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2004를 대비한 주목할 만한 선수로 이태리의 ‘토티’가 소개되어 있고,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은 스페인의 신성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던 잡지죠. 하지만 제가 조그만 잡지 책 한 권을 아끼는 이유는 수많은 축구 기사 때문이 아닙니다.
잡지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아디다스 프레데터의 광고가 실려 있습니다. 여러 축구 선수들이 신는 축구화이자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보급된 신발이라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커다란 운동화 광고의 왼쪽 위편에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지네딘 지단의 사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아래편에는 아디다스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낸 주인공이자 1954년 혁신적인 스크류 스터드로 독일 대표팀에게 베른의 기적을 선사했던 아디 다슬러의 사인이 있지요. 스페인의 마드리드, 그리고 스위스의 베른. 두 지명을 대비시키며 광고는 브랜드의 전통성과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아디다스라는 상호가 가진 선구자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프레데터 잡지 광고를 보시면 쉽게 확인하실 수 있을 거에요.)
그러나 제가 이 페이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축구계의 역사를 장식한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의 사인보다 훨씬 더 커다란 크기의 사인 하나가 아디다스 프레데터 위를 덮고 있기 때문이죠.
“No.7 신태용. 04.5.26”
제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누군가에게 사인을 받아서 간직하고 싶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들게 했던 선수의 이름. 그 사람의 흔적이 바로 그 페이지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단의 이름보다도, 아디 다슬러의 이름보다도 훨씬 커다랗게 말이죠.
대한민국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크고 두려워 그만큼 조심스러워지는 이름.
저에게 그 이름은 이회택도, 차범근도, 황선홍도, 홍명보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명성에 걸맞지 않는 씁쓸한 마지막 모습을 보며 그의 이름을 얘기해 보려 합니다.
신태용이라는 선수는 흔히들 얘기하는 한국 축구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선수였습니다. 각급 대표를 순서대로 밟아 왔으며, 16세 이하 팀, 19세 이하 팀, 올림픽 대표팀까지 각급 대표팀의 핵심 자리를 놓치지 않았지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신태용 선수는 한국 축구의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그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동료들과는 달리 명문대 출신이 아니고, 그의 소속팀 역시 입단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일화 천마 구단이었으며, 어쩌면 자신의 명성을 가장 드높일 수 있는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미진했습니다.
이러한 양면성이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신태용이라는 선수의 축구 인생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화려한 조명 아래 놓일 수도 있고, 어두운 그늘 아래 놓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일반적인 미디어의 시각은 그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루어낸 업적에 미루어 보았을 때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모습들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금 그의 뒷모습에 찬란한 영광이 아닌 초라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유, 그것은 아마도 축구팬들이 보려 하지 않았던 시선으로 억지로 바꾸어 바라보지 않는 이상 리그의 영웅이 똑바로 세워지지 않는 대한민국 축구의 가슴 아픈 현실 때문이겠지요. 이제 한 번 색안경을 벗어봅시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철저하게 배재한 채 한 명의 축구선수가 이루어낸 업적, 그리고 그의 기량과 그라운드 안팎에서의 행동으로 이 사람을 한 번 바라봅시다. 대한민국 축구의 가장 초라하고 어두운 구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K리그의 영웅, 그의 아름다운 모습이 서서히 드러날 수 있도록 말이죠.
위에서 얘기했듯이 신태용이라는 선수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라는 운동에 재능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능과 함께한 그의 성실함은 항상 그를 빛나게 할 수 있었지요. 허정무 감독은 영남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신태용 선수에 대해 “너무나 영리하게 공을 차는 선수였다. 그 때부터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신태용은 동시대에 나타난 수많은 훌륭한 스타플레이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흔히 얘기하는 ‘슈퍼스타급’의 아주 뛰어난 공격수로 평가받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천재 미드필더 김병수와 엄청난 스피드의 주인공이었던 서정원, 정재권, 탱크같은 미드필더 노정윤까지....... 신태용은 어쩌면 그들만큼 팬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선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신태용은 각급 대표팀에서 그들과 함께 플레이할 때 실질적인 게임의 리더가 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신태용이 이후 대표팀 생활에서 자신감 있는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한 원인이었을 지도 모르지요.
