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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8-11절 연구 (회복역 RSG 연구노트 No.7)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보혜사 성령의 책망의 의미와 내용)
요16:8 그분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9 ‘죄에 대하여’라 한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의에 대하여’라 한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여러분이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11 ‘심판에 대하여’라 한 것은 이 세상의 왕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핵심 사역에 관한 주님의 소개 말씀인 이 본문은 소위 성경의 난해구절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12장에서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모든 문제를 대표하는 9가지의 증세(도덕적 사람의 필요, 부도덕한 사람의 필요, 죽어감, 무기력함, 배고픔, 목마름, 죄의 속박, 보지 못함 그리고 죽음) 가 오직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으로서만 해결되고 치료될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우리가 그러한 생명을 가졌더라도 온갖 죄와 사망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여전히 살아가야 함으로 인해 오염되어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될 수 있음과 이의 회복을 위해서 씻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심으로서 보여주십니다.
14장에서는 이제 그러한 구원이 굳건히 그리고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함께 조성되고 거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함을 계시하시고, 그 거처를 마련키 위해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5장에 와서 그러한 상호거처의 신비한 비밀을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후에,
16장에 와서 주님께서는 그가 가신 다음 보내실 보혜사에 대한 소개를 하십니다. 그 오시는 보혜사는 우리를 모든 실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13절) 그리고 그의 사역 중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본문의 일입니다.
보혜사이신 성령은 누가복음의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해 우리의 심령을 밝히시고 구석구석 찾으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그 분은 늘 우리 심령 안에서 우리를 위해 심히 간구하고 계시는 놀라운 은혜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혜사 성령 곧 그 영이 오심으로 인해 오직 하나님의 삼일성(Trinity) 안에만 있었던 그 놀라운 상호내재(co-inhering)의 비밀이 우리 안에까지 확장되는 새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 진리의 측면에서 성령께서 행하실 세 가지 사역의 의미와 내용 >>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일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진리의 면에서의 놀라운 세 가지 사역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동안 세상이 오해하고 있던 세 가지 진리를 바르게 계시해 주시고 가르치시며, 또한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게 선포된 그 진리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요16:8 『 그분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할 것입니다. 』
☐ “그분께서 오시면” ; 여기서 그분은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실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과정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영 곧 ‘그 영’이십니다.
☐ “책망하시어”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ελεγχω, 엘렝코’이며 ‘논박하다’,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책망하다’, ‘꾸짖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오시면 먼저 세상이 오해하고 있는 죄와 의와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밝히 조명해 주시며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셨음에도 순종치 않는다면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도 이 말 안에는 들어 있습니다.
* 참고로 회복역 본문에서 “깨닫게 하실 것” 이라는 부분에서 '깨닫게' 란 단어는 원문상 ‘책망하시어’에 포함된 의미로서 별도로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
☐ “세상을” ; 성령께서 오시면 누구를 책망하시는가? 본문은 ‘사람’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특별히 ‘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세상’은 원어로 “κοσμος, 코스모스”로서 인간의 개념보다 매우 넓은 개념입니다. ‘코스모스’는 우주 곧 물리적으로 전 우주의 영역을 포함하며 또한 생명적으로는 사람은 물론 지상의 피조물들의 생명과 보이지 않는 ‘하늘들’의 생명 곧 영적 존재인 천사와 사단과 마귀들까지도 포함되는 확장된 개념입니다.
왜 본문은 책망의 대상을 '코스모스'로 규정하였을까요?
