라디오, 손전등 등 필수품을 용도와 함께 소개하거나 실제 만든 생존 가방을 인증하는 게시물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모 씨(28)는 1일 전기 없이 작동되는 라디오를 5만 원에 구입했다. 이 씨는 “경계경보 당시 포털사이트가 먹통이 되는 걸 보면서 실제 상황에서 전기와 통신이 끊기면 휴대전화도 무용지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구입했다”고 말했다.
비상 용품을 묶어 파는 ‘생존키트’ 또는 ‘재난대비 키트’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날 15만 원짜리 재난대비 키트를 구입한 남모 씨(27)는 “7만 원대부터 있었지만 실제 상황을 가정하면 충실하게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했다.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 여분의 약을 마련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뇨를 앓고 있는 윤정연 씨(26)는 “전날 경계경보를 듣고 대피용 짐을 싸는데 약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치 여분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해 오늘 병원에 가서 약을 타 왔다”고 말했다.
● 대피소 확인, 또 확인
일부는 집이나 직장 인근 대피소를 확인하고 직접 둘러보며 동선을 점검하기도 했다. 대피소 정보를 제공하는 안전디딤돌 애플리케이션(앱)과 국민재난안전포털(www.safekorea.go.kr)이 경계경보 당일 먹통이 되는 걸 보면서 미리 대피 경로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강모 씨(46)는 “아버지가 어제 일로 많이 불안해하셔서 집 근처 대피소까지 모시고 갔다 왔다”고 했다.
대피소에 정부가 인증한 대피소 마크가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김인철 씨(36)는 “재난포털을 통해 찾은 근처 대피처를 찾아갔는데 부실해 보였다. 정부 인증 마크를 보고서야 안심했다”고 말했다.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경우 비상 상황 시 가족들과 만날 장소를 미리 정해놓기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이모 씨(24)는 “경기 이천이 본가인데 가족과 갑자기 연락이 끊기면 이천터미널에서 모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대피 요령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 용산구 비상대비체험관을 찾는 학부모도 늘었다. 이곳에선 경보 발령 시 대피 요령 등을 배우고 방독면 쓰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체험관 관계자는 “평소 평일에 200명가량 방문하는데 어제 오늘 방문객이 30∼40% 늘었다”고 했다. 유치원 교사 이모 씨(26)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반 아이들에게 재난 상황이 발생하면 부모님 손을 잡고 지하로 내려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난 대비에 대한 국민 인식이 높아진 것은 긍정적이라면서도 이번 사태로 훼손된 정부와 지자체의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비상 시 정부와 지자체의 지시에 따르는 게 중요하다. 각자도생으로는 대피가 어려운 만큼 정부와 지자체가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조치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이상환 기자, 주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