김병수는 신태용이 가지지 못한 재기발랄함과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고, 서정원과 정재권은 신태용보다 빨랐으며, 노정윤은 보다 파워 넘치고 저돌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팬들은 이와 같은 특징 있는 선수들에게 조금 더 시선을 돌렸던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와 같은 축구팬들의 경향이 진정 위대한 선수를 간과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신태용이라는 선수는 비록 어느 한 부분에서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지 않을 지라도 그 모든 부분이 조화를 이룬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선수라고 할 수 있거든요.
처음에 축구를 잘 몰랐을 때는 신태용이라는 선수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축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마치 오락실의 대전 게임처럼 한 가지 필살기를 가지고 있는 확실한 캐릭터의 선수들에게 눈길이 쏠릴 뿐, 선수들의 기량이 갖추고 있는 균형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축구를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기량의 밸런스가 잡혀있다는 것이 선수에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알게 되었고, 신태용이라는 선수가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선수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신태용이라는 선수의 기량이 정체되어 있지 않고, 점점 발전해 나갔다는 사실은 제가 이와 같은 부분을 세월이 지나며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흔히들 미드필드 지역에서 게임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 선수를 ‘플레이 메이커’ 또는 ‘게임메이커’라고 얘기합니다. 아마도 이런 호칭은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의 선수에게 주로 사용하는 용어일 겁니다. 물론 홍명보나 황선홍 같은 선수처럼 최후방 수비수나 최전방 공격수로 경기에 나서서 플레이 메이커의 역할을 해주는 선수들도 많이 있지만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전통적 개념의 플레이메이커는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를 일컫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플레이 메이커’의 전형을 보여주는 선수는 누구일까요?
최문식은 최고의 테크닉을 보여줬었고, 윤정환은 훌륭한 시야와 패싱 능력을 가진 선수이며, 유상철은 엄청난 파워와 활동량을 보유하고 있지요. 세 선수 모두 대한민국이 배출한 훌륭한 선수들이자 좋은 ‘게임메이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만약 축구를 배우는 아이들이 좋은 ‘플레이 메이커’가 되기 위한 교과서를 꼽아달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신태용이라는 선수를 얘기할 것입니다.
신태용은 축구 선수가 가지고 있어야할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는 플레이어입니다. 빠른 스피드와 유연성, 체력을 겸비하였고, 축구의 기본기라 할 수 있는 양발을 이용한 슈팅과 패싱, 드리블에 모두 능합니다. 또한 게임을 읽는 능력과 임기응변, 넓은 시야와 경기 운영 같이 축구를 잘할 수 있는 두뇌도 가지고 있으며, 승부욕과 근성까지 겸비한 선수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 중 한 명입니다. 그에게서 결점을 찾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선수’로 생각하곤 합니다. 모든 부분을 고루 갖춘 그의 모습보다는 특별히 내세울 필살기가 없는 그의 모습이 더 부각되었으니까요.
왜일까요? 도대체 왜 이런 완벽한 선수로서의 모습보다 특징 없는 선수라는 엉뚱한 이미지가 더욱 부각된 것일까요?
위에서 저는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배제하고 신태용이라는 선수를 보자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색안경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씀드렸다시피 신태용은 각급 대표를 거쳤고,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한 후 결국 모든 축구 선수들의 꿈인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마 구단에서 그와 함께 3연패를 일구어냈던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으며 그는 대표팀에서 본격적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의 대표팀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96년 아시안 컵 이란 전 6 대 2 패배라는 결과를 남긴 실패한 작품이었습니다. 신태용은 이 대표팀에서 상당히 중용되었지만 커다란 아픔만을 맛보았고, 박종환 감독의 경질 이후 신태용 역시 치명적인 무릎 부상으로 대표팀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선수 생활의 위기에 빠질 정도의 심한 부상은 신태용에게 2년여에 걸친 긴 슬럼프라는 달갑지 않은 선물을 하게 되지요.