- 첫 번째는, 주님의 구속 사역의 범위가 전 우주적임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영향도 전 우주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 두 번째는, 인간은 물론 전 우주적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또한 그 분과 관련하여 세 가지 곧 죄와 의와 그리고 심판에 대한 잘못된 이해 곧 오해가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 세 번째는, 그 영께서 하실 계시와 책망 그리고 그에 따른 심판이 인간은 물론 ‘코스모스’ 전체에 있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2. 9절 『‘죄에 대하여’라 한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성령께서 진리적 측면에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고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죄를 ‘나를 믿지 않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해 책망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이 죄이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죄와 주님 그리고 주님의 사역과의 상관성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이해될 때 본문의 의미도 밝혀질 것입니다.‘죄’란 무엇인가요? 보통 세상은 죄라고 하면 세상이 정한 법률을 위반하거나 윤리나 도덕 또는 양심에 위반된 행위를 할 때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차원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때는 아직 신약의 경륜이 성취되시기 전으로서 구약적 관점에서 죄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구체적으로 '죄'라고 함은 바로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반하는 것이 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적 관점에서의 죄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율법의 죄라고 하면 소극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쉽습니다. 즉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와 같은 계명들을 죄로서 생각하게 되지만 그러나 율법은 적극적인 의미에서도 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곧 ‘무엇 무엇을 하라’는 계명입니다. ‘안식일 거룩히 지키라’, ‘부모에게 효도하라’와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죄란 율법의 이런 적극적, 소극적 개념 모두에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 모세가 받은 계명 ;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흔히 십계명으로 이해되지만, 유대 랍비들은 성경에서 613개의 계명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613개의 계명이 365개의 소극적 계명 곧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명과 248개의 적극적 개념 곧 ‘무엇 무엇을 하라’는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65’라는 숫자는 일 년의 날 수와 일치하며, ‘248’이란 숫자는 인간의 신체의 구성요소의 숫자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본문은 성령께서 오시면 이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죄’에 대한 관념을 바로 잡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율법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이 어떻게 주어졌을까요? 율법이 처음부터 구원을 위해 주어졌을까요? 우리는 율법이 주어진 시기와 당시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만일 율법을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하신 자녀들의 구원의 방편으로 삼으셨다면, 최초로 부르신 아브라함 때에 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게 된 당시의 상황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던지 자신들이 다 지키겠다고 일제히 외친 직후 곧 그들이 하나님의 그 동안의 은혜를 잊고 교만을 보일 때에 주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규정될 수 밖에 없는지 보여주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그 분의 거룩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곧 그들이 받은 율법 하나하나의 조항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성과 본질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생명 곧 죄인으로 조성된 인간이 그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요? 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동일하게 거룩한 생명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하나님도 그런 뜻으로 율법을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은혜 곧 그 분의 아들을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셨고 율법을 통해서 아들이 올 때까지 그들을 죄와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보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백성들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율법을 오해해 왔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으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 인간과 똑 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곧 그 분을 믿음으로(εις, 에이스 / '그 분 안으로 믿어 들어감으로서')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잘못된 오해를 책망하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9절에서 말한 나를 곧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만약 그들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율법을 통한 구원을 고수하셨다면 율법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무능력함으로 인해 단 한 사람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당연히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은 보시지 않고 그들에게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신 아들을 믿는 믿음만 보고 우리를 정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곧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렸을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것만 보고 그 집을 건너가셨듯이 그렇게 (踰越)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서 율법을 보지 않고 아들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곧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10절 『‘의에 대하여’라 한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여러분이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 본문이 가장 의미 파악이 되지 않는 구절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義’는 무엇이며? 그 의와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과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과는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죄'와 마찬가지로 '의'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의와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의이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사랑'과 '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것에도 제한받으시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가지신 분이시만 그 분께서 행하심에 있어서 그 분은 이 두 가지 큰 원칙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고 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특별히 그 분의 구속사역은 사랑과 의가 충돌하는 딜레마를 자신의 몸 안에서 극적으로 승화시킨 일대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이루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열납된 이 ‘의’가 있음으로 인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으로서 죽음과 전혀 상관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죄에서 그리고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고, 또한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의 죽으심만 있고, 살아나심이 없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과 실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죄들의 사함은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그 분의 허리에 품으시고 죽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부활하셔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영광을 입으심으로 인해 우리도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용납됨과 설 수 있음. 