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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누가복음19장28~40절
제목 :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다
어제는 열 므나의 비유말씀을 통해 당시 무리들의 그릇된 천국관과 그릇된 메시야관을 지적하고, 하나님을 틀에 넣지 말아야 하며, 맛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정(9:51~19:27)을 마치시고, 이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도 보지만 이름 모르는 또 한 사람도 보게 됩니다.
평화의 왕으로 찬미를 받으셨지만 예루살렘의 배척과 심판을 내다보며 우십니다.
1. 어린 나귀를 준비하다(28~36절)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십니다(28절)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누가는 므나의 비유와 예루살렘 입성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고'(열 므나의 비유의 말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막 10:32에도 나옵니다.
*막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는 장군이 부대 앞에서 진두지휘함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듯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受難)과 죽음을 향하여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걷는 장면입니다.
한편 본절에서 부터는 주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겪으시기에 앞서 맞이하신 마지막 한 주간의 생애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2) 제자 중 둘을 보냅니다(29절)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마태는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감람원이라 부리는 산은 남.북으로 약 4km의 길이가 되며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나즈막한 산입니다.
이 산에 벳바게(벧파게)라는 지명이 언급되는데 신.구약 성서 전체에 걸쳐 오직 이 이야기에만 나오는 지명입니다(마 21:1;막 11:1).
다만 베다니(베다니아)라는 지명과 함께 사용된 점으로 보아 베다니 근처, 혹은 인접한 곳에 위치한 마을 이름인 것 같습니다(Lightfoot, Godet).
한편 사랑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5km, 그리고 여리고로부터 약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제자 중 둘. - 본문에서 어느 제자를 보냈는지 알 길이 없으나 22:8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점을 보아 역시 여기서도 베드로와 요한인 듯합니다.
3)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하십니다(30절).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너희 맞은편 마을. - 29절의 언급 내용으로 보아 벳바게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Bruce).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 - 이같은 묘사는 슥 9:9의 예언의 성취라 볼 수 있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즉 예수님은 기치창검(旗幟槍劒)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슥 9:10) 평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구하신 것은 제물에 바치는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종교적 의식법에 맞추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민 19:2;신 21:3;삼상 6:7).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종교적 신비감까지 느끼도록 함으로써 그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지시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신 좋은 실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비적 예지의 표현은 한층 더 예루살렘 입성의 진지함을 증폭시켜 줍니다.
4) 만일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31절).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여기서 '주'는 현재 나귀를 사용할 사람이 예수라는 점에서 예수님 자신으로 봅니다.
따라서 단순히 나귀의 소유주라는 의미의 '주'보다는 신앙적 의미에서 '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눅 12:41 주제 강해 '주의 호칭과 예수' 참조).
5)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났습니다(32절).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예수님이 예견하신 대로 나귀가 묶여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나귀를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또 멀리서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지시했던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초자연적 예지 능력으로 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중 예수님의 신비적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묘사는 예지 능력 자체에 강조점을 둔 것 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입성의 종교적 엄숙성 또는 예언 성취의 경이감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 21:4).
*마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6) 나귀 새끼를 풀 때에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묻습니다(33절)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임자들'이란 나귀 주인을 가리키는데 평행 본문 막 11:5에서는 '거기 섰던 사람 중 어떤 사람'이라고 다소 불명확하게 언급합니다.
또한 그들이 묻는 물음도
누가는 남의 것을 왜 푸느냐는 식의 물음인데 반해,
마가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는가'하고 물음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전제 없이 나귀새끼의 용도에 대해 묻고 있는 점이 서로 다릅니다.
어쨌든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님께서 예견하신대로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본절의 물음은 무슨 권위로 남의 짐승을 가져가느냐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아직 새끼에 불과한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의미로도 이해됩니다.
7)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하고(34절).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고. - 이 말에 대해 나귀의 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곧 주인들이 제자들의 말을 인정했다는 암시를 줍니다.
따라서 주인들이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어쨌든 이 같은 묘사는 예수님의 초능력적 예지(豫知) 능력 또는 철저한 예언 성취 등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입성이 신적인 섭리(providence)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8) 나귀 새끼위에 겉옷을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웁니다(35절).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 나귀 등에다 겉옷을 걸친 것은 안장 대신 사용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왕이나 귀인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존경의 표시로도 간주될 수 있습니다(왕하 9:13).
그리고 타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님 스스로 나귀 위에 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태웠다고 묘사합니다.
이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 또는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존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왕상 1:33).
9)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36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겉옷을 나귀가 지나가는 길 위에 까는 행위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입니다(왕하 9:13).
여기서 '그들이' 제자들을 받는 말인데 마가와 마태는 많은 사람 또는 무리의 대부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는 겉옷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도 길에 펼쳤다고 했고(마 21:8;막 11:8) 요한은 그것을 종려나무 가지라고 밝혔습니다(요 12:13).
또한 요한복음은 환영의 무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요 12:12,13,18) 공관복음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무리들은 대체로 갈릴리에서 부터 따라온 순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을 환호(歡呼)했던 사람들 대다수는 예수님을 정치적, 민족적 메시야로 밖에 여기지 않았습니다.
2. 평화의 왕을 찬양하다(37~40절).
1)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37절)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다른 복음서에 없는 자세한 장면 묘사입니다.