마침내 끈질긴 노력으로 그가 몸을 회복하기 시작한 시기는 1999년에서 2000년. 이미 대표팀은 세대교체의 열병을 앓고 있었고 이후 30줄에 접어든 신태용을 대한민국 대표팀은 다시 부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태용이라는 위대한 선수가 대표팀에서 경험한 유일한 메이저 대회는 바로 96년 아시안 컵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대패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성인 대표팀이지요. 청소년 시절에 대표팀에서 보여준 성과와 리그에서의 놀라운 기록에도 불구하고 신태용이 축구팬들의 뇌리에 그만큼 각인되지 못한 이유. 그것을 바로 이와 같은 그의 대표팀 경력이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이유가 그의 실력적 미달보다는 시기적인 불일치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에 국가대표라는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싶네요. 그렇기에 위에서 국가대표 성적만으로 선수를 평가하는 색안경을 벗고 그를 바라보자고 얘기했던 것이구요.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축구 선수들에게 있어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축구 선수를 평가하는 궁극적 도구가 될 수는 없지요.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축구 선수의 최종적 성공 여부가 대표팀에서 보여준 활약으로만 결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디어의 초점은 각급 대표팀의 스타플레이어들에게 집중되고 리그의 결과는 신문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축구 문화. 그것이 바로 한국 축구의 현실이었죠. 그리고 그 문제점들이 초래한 결과가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한국의 프로축구는 그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연고제의 실시와 써포터스들의 응원 문화 발달, 경기력의 상승과 선수들의 의식 변화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우리 축구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지금의 역사를 만들고, 또한 지난 역사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가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바로 신태용이 서있는 것입니다.
515경기 출장. 세리에 A 6회 우승.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 유럽 슈퍼 컵 3회와 토요타컵 2회 우승.
AC 밀란의 전설적인 수비수 프랑코 바레시의 기록입니다. 밀란의 전설이자 이태리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랑코 바레시의 등번호 6번은 축구계에서 매우 드문 영구 결번으로 알려져 있지요.
401경기 출장. K리그 6회 우승. FA컵, 아시아 클럽 컵 ,아시안 슈퍼컵, 아프로-아시안컵, A3 챔피언쉽 우승.
바로 신태용이 성남에서 가져온 우승 트로피 목록입니다. 준우승까지 합친다면 그 개수는 훨씬 늘어나지요. 그리고 이러한 그의 커리어는 세리에 A의 AC 밀란에서 프랑코 바레시가 남긴 기록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전혀 손색없는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선수는 자국에서, 그리고 자신의 구단에서 전설로 기록된 반면 다른 한 선수는 자국 축구팬과 자신이 봉사한 구단에서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있네요.
1992년 신인왕.
1995년과 2001년 두 차례 리그 MVP.
1996년 프로축구 득점왕.
프로축구 베스트 11에 9회 선정.
통산 99골 68 어시스트.
그의 기록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벅찹니다. 대한민국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화려한 선수 생활. 특히 9차례의 베스트 11 선정과 두 차례의 리그 3연패라는 기록 앞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경을 표시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제 우리 축구 문화의 중심에 프로축구의 비중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가 남긴 업적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의 가치, 그의 소중함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K리그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글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그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손꼽을 정도의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였으며 그에 걸맞은 훌륭한 기록도 남겼습니다. 큰 부상도 이겨냈으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리로 34살의 나이가 될 때까지 체력적인 문제가 거의 없을 만큼 성실함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K리그의 상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 K리그의 최고 자리에 있는 자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2001년 성남이 우승을 차지하자 J2리그의 오이타 팀에서는 신태용의 이적을 타진해 왔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축구 선수들의 J리그 행 붐은 엄청났으며 노장 선수들에게 일본은 선수생활 막바지에 한 몫 잡을 수 있는 엘도라도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J리그 구단이 신태용을 그냥 놔두었을 리 없지요. 그러나 차경복 감독은 신태용의 이적을 막았고, 신태용 역시 아무런 반감 없이 차감독의 뜻에 따라 성남을 지켰습니다.
그는 얘기했습니다.
