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에 음식을 탐하다
소설가
양귀자는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라는 소설을 썼다.
시인
유화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시를 썼다
그런데
“눈 오는 날이면 어디로 가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없다. 아무래도
눈이 발을 묶어 놓기에 눈 오는 날에는 누굴 만날 약속이 있었더라도 취소하고 집에 머물게 된다.
오늘
새벽 네 시 반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눈발이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성당에 가기는 힘들겠으니 이번
주일 주보 원고는 집에서 만들어야 하겠다. 폭설이 내린다는 일기 예보를 듣고 주보 만들 자료를 모두 챙겨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전날에 눈이 오면 출근하지 말라고 얘기한 신부님의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전날에
술을 마셔서 저녁을 거의 먹지 못 하고 잔 탓에 배가 몹시 고파서 이른 새벽에 라면을 끓이느라 부산을 떨었다. 기왕 끓이는 거 맛있게 만들겠다고 기름 두른 냄비에 파 썰어서 파 기름을 내고 고춧가루도 볶고, 오징어, 양배추 버섯 그리고 양파도 썰어 넣고 달걀도 투하하고… 꼭두새벽부터 요란을 떨었다.
주보
원고를 정리하며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이 가까워져 오자 따끈한 정종이 생각났다. 이렇게 눈 내리는 날에는 생선회나 어묵
국물에 정종이 제격인데 집에 그런 게 없으니 입맛만 다실 수밖에. 전속 기사인 아내를 재촉하여 그런 걸 사러
나서기에는 날씨가 좋지 않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다가 스무 살 무렵에 서울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국밥집에서 가끔 먹던 돼지국밥과 순대국밥이 생각났다. 매운 양념을 듬뿍 넣은 뜨끈한 국에 소주를 곁들이면
그런 호강이 어디 있을까?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한인 타운 어느 음식점에서 그런 토속 음식을 취급한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런 날씨에 집 나서면 고생 길이 훤하니 안 먹고 말지 뭐. 감자를 갈아서 감자전을 부쳐 먹어도 좋은데, 감자는 있지만 손목이 아프도록 감자를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느니 그것도 안 먹고 말지.
지난주에
어느 댁에서 대접받은 푸짐한 식사가 떠올랐다. 특히 굴과 부추에 젓갈을 넉넉하게 넣고 매운 고춧가루로 시뻘겋게 버무린
굴김치가 떠오르니 군침이 돌았다. 초대받아 금요일에 방문하기로 한 댁에서 준비할 두툼한 돼지고기 구이도 생각났다.
그러나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한다. 왜 그리 먹고 싶은 음식이 많은지,
이게 다 눈 탓이다.
예전에
눈이 내릴 때는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즐기기도 했고, 눈 내리는 경치가 나오는 영화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이제는 눈 오는 날에 먹을 것만 연이어 생각나니 그것도 나이 들어가는 증세인가? 사실은 소식 체질이라 머릿속으로는 한 상 가득 떠올라도 막상 차린 음식을 대하면 께적께적하다가 수저를 놓는 밉상인데도 머리로만 온갖
음식을 탐한다. 그러나 내일이라도 쨍하고 해가 뜨면 먹고 싶은 음식 생각이 말끔히 사라지니 그것도 별일이다.
점심
후 주보 원고 정리를 마치고 나니 설경이 볼만했던 영화를 골라보고 싶어졌다. 겨울 산행에서 조난 당해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해 여주인공이 눈 덮인 산, 그가 죽은 산을 찾아 해가 떠오를 때 “안녕하세요(오 겡끼데스까?)” 라고 말하고는 목을 놓아 우는 장면이 나오는 ‘러브레터’나 볼까?
그건 좀 유치하지. 닥터 지바고는? 차갑게
얼어붙은 유리 궁전이 볼만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이 시릴 것 같다. ‘파고’는 어떨까? 눈은 실컷 보겠지만, 띨띨한 등장인물들이
지겹다. ‘러브 스토리’는 여러 번 보기도 했지만, 나이 든 사람의
정서와 맞지 않을 것 같다.
에라
영화 고르기도 번거로우니 책이나 보자. 그래서 ‘연을 쫓는 사람(The
Kite Runner)’이란 영문 소설을 집어 들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에라 다 집어치우고 술이나 먹자. 그래서 큰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라서 질금질금 따라서 마시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그 사이에 눈은 그쳤다. 눈 내리는 날 분위기에 젖어서 로맨틱하게 지내야 했는데 종일 먹을 것만 떠올리며 일만 한 셈이니, ‘내 나이가 어때서’가 아니라 무드에 무디어진 내 나이가 문제다. 나도 젊었을 적에는 무드를 푹 빠질 줄 알았는데 어느덧 먹을 것만 생각하는 주책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2017년 2월 12일)
첫댓글 형기~~
내 외장하드(6TB)에 영화, 다큐, 음악 등 약 25년간 모아놓았는데 흥미 있음 연락하게나.
아카데미 작품상 1930~2016까지 소장하고 있고, 명화 (젊은이의 양지, 지상에서 영원으로, 닥터지바고등) 영화만 약 천편정도, 다큐는 약 3천개(골프, 교양, 시사,기독교,불교,유교, 이슬람교, 문명, 사회, 상식,시대정신, 전쟁,여행,역사, 우주과학, 음악 등등 폴더로 분류해서 가지고 있음) 음악은 클래식부터 재즈, 뉴에이지,월드뮤직, 팝송, 가곡, 가요, 가스펠, 영화음악등 약 20만곡정도 소장하고 있는데 흥미 있음 연락하게. 난 2월23일 다시 뉴질랜드와 호주 2달반 여행 떠나는데 이걸로 세계일주 끝내고 앞으로 몰할까 고민중임.
형기에게 안주로 돼지국밥 한사발과 굴전 한접시를 ^^(사진을 클릭하면 전체 그림이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