이제 감람산 기슭까지 온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군중들은 이미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동행해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리고에서 부터 동행한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벳바게와 베다니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아뭏든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찬양하는데,
그 찬양은 예수님의 모든 능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베다니를 오는 동안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요 12:17,18) 그 외에도 예수님의 허다한 권능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보고 들었음에 분명합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 이 구절 역시 누가의 독특한 묘사로서 깊은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행하셨던 치병 활동이나 모든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적인 활동 등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였다는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묘사는 예수님이 군중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공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이같은 구호는 시 118:26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왕이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미 '므나의 비유'에서 예견되었거니와
여기서도 예수님을 왕권적 권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사용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라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지만, 메시야 예언과 관련된 경우에는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入城)을 예표한 것입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 - 이 구절은 2:14에서 나오는 천사들의 합창과 흡사한데 여기서는 땅에서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평화라고 표현함으로써 어색한 느낌을 줍니다.
이 표현 역시 다른 복음서와 다른 독특한 표현입니다.
즉 마태와 마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마 21:9;막 11:10) 누가는 호산나라는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본절의 뜻에 관해,
구원이 아직은 하늘에만 나타났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W.Forester) 또는 사람을 위해 예비한 하늘의 평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Easton, Plummer).
또 사람들에게 줄 평화가 예수님께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J.H.Davies), 예수님께서 왕으로 높여짐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J.H.Marshall).
이중 마샬(Marshall)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충하면 탄생 때에 천사들이 땅위의 평화를 노래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가져다준 평화가 곧 하늘의 평화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어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39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묘사입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대해 사용한 '선생'(디다스칼로스)이라는 호칭은 군중들이 외치는 '주'(퀴리오스)와 대조되고 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한 요청은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여기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7:36;11:37;13:31;14:1).
즉 군중들의 환호는 흥분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고 이같은 메시야적 행진이 계속되었을 때 예수님의 신변에 물리적 위협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흥분된 군중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환호의 물결이 시위의 양상을 띰으로써 예루살렘에 주둔(駐屯)한 로마 군대와 부딪히게 될 상황을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2)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 드린 찬양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찬양이 신성 모독의 소리로 들려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후 문맥상 (2)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나, 어쨌든 바리새인들이 신성한 하나님의 역사를 무지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막으려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마 16:21-23 주석 참조).
4)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십니다(40절)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격언구 형태의 이 구절은 합2:11에서 언급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한 마디로 묵살하는 것인데,
첫째,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호하는 그들의 찬양이 정당함을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 반드시 그렇게 찬양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대한 메시야적 찬양은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제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하에 필히 이루어질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찬양은 계속 선포되어야 할 내용이므로 응당 찬양해야 할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곧 죄가 된다는 의미도 함축(含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메시야 찬양 때문에 물리적 위협이 닥쳐온다고 해도 계속 외쳐야 할 것이며, 메시야의 행진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함으로써,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물리적 위협이나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주의 복음을 굽힘없이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순종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순종은 그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해를 넘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11장에 나사로 사건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아무런 가능성이 없었지만, 돌을 옴겨 놓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 할 때 나사로는 살아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본문에서 나귀는 주인이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이 친히 준비한 나귀입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순종 할 때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이것이 순종 할 수 있는 이유이자 작은 순종이 큰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꾸짖음에도 주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무리를 향해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책망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39절입니다.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그들은 찬양해야 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분별 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없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40절입니다.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돌들보다 우둔하며, 분별력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구약에 엘리 제사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럴때에 이스라엘은 영적 어두움의 때를 지내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영적분별력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럴때에 책망이 아닌 칭찬 받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을 주님도 기뻐하고 계십니까?
내가 안타까워하고 있는 그것을 주님도 안타까워 하십니까?
영적 분별력이 간절한 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예루사렘 인근까지 걸어오신 예수님은 제자 들을 보내어 자신이 타고 입성할 나귀 새끼를 끌어 오게 하십니다(28~31,36절).
정복자의 화려한 준마가아니라 초라한 나귀에 몸을 얹어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인 군주가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평화의 왕은 군림이 아닌 섬김으로, 혁명이 아닌 죽음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두 제자는 예수님의 당혹스런 요구에 그대로 순종합니다(32~36절).
‘주’께서 시키신 일이니 주저 않고 다릅니다.
나귀의 임자도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군말 없이 내어 줍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도 주의 말씀이기에 순종하고, 형편이 허락하기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이가 모든 상황의 주인이시기에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도 순종할 때 내 삶에 그분의 주권이 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구유에 누이신 구주를 향한 천사들의 찬양(2:14)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를 향한 제자들의 찬양으로 이어집니다(37,38절).
그동안 주의 능하신 일들을 목격해온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시118:26))을 연호하며 하늘의 평화를 땅에 가져다줄 왕에 대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수난 받는 왕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열렬한 환호는 십자가 앞에서 실망과 분노로 바뀔 것입니다.
나의 열정과 찬양은 골고다까지 주와 함께 오르게 하는 고백입니까?
3) 예수님이 무리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시자 바리새인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39,40절).
찬양을 중단시키라는 그들의 요구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왕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그분께 내가 드릴 합당한 경배는 무엇일까요?
주의 능하신 일들을 보고 듣고 알면서도 세상 앞에서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방관과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돌들보다 못한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