“K리그 MVP는 J2에서 뛰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K리그 최고 선수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처럼 자신의 자존심, 어쩌면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자존심까지도 지켜 주었습니다. J리그 행의 열풍이 젊은 선수들에게로 점점 번져가고 있는 지금 이러한 신태용의 자세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선수를 가졌었는지 새삼스레 느낄 수 있습니다. 구단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 국내 리그에 대한 자부심. 이것이 바로 그가 K리그의 상징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 대한민국 프로축구 시상식에 신태용 선수가 수상자로 나왔습니다. 당시 베스트 11의 상당수는 월드컵 대표팀 출신 선수들이었죠. 대부분의 선수들은 프로축구 베스트 11 수상 소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 월드컵 때의 뜨거운 사랑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당시의 기형적 열기가 불러일으킨 독특한 현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틈에서 신태용은 독특하고 짧은 소감을 말했습니다.
“내년에도 K리그 많이 보러 와 주십시오. 안 그러면 섭섭할 겁니다.”
아마도 그에게 소중한 것은 수백만 붉은 물결의 축구팬보다도 그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단 한 명의 관중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만큼 리그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표현한 것일 지도 모르구요. 그리고 이러한 리그에 대한 사랑과 애착은 그의 팬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1999년 동대문 운동장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아마 FA컵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3000명도 안되는 관중들이 경기장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입장료 3000원으로 두 게임을 보던 시절이었지만 평일 경기였기에 매니아 아저씨들만이 관중석을 메우고 있었지요. 관중이 적은 경기장에서 축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관중들의 반응이 매우 점잖습니다. 골이 들어가면 굉장히 드물게 소리를 지르는 팬들이 있고, 나머지 관중들은 박수 소리로 자신들의 작은 감동을 표현하지요. 선수들도 체면을 차리는지 적은 관중 앞에서 요란한 골 셀레브레이션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 날도 골이 꽤 많이 터졌지만 관중이 적었기에 그다지 시끄러운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신태용 선수가 골을 기록했습니다. 매우 극적인 골이었지만 관중들은 평소처럼 점잖은 박수로 선수를 격려했지요. 그런데 선수들과 골의 기쁨을 만끽하던 신태용 선수가 갑자기 관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탠드 앞으로 뛰어오는 게 아닙니까? 당황해하는 관중들 앞에서 신태용 선수는 갑자기 한 번 점프를 하더니 과감하게 허리를 돌리며 춤을 추는 세레모니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앉아있던 관중들은 모두 웃고 소리 지르며 기립 박수를 쳤지요. 그에게는 경기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빈 좌석들보다 그것들의 10분의 1도 안되는 자리를 채우고 있는 팬들이 더욱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는 코너킥을 차러갈 때 관중들에게 박수를 유도합니다. 어느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이 동작은 그의 여유와 함께 관중들에 대한 서비스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요. 2003년 올스타전에서 저는 스탠드 하단 코너 플랫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게임이 시작되고 코너 아웃이 선언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태용 선수는 코너킥을 차러 오며 관중들의 박수를 유도했지요. 그가 킥을 차려고 자세를 잡자 저는 소리 질렀습니다.
“태용이 형! 왼발! 왼발!”
오른발로 킥을 하려던 신태용 선수는 관중석을 힐끗 쳐다보더니 왼발로 킥을 하더군요. 그 순간 무슨 대단한 소원 들어준 것도 아닌데 왜 그리도 기분이 좋던지 오랜만에 경기장에서 크게 웃어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2001년이었던가요, 저는 수원 구장에서 게임이 끝나고 선수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호 감독님의 열렬한 팬이자 수원의 지지자였던 저는 지금도 매우 아끼는 박건하 선수의 저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성남의 버스가 먼저 밖으로 나오는데 신태용 선수가 보이더군요. 순간 흥분한 저는 버스 앞으로 가서 신태용 선수를 불렀습니다. 그는 창문 밖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날 경기는 성남이 석패한 경기였고, 패한 팀의 선수를 상대편 유니폼을 입은 채 불렀으니 신경을 건드린 꼴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웬걸요. 약간 미안한 마음에 뒤로 돌아서려는 저에게 신태용 선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작년 시즌에 상대편 써포터가 던진 물병을 열어 물을 마시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 그의 사연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지요. 그는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팬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지요.
