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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소리[제 16권 2호](통권 262호)(2014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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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님의 ‘소집령장’
장 기 홍
2014년 2월 10일, 일행은 부산광역시 화명에 있는 금종연 선생 댁을 방문했는데, 이 기회에 금선생은 그가 고교 2년생이던 1951년에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받은 친필 시고(詩稿) 한 장을 우리에게 건네주시었다. ‘소집영장’이란 제목 아래에는 1951년 8월 20일이라고 명기되어 있어 아직 6·25 전쟁이 진행 중이던 때였음을 알 수 있다. 휴전협정은 시작되었으나 일선의 전투는 더 치열하던 때다.
아파트 창문 너머로는 김해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일제 때 복음농업실수(實修)학교가 있던 자리가 보인다. 그 학교의 설립자 윤인구 선생은 일찍 미국 프린스턴 신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분으로 후에는 연세대 제3대 총장을 지냈다. 그 농업학교는 일제(日帝)의 방해로 폐교되었으나 6·25 사변 때까지 기숙사 건물이 남아 있어서 피난민이던 함석헌 선생 가족은 그 지붕 밑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소집영장’을 쓰시던 당시의 주소는 김해시 대저면 대지리 5번지였으나 지금은 지번이 바뀌어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780-6번지가 되어 있다.
금선생은 자기 차로 그가 어릴 때 함선생 가족과 이웃해 살던 옛터로 우리를 안내했다. 지금은 고인이신 금장노님의 주선으로 함선생님 가족뿐 아니라 노평구선생, 고병려선생 등 쟁쟁한 신앙동지들이 이웃이 되어 사시면서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하시던 옛 일을 회상했다. 추운 날씨였지만 순례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지체했다. ‘소집영장’이라는 시의 원고를 받았던 금종연님(금장노님 아들)보다 여러 살 아래였던 나의 아내(은선)는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나 자신은 서울대학 가교사가 부산 대신동에 있을 때 입학하여(1952년 봄) 영도에서 열리던 함선생님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선생님 댁은 들르지 못하였다.
召集令狀(소집영장)은 만년필이나 철필(鐵筆)로 쓰신 것인데 성함은 쓰시지 않았으나 특징적인 그이의 필적이 완연하다. 이 시를 읽으면 어떤 독자는 내용이 의외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친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령자는 63년간 이것을 보관하고 있다가 우리가 간 기회에 공개했던 것이다. 정현필군은 그가 수집한 외조부의 원고들 중에는 이 시고(詩稿)와 똑 같은 규격과 지질(紙質)의 것들이 여럿 있는데 그것들은 이미 시집 ‘수평선 너머’에 실려 있다 한다. 그래서 이 시고를 보니 종이가 낯익다는 얘기였다. 이 시(詩)만은 출판되지 않았으니 아마도 금군에게 시고(詩稿)를 건네고 말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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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集令狀(소집영장) 1951. 8. 20.
나라의 명령 나리었다
나서라는 명령 나왔다
어서 나가자
지체를 왜 하느냐
간밤 7월 보름달에 구름꼈더라
무더운 공기 가슴을 누르고
벼룩 빈대 모기 달려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노라
이제는 모든 걱정이 다 떨어지고
의심의 구름도 날아 나버리고
솟아오르는 아침 해 같은 맘 뿐이로다
어서 나가자
나가자 나서라는 대로 가자
나라 있어 있는 이 몸이오
나 소용된다는 오늘인데
아니 나갈 줄이 있겠느냐
내 사랑아 나를 붙잡지 말라
눈물로 내 가는 길을 흐리지 말라
보다 큰 사랑 나를 부른다
네게도 나서라는 令(령)을 내가 내리노라
1950년 6월 25일 남한 정부는 기습을 당해 대전, 대구, 부산으로 사흘이 멀다 하고 이전해야 했다. 흩어졌던 피난민이던 함선생 가족이 모여 이 대저면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것이니 시가 쓰여진 1951년 8월은 전쟁발발 1년 남짓 후였다. 대저면은 김해공항에 가깝고 김해시에 인접한 곳이다.
1950년 9월 15일에는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을 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소위 ‘1·4 후퇴’를 맞게 된다. 시가 쓰인 그해 8월은 휴전회담이 진행 중일뿐 일선에서는 전투가 치열했고 임시수도 부산은 피난민으로 북적댔다.