다시말해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거룩을 만족시킨 이것이 바로 ‘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여러분이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의’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미 말씀드린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단순히 대속의 죽으심을 짊어지신 것만이 아닙니다. 그 분은 그 사망에서 새롭게 일어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아버지께로 가심"은 곧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루었다”는 그 결과물을 가지시고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고 아버지의 의로우심을 만족시킴으로서, 아버지도 영광을 입으시고 아들도 영광을 입으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일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떨어져서 죽으셔서 그 분의 생명을 해방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육체를 입으신 채로 만일 지금까지 살아계신다면 그 분 안에서 온전한 의는 성취되고 유지되시겠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고 또한 실재가 될 수 있는 길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아버지에게로 가시고 그 분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것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분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천년 전에 육신을 입고 역사 가운데 오신 그 분을 볼 수 없지만 우리가 그 분을 믿을 수 있다는 이것은 놀라운 축복이며 기적입니다. 보지 못하지만 믿는 이 믿음으로 인해 그 분이 이루신 의가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여러분이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가 '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 11절『‘심판에 대하여’라 한 것은 이 세상의 왕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펴본 두 가지 곧 '죄'와 '의'에 관한 것은 원문 상 동사가 현재시재 곧 어떤 상태를 서술해 주고 있습니다. 곧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을 때(믿는 그 시점을 말합니다.) 그것이 죄와 의에 관한 어떤 실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11절의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 사용된 원문의 동사는 완료시재가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여기서도 ‘코스모스’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의 임금 곧 사단의 심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그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에 따라 우리의 심판도 결정된다는 사실을 본문은 말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시고 다른 창조 때와는 달리 “심히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심판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대신 그 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아들까지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의 아비요 거짓말쟁이인 사단은 심판하시지만, 사람이 그 심판의 길에 들어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심판에 들지 않도록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고 그리고 사단에게는 이미 유죄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들려주시고 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사단에게 이루어진 심판을 알고 사단과 함께 심판에 서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전적으로 우리가 심판받고 안 받고의 문제는 오직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이미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영적 존재입니다. 사단은 자신에게 이미 유죄판결이 내려진 것을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단지 사단에게 잠시 집행이 연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왜 연기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의 길로 오시길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그 분의 왕국의 통치가 끝날 때는 사단은 영원히 불 못에 집행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저 혼자 심판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세상 곧 세상의 체계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계속 자기에게 묶어두어서 함께 죄의 심판에 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계(system)란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요소와 자원들을 엮어서 하나의 생존 시스템 또는 운영 시스템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다 어떤 체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체계를 벗어나면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생계를 이어가려면 직장의 체계에 순종해야 하고, 우리가 건물에서 따뜻하게 지내려면 난방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시스템에 있고, 세상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돈 곧 물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권세를 가지고 사람을 유혹하고 속이고 또 때로는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여 이미 심판이 내려진 자신에게 계속 붙들어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바로 사단 자신이 이미 받은 그 심판에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왕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라는 본문의 의미는 곧 사단의 심판은 이제 십자가로 인해 이루어졌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소리를 통해 그 사실을 너희에게 알릴 것이며 또한 나는 너희가 이 심판에 동참하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가 복음을 듣고 아들을 선택하여 사단이 받은 심판에 속하지 않기를 원한다! 이런 뜻입니다.
< 나가는 말 >
그동안 세상이 잘못 알고 오해하였지만, 성령께서 오시고 나면 이제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들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심은 우리에게 한편으로 너무나 큰 복음이며, 또 한편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종말이 세상에 임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부모 형제 그리고 이웃은 모두 이런 실존의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새 예루살렘이냐 바벨론 성이냐!
선택의 기로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도 진리에 만족하고 있을 여유도 없습니다. 혹시나 우리가 구원받았고 큰 계시 가운데 있다고 만족하고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께서 우리 손에서 핏 값을 계수하실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첫댓글 함께 누릴 지체들을 위하여 펌합니다..귀한 말씀 감사합니다