그는 선수와 관중이 함께 호흡할 수 있을 때의 기쁨을 알고 있었습니다. 항상 팬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소홀히 하지 않았고, 함께하는 축구를 실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선 사업에도 항상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팬들에 대한 그의 행동은 신뢰를 불러왔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시작하기 전 폴란드와 성남의 평가전이 끝난 후 인터뷰에서 신태용 선수는 격앙된 목소리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첫 경기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섰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태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방정스러운 입을 놀리며 상대방을 우롱하는 얘기가 아닌 진심에서 나온 자신감이었기에, 대한민국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충고였기에 그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는 팬들에게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약속했던 우승컵들을 성남에 가져다주었고, 그가 얘기했듯이 천마 구단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팬들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한다는 약속을 지켰고, 언제나 모범이 되겠다는 약속과 K리그에서만큼은 자신이 최고가 되겠다는 약속도 지켰습니다.
99골. 그가 K리그에서 기록한 골의 숫자입니다.
그는 100호 골을 넣지 않았습니다. 100호 골을 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넣지 않았습니다. 수차례의 페널티킥 찬스를 그는 동료들에게 양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팬들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100호 골은 진정한 의미의 골, 필드골이 아니라면 넣지 않겠다고.......
그리고 이제 어쩌면 그는 영영 100호 골을 넣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 방 구석에는 제가 정말 사랑하는 보물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2004년 ‘월드 싸커’지 4월호가 그것입니다.
‘토티’ 때문도 ‘레예스’ 때문도 아닙니다. 프레데터 운동화가 나와 있는 그 페이지. 세계에서 가장 공 잘 차는 선수 ‘지단’과 축구화의 혁명을 불러온 ‘아디 다슬러’의 사인보다 훨씬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사인. 바로 그의 사인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가슴속에 그는 그 사인보다도 더 커다랗게 새겨져 있습니다.
13년. 정말 오랜 시간이네요. 그는 천마 구단에서, 아니 대한민국 프로축구에서 그 긴 시간을 우리와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축구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마술 같은 플레이로 일궈낸 승리들과 트로피를 끌어안고 포효하는 모습들, 팬들을 바라보던 그의 따뜻한 미소까지 한 페이지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외국 축구팬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전설’들을 보며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도 그들의 소중한 선수들만큼이나 커다랗게 남아있는 ‘전설’이 있으니까요.
신태용, 그는 스스로 전설이 되어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마음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는, K리그는, 성남 구단은 우리 축구팬들에게 이렇게 소중한 ‘전설’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나 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고, 그의 쓸쓸한 뒤안길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습니다. 13년을 구단과 팬을 위해 봉사한 위대한 선수를 내쫓듯이 몰아붙이는 현실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축구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낍니다. J리그를 외면하고 구단에 충성을 보였던 때를 생각하지 않고, 선수 생활을 계속하려면 먼 타국으로 떠나라는 그들의 매정함이 한 편으로는 대단하지만 한 편으로는 한심스럽네요.
지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사우디 클럽 알 이티하드의 3번째 골이 들어가자 팬들은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우승컵을 위한 조율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팬들은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그라운드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5 대 0.
그는 비참하게 짓밟힌 팀의 패배를 그라운드 밖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억지웃음으로 준우승 트로피를 손에 들던 그는 몰랐을 겁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앞날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가 저에게 그랬듯이 따뜻한 희망과 꿈도 주고 싶습니다. 벅찬 가슴으로 그의 이름을 소리치고 싶습니다.
신.태.용.