회고하면 6·25발발 직후는 기습을 방어하느라 길에서도 청소년을 붙들어 총대를 메게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만일 유엔군 참전이 없고 이승만 정부가 버티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은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의 이승만과 맥아더 원수를 칭송하는 축과 그들을 원망하는 종북인사들로 나누인다. 후자는 그때 만일 적화통일이 되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다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중에는 함석헌 선생도 같은 방향으로 생각하시리라고 희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시의 내용이 충격적일 것이다.
그때 만일 김일성 치하의 소위 ‘공산통일’이 되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같은 북한의 세습왕조 아래서 살고 있을 것이다. 피 흘려 자유를 지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시의 형식을 빌린 글 ‘소집영장’의 요지는 나라의 소집명령을 따르라는 것이다. 선생은 한때 확신이 오지 않아 구름 낀 듯 가슴 답답하고 벼룩 빈대 모기가 달려드는 것 같아 잠 못 자고 고민하시던 한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마침내 “모든 걱정이 다 떨어지고, 의심의 구름도 나라나버리고 솟아오르는 아침 해 같은” 명확한 판단이 왔다고 했다. “어서 나가자, 나서라는 대로 가자” 왜냐하면 “나라가 있어서 비로소 있는 이 몸이오, 나라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데 아니 나갈 줄이 있겠느냐?” “보다 큰 사랑이 나를 부른다.” 그 큰 사랑은 ‘나라 사랑’이다. 그리고서는 “네게도 나서라는 令(령)을 내가 내리노라” 했으니 고등학교 학생인 금군에게 그 명령을 전달하겠다는 뜻이리라.
이런 내용은 나에게도 뜻밖이었다. 왜냐하면 그 후 선생의 사상은 국가주의를 탈피하고 절대평화를 실천하자는 비전론(非戰論)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1953년 서울로 수복하시고는 내가 집회에서 선생으로부터 받은 인상은 병역거부를 해도 무방하다는, 아니, 병역거부가 정당하다는 절대평화사상이었다.
1950년대에 선생님 집회에 다니던 홍명순씨는 실제로 병역거부를 하여 양심수로서 감옥살이를 했는데 함선생님의 영향이었음은 사실이다. 나 자신은 1958년에 지질연구소 근무 중 경찰관이 들이닥쳐 입대를 해야 했는데 함선생님과 홍명순씨 보기에 조금은 면구스러움이 있었다. 나는 이미 대학을 나오고 함선생 제자로서 내 나름의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훈련소 철조망 안에서 고민이 많았다. “무슨 이유로 나라가 나를 이렇게 구속할 수 있나?” “국가가 개인에게 절대권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등등. 그때는 이미 휴전 후였으므로 입대하더라도 실전에 나설 위험은 없었으니 한갓 사치스런 고민이었다고 할까? 내가 논산훈련소의 과정을 마치고 휴가를 얻어 선생님 앞에 나타났을 때 선생은 “몸은 좋아졌구만!” 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6·25에서 십년이 지난 5·16에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함선생님은 책망하는 방향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논조에는 군의 존재가치를 크게 인정치 않는 태도가 역력했다. “좋은 쇠(鐵)는 못(釘)을 만들기에는 맞지 않고, 좋은 사람은 군대가 합당치 않다.” 그이의 강연 때 가끔 듣던 인용문이다.
군이 일단 국방에 성공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무력행사를 정치에 적용하면 도리에 어긋나 결과가 좋을 리 없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었다. 나는 그때 그이가 군부에 저항하신 것이 우리나라가 군의 영구집권으로 미얀마 같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에 이바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은 그 저항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선생의 사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군사정권이 경제개발을 했던 극약처방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어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나 역시 평화주의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김일성이 기습으로 시작한 그 전쟁에 대응할 길은 무력으로 맞서 싸우는 그 길 외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국방과 자유수호를 위해 맞서 싸우는 그 길 밖에는 없었다. 악의 순환을 차단하는 일은 미래의 과제이고 일단 악에 대한 저항에 나서는 수밖에 없으리라. 내가 이승만의 위치에 있었더라도 별 수가 없었으리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하여는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처벌하고 불이익을 주었으리라.