전설이 신화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금세 잊혀지는 추억이 될 것인지는 그 전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정직하고 순수한 축구로 그를 바라봤으면 합니다.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평가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13년 동안 우리 팬들과 함께했던 그의 무거운 땀방울이, 그의 화려한 재간과 여우같은 플레이가, 그의 커다란 미소가 헛되지 않게 우리 가슴 속에 그를 새겼으면 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 땅의 축구 선수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훌륭하고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화려한 축구사에 그의 자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외국의 축구팬들도 그를 모르고, 우리 축구팬들도 그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둡던 한국 축구의 그늘에서 그는 항상 우리의 곁에 있었습니다. 좌절과 역경에 힘들어하던 축구팬들의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묵묵하게 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축구팬들의 가슴속에 천천히 다가와 너무나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어느새 너무 커다랗게 변해버린 그의 존재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축구의 성장을 봅니다. 대한민국 축구가 겪었던 시련을 봅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 축구가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봅니다. 텅 빈 그라운드에서 영광의 우승컵까지 그 많은 순간들 동안 함께 숨쉬어준 그에게서 나는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를 봅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성남구단을 위해 여러분들을 위해 단 1분간이라도 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100골에 대한 미련도 70-70에 대한 미련도 버렸습니다. 오직 진정한 스포츠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고 싶습니다. 만에 하나 그러한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 하여도 최선을 다한 사람들로서 이세상에 비추어 진다면 미련없이 뒤돌아서 한번 크게 웃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신태용, 성남일화 써포터스 '천마불사' 홈페이지 -
언젠가 그가 팬들에게 내보였던 엄지손가락을 이제는 그를 향해 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최고라는 표현. 그것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니까요.
그는 화려한 플레이를 자랑하는 완벽한 기량의 축구선수였으며, 성실함과 승부욕을 가진 스포츠맨이었고, 팬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신사이자 사회에 봉사하는 공인이었습니다.
휴우...............전에 대전과의 경기에서 골키퍼가 부상당하자 더이상 교체를 할수 없는 상황에서 팀의 맏형인 신태용선수가 골킵을 봤었었죠. 그 후 두골을 실점하였습니다만.....정말 열심히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었죠. 운동장에 있는 순간만큼은 정말 최선을 다하는 모습.......신태용 선수는 최고였습니다...
신태용 선수 씨엠3때도 유럽리그 3부리그 할때도 오퍼 넣으면 싼값에 와주어 우리팀의 어시스트는 도맡아 하던 선수였는데.. 그래서 전 항상 40대가 될 때까지 방출시키지 않고 우리 팀에서 은퇴시켜 코치로 썼습니다. 게임에서조차 온화한 성격으로 감독을 믿어주는 성품이었습니다. 케이리그 경기 때도 멋지게 봤는데..
첫댓글 신태용 선수! 화이팅! 훌륭한 지도자가 돼서 나타날때까지 전 마음을 열고 당신을 기다릴겁니다. ^^
좋은 글이네요 ^^;; 신태용 선수의 코너킥골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38세가 될때까지 뛰어주십시요~~~~웃는모습이 멋진 ~
호주로 이적하신거 같은데...정말 아쉬워요 k리그서 계속 보고 100호골도 봐야하는데 ㅡㅡ;;;
휴우...............전에 대전과의 경기에서 골키퍼가 부상당하자 더이상 교체를 할수 없는 상황에서 팀의 맏형인 신태용선수가 골킵을 봤었었죠. 그 후 두골을 실점하였습니다만.....정말 열심히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었죠. 운동장에 있는 순간만큼은 정말 최선을 다하는 모습.......신태용 선수는 최고였습니다...
신태용 선수 씨엠3때도 유럽리그 3부리그 할때도 오퍼 넣으면 싼값에 와주어 우리팀의 어시스트는 도맡아 하던 선수였는데.. 그래서 전 항상 40대가 될 때까지 방출시키지 않고 우리 팀에서 은퇴시켜 코치로 썼습니다. 게임에서조차 온화한 성격으로 감독을 믿어주는 성품이었습니다. 케이리그 경기 때도 멋지게 봤는데..
앞으로도 호주 퀸즐랜드에서의 마지막 커리어 기대하겠습니다. 신 선수 화이팅~
한마디로 한국의 진정한 판타지스타...
후추에서도 근래보기 힘들게 최단시간 최다추천을 받은 글이죠. 거의 명전수준...
아..가슴찡한..감동..
신태용 좆타 베스트 일레븐 2월호에도 신태용 선수 인터뷰 나왔죠 K리그에서 빼놓을수 없는 선수 성남 개색히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