그러나 한편 철학자인 나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나서서 “나는 살인과 동족상잔에 참여할 수 없소” 하고 양심선언을 하면 눈물겨워 하리라. 아마도 그래서 1951년의 함선생님은 밤잠 못 자고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총거부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 편이다.
50세의 함선생님은 김해평야에 몰린 궁지(窮地)의 피난민으로서 밤새 고민하다가 마침내 국방에 나서자고 결심한 현실주의자였으나, 60세가 되어서는 군사 쿠데타를 꾸짖고 군의 존재를 저평가하는 평화주의자 곧 이상주의자가 되기에 이르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다. 사람은 본래 현실과 이상의 복판에서 고민 고민 하면서 중용의 길을 걸어야 하는 그런 제한된 자유를 누리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싸우는 동안 생명의 진전이 있고 역사가 있도록 싸울아비로서 사람을 점지해 둔 조물주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조물주가 있다면 그는 세계와 인간을 고약하게 만들었다 할 것이다. 그 원악(原惡)을 교정하기 위해 선(善)을 조금씩 창조함으로써 아버지를 보정(補正)하고 참 아들 구실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자가 인간이다. 어차피 인간이 나서서 창세(創世)의 틀을 일시에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6·25때 남한의 모든 청년이 집총을 거부했더라면 그 결과는 적화통일 밖에는 없었으리라. 우리는 지금 김일성 세습왕조의 신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현황을 대조해보면 전사자와 살아남은 자들이 참전하여 자유수호를 성취했음은 정당했다. 이것이 평화주의 일변도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이다.
1951년 그 시를 쓰시던 때의 함선생님의 생각은 그 자체로서 옳았다. 그 후 함선생님은 인류의 평화를 생각하여 원시안(遠視眼)을 가지게 된 진일보를 취했지만, 지금이라도 자유와 나라가 침해를 당하면 (지하에서라도) 국방을 독려하실 것으로 나는 믿는다.
대한민국 정부가 독재정치를 할 때에는 독재의 폐단 때문에 대한민국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한 때가 있었다. 남한과 북한이 다 틀렸고 아직 가공이지만 통일된 후의 미래국가만이 애국할 대상이라는 상상력이 지배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공(架空)의 나라요, 현실로는 대한민국을 튼튼히 하여 민족통일로 나아가는 방향만이 우리 앞에서 훤하게 뚫려 있다.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치하를 회상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가진 다행이 새삼스럽다. 이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에서 나 자신 진정한 진보의 편이지만, 그러나 대한민국을 보위(保衛)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문자 그대로 보수(保守)이다. 나는 이번 선생님의 젊으실 때의 시 한편에서 ‘보수’의 동지를 발견하여 기쁘다.
자기 국가만을 위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기주의이므로 언젠가는 인류가 그것마저 초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족통일을 앞둔 오늘에 있어서는 그 과업이 우리의 중간적 최대목표이다. 우선 그 고지에 선 후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일시에 최종 단계로 가버릴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역사가 끝나 종말이 올 것이기 때문에!
작년 어느 신문에는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쏜 백선엽장군이 조금도 후회하거나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없다”는 비난조의 논설이 실려 나는 그것을 읽고 경악했다.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쏘았기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은 엄연하다. 아마도 그의 논리는 대한민국은 그 때 북에 흡수되고 없어졌어야 할 나라임을 의미하리라. 일부 종북좌파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저 인권부재의 지옥이요 복마전인 현 북한체제를 대안이라고 보는 그런 사람들, 과연 이성이 있는 사람인지 묻고 싶다.
이 세상은 어차피 선과 악의 싸움터이다. 그리고 조물주는 그 싸움의 투사로서 우리를 창조했다. 침략을 당하면 저항하여 국방에 나서야 하듯이 지금이라도 저 북한의 무수한 수용소를 허물고 반체제 인사들을 구출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앞으로 대한민국은 통일의 대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제 역사의 취지는 너무나 분명해졌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과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통일은 선의와 사랑과 ‘정의의 심판’의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수호해야 할 것을 수호해야 한다. 지금까지 지켜낸 대한민국을 기지(基地)로 해서 조국통일을 이룩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안고 있다. 민국을 지킬 필요성이 아직도 절실한 이때에 함선생님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글이 발견되었음은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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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모임
3목(木) : 1월 20일(목) 저녁 7시
장소 : 경북대학교 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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